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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인사이더와 아웉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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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력 있는 감상과 비평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잡식동물처럼 닥치는 대로 다독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도 물론 그랬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친구 또는 은사와 함께 납량 공포물이라면 아무 영화나 무턱대고 보던 때도 있었다. 정말 무서울 때는 깍지 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걸러서(?) 보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신 들린 여자'.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서 차차 보고 읽는 법, 문화예술 감상법을 깨우치게 됐다. 성경 말씀 이외에는 그 어떤 책이나 영화/미술/음악 등의 작품에도 속깊이 빠져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돈벌이를 하느라 노골적으로 겁 주려고 만든 납량물은 되도록 보지 않는 것이 좋지만, 마지 못해 볼 때는 인사이더가 아닌 아웉사이더여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어디까지나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봐야지, 지은이의 주관 속에 점점 빠져 들어 거기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판단력을 잃어 버리는 흐물흐물한 무골충처럼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무골충을 닮아 갈수록 가장 중요한 책인 생명 같은 성경말씀을 파고 들기는 싫어하게 된다는 점.

성경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로 딱 부러진 진리만을 말한다. 크리스토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리망당한 '중간 진리' 같은 건 성경에 없다. 그래서 성경과는 멀찌감치 거리를 둘수록 더 '건전'하고 '균형' 잡힌 기독교 문화작품으로 매도되는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균형은 그런 게 균형이 아니다. 인사이더가 아닌 아웉사이더가 균형이 더 있다. 하나님의 진리엔 전적으로 인사이더가 되고 세상에 대해선 아웉사이더가 돼야 한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전혀 동참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도 세상의 아웉사이더로만 계시지 않고 임마누엘 되어 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요3:16)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함(요한서신A 2:15)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 영혼을 먼저 복음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 아픔에 대한 인사이더적 입장도 복음진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교계 작품이라 해서 다 비가시적 교회에 속한 것일 수 없다! 맄 워런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교회에 속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장담하냐고? 워렌의 "희한빠끔"한 행보를 보면 알 게 아닌가?

독자는 왜 워런이 피터 드러커, 켄 블랜처드, 브라이언 매클러렌, 존 템플턴 경, 유스스페셜티, 애스펜 재단 등 뉴에이지성 인사/단체들과 그토록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왜 세속단체인 유엔 등과 밀월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르완다 정부 등 세상 정권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그가 생각하는지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워런과 평생 언약을 맺은 비전과 꿈의 사람 브루스 윌킨슨이 그 비전을 이루려고 남아프리카로 내려갔다가 왜 와장창 깨어가지고 돌아왔는지 까닭을 아는가? [필자의 글 '비전의 허와 실' 참조]

독자는 왜 노먼 빈슨 필,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 등 소위 신복음주의자 내지 종교다원성 인사들이 프리메이슨리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래엄이 그럴 리 없다고? 복음주의자라고? 그래서 필자는 독자를 '그래엄 인사이더'로 보는 것이다.
그래엄이 진리의 사람이라면 왜 평생 메이슨들과 밀접한 연계 속에 살아왔는가? 그가 진리의 사람이라면 왜 메이슨 청년단체 '드몰레이'를 적극 추천했는가? 2005년 뉴욕집회 직전 USA 투데이는 왜 그래엄을 "포용주의자"로 대서특필했는가? [필자의 글 '그래엄의 메가톤급 비밀' 참조]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의 신과 임금이 돼 있는 마귀에게 속아 살고 있는 것이다! 싹이 노~랗다. 성령께서는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독자는 그래엄이나 워런의 영을 성경에 입각하여 검증해 본 일이 있는가? 해 본 일이 없다면, 독자는 그들의 인사이더나 다름없다.

세상과 교계 작품의 인사이더가 될수록, 이래저래 성경엔 아웉사이더가 돼버린다. 만약 성경의 인사이더가 되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우선적으로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되도록 성경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기독교 작품'들-그것은 성령의 영감이기보다는 사탄의 교묘한 조종을 배후에 받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대표적인 예가 C.S. 루이스. 루이스는 '단순 기독교' 등에서 성경과 성경 기자들을 조롱한 종교다원주의자다. 개신교로 개종했다가 임종 시엔 카톨릭으로 선회했다가 왔다리갔다리 경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구원관은 헨리 나웬, 테레사 수녀, 요한 파울로 2세처럼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 한국/한인 교계는 예리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무골충이 돼 간다. 워런 등 소위 미 복음주의권 엘리트들의 작품을 주섬주섬 거침 없이 주워 먹으며 주워 섬기고 있다. 이젠 시대가 될 대로 다 됐고 갈 데까지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분별력을 잃고 허옇게 개풀어진 흐릿하고 썩은(?) 눈동자로 어둠인지 빛인지, x인지 된장인지를 가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예를 들라면, '단순 기독교', '나니아..' 등 루이스의 작품이나 워런의 '목적에 이끌린 삶', 기타 리처드 포스터, 댈러스 윌러드, 유진 피터슨, 브라이언 매클러렌, 켄 블랜처드, 레너드 스윝 등 소위 '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100% 인사이더가 되어 아무 비평 없이 전적으로 공감하고 받아 들이는 어이 없는 태도. 이것은 모든 영을 검증해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반이요 도전이다!

주님께선 계시록 초두에서 7 교회의 장/단점을 통렬히 지적하신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시면서, 경계할 것 즉 비진리를 경계하라고 철저히 촉구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계에서 경계할 것을 제대로 경계하는 사람을 보는가? 보면 몇이나 보는가. 경계는 아예 처음부터 제쳐놓고 들입다 칭찬만 하지 않는가?

모조리들 인사이더가 되어 얼씨구 절씨구, 좋은 게 좋을 씨고! "더불어 함께" 아우러져 덩실덩실 춤을 춰줘 가며 비진리에 호응하지 않는가? 그 배경엔 소위 부정적이면 무조건 안된다는 '긍정철학'이나 모든 종교를 "공평히" 봐야 한다는 종교공평주의 내지 다원종교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독자는 필자더러 "당신은 왜 루이스, 워런 등 '복음주의자'들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냐?"고 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는 독자에게 필자도 묻겠다. "독자는 왜 그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100% 칭찬하고 공감하는 인사이더가 돼 있냐"고. "100%는 아니다"고 답변해도 아무 분별도 비평도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100% 공감과 다름아니다. 독자가 성경에 근거하여 김삼을 검증하겠다면 그건 올바른 태도다! 그 원리를 딴 교계 작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나마 이렇게라도 한 구석에서 독자 대신 분별과 비평 노력을 해주는 김삼 같은 아웃사이더에게 불만스러워 할 게 아니라 고마워 해야 하지 않겠나. 필자가 잘 났다는 게 아니라 이런 문화비평가에게 독자가 자극이라도 받아야 최소한의 균형 잡힌 독서와 감상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다.

독자여. 성경엔 인사이더, 기타에는 아웉사이더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