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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인자가 들려야 영생도(요한복음묵상17)




요한복음서 3'14-16 (사역)

또 마치 모쉐가 광야에서 뱀(=놋뱀상)을 들어 올렸듯, 인자도 들려야 하오.
그래서 그(=인자)를 믿는 누구나 영생을 얻도록 말이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소!


주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는 이제 절정에 이른 느낌입니다. 땅의 일은 물론 하늘의 일을 알지 못하는 니코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분은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주님이 오신 핵심 목적은 물론, 주님의 십자가 수난이죠.
십자가 처형을 주님은 '들리기'(들어올려짐=휲소테나이)로 압축해 표현하십니다. 모쉐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 형상을 매달아 올린 옛 사건에다 직유하신 것이죠. 과연 니코데모가 이 고차원적 비유를 이해했을지 의문입니다만.

십자가형을 표현한, 인자의 '들리기'는 유독 요한복음서에만 3번 기록돼 있습니다(요복 8'28; 12'32,34). 따라서 이 표현은 관용어이기보다 암시적 직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쉐의 놋뱀 상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지요.

미쯔라임 출국 후 카나안 원정 여정 중 광야에서 지름길의 하나인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고 멀리 에둘러 가야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매일 양식인 만나를 경멸하면서 먹거리 불평을 했습니다. 430년 간의 미쯔라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그들은 정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노하신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서 많이들 죽게 징벌하십니다. 그러자 백성은 모쉐에게, 하나님께 간구하여 불뱀들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애걸했고, 모쉐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불뱀을 상징하는 놋뱀을 매달라고 하셨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 위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치유 받아 생존했습니다.

'불뱀'(하쎄라핌)이란, 예샤야후(이사야)서 14'29; 30'6 등의 '나는 불뱀'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나 미쯔라임의 광야에 있는 날랜 독사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습니다. 색깔이 불빛처럼 빨갛다거나 물리면 불에 댄 것처럼 아프다거나 등등의 추정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불뱀을 백성들에게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즉 단순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사건에서 우리는 십자가 처형과 같은 유추를 발견합니다. 마치 모쉐가 놋뱀을 장대 위에 매달았듯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나 장대 위에 매단 놋뱀을 쳐다 보기만 하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덧붙여, 우리는 또 다른 숨은 비유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백성을 물어 죽였던 불뱀 떼는 마귀와 그 졸개들을 상징한다는 것이지요.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와를 유혹한 뒤 저주 받은 뱀은 '흙'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흙은 흔히 인간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싸탄은 인간의 육신적 삶을 해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그래서 불순종과 죄로써 불뱀에 물린 백성처럼 마귀에게 죽음과 기타 모든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아담의 후손인 인자-'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크리스토님을 가리키지요. 불순종과 죄악으로 '불뱀'에 물린 불쌍한 백성을 위해, 인간이 되어 오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분요.

이것은 땅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원대한 구원 계획입니다. 니코데모는 상상도 못할 비밀이죠.   
니코데모는 고대 광야의 장대 위 모쉐의 놋뱀이 바로 자기 눈 앞에 계신 이 분을 가리킨다는 진리, 놋뱀처럼 인자도 얼마 후 곧 들려야 한다는 진리를 가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았더라도 "설마 그럴 리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엔 성령님을 통하여 깨달았을 터입니다.


주님은 들려진 그-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제가 어찌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던 젊은 율법사와 사실상 같은 물음을 속에 품고 왔는지 모릅니다.
이제 주님은 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주고 계십니다.

영생! 멸망 없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
이것이 주님을 통해 가능하다는 선언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이 위대한 영생선언-요3'16-은 바로 니코데모와의 한밤의 대화 도중 나온 것입니다!

영생선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사실/진리..!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유일한 아드님을 거저 주셨다는 사실..
       그 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은 니코데모가 깨닫는 대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슨 신화 속처럼 그냥 심심풀이 나들이가 아니라, 아버님의 지극한 아가페 사랑을 몸소 보여 주시고 전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고, 표현이고, 화신(化身)임을 보여 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큰 불행이죠.
주님은, 한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 사랑(아가페)이 없다고 몸소 예언하셨습니다(요복 15'13). 여기서 한 사람은 곧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또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복 15'15).

그래서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의 죽음은 결코 사랑 없는 희생이 아니었지요(코린토A=고전 13'3b).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이 하나뿐인 성자님/독생자를 세상에 주신 것은 위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온 우주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스럽고, 영생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지, 구원과 영생에 조건이 있음을 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이 사랑에 호응하여 이 영생을 얻을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 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이 조건입니다.

굳이 예수님을 안 믿고도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교계 사람들은 어찌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도무지 모르거나 완전 거부하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고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죽음의 참 뜻을 모르는 지극히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크리스토님을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유일한 구주로, 메시아로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죠.

그러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가 받아 누리는 길도 오직 하나-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독자도 그렇게 믿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