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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아브라함, 사라가 만년에 별거했나요? (물음과 답)

물음: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한 사건(구약 창세기 22장 참조)으로 혹시 아내 사라가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 후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거주하고(창 22'19), 사라는 가나안 땅 헤브론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으며,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맞아 어머니 장막에 들였는데(창 24'67), 혹시 사라와 아브라함이 별거했고, 이삭은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나요?


답:

성경이 개인의 삶의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지는 않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실제로 '별거'를 했는지 여부는 물론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발상이 하나의 학설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상식으로 유추해 볼 때, 어느 정도는 신앙의 선조인 그의 말년의 '불행' 가능성을 우리가 불식시킬 수 있지 않나(^^) 싶네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아내 사라와의 사이에 낳은 유일한 아들 이짜크(이삭)를 바치려 했을 때, 그는 아내는 물론 이짜크에게까지도 미리 상의하거나 어떤 귀띔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짜크는 매우 온유했고 아버지의 말에 끝까지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짜크가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스스로 주동하여 아버지와 쪼개져 어머니와 함께 별거를 원했을 리가  없겠지요.
아마도 사라가 미리 알았다면, 큰 충격을 받긴 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전에 말하거나 의논하지 않았기에 그 충격을 면했고, 사라가 충격과 '상처'를 받을 만할(?) 무렵, 이짜크는 멀쩡히 살아 있었기에 문제 삼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짜크가 살아 있는데도 그 사건에 대하여 사라가 뒤늦게 불평한다면, 결코 온당치 못하겠지요.

또..아브라함은 아들이 설령 죽었어도 되살아날 것을 굳게 믿었었고(신약 히브리서 11'19), 평생 함께 살아온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主)로 부르며 섬겨 왔기에(페트로A서/벧전 3'6), 모리아 사건 자체나 사후(事後) 해명을 남편이나 아들에게서 듣고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을 터입니다.

만약 이 사건을 계기로 아브라함 부부가 불화 끝에 별거에 들어갔을 정도라면, 창세기 기자(모쉐)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고 숨겼을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많은 경우,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면밀한 정보를 밝혀 우리를 놀라게 하니까요. 그런 불행이 있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고 모종의 중재를 통해 은총의 마무리를 하시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하마터면 남의 아내가 될 뻔한 위기에도 매번 중재하셨으니까요.

또한 아브라함의 먼 후손이기도 한 사도 파울은 부부가 시험 들지 않게 약정 기간 외에는 분방(分房)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었고(신약 코린토A서=고전 7'5), 아울러 아브라함을 믿음의 후예들의 선조로 기렸기에(갈라티아서 3장 참조), 아브라함과 사라가 만년에 별거했다면, 믿음의 선조로서 과히 모범적이진 못했을 터입니다.  
 

아브라함이 베에르쉐바(=브엘세바: '일곱 우물' 또는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에 일시 거주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가정이 일종의 유목민으로서 목초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녔기에 샘물이 있는 이런저런 곳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또한 베에르쉐바는 그의 첩 하가르(하갈)와 서자 이슈마엘(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샘물을 발견한 곳이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장소로서 아브라함이 인식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가 거기서 기념식수를 하고, 영원하신 예호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했으니까요(창 21'14,19,28-31,33).

21'34을 보면, 아브라함이 게라르(그랄)의 펠레쉩(불레셋)족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낼 동안,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시려고 약 3일길 떨어진 모리아로 부르십니다(22'2-4 참조). 22'19에서 아브라함이 베에르쉐바에 거주한 것은 아브라함 혼자 거주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아들 이짜크도 함께였고, 기자가 언급을 생략했을 뿐 아내 사라는 물론 아브라함의 종들을 포함한 모든 가솔들이 함께 거주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 23'2에서, 사라가 카나안 땅 헤브론의 키리앝아르바에서 죽은 것은 그녀가 남편 아브라함과 '별거'하던 중에 죽었다고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 가족이 이곳에 살던 중에 사라가 별세했다고 봐야 자연스럽습니다. 그곳 헤브론(지역 종족 우두머리 '에브론'의 이름에서 유래)은 아브라함 일가가 나그네처럼 머물던 곳이며, 헽 족(=히타이트)이 아브라함을 귀족과 지도자로 매우 존중하던 지방입니다(23'6).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매장하려고 이곳 막펠라 굴과 주변을 공식 매입합니다. 아울러 이곳은 향후 영구히 아브라함 온 가문의 매장지가 될 곳이었습니다. 단지 사라가 일시 머물던 곳으로 사라만 매장할 곳이 아니었지요. 아브라함의 말이나 에브론을 비롯한 그곳 주민들의 태도에서 전혀 사라가 따로 별거해 온 곳이라는 인상을 찾을 길이 없네요(23장 전체 참조).

다만 아들 이짜크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잠시 별거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요. 이것은 어머니 사라와 아버지의 불화/별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목축업 때문이었다고 추정됩니다.   
이짜크가 아내 리브카를 맞을 때, 그는 베에르라해로이(브엘라해로이)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던 헤브론으로) 왔다고 했습니다(24'62). 베에르라해로이는 네게브(카나안의 남부 광야지대)인 카데쉬(가데스)와 베레드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아브라함도 이 지역에 거주한 바 있습니다(13'1,3, 20'1, 24'62). 네게브는 강우량이 적고, 겨울-봄 사이의 방목에 적합했습니다.  
이곳 역시 하가르가 과거 목말라 죽어갈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신 언약의 샘물이 있던 곳이지요(16'14). 이짜크 역시 아버지처럼 목축을 했기에 가축에게 이곳의 물이 필요했을 터입니다.
이짜크는 리브카와 결혼한 뒤에도 이곳에 거주합니다(25'11).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과거 일시 거주하던 펠레쉩 족의 땅 게라르에 내려갔다가 다시 언약의 샘, 베에르쉐바로 이주해 오죠(26'1,23 참조). 이짜크는 에사후/야콥 쌍둥이 형제를 낳고 죽기까지 베에르쉐바에서 지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24'1,2 참조) 자기가 '별거'해 살던 베에르쉐바에서 하란으로 자기 충복을 보내어, 이짜크의 신부감(리브카)을 찾아 데리고 이짜크가 있는 별도의 장소에 가게 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짜크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고 지내던 베에르쉐바 또는 헤브론에 함께 머물면서 잠시 베에르라해로이에 다녀왔을 터입니다.

그럼 사라의 장막(24'67)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사라가 아브라함과 '별거'하던 곳의 장막이 아니라, 유목민 일가가 가족 단위로 갖고 있던 수많은 장막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히브리서 11'9b). 당시는 부부 사이라도 남녀 유별할 일이 있어 아내만을 위한 장막이 따로 필요했을 것이며, 이짜크가 신부를 맞아 합일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장막이 아닌 어머니 사라의 별채가 필요했을 터입니다. 더욱이 어머니 사라를 여의고 그 장례를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이 신혼부부에게는 어머니의 장막이 위로의 장소이기도 했을 터입니다.
또 그것이 당시 현지의 관습이기도 했을 성 싶네요. 노래들의노래(아가) 3'4,5을 보면, 어머니가 후손을 잉태/해산한 방이 곧 후손의 신방이 되어 있습니다(8'2 참조). 아마도 슐로모는 '사라의 장막'을 익히 기억하고 있었을 터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는 아브라함/사라가 말년에 별거했을 만한 뚜렷한 까닭과 근거가 과히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