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
1. 신비주의란
신비주의(Mysticism)란 ‘눈이나 입을 닫는다’는 뜻의 헬라어 미스티코스(mystikos)에 어원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말은 ‘감각을 차단한다’는 의미와 ‘비의(秘儀)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비주의를 쉽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다양한 체험 속에 분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점들을 모아서 정의한다면, 신비주의란 “절대자(신, 또는 하나님)과의 연합(union)이나 합일(unity, 또는 unification)을 경험하고 황홀경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더 간단하게 줄이면, “체험을 통한 신 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세 초기의 신비주의자,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또는 베르나르도. 이하 '버나드')는 말하기를 “나는 그러한 (신비) 경험을 하도록 허락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표현하도록 허락받지는 못했다”고 했듯이, 표현하기 어려운 체험들의 공통점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스펙트럼 사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비주의가 다양한 체험 속에 분포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류하는 방법 역시 다양하지만, 그 중에 세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 종교적 지식의 근원들 추구하는 관점에서의 분류
o 자연주의적 신비주의
o 초자연주의적 신비주의
o 접신적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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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적 신비주의 현상에 대한 관점에서의 분류: 부캄(Bucham)의 분류
o 명상 신비주의 (어거스틴, 에크하르트)
o 인격 신비주의 (바울, 루터, 토마스 아켐피스)
o 자연 신비주의 (아시시의 프란시스)
· 3) 틸리히의 분류
o 기독교적 신비주의
o 신플라톤적 신비주의
o 아시아적 신비주의
신비주의를 어떻게 분류하든지 신비주의 수행의 발전 과정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보통은 정화, 조명, 그리고 연합 또는 합일의 과정이다. 이블린 언더힐은 이것을 세분해서 달리 표현하여, ㄱ. 신의 실재에 대한 각성, ㄴ. 신을 향한 정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 ㄷ. 빛을 조명해 주는 정화, ㄹ. 자아의 순화 및 신비적 고통 혹은 죽음, ㅁ. 합일, 이렇게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이렇게 분류된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신과 연합 또는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하여 황홀경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신비주의의 뿌리
기독교 내에도 신비주의의 뿌리는 깊다. 기독교의 모체가 되는 유대교에도 신비주의가 있는데, 대표적인 유대교 신비주의 종교인 카발라는 그 기원을 주전 2~3 세기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가 카발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좀 더 연구해야 하지만, 기독교 신비주의의 초기부터 영향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기독교 신비주의도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모두 기록한 후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주후 2~3 세기 어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에 신비주의가 투입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앙적 루트 – 신앙을 빗댄 방법론 상의 루트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학적/철학적 루트이다. 신앙적 루트는 사막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신학적/철학적 루트는 교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막 수도원들이 주로 분포해 있었던 이집트와 아라비아 사막에는 이미 주후 1세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온 힌두교 및 불교 수행자들이 퍼져 있었다. 그들은 서북부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었고 나일강 유역에서도 고행하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 있다. 주전 6세기 경의 페르시아 제국 영토는,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동쪽으로는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과 그 후의 로마 제국 역시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동서양의 교류 역시 가능했었다.
주전 1세기에 태어났던 그리스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당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지리책을 만들었었는데, 거기엔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인도의 종교 수행자들의 모습도 묘사해 놓았는데, 그들은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옷을 벗고 사는 인도의 지혜교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터툴리안 역시 나일 강변에서 이렇게 “옷을 벗고 사는 인도의 지혜교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초대교회 시대의 대표적인 이단이자 신비주의였던 영지주의는 인도 지혜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막의 수도원 역시 영향을 받았다.
사막의 수도원들에서 행해지던 신비주의 수행법의 하나가 관상기도였다. 이것은 현대의 관상기도 수행자들이 관상기도의 기원에 대해서 모두들 한결같이 사막 수도원과 사막 교부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관상기도의 대가인 토마스 머튼은 영적 훈련의 시초를 사막 수도원이라고 하며, 토니 존스는 말하기를, 5세기 초에 카시안(A.D. 360~435)은 관상기도를 배우기 위해 사막을 순례하였다고 했다.
사막 수도원들에서 관상(명상)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된 이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심어져 있는 종교심의 발로에 의한 것이어서 우연하게도 인도의 지혜자들과 동일한 방법을 개발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인도 지혜자들로부터 전수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사막 수도원들의 관상수행은 인도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ㄱ.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시대적으로 인도 지혜자들이 사막 수도원 지역에 이미 진출해 있었고, ㄴ. 힌두교나 선불교에서 수행되는 명상법과 수도원에서 수행되는 관상법이 서로 너무도 비슷하며, ㄷ. 요한 카시안이 5세기 초에 사막을 순례하여 관상수행법을 서방 교회에 전했다는 것은 카시안 이전의 서방 교회는 관상수행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데 서방 교회와 사막 수도원의 이러한 차이점은 인도 지혜자와의 접촉 가능성 여부에 있다. 따라서 사막 수도원의 신비주의는 이교적 명상이 그 뿌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독교에 신학적 또는 철학적으로 신비주의가 투입된 것은 교부들을 통해서였다. 교부 시대에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정수가 교회에 침투하였는데, 오리겐, 어거스틴과 그리고 위-디오니시우스 등을 통해서 흘러들었다.
일찍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철학자 필로(B.C.20?~A.D.50?)가 있었는데 그는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학파를 비롯한 헬라 사상을 구약성경과 통합하고자 하였는데, 그 근본 이유는 구약성경이나 헬라 사상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일부에서는 그를 “최초의 신학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구약성경 특히 모세 오경을 알레고리적(영적)으로 해석하였고 오경이 이상적인 철학적 자연법을 담고 있으며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은 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주의적으로 이해되어, 존재자요 모든 것의 원인자이며, 전 인류의 아버지요 통치자요 구원자로 여겼다. 오경의 율법은 유대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부응하는 보편적인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성경해석은 오경의 가르침을 헬라주의적 보편성에 편입시킴으로써 헬라문화를 유대의 종교와 문화에 종속시키면서 유대화하려고 하였다.
필로는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고 내재자이시며 편재해 계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참 존재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완전히 알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는데, 그가 묘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헬라식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경이나 랍비 전승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마치 인간처럼 묘사되어 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을 신인동형론적 언어로 표현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알레고리적(영적, 유비적) 해석을 통해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렇게 이미 예수님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벌써 헬라식 철학 – 플라톤주의나 신 피타고라스 학파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이 유대교에 영향을 주었고 그러한 사조가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조는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제롬은 필로를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명단에 포함시켰는데, 필로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주장은 아마도 클레멘트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와 타티안을 비롯하여 아테나고라스, 아리스티데스, 데오필루스 등 거의 모든 변증가 및 교부들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오히려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나 플라톤주의의 “일자(一者)”를 통해 서로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을 연결하였다. 반면에 터툴리안은 “헬라 철학이야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단정하며, 철학을 사탄의 시녀로 간주하였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완성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 A.D. 205~270)는 플라톤주의를 가르치던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제자가 되어 11년간 플라톤주의에 몰두했다. 그 당시 유명한 교부들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페르시아와 인도의 지혜에 대해 직접 알아보기 위해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원정군에 합류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인도 사상, 특히 불교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도쿄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던 나카무라 하지메 교수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스즈끼 다이세즈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연구하여, 그것이 대승불교와 너무도 흡사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주의에 신비주의 사상을 가미하여 새롭게 재해석하였고, 결국 플라톤주의와는 너무도 다른 사상을 정립했고, 새롭게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만큼 다른 신플라톤주의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 인물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플로티누스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A.D. 354~430)은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단지 몇 마디만 바꾸면 기독교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는데, 그 정도로 어거스틴 등을 비롯하여 많은 교부들이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의 “신과 인간의 이원론적 구분을 거부하는 신의 모방론”, 그리고 “신과 온전하게 한 몸을 이루는 방법으로 사랑을 강조하는 합일사상”은 플로티누스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다만 플로티누스의 신비주의는 피타고라스 학파나 영지주의 같은 신비주의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결코 유한한 그리고 가시적인 세계를 부정하거나 물리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한하고 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무한하고 불가시적인 것이 임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신비주의였다.
어거스틴은 신학자, 교부, 설교가였으나,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신비사상은 고백록, 시편 설교집, 삼위일체론 등의 저서에서 발견된다. 특히 그의 고백록은 그의 내면 생활에 대해 고백적으로 이야기하며, 개인적으로 육욕을 버리고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플로티누스가 제시한 상승 모델을 사용하여 영혼의 상승 단계를 설명한다. 육체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 영혼 내부에서의 진행, 그리고 신적 단계를 향한 상승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를 단순하게 그대로 추종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기독교화 하여 기독교적 맥락에서 이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서방 기독교에 공헌한 여러가지 – 신론 및 삼위일체론과 변증 – 이외에도 신비주의에 공헌한 것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ㄱ.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경험에 대한 설명, ㄴ. 이 경험의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에서 찾고 있는 것, ㄷ. 이 경험을 위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3. 중세로의 연결 통로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을 넘어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sius)에게도 전수된다. 그는 500년경 시리아의 수도사로, 사도행전 17:34에 언급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익명의 작가였는데, 사도행전에 기록된 디오니시우스보다 훨씬 후대 사람임이 밝혀져서 사도행전의 디오니시우스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위(僞/Pseudo)“가 붙여졌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어느 특정한 한 인물이 아니라 동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저서로는, 천상의 계층구조(The 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계층 구조(The Ecclesiastical Hierarchy), 신의 명칭들(The Divine Names), 신비신학(The Mystical Theology), 4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것은 후대의 신비주의자들에게 사도적 권위에 준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자신은 사변적 신비주의의 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그가 14세기 신비주의 문학의 황금기의 글들에서 “디오니시우스가 말하기를”이란 문구가 빈번히 발견됨으로써 알 수 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주요한 공적 중 하나는 영혼의 상승을 “정화, 조명, 합일”의 세 단계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 형식은 그 후 서방 신비주의의 표준이 되었다. 정화의 단계는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을, 조명의 단계는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어주는 것을, 그리고 합일의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말한다. 정화의 단계는 유한한 본성과 관련된 것으로부터 영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조명의 단계에 속하는 것이 관상이다. 그것은 창조의 계층 구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합일은 신화와 동일한 것이다. 영혼은 에로스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되고 신화(神化)된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적 합일의 개념은 모든 관념과 지식을 초월하여 몰아적 상태에 이르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무정념(apatheia 또는 부동심), 즉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또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로 형용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 추론으로 도달할 수도 없는 신비한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의 관념들은 하나님에게 적합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하고 멀리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려면 그것들을 마음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방식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정념은 우리의 상상력과 감정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그려보려고 시도하는 긍정적 방법이며, 영성의 길을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유익하다. 무정념은 하나님에게 합당치 못한 모든 관념들을 제거하는 부정적 방법이다.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며, 무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고, 하나님과 합일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은 무정념의 방법이 필요하며, 지적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수동적 상태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 수동성은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과 융합되는 사랑의 엑스타시(ecstasy, 황홀경)로 이어짐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방법은 하나님과 합일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논의와 부정적 논의를 결합하고, 마지막에는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 특징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자기 시대 이전까지의 신비주의를 정리하고 체계화 하였으며 신학적 이론 및 방법론을 통하여 설명하였다는 점이 가장 큰 업적이며 이를 따라서 중세 시대에 신비주의가 활짝 열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위-디오니시우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앙적 방법론인 관상(명상) 수행법과 신학적/철학적 신비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디오니시우스 이후의 신비주의에서는 신학적/철학적 토대 위에 관상 수행이라는 방법를 통해 신비주의를 세웠고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다만 각 신비주의자에 따라서 관상을 통한 신비주의 체험을 더 중요하게 내세우기도 하고 또는 신학적 토대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기도 할 뿐이다.
사막 수도원에서 시작된 관상기도 수행은 수도원 제도를 중요하게 여긴 그레고리 대제(A.D. 540~604)에게로 이어지며 유지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신비주의가 정적을 유지하는 중세 초기의 암흑기로 들어간다. 이 시기에는 스토투스 에리게나(A.D. 800~877?)가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전해주는 등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신비주의의 큰 흐름은 11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베네딕트 수도회와 관련이 있는데 로무알드(A.D. 951~1027)와 피터 다미안(A.D. 1001~1071) 그리고 브루노(A.D. 1030~1101)가 신비주의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 신비주의는 종교가 의존하는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었으며, 주로 개인적인 교훈과 훈련을 통해 퍼져 나갔다. 어거스틴적인 신비주의를 전달하는 통로가 된 것은 안셀름(안셀무스 A.D. 1033~1109)의 명상집이었다.
4. 중세의 신비주의
12, 13세기 이후 중세시대는 여러가지 사회, 정치, 경제적 이유 때문에 수도원 제도가 강조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 8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A.D. 1095~1270)으로 기독교 세계권에 전쟁에 대한 죄책감을 가져왔고 부귀영화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가 사회에 펴졌다. ㄴ. 로마 카톨릭 체제가 강화될수록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부패가 심해질수록 지적이거나 의식(의식)적인 종교 체제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비매개적 직접 체험’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ㄷ. 사회 빈민계층에 대한 구제와 전염병으로 인한 시신의 매장에 수도원들의 자발적 봉사로 인해 청빈한 무소유의 생활, 자연친화적인 생태윤리, 육체노동과 탁발을 통한 경건생활 등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로마 카톨릭과 수도원들의 타락과 부패로 인한 반작용으로 이들을 개혁하려는 시도 역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어디까지나 로마 카톨릭 내에서의 개혁이었을 뿐, 루터의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은 아니었지만 결국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버나드
중세 시대에 신비주의는 12세기에 끌레르보의 버나드(A.D. 1091~1153)와 리차드(Richard of St Victor, 1173년 죽음)에게서 다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이후 2백년 간의 중세 신비주의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이들에 의해서 중세 신비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말해진다. 이들 이외에도 빙엔의 힐데가르트(A.D. 1098~1179)와 요아킴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버나드는 사랑의 4 단계를 말하였는데, 그 절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한 영이 되는 것이었다. 버나드의 “하나님의 사랑”은 수도원 문헌으로, 하나님 앞에서 관상을 불러 일으키도록 반성과 관상 가운데서 신중하게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설교와 서신 그리고 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아가서 설교는 명상을 위한 기록으로 계획되었다.
버나드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제 1 단계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제 2 단계는, 자신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고, 제 3 단계는,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 4 단계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그는, "사랑의 제 4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버나드는 이와 같이 4단계의 사랑을 말하고 난 후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마지막 네 번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사랑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지며,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 사랑을 체험할 수 잇지만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이 사랑은 부활 시에 완전히 체험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사랑을 체험해 보라고 권유하는데,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다.
버나드의 기도는 다분히 관상기도이다.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도이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 두 가지의 황홀경에 도달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는 지성의 황홀경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의 황홀경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황홀경을 얻기 위해 무분별한 감정 발산이나 감정 이입을 경고한다. 결국 버나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에 취하는 것, 즉 사랑의 교제에 함몰되는 신비의 황홀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내적 영성을 개발할 수 있는 침묵과 독거의 기도를 여러번 가르쳐 주고 있다.
리차드
리차드는 신비한 체험들을 체계화시킨 최초의 학자이다. 즉, 리차드는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의 최초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적인 사고보다는 관상으로 진리를 알게 된다고 가르치며 깊은 관상의 삶을 살았다. 단테는 그의 대작 “신곡”에서 리차드를 인간으로 존재하는 시간보다 관상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인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은 관상의 삶을 살았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리차드는 관상의 여섯 단계를 가르쳤고, 다시 이것을 세 종류의 관상으로 정리하였다. 첫번째 종류는 상상으로 하는 관상이고, 두번째 종류는 이성으로 하는 관상이며, 마지막으로는 깨달음으로 하는 관상이다. 마지막 종류에서 마음은 극적으로 세상과 떨어져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가며 황홀경을 맛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자가 관상을 하는데 그 관상을 이끌고 가는 힘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사랑에 대해서도 4 단계의 사랑이 있다고 가르쳤는데, 마지막 네번째 단계의 사랑에서는 영혼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내적 비밀 속에 들어가면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된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신비한 것들을 깨닫게 되며 그러면서 영혼은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에 녹아져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 사랑에서는 영혼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차게 되며, 친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는 삶이 실천되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리차드는 신비한 체험을 성경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신비한 체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성경으로 반드시 확인될 수 있고, 또 성경의 가르침은 신비한 관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신비주의 신학을 성경에 근거하여 전개하였다. 그러나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상징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따랐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신비주의 신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손에 의해 체계화된 신비주의가 중세시대로 전해진 것이다.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부딪치고, 십자군 전쟁이 몇 차례 있었고, 한편으로는 교회쇄신 움직임이 일면서 엄격한 금욕을 강조하는 평신도들의 수도생활이 시작되는 시기에 살았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미 3살 때 특별한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카톨릭의 사제였다가 파문당한 신비주의자 매튜 폭스는 그녀를 “라인강 유역의 신비주의 운동 및 창조 중심 영성운동의 조모”라고 부른다.
힐데가르트는 많은 일을 활동적으로 해나가면서도 끊임없이 관상생활에 몰두하였고,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43세 되었을 무렵인 1141년 극적인 환상체험을 하였는데, 환상 속에서 그녀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는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하라!” 하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3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첫번째는 1141년에서 1151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우주론과 인간론이 신학과 조화된 신앙론이라할 수 있는 책 “Liber Scivias”이다. 책 제목인 “Scivias”는 라틴어 문구 "Scito vias Domini"에서 따온 것인데 그 의미는 "Know the Ways of the Lord"이다. 두번째는 1158년과 1163년 사이에 덕과 악덕 사이의 대화록이라 할 수 있는 “Liber vitae meritorum”이다. 마지막으로는 1163년과 1172년 사이에 하나님의 사역을 주제로 하여 “Liber divinorum operum”을 저술하였다. 1143년에는 끌레보의 버나드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도 그녀의 환상을 사적 계시들로서 인정하였다.
그녀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노래와 송가 그리고 신비적 음악집인 Ordo virtutum 을 작곡하기도 하였고, 의학과 자연과학에 관련하여 질병과 치료에 대한 책이나 식물, 동물, 그리고 섭생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힐데가르트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고, 극작가이며 자연과학자였고, 의사이며 예언자였고, 화가이며 여성들과 남성들의 지도자였고, 대지와 만물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힐데가르트 사상의 특징은, ㄱ.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내적인 통일성을 봄, ㄴ.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인식함, ㄷ. 음악을 통한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의 조화, ㄹ. 몸과 영의 조화이다.
그녀는 창조된 모든 것 안에서 사랑과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서로 연결된 조화로움 안에서 창조 영성을 살면서 “대지는 자연적인 모든 것의 어머니며, 인간적인 모든 것의 어머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인식하는 궁극적인 죄는 생태학적인 죄다. 대지를 거스르는 죄, 공기를 거스르는 죄, 바다를 거스르는 죄,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하는 죄가 인간의 궁극적인 죄라고 본 것이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하나님의 어우러짐을 강조하는 그녀는 가히 생태신학의 선구자로 불릴 만하다. 그리고 다채로운 특성들의 조화를 추구하던 그녀는 여성 예언자였다. 그녀의 신학적 방법은 자연신학이 아니라 “자연의 신학”이었고, 아씨시의 프란시스에게 진정한 의미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중세시대의 많은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원류가 되었다.
엑크하르트
위-디오니시우스를 지나 안셀름을 거쳐 버나드, 리차드, 힐데가르트 및 요아킴 등으로 시작된 중세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신비주의의 황금기가 열렸다. 유럽 전역에 걸쳐서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출현하기도 했지만 또한 엑크하르트라는 특출난 신비주의자가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엑크하르트는 신학계 뿐만 아니라 철학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중세 신비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활약도 눈에 띠는 부분이다. 힐데가르트를 시작으로 시에나의 카타리나, 노르위치의 줄리안(율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등 독일,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스페인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란시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아씨시의 프란시스(A.D. 1182~1226)는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그 환상에 따라 복음의 말씀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하며 ‘가난’과 결혼하고, 평생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고 또한 동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늑대와 새들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꽃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십자가의 신비주의 그리고 자연의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20세 때에 주님께서 “내 집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듣고 문자 그대로 한 교회를 보수했지만 그 뒤에는 그 명령의 숨은 뜻을 따라서 타락한 교회 전체를 정화, 개혁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작은 형제단으로 시작한 수도회 모임이 후에 프란시스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이 수도회는 탁발 수도회로서 자신들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하고 손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프란시스는 글을 거의 저술하지 않았지만 신비주의를 생활화 하였다.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이룬 십자가의 신비체험은 1242년에 40일간 금식하며 기도와 관상에 몰두하던 중에 일어났다. 그는 주님과 더욱 더 깊은 영적 표통을 하기 위하여 매일 기도하였는데 자기 영혼과 육신에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였고, 어느날 그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못 박힌 한 스랍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환상이 사라졌을 때 프란시스는 하나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과 열정과 불을 느꼈고 그의 육체에는 그 천사가 준, 예수님의 상처와 똑같은 신비로운 성흔이 남겨졌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신비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어거스틴 신비주의를 잇고 있어서, 빛의 신비주의, 존재 신비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십자가) 신비주의로 설명된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은 형제, 자매가 된다. 특히 작은 자 안에서 주님을 보고 그들을 섬길 것을 강조하였다.
중세 신비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엑크하르트는 직접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플로티누스로부터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에 대한 개념을 받아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으며, 위-디오니시우스로부터는 부정신학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플로티누스는 온갖 형태의 이원론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의 궁극적 존재만이 존재한다고 보고, 존재의 근원을 ‘일자(一者)’라는 원리를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이 일자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만물이 존재하게 된 방식을 ‘유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근원적인 일자로부터 계층적 질서에 따라 먼저 누스(Nous)가 유출되고 그 다음에 영혼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영혼은 한편으로는 누스를 향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물질을 향하기도 하는 양의성(양의성)으로 인하여 물질의 세계 즉 비존재의 세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영혼은 이렇게 떨어진 상태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가장 높은 일자에게로 고양되며, 그리고 그것은 황홀경에서 이 최고의 존재와 다시 결합한다고 하였다.
엑크하르트는 삼위일체와 창조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플로티누스의 ‘유출’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일자로부터 세계의 다양성으로 내려오는 존재의 하강적 발전과 일자로 복귀하는 상승적 발전이라는 원리는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화 시킨 위-디오니시우스의 사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엑크하르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위-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한, 신 인식을 위한 두가지 방법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또는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이다. 긍정신학은,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바탕으로서 현상계에서 부르는 모든 이름, 모든 속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피조물 안에 있는 완전성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이긴 하지만 피조물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하나님에게 서술할 수는 없는데, 왜냐면 하나님에게는 피조물과는 달리 아무런 불완전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부정신학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가 하나님은 피조물의 본질을 초월하신 분이고 피조물의 실체를 초월하신 분이므로 어떤 이름이나 어떤 속성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지성을 초월하신 분이므로 피조물의 불완전한 속성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고 결국 피조물의 속성을 거부하는 부정의 방법으로 하나님 존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부정신학은 언어와 사고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은 상승적 발전이라는 신비주의적 과정에 의거하는 것이다.
엑크하르트는 긍정신학을 거부하고 부정신학만이 유용하다고 보았고 그의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모두가 이 부정신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엑크하르트는 자신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마그누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엑크하르트의 신학적 입장은 이원론적 대비를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신학보다는, 보편자가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아퀴나스의 신학에 가깝다. 그러므로 엑크하르트의 사상은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의 영적, 신비주의적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폴 틸리히는 엑크하르트가 스콜라적 사고에다가 따뜻한 종교적 감정과 힘찬 종교적 사랑의 행위를 가진 불탄 혼을 결합시켰다고 말하였다.
엑크하르트는 존재론에서 매우 독특한 이론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God)과 신성(Godhead)를 구별하여, 하나님은 활동하시지만 신성은 활동하지 않으며, 신성이 궁극적 일자이며 하나님은 다자와 관여되어 있는 일자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피조물인 다자는 일자로서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결코 궁극적인 일자가 아니다. 이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궁극적인 일자인 신성은 결코 다자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신성은 존재의 최상의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자가 신성을 지시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자성을 제가하는 방법 밖에는 남지 않는다.
엑크하르트의 존재론은, 피조물의 본성을 – 애초부터 피조물의 본성은 무(無)이다 –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인 신성으로의 귀환을 촉구한다. 다자는 참된 “하나님”으로서의 일자에 근거하고 이는 더욱 근원적인 “신성”으로서의 일자에 근거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다자에서 신성으로까지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통해 돌파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엑크하르트에게 모든 피조물의 본성은 무(無)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또 하나님과 관여되는 것은 영혼이다. 엑크하르트는 영혼을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성의 일부로 보았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생각)에 이르는 길은 영혼에서 가능하다고 이해하며, 이 통로가 “영혼의 불꽃”이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이 영혼의 불꽃을 통하여 연결된다. 그 과정은 차이(dissimilarity), 유사(similarity), 합일(identity), 돌파(breakthrough)라는 4 단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비움의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의 정점은 영혼의 불꽃을 통한 신성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고 자신마저도 완전히 비워야만 가능하다.
엑크하르트의 이러한 신비주의는, “신비주의: 기독교인과 불교인”이라는 책의 저자인 스즈끼가 볼 때 선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스즈끼는 이 저서에서 엑크하르트의 신성과 불교의 공(空)은 서로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루돌프 오토는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인도의 상카라의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유사성과 차이성을 논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오토는 아트만과 영혼이, 브라만과 신성이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에게도 권위있게 인용되고 있으며, 타울러와 수소(Suso)에게 이어져 독일 신비주의의 원조가 되었고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일 관념론 철학에도 영향을 주어 칸트의 순수이성과 이해와 같은 근본 개념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엑크하르트의 제자인 타울러(A.D. 1300~1360)는 엑크하르트와 신론에 있어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타울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질서, 존재, 선, 그리고 모든 특별한 것 위에 계시며, 모든 이름 위에 계신다. 엑크하르트와 타울러 두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무의 경험, 세상의 복합적인 요소들과 섞일 수 없는 존재의 경험이었다. 하나님 뒤에 있는 하나님(God-behind-God)에 대한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고, 침묵을 듣는 것과 같으며, 음부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때로 신비주의자들은 이 경험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종교인들이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고 그대신 내적 생명력을 중시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내재’, ‘내적 빛(inner light)’과 같은 표현이 많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죄의 관념이 강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회개를 가르쳤으므로 복음적인 요소가 강했다.
여성 신비가들
중세 시대에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이것은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고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독일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아씨시의 클라라(A.D. 1194~1253), 독일 막데부르그의 멕히틸드 (1207?~1282?), 벨기에 아트붸르펜의 하데뷔히(1240년 경), 프랑스 포레트의 마그리트(1250~1310), 영국 노르위치의 줄리안(1343~1416), 이탈리아 시에나의 카타리나 (1347~1380), 스위스 제노바의 카타리나(1477~1510), 스페인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등 종교개혁 직후까지 많은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활약하였으며, 특히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테레사는 로마카톨릭에서 두 명 밖에 인정하지 않은 여자 교회박사들이다. 로마카톨릭이 여성으로서는 오직 두 명 밖에 인정하지 않은 교회박사들이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되새겨 볼만한 의미가 있다.
중세 시대에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나마 여성들이 신비주의 역사의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수녀원/수도원을 통해서였다. 그 당시에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모습을 사회에 알릴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녀원/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12~13세기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여성 수도운 운동은 절정에 달하였다. 이러한 수녀원에는 대부분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기에 귀족계층이나 부호의 딸들이 주로 들어왔고 지참금으로 인해서 잡무에서 해방되어 기도와 관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신비주의는 여성들에게 각별한 매력을 지니며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세 시대에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사상이 집중하여 나타났다. 그 특징은 신비적 관상, 환상, 어떤 표시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등이었다. 그림과 환상은 중세 여성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것은 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가르침을 줄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을 망각한 이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마음이 상한 이들에게는 관상(명상)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다.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이러한 현상의 이유를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공식적인 역할로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을 개인적인 신비형태로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이들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권위를 주고 직접 말하게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신비한 혼인’에 비유하는데, 이로써 죄로부터 벗어나 보증과 표시, 메시지를 받게된다는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6살 때 처음 환상을 보았고 7살 때 독신으로 살기를 서원하였으며 18세에 도미니칸 수도회에 입단하였다. 그녀는 약 20세가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혼인’을 체험하였다. 그녀의 기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이제 나는 너와 함께 가장 축제적인 혼인을 축하할 결심이 확고하게 되었다. 그래, 이제 내가 너에게 약속했던대로 나는 너와 신앙 안에서 혼인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을 마친 후에 그분은 사라졌으나 카타리나의 손에는 반지가 남겨져 있었고 그 반지는 평생을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었지만,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 반지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1370년에는 ‘신비적 죽음’을 체험하였다. 그 체험 가운데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한 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1375년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일체감을 상징하는 성흔(stigmata)를 받게 되었다.
카타리나가 궁극적으로 소원했던 것은 만유의 구원, 보편 구원이었다. 이것을 신학화해서 가르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희망 가운데 그녀의 삶을 꾸려 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신적 사랑과 은총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사상이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는 영원히 지옥의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몸을 지옥 입구에 세워 문을 막아서 다른 이들이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원하였다. 지옥을 소멸시키기를 열망할 만큼 그녀의 사랑의 힘이 강하였던 것이다.
줄리안
줄리안은 1373년 계시를 받고 첫 저서 “Short Text”를 저술하였다. 1393년이라고 날짜가 명기된 “Long Text”는 금욕적 과정 동안 받은 16 개의 계시와 종교적 체험을 기초로 영적(신비적)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이 두 Text들은 ‘신적 사랑의 계시들’이란 제목의 책 안에 포함되었는데, 인간 실존, 그리스도의 의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상상력 풍부한 신학적 해석들을 담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표현하고, 우리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와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매체가 된다. 그녀는 또한 예수님을 어머니라고 비유하는 – Jesus as our Mother –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어머니인 그리스도는 긍휼의 어머니이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부양하였고 사랑했으며 생명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신성을 대담하게 표현하여서 여성적 상징과 남성적 상징을 이용하여 신의 모습을 재정의 하였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은 우리의 친절한 아버지이며, 하나님의 지혜로움은 우리의 친절한 어머니시다. 성령의 선함과 사랑을 지닌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리고 결혼으로 하나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배우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내이며 깨끗한 처녀이다”고 하였다.
결국 줄리안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성을 자기가 받은 계시를 근거로 하여 여성적 이미지로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중세 이후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노바의 카타리나 (1477~1510)
아빌라의 테레사 (1515~1582)
빠지의 마리-마들렌느 (1566~1607)
뚜르의 마리 귀야르 (1599~1672)
마담 귀용 (1648~1717)
프랑스 리지외의 테레사 (1873~1897)
까떼즈 엘리사벳 (1880~1906)
에디트 슈타인 (1891~1942)
시몬느 베이유 (1909~1943)
마르뜨 로뱅 (1902~1981) 등이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
여기서 특별히 아빌라의 테레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아빌라의 테레사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로마카톨릭이 여성으로서는 오직 두 명만 인정한 교회박사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로마카톨릭) 역사상 최고의 여성 신비주의자로 평가되는 아빌라의 테레사는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느 학자는 아빌라의 테레사에 대해서 그녀가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음에 주목하면서 그녀와 카발라의 관련성에 의혹을 품고 있기도 한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이미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기를 결심했고 스무 살 때 카르멜(갈멜) 수도회에 들어가려고 가족을 떠나 그 다음 해에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서 영적 생활에 결정적인 변화를 맞았고, 에라스무스의 저서는 종교적 열정을 신비주의적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신비주의는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십자가의 요한의 영향을 받았다. 십자가의 요한과는 카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는 동지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약 20 여년에 걸친 내적 싸움을 거쳐, 41세가 되던 해에 내면으로부터 들려우는 뚜렷한 소리를 듣고 마지막 신비적 단계에 들어갔다. 1572년, 테레사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혼인”이라는 과정을 거쳐 사랑의 완결된 일치를 맛보게 되었는데, 상상적 환상 속에서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나타나서 이르기를, “이 못을 보라, 이는 네가 오늘부터 나의 배우자가 되는 표이다. 너는 지금까지는 이 못에 합당하지 않았으나 오늘부터는 너의 창조주, 너의 임금, 너의 하나님으로서의 나의 영예를 받는 것이 아니고, 나의 배우자로서 (받게 되니) 나의 영예는 너의 영예이고 너의 영예는 나의 영예이다.”고 하였다.
기도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테레사는 기도를 세상으로부터의 단순한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관상기도의 실천은 테레사의 영적 성공의 비결이었다. 어느날 그녀는 “네 안에 나를 가두려고 수고하지 말아라. 그러나 내 안에 네가 갇히어라.”고 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는 신비주의에 보다 더 전향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
테레사는 카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였고 또한 이를 통해서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을 개혁하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 안에 신비적이고 활동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테레사의 대표적 저서인 “영혼의 성(城) (The Interior Castle)”은 영적 발달의 단계를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삶을 통해서 내적인 성숙으로 이르는 데 필요한 안내서이며,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상승에 대한 참된 신비주의를 비유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면서, 하나님께 이르는 영적 여정을 일곱 궁방으로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관상의 종류를 구별하여 설명하는데, 관상은 정적인 침묵의 기도와 연합의 기도로 나뉘는 것으로 보았고, 기도의 주체자인 영혼과 기도의 응답자인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자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테레사는 당시의 교회 안팎과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19세기에 카르멜 수도회 소속 수녀인 리지외의 테레사(1873~1897)와 에디트 슈타인(1891~1942)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슈타인은 무신론자였다가 테레사의 자서전을 읽고 감화되어 카르멜 수도회에 들어갔던 여인이었다.
5. 신비주의의 영향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는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도 버나드의 글이나 엑크하르트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하였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나는 버나드를 모든 수도사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누고보다도, 심지어 성 도미닉보다도, 그를 더 좋아한다. 그만이 교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연구해 볼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탐부렐로는 최근 그의 연구에서 버나드와 칼빈의 신학 사상을 비교 · 검토한 후 칼빈의 개혁 사상이 버나드의 사상에서 적지 않게 유입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하게도 종교개혁자들은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고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를 천명하며 오직 성경말씀만을 의지하였다.
또한 중세 시대에 신비주의에 대한 주류가 결정적으로 변화를 맞이하여 그 이전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갈라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초기나 그 이전 시대에는 신비주의를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틀 안에서 담고자 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성경말씀을 신비주의 신학과 철학 방법론이라는 틀 안에 담아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그러나 중세 초기 이후에는 신비주의를 직접적인 체험의 틀 안에서 서술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성경말씀을 직접적인 신 인식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비주의는 기독교 내에서 기독교의 문맥으로 기술되고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사도 요한과 바울 그리고 베드로처럼 올바른 신비를 추구하는가 하면 –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를 신비주의에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 수행자들처럼 이교적 신비를 추구하기도 하는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본고에서 살펴본 신비주의는 사도 요한과 바울 그리고 베드로가 기록한 신비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시작부터 이교적인 관상수행과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내의 신비주의이기에 때로는 신학적으로 아주 건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이교적인 것이며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이후의 연구들에 따르면, 기독교 신비주의와 대승불교 신비주의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심지어 스즈끼 다이세즈는 엑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대승불교의 사상 원리와 너무도 흡사하다고 하였고, 심지어 엑크하르트가 기독교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대승불교의 사상가로 착각될 정도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더욱이 복음주의권이라고 하는 기독교 내에서도 어느 신비주의자를 소개하면서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를 거듭나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탄마귀에게 속은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비주의라 하여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수용해서도 안 된다. 성경적 분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가o 신비주의 내에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가
o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 중보자, 그리고 중개자인가
· 2) 원죄와 죄의 개념이 성경적인가
· 3) 하나님과의 연합 또는 합일이 곧 사람이 하나님 됨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질문 중에서 단 하나라도 실패하면 우리는 그것을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노력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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