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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1)



요한복음묵상시리즈
19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4'22-36

 


사도/기자 요한은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더, 세례요한(이하 '침례요한'으로 표기[각주:1])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피상적으로 요한을 소개했다면, 본 서는 요한의 언행 특히 증언 내지 설교를 가장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바탕본문 부분도 그렇지만, 앞서 1'6,7절에서 빛이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각주:2]님의 증언자로, 15절에 요한 자신을 예비자로, 19-28절에는 베타니[각주:3]에서 침례를 베풀면서 사제[각주:4]/레빝[각주:5]/파리세인[각주:6]들에게 자신과 크리스토님의 분명한 차이점을 말한 것 등입니다.
침례요한은 또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여, 결국 쉬몬 페트로[각주:7]의 동생인 안드레등 제자 일부가 이때부터 예수님을 대신 따르게 됩니다(1'29-40).

이런 점에서 침례요한은 애당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召命/부르심/calling)대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예비하러 온 구약시대의 마지막 대언가임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크리스토님을 구약 시대의 명실상부한 마지막 대언가이자 총완결자로 때때로 묘사함. ]

이번 바탕본문 내에서도 요한이 이 점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친척 형이기도 한 요한을 여인이 낳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각주:8] 사람이라고 하신 바 있는데, 이는 구약인들 가운데서 바로 메시아의 도래/초림(初臨)을 예비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고대의 대언가 예샤야후(이사야)가 예언했던 바로 그 예비자였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에는 메시아 자신 뿐 아니라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할 사람 곧 침례요한의 존재까지도 이미 예언돼 있었다는 것이지요(참고: 구약 예샤야후=이사야 40'3, 신약 마 3'3, 맑 1'2,3, 루카복음 3'4-6)!
 
이 점을 복음서 기자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히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동료들의 말을 평소 익히 참고하였을 터입니다.
특히 후대의 루카(누가)는 침례요한의 집안 배경 및 내력과 예수님 집안과의 관계를 놀랍게 매우 소상히 적어 놓았습니다(뤀 1'5-80).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할 대언자로서 요한의 존재를 입증할 사람은 매우 많았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예언대로 나타난 예비자인 침례요한 자신이 예샤야후의 옛 예언은 바로 자신에게서 성취됐음을 증언합니다(마 3'3, 요복 1'23).

이처럼 구약 대언가들이 메시아의 예비자(즉 침례요한)의 출현까지 예언한 그대로 요한에게서 성취된 점은, 예수 크리스토가 바로 참되고 유일한 메시아이심을 부정 못할 결정적인 증거들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가는 세대의 유대인들이나 '안티'들이 예수 크리스토님이 참 메시아이심을 부인할 수 있는 자료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참 메시아이심을 유대인들이 부정하려면, 다른 많은 진실들과 더불어, 침례요한의 존재와 의의, 침례요한의 존재를 알았던 당대의 수많은 증인들까지도 모두 깡그리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메시아의 존재는 예비자의 존재와도 밀접하게 연결 고리를 이룹니다.


우리는, 침례요한의 위대한 점은 바로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고 낮추면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을 그분에게 안내/소개/증언하고 그 분을 높이는, 이른 바 '도우미' 역할을 잘 감당한 데 있음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즉 구약시대로부터 신약시대/교회시대/복음시대/성령시대/은총시대를 향한 과도기의 전조 노릇을 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낙타 털옷을 걸치고 광야에서 돌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지내던 침례요한의 겸허한 외양이나 소박한 삶, 당대 지도자의 불의를 과감히 지적하고 꾸짖던 정의심을 높이 사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점은 요한이 메시아의 예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그의 소명이고 사명이고 마땅히 할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주변 교계와 사회에서, '신자'를 자칭하면서도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 분을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높이고 더 드러내어 사실상 예수님을 자신보다 낮춰 버리고 그 분의 영광을 짓뭉개 버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데 대해 경악해 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안내도우미이기보다 제 멋에 사는 사람들에 가깝죠.
 
한 술 더 떠, 자칭 '메시아'로 나서서 온갖 자작교리를 설파하고 따르미(추종자)들을 꾀어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오늘날 교계의 슬픔과 위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올 것을 이미 오래 전 예수님 자신이 예언해 놓으셨지만 말입니다.

비단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는 그런 사실상의 사기꾼, 정신질환자 내지 도착증 환자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계 인사들이 명사(名士/celebrity)가 되려고 발버둥을 치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정신 내지 맘가짐은 예수님이나 침례요한의 자세와는 너무나 다르지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시고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 아닌가요? 그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신들메를 풀기조차 감당키 어렵다던 요한이 아니었나요?

주님은 부자와 권력자, 귀족들과 어울리며 지내시지 않고, 낮고 천한 빈민들, 어부들, 사회의 죄인들-세무관, 성매매 여성들..-과 주로 지내시지 않았나요? 요한도 주로 천박한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지 않았나요?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명사'가 되어, 세상 권력을 비롯한 시스템에 깊이 뿌리를 박으면서, 돈과 권력, 겉만의 풍요를 일삼고 이 땅 체제 속에다 "이루겠다"는 왕국! 왕국! 왕국!을 떠들며 외치는 인사들이 날로 늘어간다는 사실은 우리를 정녕 놀랍게 합니다.

그들은 얼굴과 이름, 책과 강의를 팔고 다니면서 교계와 사회의 명사로서 현란하게 활개쳐, 교인들과 뭇 누리의 주목과 인기를 끕니다. 말글로는 섬기고 돕는다면서 숨은 목적과 어젠다를 갖고 명사 대우를 받고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간증과 치유와 예언을 한답시고 비성경적인 사상과 주장을 늘어 놓곤 합니다. 돈을 긁어 모아 어떤 숨은 목적과 어젠다에 바칩니다.
이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 하나님의 왕국, 기독교와 교회의 명목을 빙자해 가며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런 정신과 자세가 우리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것이었을까요? 페트로, 요한이나 파울의 정신이었을까요? 천만에..

하나님의 왕국은 가난한 마음, 낮아지는 마음-겸손과 온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명사들의 주장처럼 세상 시스템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와 거듭난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이룩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높고 높은 눈과 자세로 주위를 둘러 보며 자신들의 어젠다와 목표를 이루려고 그들 나름의 왕국! 왕국! 왕국!을 떠들고 있네요.  
마치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끌고 올라가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이것을 내게 줄 테니 내게 엎드려 절하여라"고 꾀던 그 자처럼 높은 눈을 갖고 세상 시스템을 둘러 보며 말입니다.

그런 그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야 뭐라고 자임하든지 말입니다. 높은 산을 꿈꾸고 명사를 추구하는 그들은 하늘의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땅에서 났거나 위로부터 나고도 땅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31b절 참조).

말과 글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떠들면서 세상 시스템을 '치유'하고 고쳐서 거기 뿌리박으려는 사람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지요.

우리는 그들의 정신이 아닌,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자세와 맘가짐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 시스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개선'하거나 '치유'하여 거기 안주하려 들지 않습니다. 다만 잃어진 심령들을 고치고 복음으로 치유하고 궁극적으로 구원하려고 할 뿐입니다.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둔 본향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본향 찾는 사람들은 한곳에 뿌리 박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명사들은 자꾸만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고쳐서 거기서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거기를 본향으로 삼자고, '땅 밟기'인가 뭔가를 하며 떠들어 댑니다. 심지어 그곳을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자기네 멋대로 딱지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아니죠! 그게 아니죠!

하나님의 왕국은 이 세상 시스템/체제가 아니라(!) 오로지 죄인이었다가 주님께 돌아와 거듭난 사람들의 심령 속에 지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평화 재림하실 때 천년왕국 속에 이뤄집니다. 또한 새 하늘 새 땅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님, 주님이 뭐가 부족하셔서, 마귀가 세상 신, 세상 임금으로 지배하는 이 땅의 시스템 속에 그 분의 왕국을 이루시겠습니까?


우리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명사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마음과 자세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1. 천주교에서 온 '세례'라는 용어보다 침례가 원어에 더 가깝고 정확함. 마태복음 3'16a, 마르코스복음=맑 1'10a 참조. [본문으로]
  2. = 그리스도 [본문으로]
  3. 베다니 [본문으로]
  4. 제사장 [본문으로]
  5. 레위인 [본문으로]
  6. 바리새인 [본문으로]
  7. 시몬 베드로 [본문으로]
  8. = 위대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