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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칼뱅-아르미니우스 주의

아르미니우스는 누구인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네덜란드식 표기: 야콥 하르먼순)
 

세계 기독교계-신교계는 크게 칼뱅주의권과 아르미니우스주의권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프랑스 출신의 법학자로 스위스 개혁가였던 장 칼뱅(본명: 코뱅, 영어식: 존 캘빈, 라틴어식: 요하네스 칼비누스)의 신학사상 체계에 주로 바탕을 둔다.
후자는 네덜란드의 야콥 하르먼순(라틴어식: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영어식: 제임즈 알미니어스. 어원상 고대 로마의 '아르민/헤르만' 후예란 뜻)의 신학사상을 주로 따른다.
전자의 사상을 따르는 교파는 장로교/개혁교/개혁침례교가 주종을 이루고, 후자는 감리교/성결교/구세군/오순절교 등이 따른다. 그밖에 많은 교파나 교단의 일부가 각각 부분적으로 전자나 후자를 취사선택하여 좇기도 한다.


여기선 우선 주로, 아르미니우스가 과연 누구였고 어떤 사상가였는지를 알아 본다.
[글을 쓰면서,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 아르미니우스 연구가인 마리우스 판 레우번 교수(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역사학), 칼뱅주의 학자 라벑 갇프리 박사(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총장)의 글과 위키피디어등을 참고했다. ] 

지난 10월 19일은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지 402주기 되는 날이었다. 그는 칼뱅보다 한 세대 이후 사람으로, 엄격한 칼뱅주의를 따르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출신으로서는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으나, 아이러닠하게도 역사적인 칼뱅주의의 적수로서 세계 양대 신학사상의 한 쪽 기수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교회에 지속적 영향을 준 세계 10여 신학자들의 한 명으로 꼽힌다.   

(정통) 신교계 체제는 크게, 장로교를 포함한 개혁교, 루터교, 아르미니언계 등 3계열로 나뉘는데, 흔히 세 번째가 "진정한 새 합리주의에 오픈된 체제"로 꼽힌다는 게 아르미니우스주의권의 입장이다. 
리처드 뮬러는 묻는다: 아르미니우스는 개혁신학 전통을 새 지평 앞에 오픈함으로써 풍부하게 해 주었는가, 아니면 개혁신학의 '대안'으로서 아예 새 전통을 만들어 버린 이단아인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찬반론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두 동강 냈고, 그의 후예들은 온 유럽과 북미주까지 퍼져갔으나, 그의 신학 사상을 "미혹적 오류"로 보는 저항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아르미니우스의 생애

아르미니우스는 1559년, (위트레히트의) 아우드바터에서 태어났다. 아우드바터는 (현재는) 네덜란드/벨기/룩셈부르크/북프랑스로 나눠진 옛 네덜란드 또는 북해 연안 '저지대'의 17개 주의 하나였던 홀란드의 소도시였다. 당시 천주교 군주인 필맆2세가 스페인과 함께 네덜란드를 다스리고 있었다.
필맆2세의 강력한 천주교 정책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저지대'의 개혁 열기는 뜨거웠다. 1540년대 후기에, 칼뱅주의는 특히 남부 지역에서 인기가 높고 매력적인 신학/신앙 사상이었다.

1559년 귀도 드 브레는 칼뱅주의 신앙을 명확하게 간추려 천주교와 재침례교 사상과 차별화한 '왈롱(월룬/발룬)고백서' 곧 훗날의 '벨짘('벨기의'라는 뜻의 영어) 신앙고백' 첫 판을 써 냈다. 이 고백서는 네덜란드 칼뱅주의의 기본 표준 교리서의 하나가 되었다.
1560년대는 네덜란드 신교의 극적인 발전기로, 벨짘고백서가 출판됐고, 여러 지방의 로마 천주교 성당에 있는 성상들이 훼파되고, 드 브레는 1567년에 순교했다. 필맆2세는 귀족들과 합세하여 더욱 더 박해에 열을 올리자, 왕족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들이 곳곳에서 터졌다.

1570년대 초부터 1648년까지 스페인에 저항하는 '80년전쟁'이 네덜란드 국내에 발발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아버지 하르만은 일찍이(1559-60년 사이) 죽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넉넉한 국제 교육을 받게 된다.
먼저, 개혁 마인드를 지닌 테오도루스 에밀리우스 신부에게 입양돼 위트레히트의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지만, 양부 에밀리우스마저 이내 죽는다(1574년). 이어서 당시 위트레히트를 방문했다가 그를 발견하고 친근해진 아우드발터 동향인 원어학자, 루돌프 스넬리우스의 도움으로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스페인 군대에 짓밟힌 고향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아우드발터 대학살' 사건 당시 피살해, 아르미니우스에겐 이제 유족이 없었다. 

1575년, 아르미니우스는 갓 창설된 레이던 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스넬리우스의 도움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된 12번째 학생으로서, 이어서 다른 학생들처럼 딴 학교에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스넬리우스의 제자 가운데는 훗날 아르미니우스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후고 그로티우스(휘호 드 그뤁)가 있었다.]

1576-1581년 그가 레이던에서 학업을 닦을 당시, 신학교수들은 람베르투스 다네우스, 요한네스 드루시우스, 귈라우메(귀욤) 퓨게리우스, 요한 콜만 등이었다. 특히 콜만 교수는 강력 칼뱅주의가 하나님을 '독재자/집행자'로 만들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젊은 아르미니우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미니우스 자신, 훗날 레이던 대학교 교수가 된다.  

1582-87년에는 암스테르담 상인 길드의 장학금을 받아, 제네바와 바젤에서 공부한다. 1582년 제네바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의 수하에서 공부하던 아르미니우스는 마르부르크 대학 시절에 배운 라무스 기법(프랑스 신교/위그노 학자 페트루스 라무스의 수사학/논리학/교육학 이론체계)을 활용하던 중, 그곳 학자(베자 자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근거가 약하다)와 다소 갈등을 빚게 돼, 잠시(1582-84) 제네바를 떠나 바젤로 가서 J.J 그뤼네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한다. 다시 제네바에 돌아온 그는 새로 요한네스 브텐보가르트 등의 친구를 사귀는데, 브텐보가르트는 훗날 칼뱅주의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아르미니우스의 주된 도우미가 된다.  
 
일설과는 달리, 제네바 유학 시절 아르미니우스와 스승 베자와의 관계는 퍽 좋았음에 틀림없다. 베자는 아르미니우스의 귀국을 앞둔 1585년, 암스테르담 시의회에 보내는 썩 좋은 추천서를 써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물에 대한 민감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경건으로써 조절된다면...가장 큰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베자의 이 축복은 훗날 아르미니우스가 자신과 칼뱅주의의 최대 적수가 되는 '가장 큰 열매'를 낳게 되니, 일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586년 말, 아르미니우스는 이탈리아 여행을 위해 두 번째로 제네바를 떠나, 베네치아 인근의 옛 대학/문화도시, 파두아에서 당대의 명 논리학자 자바렐라의 강의를 듣고, 로마에서는 먼 발치에서 교황(식스투스 5세)을 보기도 했다.
[훗날 칼뱅주의자들은 바로 이 이탈리아 여행을 두고 그가 로마 천주교에 일말의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나, 논거가 박약하다. 갇프리조차도 그런 주장을 "전적으로 무근하고 부당한 비판"이라고 지적한다.] 

장학금에 보답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 안수를 받고, 이내 탁월한 설교가/목회자로서 명성을 떨친다. 다양한 외국에서 유학한 그에겐 장래 유망한 신학자로서의 탄탄대로가 열려, 1590년엔 (상인 명문가 출신으로, 훗날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이 될 라우렌스 레엘 박사의 누나인) 레이스벹 레엘과 결혼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귀국과 거의 동시에, 칼뱅주의 교의를 매우 엄격한 시각으로 지지/해석하는 동료 사역자들과의 사이에 갈등과 위화감을 느낀다. 아마도 철저한 카톨맄 계열인 스페인 군대의 네덜란드 침공 전 이후, 조금이라도 정통 칼뱅주의 노선을 벗어나는 기미가 보이면 모조리 경계하거나 적대시하는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서에 기초한 여러 편의 설교를 통해, 은총과 예정, 자유의지 등에 관하여 칼뱅/베자의 가르침과 다른 견해를 점차 표출하기 시작했고, 칼뱅주의자들의 의혹도 거기 비례해 커져갔다.
1591년, 아르미니우스는 두 칼뱅주의자-라이니어 돈테클로크, 아렌트 코르넬리순의 비정통적 예정론인 '후정론'(또는 타죄/墮罪이후론/infralapsarian)적 견해를 반박하라는 위촉을 받고 응하지 못하자, 비평가들은 더욱 그를 반목시하게 된다. 더욱이 예정론을 거부하는 크룬헐트에게 적절한 회신을 하라는 암스테르담 교회 회의의 요구도 이행하지 않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돈테클로크나 크룬헐트의 지지자였을까? 그는 결코 예정론 반대자는 아니었으나, 사역 초기부터 후정론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나님의 예정의 뜻-저주/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사람 또는 "타락 가운데 내버려두실 대상"에 대한 결정-을 타락 이전 또는 창세 이전에 정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하셨다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의 생각이었다.

1590년대를 거치면서 아르미니우스의 이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갔다. 예정이 타락 이전 또는 창조 이전에 이미 되었다는 선정론(先定論/supralapsarian)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최대화하는 셈이지만, 인간의 자유/선택의 공간은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칫, 인간 타락과 거기 따르는 형벌의 응보를 처음부터 결정해 버린 '악의 창시자'가 돼 버린다.

주의 깊은 청중이 그에게 모여든 동안 아르미니우스는 자기 나름의 오솔길에서 신적 권능과 인간 자유와 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의 정통성 여부에 대한 질문이 청중 가운데 한 번 이상 터져 나왔다. 
일례로, 로마서 7장을 갖고 설교하면서 바울이 "죄의 법에 매여" 죽음으로 이끌린 삶은 회심 이전의 삶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가 보기에 그 까닭은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만나 새 삶을 사는 중생인은 죄 탓에 망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의 인간 조건에 관한 그런 낙관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비난을 불렀다.

암스테르담 기간동안 아르미니우스는 예정론에 관한 주요 저작물을 썼지만, 사후에야 출판돼 나왔다.
그는 특히 1601-02년 전염병이 나돌 동안의 목회사역을 통해 예정교리를 지나치게 강요할 경우, 근심이나 체념 등 극한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확신을 굳혔다.

1602년 레이던 대학교의 세 신학 교수들 중 두 명이 역병으로 죽자, 후임자 물색 과정에서 당시 모리스 공의 궁정목회자였던 브텐보가르트가 아르미니우스를 천거했다. 살아남은 교수인 프란치스쿠스 고마루스는 암스테르담의 경고를 듣고 딴 교수감을 선호하면서 아르미니우스의 지명을 반대했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고는 만족한다며 동의를 표했다. 왜 고마루스가 "만족"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603년 7월, 아르미니우스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그 해 9월 자연에 대한 3개 강의와 신학의 목적을 말하면서 신임교수로 나섰다. 그러나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영구적 논쟁은 예정론에 대한 후자의 입장이 밝혀진 1604년 2월에 시작됐다.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레이던 사람들의 의혹이 일기 시작한 것.
사람들은 그가 학생들에게 할당한 책들을 비평했고, 그와 학생 개인과의 학습 세션을 우려했다. 고마루스는 아르미니우스의 예정교리가 정통 칼뱅주의가 아님을 확신하게 됐다. 이런 의혹 탓에 강의 때 그의 교리를 검증하자는 분위기였으나, 대학교 이사회가 허용하려 하지를 않았다. 혹자들은 이 문제가 전국총회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으나, 교회 당국도 이것 때문에 총회를 열려고 하지 않았다.

교계 내 긴장감이 팽창하자, 1608년 당국의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 중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신앙을 간추린 '견해선언서'를 썼다. 그는 교회를 과도한 칼뱅주의-특히 선정론-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해 왔을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고마루스는 단순히 그런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개혁의 핵심교리인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 의롭다 칭하심, =의인/義認)교리에 연계된다고 답했다.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결이 보이지를 않는 가운데, 아르미니우스는 병이 들어 1609년 숨졌다.
죽기까지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양호한 사역자였다고 평가된다.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

아르미니우스의 주된 가르침이 뭔가? 그는 신학적으로 칼뱅주의 예정론을 거부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다. 그는,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이라고 진술했다: "하나님은, 크리스토 안에서 영원한 은총(또는 은혜)의 택정(decree)으로써 신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입양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비신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실 것을 정하신다."

그러나 칼뱅주의 입장은 로마서 8'30, 행전 13'48 등에 근거하여 아르미니우스와는 배치된다. 정통 칼뱅주의로서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택정-하나님이 주권적 의지에 따라 믿음을 주시려는 목적-이 사람의 믿음에 앞서지 않는다면, 믿음은 선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아르미니우스는 4개 논문에서 예정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 정의를 펼쳤다.

   1. 하나님은, 크리스토님이 구주로서 "죄를 멸하시고", "(인간)구원을 쟁취하시고", "그 분의 덕으로써 그것을 전달하시도록" 절대로 택정하셨다. 

   2.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크리스토 안에서, 그 분을 위하여, 그 분을 통하여, 그런 회개자들과 끝까지 견디는 신자들의 구원을 발효시키기로" 절대 택정하셨다.

   3. 하나님은 그 분의 거룩한 지혜와 공의에 따라 "회개와 믿음에 필요한 수단들을 충분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베푸시기로" 택정하셨다. 

   4.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분의 선행적(先行的) 은혜를 통하여 누가 믿을지, 그리고 이어지는 은혜를 통하여 (끝까지) 견딜 지를 아신 그 예지(豫知)에 따라, "특정 개인들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기로" 택정하셨다.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예정론 해설에서, 은총 신학을 지키고 펠라기우스주의를 전적으로 피하려고 힘썼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한 그 분의 모든 대우가 공평하게 보이는 은총 신학을 원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은총을 거부할 여유를 남겨 두는 신학을 원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역시, 그런 종류의 신학이 복음전파를 더 쉽게 하고 인간 책임을 강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통 칼뱅주의 입장에서 볼 때, 아르미니우스는 참된 은혜 신학을 구사하는 데 실패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비록 은혜가 필수적이고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효력적이지는 않다는 것.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구원에 있어서 최종적, 결정적인 요인으로 남는다. 아르미니우스의 예수님은 이젠 더 자기 백성의 실제적인 구주가 아니시다. 그 분은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되신다. 아르미니우스가 제 아무리 진지하게 제한한다 해도 인간 쪽의 기여(contribution)가 구원의 중심이 돼 버린다.

아르미니우스는 또 정통 개혁신학에서의 믿음의 위치를 바꾼다. 즉 믿음 자체가 죄인에게 의를 위하여 부여된다고 보는 반면, 정통 칼뱅주의 가르침에서는 죄인에게 부여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인 크리스토와 그 분의 의라고 강조됐었다.
이 전이가 중시되는 이유는 구원의 주된 초점이 크리스토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아르미니우스로서는 심지어, 믿음이 새 언약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아르미니우스의 이런 가르침은 그가 신교의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격하시키고 있다"는 비판의 문을 열어 주었다. 칼뱅주의자가 볼 때,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은 믿음을 크리스토의 사역에 기초한 도구로부터 인간의 행위로, 크리스토의 의를 얻는 도구로부터 의(義) 자체로 바꾸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개혁교회의 분화

1610년, 42명의 사역자들이 네덜란드 교회회의에 자신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견지하도록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Remonstrance)에 서명했다. 이 청원은 아르미니안주의를 다음 5대 요점으로 간추렸다:   

    • 조건적 선택
      • 보편적 속죄 
        • 전적인 부패 
          • 충분하나 저항 가능한 은혜 
            • 성도의 견인(堅忍)의 불확실성

이듬해인 1611년, 칼뱅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반청원서로 응했다. 갇프리에 의하면, 본래 칼뱅주의측은 5개 요점으로 조직하지도 않았거니와 사실상 5대 요리로 간추려진 적이 없는데도 '칼뱅주의 5대교리'라고 알려진 사실은 아이러닠하다. 다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오류'에 대한 5대 응답을 제시했을 뿐이다.

칼뱅주의 진영의 이 5대 반응은 다음과 같다:  

   • 전적 부패
      • 무조건적 선택
        • 제한(비보편적) 속죄
          • 저항 못할('불가항력적') 은혜
            • 성도의 견인

흔히 이 5대 요점은 영문번역의 첫 글자를 따서 'TULIP'으로 지칭되며, 가끔 튤맆 문양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네덜란드는 튤맆과 풍차의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갈등은 날로 가중되어 심지어 국내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마침내 1618년, 교회정부 지도층의 일부 변경 후, 도르트레히트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재판하기 위한 전국총회가 열렸다. 이 '도르트총회' 전, 아르미니우스주의 이슈는 온 유렆에서 폭넓게 토론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스위스/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의 '위험성'에 큰 우려를 표명했다.

영국 청교도신학자 윌리엄 에임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본래적 의미의 이단은 아니나, 이단...펠라기우스주의 이단으로 기울어질 신앙의 위험한 오류"라며 그 까닭은 "회심과 신앙의 효과에 필요한 내적인 은혜의 효율적 작용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평가에서 에임즈는 은혜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 사이의 갈등에 연계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했다. 펠라기우스 사상에 따르면, 인간 자신의 본성적 능력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

도르트 총회의 대의원들은 네덜란드 뿐 아니라 온 유렆에서 왔기에 가히 국제적인 개혁 총회였다. 총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사상을 배격하고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정통 칼뱅주의 사상을 명확하고 도움되는 어조로 제시했다. 도르트 신조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유렆 온 교회에 탁월한 신앙방어로써 기려졌다.

도르트 신조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오류'에 대한 칼뱅주의의 반응으로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크리스토님의 의를 통하여 잃어진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택하신 자들(이하 피택자)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로 정하셨다.     

    2) 하나님은 그 분의 피택자들을 위한 죄의 대속물로 죽으실 그 분의 아들을 보내셨고, 크리스토님의 죽음은 확실히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3) 사람은 죄 가운데 전적으로 잃어져, 하나님의 중생시키는 은혜 없이는 구원을 바랄 수도, 회개할 수도, 믿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4)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죄인이 저항할 수 없게 구원하신다. 왜냐 하면, 오직 불가항적 은혜만이 인간의 반역을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온정(긍휼) 가운데서 그 분의 피택자들 속의 믿음의 선물을 보존하셔서, 그들 속에 시작하신 선한 일을 그들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갇프리는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차이점은 오늘날도 문제 되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점이 이젠 더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아직도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가? 물론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늘날 복음주의권과 오순절교 서클에서 매우 영향력이 크다. 오늘날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과거 아르미니우스자신이 했던 것보다 더 자유의지를 강조하거나 행위마다 정당화할 것이다.
   신학에 다소 무관심한 일부 행동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와 칼뱅주의의 차이점을 경시한다. 어떤 운동가들은 흔히 세상에서 크리스토님을 위해서 할 일이 너무 많고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너무 많아, 신학적 차이는 최소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과도히 강조돼선 안된다는 것이 진리다. 대부분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신자들이다."


과연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일까? 비록 성도가 신학을 잘 모르더라도 이것을 가리는 것은 성도의 분별/검증작업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칼뱅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요 교의(敎義)를 성경적으로 분별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