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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메시아계보대장정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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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윋

앞에서도 썼듯, 다윋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맞는, 꼭 맞는, 합한) 사람으로 상징됩니다. 다윋은 신약에서 자주 메시아 예수님과 연계되지요.

사도 파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샤이의 (아들) 다윋을 찾았다. 내 마음에도 맞는 사람, 내 모든 뜻을 이룰 사람!'-이 사람의 후손으로부터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에 구주님을 세우셨는데 곧 예수님이십니다"
   (행전 13:22~23. 사역).

다윋과 메시아

즉 다윋은 예수 크리스토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처음부터 찾아 만나고 골라 빼어 내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샤이의 8명이나 되는 아들 중 맏아들도, 셋째도 넷째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맨 끝인 막내일까요? 여덟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딱 하나-다윋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다윋은 이스라엘에 구주, '왕들의 왕'을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시 89:3). 그러므로 다윋과 예수 크리스토의 상호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중대한 연계성이지요.
시편에 따르면, 다윋은 자기 후손들 중에서 자신의 주님이 오실 줄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마태 22:42~45. 비교 시 110:1). 시편 89:19~37을 읽어 보면 이 말씀들이 다윋/슐로모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상 메시아-예수님께 대한 예언임을 명명백백히 느끼실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다수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진리를 모르거나 거부한다는 점. 그들은 '이단자' 예수가 메시아이긴커녕 위대한 왕 다윋의 후손이라는 것조차 부끄러워 하거나 부인하려 들지요.
그들에겐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 메시아상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을 뒤집을 위대한 혁명적/정치적/정신적 지도자 메시아를 꿈꾸며 기대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메시아를 가장한 강력한 적크리스토 '짐승'이 나타나면 현대의 이스라엘은 기꺼이 환영할 테지요.
 
그러나 다윋이 대언한 메시아는 죽음에서 되살아나실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내가 다윋의 (= 다윋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은총을 너희에게 주리" 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행 13:34,35 비교: 시 16:10).

하나님이 함께 하신 용맹한 사람

아무튼 한낱 목동이었던 다윋이 일약 이스라엘 온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 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슈무엘A=삼상 18:5~7). 그는 하나님이 빼고 고르신 사람답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타는 열심이 있습니다.

그는 신앙과 담력, 슬기의 사람입니다. 용장이자 지장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슬기가 넘쳤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존재도, 사자나 곰 따위의 맹수도(슘A 17:34~37) 펠레쉩 최고 용사인 거인 골리앝조차도(17: 전장 참조) 그에겐 하등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용감무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요소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며 특히 크리스토의 형상이지요.

이런 다윋의 용맹성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샤울 왕부터 온 군대가 골리앝 앞에서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17:11, 24). 과연 단지 겉보기에 커 보인다고 악을 무서워 해도 될까요..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겐 작은 벌레로부터..악의 왕인 싸탄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다윋이 거인 골리앝을 쳐 죽인 사건은 바로 싸탄에 대한 메시아-크리스토의 승리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펠레쉩 군대가 골리앝의 허우대를 내세워 이스라엘을 겁 준 것은 오늘날 싸탄이 세상과 주변의 온갖 상황과 환경을 통한 공포심과 두려움으로 성도들을 겁 주는 행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윋이 골리앝 하나를 쳐 죽이자 펠레쉩 전군이 이스라엘 앞에 추풍낙엽처럼 패주한 것과 같이 크리스토께서 이미 이겨 놓으신 야웨의 싸움에 우리는 동참하여 마귀를 적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윋은 외칩니다.

"주님/야웨는 나의 빛, 나의 구원!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야웨는 내 삶의 힘! 내가 누구를 겁내랴?"(시편 27:1 사역)  

겸손/온유의 사람

다윋은 또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사람을 대적하지 않습니다(슘A 24:6, 8~15, 26:11,23끝). 하나님이 세우신 위의 권위를 높이고 침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두렵게 여긴다 - 따라서 온유/겸손하다는 뜻입니다. 그를 기름부으신 성령님이 주신 마음이고 크리스토의 마음이지요.

다윋은 맘만 먹는다면 자기를 해치려는 샤울 왕을 얼마든지 능히 반격하고 상처를 주거나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샤울에게 손을 대지 않죠(24:4~6,11, 26:8~12). 몰래 왕의 겉옷자락을 벤 것조차 마음에 가책을 받을 정도라니(24:4끝)! 샤울은 하나님이 직접 기름 부으셨던 초대 왕인 데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대신 응징해 주실 것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입니다(24:12,15, 26:23). 하나님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자기를 악착같이 죽이려는 샤울 왕을 대적하는 대신 한사코 그 칼을 피하기만 합니다. 자신과 죽음 사이는 불과 한발짝 뿐이기에 피할 수 밖에 없죠(20:3끝). 개 죽음 당할 순 없으니까.

다윋은 이렇게 읊습니다.

    주님/야웨 안에서 조용히 참고 기다리오.
    제 뜻대로 잘 되는 사람 탓에
    악한 꾀를 이루는 사람 탓에 초조해 마오..
    악행자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주님/야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리    
    잠깐만 있으면 악인들은 없어질 테니
    아무리 그의 자리를 살펴 보려도 없으리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고
    넘치는 평화 속에 즐거워하리!
           (시 37:7~11 일부 생략. 사역)

이것은 크리스토님에게서도 발견되는 성품이고 정신입니다. 마음이 온유/겸손하신(마 11:29) 주님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12 영(군단)도 더 되는 천군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지요(마 26:53). 사실 주님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 양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고 잠시 악인들의 손에 몸을 맡기십니다(이사야 53:7, 필리 2:8).
 
의인 다윋과 악인 샤울

다윋이 이렇게 행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심지어 그를 대적하는 샤울 왕가의 핵심 최측근들까지도 다윋의 사람이 됩니다. 왕세자 요나탄도, 공주 미칼까지도 다윋 편입니다(슘A 18:1~4,28, 19:1~7, 11~17, 20:전장).
이럴 정도로 하나님이 다윋과 늘 함께 하심을 보자 샤울은 다윋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18:12,15, 18:29). 조만간 자기 왕위를 찬탈하고 왕자 요나탄을 죽이고 자기 왕가를 허물지 않을까 의심한 것이지요(20:30,3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과 하나님의 성령이 떠난 악인과의 극단적인 대비와 차이를 봅니다. 다윋에게서 하나님의 품성을, 샤울에게서 싸탄의 품성을 발견합니다. 다윋에게 성령님의 감화와 영감이 넘치듯, 싸탄은 샤울에게 악령과 악의 영감을 심고 내려 줍니다.

마귀 싸탄은 샤울을 급변시켜 갑니다. 먼저 다윋에 대한 질투심이 끓습니다. 샤울의 질투는 곧 싸탄의 질투지요! 싸탄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다윋 - 하나님이 고르시고 빼 내시고 사랑하셔서 믿음과 담력과 슬기를 주시는- 사람을 몹씨도 질투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요.

샤울에게는 다시 악령이 작동하며 기회를 엿보아 틈만 있으면 다윋을 죽이려고 합니다. 싸탄의 파괴 근성, 살해 근성을 암시하지요(요10:10a).

사실 다윋은 조금도 샤울을 해치려 들지 않으며 실상 두려워 할 아무런 대상도 상황도 아닙니다! 오히려 샤울을 도와 나라를 살리고, 지키고, 더구나 샤울 곁에 돌아 와 궁중 음악인의 임무를 감당하여, 기름부음 받은 성령님의 거룩한 음악요법을 샤울에게 시술하고 있으니, 정말 샤울이 그를 통해 복을 누리고 있는 판국이 아닙니까.

그런데도..샤울은 다윋의 선을 항상 악으로 갚으려고 합니다. 다윋의 선행과는 전혀 무관하게, 싸탄은 샤울을 통해 다윋을 죽이려 듭니다. 이처럼 싸탄과 그의 졸개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선과 의와는 관계 없이 목숨을 빼앗으려 합니다. 지금도 싸탄은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질투하고 미워하며 파괴하고 죽이려 들지요(시 56:1,2, 페트로A 5:8).

바로 이래서 우리에겐 영적인 경성(깨어있음)과 민감함, 적에 대한 경계와 분별, 적과의 영적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윋은 무력하고 미련하고 허무하게 샤울에게 당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샤울은 다윋이 킨노르를 연주하는 틈을 타 순식간에 죽이려고 여러 번 단창을 던집니다만 다윋은 때마다 민첩하게 피하여 죽음을 면합니다(슘A 18:11, 19:10, 샤울은 심지어 왕세자 요나탄에게까지도 단창을 던집니다. 정말 미친 짓거리입니다! 20:33).
이것은 다윋이 그만큼 무술에 단련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성령님의 슬기와 민감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친히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윋의 시편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의 보호와 방어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예: 시 3:3, 5:12, 7:10, 18:1,2 등).  

크리스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그 분은 때가 차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까지는 늘 하나님이 보호하셨고 공사역에 나서셨을 때는 슬기롭게 위기를 모면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분을 절벽에서 밀어뜨려 추락사 시키려 했고(루카 4:29,30) 그외에도 여러 번 그 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민감하고 슬기롭게 그리고 용기 있게 피하셨습니다(요 8:59, 12:36끝 등). 성령께서 그 분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싸탄의 살인 전략

싸탄은 더욱 전략을 강화하여 다양하게 펼칩니다. 그는 하나님이 다윋에게 성령의 영감이 넘쳐 슬기롭게 행하는 것을 보자 이번엔 사특하고 간교한 꾀를 내어 샤울에게 악의 영감을 심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싸탄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을 기회를 보아 죽이려고 듭니다. 온갖 간교한 영감을 악인들에게 심어 우리를 적대합니다(마 24:24).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무장으로 이에 대처하고 방비해야 마땅합니다(에페소 6:10~18a). 크리스토의 사람들은 마귀와 악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야코보 4:7, 페트로A 5:9).

싸탄이 샤울에게 준 악한 영감과 꾀는 이런 것입니다(슘A 18:17).

먼저 전략 1 단계로, 다윋을 자기 맏사위로 삼겠다는 명목을 달아 상대의 마음을 붕 뜨게 부추기려 듭니다. 그래서 맏공주 메랍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내가 왕의 맏사위가 돼? 우와~! 이게 웬 떡이냐?" 따위의 허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다윋이 정말 그랬다면 그의 중요한 헛점-빈 구석이 될 터입니다.
  
2 단계로는, 왕을 위하여 용기 있게 싸우라고 주문합니다. 다윋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부추기는 것이죠.

3 단계로는, '야웨의 전쟁'을 하라고 짐짓 격려합니다. 여기서 샤울은 다윋이 목숨 내걸고 위하는 바로 그 대상이신 야웨의 이름을 빙자합니다. 가장 사특하고 악한 방법이지요. 앞서 다윋은 골리앝과 싸울 때도 야웨의 이름으로 야웨의 전쟁을 치렀습니다(17:45~47). 전쟁은 야웨께 속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샤울은 자신의 숨은 목적을 이루려고 바로 다윋의 이 점을 적극 악용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싸 해 보이는 샤울의 이런 말은 실은 모두 자기 손을 대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는 간접 암살 계획입니다. 선으로 포장된 악에 불과합니다. 철저한 위선입니다. 샤울은 몇 차례 직접 살해를 시도해 봤지만 다윋의 기민하고 재빠른 동작에 혀를 내 두르며 포기합니다.

이후 간접 살해 기도로 전략을 바꿉니다. 다윋을 속여 그에게 굴레를 씌우고 포망을 씌워 꼼짝 못하게 해서 적군인 펠레쉩 군대를 통해 암살하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싸탄은 훗날 다윋 본인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써 먹습니다. 다윋이 왕이 되어 나라가 견고해지자 마음이 느슨해진 틈을 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밭쉐바를 먼저 겁탈하게 하고 그 죄상을 덮으려고 극비의 지령을 내려 우리아를 최전선에 내세워 펠레쉩 군대의 손에 죽게 하는 간접 암살을 자행한 것입니다(슘B=삼하 11:전장 참조).  

이 방법은 오늘날 싸탄이 문명사회 속에서 구사하는 음모술이기도 합니다. 즉 온갖 첩보기관을 통해 요인 암살에 써 먹는 방법이지요. 거짓과 속임의 아비인 싸탄은 완전 범죄를 추구하기에 "귀신 같이" 뒤끝 없이 처리하려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역사가 말해 주지요. 설령 인간 앞에는 '완전범죄' 같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선 완전범죄란 없습니다.

더 나은 지략

아무튼 다윋은 샤울의 이 간계 역시도 슬기롭게 극복합니다. 만약 다윋이 호락호락 왕명을 거부했다가는 샤울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기에 다윋은 겸허한 반응을 보입니다. "제가 누구관대 감히..? 이스라엘 중에 저의 친족이나 아버지의 집이 도대체 뭐기에 제가 국서(國婿=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된다는 말입니까?" 라고 답합니다(슘A 18:18).

결국 다윋에게 주기로 했던 맏딸 메랍은 당초 왕실이 내 건 마감시한이 차자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줍니다. 싸탄의 계략은 늘 이렇게 야비합니다. 만약 다윋이 정말 위 전략 1~3 단계를 통하여 결국 죽게 된다면, 맏딸 메랍 공주는 과부가 될 거 아닌가요? 과부가 돼도 좋으니 앞뒤 안 보고, 할 짓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다윋의 말 한 마디에 아까운(?) 3단계 전략이 허사로 돌아 가지만 싸탄과 그의 노예 샤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침 둘째 공주 미칼이 다윋을 짝사랑한다는 뒷소문을 듣고는 대동소이한 수법으로 재도전합니다(18:20~22). 둘째 부마를 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다윋은 한결 더 저자세로 반응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니 왕에게 걸맞지 않은 사윗감이라고 답합니다(23절). 그러나 이 정도에 간단히 물러설 샤울이 아니지요. 다윋의 겸허와 자기비하를 되레 역이용하여 단지 펠레쉩 군 100명을 쳐 죽인 전리품으로 남성의 포피를 폐백 대신 원한다고 주문합니다(25절).

다윋은 샤울의 이 전략에는 응하지만, 단지 샤울의 주문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지 그의 간계에 말려 들어서가 아니지요. 이 때도 샤울 왕은 후보자가 공주를 차지할 마감 시한을 제시했는데, 다윋이 마감 전 부하들과 함께 출전합니다(26~27절).
샤울은 "옳거니! 네 놈이 영락없이 잘 걸려 들었다. 적군에게 패배해 죽어라. 죽어도 싸지.." 했습니다만, 다윋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단히 승리하고 돌아 와 결국 둘째 부마가 됩니다. 오히려 왕이 내 건 조건의 배나 되는 200명을 죽입니다(26~29절 참조). 즉 다윋의 슬기는 샤울의 잔꾀보다 늘 한 수 앞섭니다. 하나님의 지략은 늘 싸탄의 간계를 능가하지요!
 
펠레쉩 군대를 통해 다윋을 죽이려던 샤울의 계략은..오히려 다윋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더욱 입증되고 심지어 요나탄, 미칼 공주까지 가세하여 다윋을 더 사랑하고 다윋을 비밀리에 도와 목숨을 살리는 계기가 됩니다(19:11~17, 20:전장).
결국 하나님과 다윋은 오히려 싸탄과 샤울의 계략을 역활용한 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단수는 언제나 높습니다(이 55:9)! 따라서 그 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싸탄의 고도의 전략을 역이용하여 단수 높으신 하나님을 입증할 수 있게 되지요.  

여기서 우리는 샤울이 하나님과 다윋을 두려워 하면서도 한 편으로 다윋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사람인 다윋을 능멸한다는 사실을 뚜렷이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소치이죠.

샤울 왕은 때때로/간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도 합니다(19:6, 24:16~21, 26:21이하). 사실 그가 철저히 회개했다면 그의 왕조가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아합 같은 악인의 뉘우침도 가상히 보시기 때문입니다(왕들A=왕상 21:27~29). 그러나 샤울의 회개는 한 때일 뿐 죽기까지 그림자처럼 악성을 되찾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굶으신 뒤 싸탄에게 3단계 유혹을 받습니다만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깁니다(마태 4:1~10). 마귀는 성경까지 이용하는 고도의 전술을 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의탁한 주님의 통쾌한 승리로 결판이 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도 우리는 다윋에게서 예수 크리스토님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삶의 모든 유혹을 철저히 100% 이기셨기에..
지금 우리를 중보하시는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시기에 지금도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브리 2:18, 4:15~16, 7:25). 할렐루야!


[ 필자는 외래어를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