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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등풀의 생각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본 칭의론 (등풀)




1500년 즈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죄로 인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었다는 여러가지 일화를 가지고 있다. 루터가 죄로 인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고백성사를 위해 사제를 찾아갔더니 나중에는 사제가 너무도 귀찮아 하며 루터에게 죄를 범할 때마다 찾아오지 말고 여러 개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였다는 일화도 있고,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테란 성당의 그 유명한 빌라도의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으로 올라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루터를 죄에서 해방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죄로 인해 너무도 고민하였고 결국 성경말씀에서 해답을 찾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루터가 깨달았던 그 길을 더듬어 따라가고자 한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살펴보고 루터가 깨달은 진리를 확고히 하여서,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살펴본다.

 

1.     율법의 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을 살펴보면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심지어 거짓 가르침에 이끌려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거짓 가르침은, 신자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믿음과 유대 율법주의를 혼합해 놓은 것이었다. 이것을 사도는 다른 말로 표현하기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고 하면서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거짓 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은 할례와 월삭 그리고 음식과 관련된 율법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이 율법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베드로와 바나바조차도 이 거짓 가르침에 이끌려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2:12~13).

 

이 가르침의 배경과 이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도록 한다.

 

1)    구약시대 율법의 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는 몽학선생이었으나 유대인들은 그 율법으로 의를 이루려 하였다.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 6:25)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전부 다 지켜서 그것을 자기들의 의로 삼고자 하였다.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였다( 10:6).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던 시기의 유대인들의 생각과 여전히 동일하였고( 19:20), 회심하기 전의 바울 역시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3:6).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려 하는 모든 노력들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누더기와 같음( 64:6)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생각한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율법의 의를 능동적 의라 부르고 있다. 사람이 능동적으로 노력해서 이루는 의라는 의미에서 능동적 의라 부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바리새인들의 전통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던 동안의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서 세분화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표면적으로 지키면서도 어떻게든 율법만 지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15:5~6). 복음서에는 이러한 예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안식일에 일정 거리 이상을 절대로 여행해서도 안 되었고,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해서도 안 되었으며 굶주린 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양은 구해내면서 사람은 아파도 치료해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5경을 주석하고 성문화하여 율법이라 부르는 것들을 정리하였고 613 개의 조항으로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잔과 대접의 겉을 씻는 것과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조항까지도 들어 있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율법을 절대화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께 의로운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쉽게 혼합될 수 있었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예수님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15:1~5)고 할 만큼 복음을 율법과 혼합하였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가장 큰 어려움은 단일신주의와 이러한 율법주의였다. 요즘 N. T. Wright 이라는 신학자가 어리석은 주장으로 유대인들의 이러한 율법주의를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칭의가 아닌 거짓 칭의로 귀결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도가 율법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한 이유는 율법으로는 그 어느 육체도 의롭게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저 헛된 일일 뿐이라고 함으로써 율법으로 인한 의의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 2:21).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혼합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2:16).

 

2.     그리스도의 의

1)    갈라디아서에 계시된 그리스도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에는 처음 인사말에 다른 서신서에는 인사말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들어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라는 표현이다. 사도는 이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갈라디아 교회들의 성도들이 우선 먼저 역사적인 예수, 즉 실제로 이 땅에 사셨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도록 한다. 복음은 사람이 정한 것이거나 허구이거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재라는 것을 우선 먼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바로 이 예수님을 갈라디아서 1장 처음(1절과 4)에 제시함으로써 실제로 역사 속에 살아계셨던 바로 그분을 유대교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들에 퍼져 있는 거짓 복음인 율법과 복음의 혼합에 대항하여,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는가에 대해 논증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율법과의 관계성 속에서 조명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4:4~5)

 

이 성경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우리의 역사 속으로 육신을 입고 들어 오셨음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아들, 선재하신 분께서 여자를 통해 육신을 입고 우리의 역사 속에 들어 오셨음을 계시하는 이 말씀은 우선 먼저 그리스도의 사역의 진실성을 보증하고 있다. (물론 보내사라는 단어를 통해서 아들의 선재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6절 말씀에 다시 보내사라는 단어를 아들의 영에 사용함으로써 아들의 선재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며 그분의 구속사역 및 순종은 허구의 영웅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논증하면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아들이 육신을 입고서 율법 아래 오셨음은 유대교의 상황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하고 또한 모든 율법이 그분에게 적용됨을 의미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율법 아래에서 나신 것은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에 속박된 자들을 속량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5).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침이 되고( 10:4)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논증하여 성도는 율법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성도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논의된다).

 

2)    그리스도의 의

율법으로는 그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사도는 다시 한번 명백히 밝히면서( 3:11), 율법은 범죄로 인해서 더하여져서( 3:19)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기 위한 것이며( 3:22) 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죄를 알게 함으로써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일( 3:24) 뿐이다. 율법으로는 의가 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우리 인간들 스스로에게는 그 어떤 소망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율법 밖에 있는 의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된다.

 

로마서 3장에는 직접적으로 그 의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3:21). 그리고 바로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의니 차별이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선포하여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어린 양으로서 죽음으로 모든 죄를 다 대속하셔야만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으니, 이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시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완전한 의를 이루신 분이어야만 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이것을 간단하게 표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1:4)로 기록하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이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오고 간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었던 의를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칭의)

칭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심은 법정적 선언의 개념이 강하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칭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사건으로, 두 가지 모습으로 이해된다.

 

1)    죄 용서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의를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죄 있음을 알게 될 뿐인 우리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다. 사람들을 위해서 그 누군가가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주기 전에는 구원이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러한 존재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모든 율법을 다 이루며 점도 흠도 없는 완전한 어린 양으로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도록 하셨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의 죄는 예수님께로 전가되어 다 갚아지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죄에 대하여 묻지 않으시게 된다. 예수님께서 다 갚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3:13)라고 기록한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율법의 저주는 사망이기에 율법을 어긴 자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다 받으시고 우리에게 죄 없음이란 선언을 해주신 것이다.

 

2)    의의 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 단순히 죄 용서만을 이루셨다면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만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 13:43; 12:23).

 

바로 이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신자에게로 의의 전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2:16).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설명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3:27).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그리스도처럼 봐 주신하는 말씀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처럼 된 자이다. 신자 자신이 행위로나 무엇으로든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가 수동적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의를 루터는 능동적 의에 대비하여 수동적 의라고 표현하였다. 사람이 자기 행위로 능동적으로 이루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수동적으로 주어진 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죄 용서받음'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별도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대한 단지 논리적 신학적 구분일 뿐이지만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신자를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전가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 합하여 이중전가(Double Transfer)의 개념은 이처럼 신자의 정체성을 결정짓기에 매우 중요하다.

 

3)    율법과 신자의 관계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의롭다 함을 받게 되면 이제 이 율법과 신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게 되는가? 이것을 살펴보자.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율법의 두 가지 목적은, 죄를 알게 함으로써 범죄를 방지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몽학선생이다. 그리고 율법의 힘/능력은 사망에 있다( 7:5; 고전 15:56). 그러나 이 모두는 이제 신자와는 상관이 없다. 신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며, 돌에 새겨진 의문이 아니라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또한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는 율법과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율법폐지론을 끌어내는 어리석음은 성도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며 율법으로 심판받게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 ( 2:19) 그리고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5:18).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에게 보낸 서신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과 함께 살펴보면 보다 더 명확하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7:2). 그런즉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 함은 이제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율법에 대해서만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율법 하나를 지키는 자는 전체를 지켜야 하는 자와 같다고 이미 그전에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 5:3). 그래서 신자에게는 이제 십계명도 상관이 없고 할례도 상관이 없고 날을 지키는 것이나 음식에 관한 규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신자가 율법과는 이제 더 이상 상관이 없다는 말이 곧 율법을 어기고 범죄해도 괜찮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는 신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존재여야 함을 먼저 밝히고( 5:16, 18)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신자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이제 율법보다 훨씬 더 고차원의 법, 생명의 법,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다.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천국 시민답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인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에게 율법은 은혜로 말미암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다. 율법보다 훨씬 고차원의 법을 지키고 이루며 살고 있으니 율법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이라 불리운다. 이그리스도의 법은 율법이 강화되었거나 진일보한 수준이 아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만큼 차원이 다른 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지키며 사는 자는 율법을 저절로 다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이미 다 지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라는 율법을 이미 다 지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에게 율법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여전히 유익을 준다. 율법도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기에( 7:12) 적절하게 사용하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면 유익을 준다. 율법은 절대적 진리이기에 율법을 통해서 신자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바르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아 볼 수 있고, 신자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라인을 그어주기 때문에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게 한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신자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서 연약함에 싸여 있는 동안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육신적 신자도 있기 때문이다(고전 3:3). 그들에게는 여전히 가이드 라인이 필요하며 율법은 그 역할을 한다. 이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밤낮으로 열심히 묵상해야 한다.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들에는 자신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전하면서도 나중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십계명의 제 5 계명을 지키라고( 6:2) 권면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의를 이루고자 함이 아니라 신자로서 천국 시민으로서 부모를 공경함이 마땅함을 가르치며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자라 할지라도 연약한 육신을 입고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며 사는 삶을 살다가도 실족하여 넘어져서 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으며 천국 시민으로 남아 있는다. 다만 죄는 언제나 보응을 받아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신자를 징계하시고 멀리 하시며 죄에서 나오도록 하시며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도록 인도하신다. 그가 죄를 범했으므로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자가 되도록 하신다.

 

4.     성령을 좇아 행함

율법으로는 의를 결단코 이룰 수 없음을 논증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도는 이제 시선을 돌려 성령님으로 인도되는 삶에 대해서 설명한다 (갈 5장, 6장). 육신으로 율법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오히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면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사도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삶의 결과들을 제시하며 어떠한 삶이 그런 삶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하지만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것은 사도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설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며 단지 그 결과만을 제시해 놓은 것이다. 각자의 삶을 열매로 분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에 23번이나 나오고 성령이란 단어는 12번 나오지만 은혜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에 8번 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은혜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의 맨 앞(1:3,6)과 맨 뒤(6:18)에 나온다. 시작과 마침이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렇게 은혜로 싸여져 있는 서신이다. 이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이 늘 그렇듯이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반석 위에서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서신을 기록한 것이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다 은혜임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배경 설명이 없어도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말씀(고전 15:10)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이 그랬고 주님을 닮은 바울도 비록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서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지만 - 자기 삶 전체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 것임을 삶으로 보여 주었고 그 삶이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임을 갈라디아 성도들은 쉽게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푸욱 잠겨보자. 우리의 몸에 흐르는 피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날마다 시마다 묵상하면서 내 안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지배를 받게 하자. 내 의지대로 내 생각으로 내 방식으로 내 끈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서 하자.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다 이루시리라. 나는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이웃조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으나 성령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다 이루시리라.

 

5.     결론

루터가 그토록 떨쳐버리고자 했던 죄책감. 아무리 해도 어떤 방법으로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 죄책감을 그는 성경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의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깨달은 그는 비로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칭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었던 것처럼 칭의 개념은 신자의 삶에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들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배하게 하며 열매맺게 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