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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영언노래(방언송)는 왜 중요한가?



(사도)행전 2장은 성령님이 땅에 갓 내려오신 뒤 태어난 첫 교회의 원초적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영언을 말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신 교회의 표준적이고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이지요. 누가-특히 신학자들이-뭐라고 '나름 주장'을 해 쌓아도 성령님은 변함없이 늘 한결같으시며, 따라서 초기교회와 마찬가지로 현대교회도 얼마든지 영언을 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교회시대 초기 당대 교회들의 중요한 모습 또 한 가지는 영적인 노래(기존 한글역: '신령한 노래')로 화답한 것입니다. 사도 파울은 분명히, 모든 초기 교회의 성도들이 영적인 노래로 화답하기를 바라서 적극 장려합니다. 그는 에페소교회와 콜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노래를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시들과 찬미들, 그리고 영적인 노래들로 화답하고,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읊조리시오." (에페소서 5'19, 이하 성구는 사역)


   "크리스토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풍성히 머물도록 하되,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면서, 그리고 시들과 찬미들과 영적인 노래들로써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그렇게) 하시오." (콜로새서 3'16)



위 두 성구는 파울이 비단 에페소/콜로세 두 교회에만 주는 교훈이 결코 아닙니다! 오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지금 파울은 초기교회 성도들에게 시/찬미 외에도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주고 받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들에게 힘과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 에페소 말씀 앞 부분에서, 파울은 성도가 술 취하는 대신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영적인 노래는 성령충만과 밀접한 연계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파울이 말하는 '영적인 노래들'이란, 사람이 작곡했거나 전승을 따라 부르는 인위적인 노래가 아니라, 원문(주격: 오다이 프뉴마티카이) 그대로 영적인(spiritual), 초자연적(supernatural)인 노래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이라면 이상하게들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는데..하나님/성령님의 초자연과 마귀의 초자연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우리가 영/성령과 진리로 경배할 대상이지요. 그래서 그 분은 주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초자연적이지, 결코 자연 경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노래라면 말 그대로 혼이 아닌 영의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이 어떤 유형의 노래일까요? 우리가 평소 부르는 찬송가나 성가, 기타 노래와 어떻게 다르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노래는 영언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르는 '영언송'입니다. 일반 노래에 비견한다면, '가사' 격인 영언을 넣어서 부를 수도 있고, 그냥 모음으로 가락만 계속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행전 2장에서 보면, 첫 교회 성도들이 영언노래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첫 이방인교회 격인 케사리아(가이사랴)의 코르넬리우스(고넬료) 가정교회가 사도 페트로를 통하여 성령님을 받아모셨을 때, 그들이 영언과 함께 찬양을 한 기록을 봐서(행전 10'46), 단순히 영언만이었다기보다 영언송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영언송은 파울이 적극 장려할 뿐더러 파울 자신이 즐기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내가 마음으로도 노래하고 영으로도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전자는 찬미/성가이고 후자는 영언송입니다. 

우리는 파울이 필리포 옥중에서 실라(실루아노/실바누스)와 함께 갇힌 몸으로 한 밤에 찬양했다는 기록을 봅니다. 호된 매를 맞아 아픈 몸으로도 캄캄한 옥중에서 노래를 했다는 것은 파울이 얼마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즐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파울이 마음으로도 노래하고 영으로도 노래했다는 것을 보면, 코린토 교우 전원보다 더 영언을 한 그가 영언송을 즐겼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파울은 모였을 때, 더욱 화답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다수의 현대교회가 교회에서의 영언을 은근히 삼가거나 외면하는 것과는 판이한 차이를 봅니다. 


대다수 현대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영언을 추하고 잘못된 '신비주의' 정도로 봅니다만 사도 파울의 태도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파울은 교회에서 모임에서 적극 영언송으로 화답하라고 장려했기 때문이죠. 


성경보다 신학의 물을 더 먹고 거기 취하여 비척거리는 현대교회의 비뚤어진 모습과 달리, 사도 파울은.. 


   그 누구보다 영언을 더 열심히 하면서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고.. 

   마음으로도 노래하고 영으로도 노래했으며.. 

   모일 때에 영언이 있다고 명시했으며..

   모일 때에 아울러 영언송으로 서로 화답하라고 했습니다. 


현대교회가 제 아무리 파울을 존중하고, 파울을 말하고, '파울 신학'이란 것을 논해도 파울이 교훈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파울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영언을 말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어도, 현대교회 대다수는 소위 종식론/중단론 신학의 이론적 신화에 빠져 영언을 열심히 반대하고, 교회 안의 영언자들을 질시/천대하고 심지어 박해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긴커녕 불평을 안하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입니다. 파울은 마음으로도 노래하고 영으로도 노래했건만, 현대교회의 절대 다수는 마음으로만 노래할 뿐 영으로는 거의 노래하지를 않으며, 영으로 노래를 할 수 있는지, 가능한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파울은 성도의 모임에서 영언송으로 적극 서로 화답하라고 했지만,  현대교회는 화답은커녕 대부분 영언송이 뭔지조차 이해를 하지 못하며, 혹 일부 성도들이 하더라도, 공석상에서는 절대로 반대하는 상황입니다. 그 까닭은 "이상하게" 보인다는 거부감 탓입니다. 


그럼, 영언송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구원을 받아 거듭난 사람으로서 영언을 시작한 사람이면 누구나 영언송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구원 받은 바로 그 믿음(!)으로 누구나 영언을 시작할 수 있고, 또 영언송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초기 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모여 화답할 수 있습니다. 영언송으로 화답(response) 곧 서로 주고 받는 것처럼 아름답고도 거룩하고 "황홀한" 광경도 드뭅니다. 그 맛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물론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냥 '미치광이'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영언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께서 모든 성도에게 약속한 것이고(맑 16:17a),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부터 점차로 첫 교회 성도 모두가 했던 것입니다. 파울은 그 누구보다 영언송을 했던 사람이고요.

 

첫 교회가 그렇다면, 훗날의 교회들도 모두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여기엔 숨겨야 할 비법 같은 것이 따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