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영언(방언)론

나는 왜 방언이 '안' 될까?


   "나는 왜 영언(방언)이 안될까?"


수많은 신자들이 이런 질문을 자타에게 하곤 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다닌 지,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지 오래됐는데도 영언(방언)을 단 한 마디도 시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여러 모로 본인과 교회에 손해입니다. 그 까닭은 성경이 다양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도 신학자들과 소위 '종식론자'들이 전혀 성경적인 뒷받침이 안 되는 무지하고 기이한 주장을 함으로써 남의 영언 기회까지 막고 앗아 버리거나, 이미 시작했다가도 도로 멈추고 하지 않게 (본인의 오해와는 달리 영구적 중단이 아님. 본인이 언제라도 금방 다시 시작할 수 있음) 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나는 왜 영언이 안될까?"라는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영언은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성경은 신자 누구나 영언을 할 수 있다고 보장해 줍니다. 마르코스(마가)복음서 16'17a에서 주님이 그렇게 약속/예언하고 계십니다. 믿는 사람들에겐 으레 따르는 표징의 하나가 바로 이 새 언어, 곧 영언이라는 것입니다. 이 언어는 지상의 어떤 언어나 모국어/외국어 따위가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새 언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이천년전인 오순절 이전의 구약시대에는 없었던 하늘에서 내려진 언어였습니다. [ 사실 '방언(方言=지방언어, 사투리)'이라는 용어 자체도 초기 한글 성경 번역가들의 오역입니다. 영언 곧 영적인 언어를 뜻하는 '글로싸', '글로쏠랄리아'에는 본래 그런 땅의 지방적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과연 주님의 예언 그대로 첫 신약교회인 예루샬렘 교회의 성도 120명이 모두 다 한결같이 영언을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 파울은 분명히 "나는 여러분이 모두 영언 말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코린토A서=고전 14'5)라고 말함으로써 신자 누구나 영언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울러 파울은 "나는 여러분 모.두.들.보.다. 더 영언을 말합니다"(코A 14'18)라고 밝혔습니다. 즉 코린토 교우들 대다수뿐 아니라 당대 모든 교회의 대다수 교우들이 영언을 말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직 미처 안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의 모든 교인들도 다 영언을 말했습니다(행전 10'44-46 참고: 11'15). 에페소 교우들도 모두들 영언을 했습니다(19'6,7).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언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앞서 밝힌 성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십시오. [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영언엔 개인기도를 위한 영언(소위 '대신/對神' 영언 또는 상향적 영언 코A 14'2,14,15)과 대중/교회를 위한 영언('대인/對人' 영언, 하향적 영언 14'26-28)-이 두 가지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은사로서의 영언(코린토A서=고전 12'10,30)은 물론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행전 2장에 나타난 (개인별 은사가 아닌) 모두를 위한 영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유도 신자 모두를 위한 신유와 개인별 신유은사(12'9b)가 따로 있고, 믿음도 모두를 위한 믿음과 특별한 믿음(12'9a)이 따로 있음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둘째로, 영언은 성령을 받은 첫 증거(initial sign)입니다. 성령침례(성령에 깊이 잠김)와 성령충만(=성령으로 채워짐!)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에(요한복음서 15'26; 16'13,14) 반드시 눈에 띄게, 귀에 들리게 부어지십니다. 이것은 다음으로 명확히 증거됩니다. 


120 성도들이 한꺼번에 영언을 하자, 그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세계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성령님은 증언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행 2'4-6). 

사도인 페트로님도 분명히 이것을 성령님과 함께 증거했습니다(참고: 요복 15'27). 그는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하여 영언이 성령을 받아모심으로써 받게 되는 선물임을 밝혔습니다(2'33b 참고: 2'17,18. 말세에 누구나 꿈/환상/예언하게 되는 일이 곧 영언을 통해 가능해짐). 이 성령은 모든 육체(곧 사람)에 부어진다고 요엘은 명시했습니다(2'17). 예외 없이 (믿는) 모두에게 말입니다.  


페트로는 훗날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영언을 하는 광경을 보자 놀라면서(10'44-46)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까"라고 했고, 추후에도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시길 우리(120명)에게 하신 대로 똑 같이 하시더군요"(11'15)라고 회고하여 영언이 곧 성령 내리심의 표징(!)임을 증거했습니다. 


페트로님과 요한님이 (필맆의 전도와 이적 후에) 방문했던 쇼므론(사마리아)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 "보고 듣는" 표징인 성령 받아모심의 증거를 받았습니다(행 8'14-17). 바로 그래서 마술사 쉬몬도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남이 영언을 받도록 안수하는) 그런 권능을 받게 해 달라며 돈으로 사려고 했다가 페트로님에게 혼쭐이 났던 것입니다(8'17-20). 



그럼 왜 독자인 '나'는 영언이 되지를 않나요??


첫째로, 그것은 영언은 '되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이 직접 믿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교회 사람들 모두가 성령이 주신 언변을 따라 (스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행 2'4b).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예언(맑 16'17a) 그대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입을 열고 혀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영언이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관건은 믿음으로 혀를 성령께 내맡겨 스스로 혀를 움직이기 시작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언은, 우리가 신자가 되어 이천년전 이미 오신 성령님께 언변을 받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입을 열어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행전 1'14에 근거하여 오래 기도로 '준비'해야 하는 줄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영언을 하려고 기도에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몰래 산에 올라가 애꿎은 소나무와 씨름하다 뿌리째 뽑기도 했답니다. 물론 성령이 가득 채워지기 앞서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도 해야겠지만, 오래 기다리는 것은 맨 처음 성령님이 땅에 내리시기 전까지 첫 교회 교인들이 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성령께서 지상에 계신 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은 거듭난 신자라면 누구나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입을 열어 영언을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어떤 이들은 꼭 안수를 받아야 영언이 '되는' 줄 알고 있으나, 120명은 애당초 안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다들 영언을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안수를 받아야 영언을 할 수 있나니"라고 하시지 않았지요. 따라서 거듭난 누구나 믿음으로 영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가는 세대의 모든 참 신자들의 온 교회가 이미 이천년전 오순절에 성령의 침례를 받아(코A 12'13) 영언을 시작할 수 있는 언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서 참 교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은 누구나 영언을 시작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소위 '신사도'들이라는 이상한 비성경적 무리가 있기 때문에, 소위 '임파테이션'이라는 그들의 '안수' 행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금가루/금니, 집단쓰러짐, 괴상한 온몸진동, 짐승울음, 신경질적인 웃음, 허리꺾기 같은 괴이한 현상들은 곧 그들의 권능이 성령의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수는 위험합니다. 그들과 그들의 모임에 가까이 하지 마세요.


셋째로, 영언이 안 '되는' 이유는 온갖 선입견/편견 탓에 영언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혀를 안 떼고 입을 열지 않아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영언을 지상언어나 외국어 정도로 잘못 알고 그런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린 영언은 세상의 잡된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영적인(신령한) 새 언어이며, 행전 2장 5-13절의 기록도 (신학자들/종식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렇게 자기나라 말로 들리게 됐을 뿐입니다(6,7절과 8,11~13을 대조 비교하기 바람).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기까지 고쳐 주시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넷째로, 두려움 탓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언을 기대하면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건 신자가 영언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마귀의 간특한 수작이고 방해작전입니다. 어떤 이들은 "혹 마귀방언을 받으면 어떡하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런 유의 두려움과 고백이 바로 마귀영언을 받게 되는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언을 하기 원하는 거룩한 거듭난 성도의 순수한 바람과 달리 마귀영언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물리치셔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권능과 사랑과 건실한 마음입니다(티모테B=딤후 1'7). 


사도 파울은 지금은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면서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시와 찬양, 영적인(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라..고 강조합니다(에페소서 5'16-19). 


지금은 때가 악하고 세월이 아깝습니다. 우리들은 내일을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영언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몫인 은사들을(코린토A 12'7-10) 영언과 기도로 발견하여 누리는 동시에 교회를 유익되게 합시다. 


지금이라도 독자인 님은 예수님을 구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셔들인 거듭난 신자라면, 입을 열어 영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영언을 기대한다면, 당연히 영언을 시작하는 그 순간까지 자국어로 기도해선 안되겠지요. 혀는 믿음으로 성령님께 자연스럽게 내맡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