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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모든 것 내려놓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요즘 교회에서 아주 자주 불리는 노래의 하나이다. 가사와 악보는 여기서 볼 수 있다. -> 심지어 영문 가사도 있다. ->  동영상이 흔한 것은 물론이고. '마커스' 등의 노래를 유튜브에서 해당 검색어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노랫말이 입에 잘 붙고 반복악구, 음군(音群)의 대조부분들이 효과적인 가락이 감칠 맛이 있어선지, 가사의 속뜻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이 거의 무차별로 불린다. 노랫가락이 좋아서 가사도 덩달아 '도맷금'으로 붙어가는 것은 유혹과 위험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세상 노래와는 달리, 노래하는 이의 감정이 촉발되고 자극된다고 해서 다 건전한 교회 노래라고는 할 수 없다. 



요즘 (모든 것) '내려놓기', (영점/0 상태로) '비우기' 따위의 말이 마치 하나의 코드워드인 양 교계에서 대유행하고 있는데, 자못 불편한 마음이다. 별로 성경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엔 그런 유의 '내려놓기'의 낱말이나 개념 등이 전혀 없다. 그런 성구가 있는가? (관상영성을 '뒷받침'하려고 그런 식으로 성구를 옮겨 놓는다면 저주를 면치 못한다!)

오히려 불교나 카톨맄 관상영성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관상영성에서 쓰이는 것이 이상할 게 없는 것이 그것은 순수 기독교 영성이 아닌 에큐메니칼 영성이며, 그 증거로 토머스 멀튼, 토머스 키팅, 버질 페닝턴, 윌리엄 메닝어, 리처드 로어, 리처드 포스터 등 20세기의 대다수 주요 관상가들이 도교, 티벹 불교 등과 '기도 관행'을 놓고 교류하는 등 종교혼합적/초종파적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유행해온 이 노래의 '모든 것 내려 놓고'라는 가사도, 지은이의 의도야 어떻든 마치 관상영성을 대변하는 노래 같아서 들을 때마다 솔직히 기분이 안 좋다. 사실 작가가 관상영성가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관상 영성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맡겨야 할 것들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죄짐과 삶 속의 온갖 근심과 스트레스 등이다. 그런 것은 주님의 어깨에 이전시켜야 좋다. 왜냐고? 주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맡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시 55'22, 마태복음서 11'28) 사도들도 그렇게 권하고 있으니까(히브리서 4'16, 페트로A서=벧전 5'7). 찬송가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539장 옛 483)에서의 내려놓기도 그런 의미에서다. 


작가는 우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라고 노래한다. 주체가 다른 객체를 '주인 삼는다'는 개념이 언뜻 좀 이상해 보여도, 이내 이해가 간다. 내가 주인 삼는 객체가 있긴 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 그러니 주인 삼은 모든 것에는 돈도 있고 마귀도 있다. 


다음 순간 생각해 보면,  내려놓는다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내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면, 과연 나의 실체인 나의 영 곧 속사람이 제3의 객체인 무엇을 어디까지 내려놓는다는 것인가? 가령 과거 거듭나기 전 주님 대신 주인 행세하던 나의 자아가 나의 옛 주인이었기에 그럴 경우 나의 전존재라도 '내려놓는다'는 것인가? 누가 내 존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인가? 내 영이 나를?

또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올려놓아도 되는 것인지, 아예 내려놓고 거들떠 보지도 않기인지..


다시 생각해 보면, 작가의 뜻은 결국 내가 주님 아닌 다른 것을 주인으로 삼았던 행위를 뉘우치고 그만 둔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것은 좀 애매한 말이다. 내가 한 말은 나 스스로가 알아야 좋다. 적어도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말했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도 진리이다. 성경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알 동 말 동한 말을 하지 않는다.


자, 내가 주인 삼았던 돈을 내려놓는다면, 돈 자체를 삶 속에서 아예 내려놓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랬다간 교회 재정이 텅텅 비지 않겠는가? 교인들마다 모든 돈을 삶에서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단지 돈을 맘몬으로 섬기던 행위를 내버린다, 또는 그만 둔다는 뜻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래서 내려놓는다는 말이 막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 무거운 짐과 죄짐, 근심, 걱정, 두려움 따위는 주님 앞에 내어놓고 맡겨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돈은 다른 문제이다. 성도라고 해서 우리가 돈을 삶 속에서 포기하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돈이 없으면 하루라도 못 산다. 하나님은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하까이=학개 2'8)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사회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돈을 어떻게 내려놓는다는 것인가? 


따라서 지은이의 문구는 내가 주님 대신 돈을 주인 삼았던 옛 행실을 내버린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주님은 그 어떤 것도 그분보다 더 사랑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런데 가사는 마치 주인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일시(?) 포기한다는 말처럼 착각하게 하기가 쉽다. 사실 관상영성이 그런 착각을 가져온다. 


우리가 옛 주인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상당히 종류가 많을 것이다. 한 번 열거해 보자.


마귀, 세상, 나(자아), 가족, 남편/아내, 부모, 자식, 교회일, 친구(우정), 돈, 정욕, 성/섹스, 권력/지위, 마약/도박(로토 포함)/알코올/포르노 등등..심지어 영적인 은사나 권능도 주님 대신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참고: 마태복음 7'22,23)! 


이러다 보면 리스트는 계속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지도 않겠는가? 그런데 이 모두를 죄다 일시일순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엄청난 결단이요, 과정이요 작업이다! 그 모두 또는 대다수를 주인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 실로 복잡하지 않겠는가? 한꺼번에 내려놓기가 가능하겠는가? 또 내려놓았다가 아까워서 도로 챙겨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려 놓기라는 개념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또 '모든 것 내려놓'기는 주님 앞에서 잠시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 잠시 망각하며 잊어버렸다가 이내 되찾거나 되새기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부분적 또는 일시적/임시적 또는 주기적/반복적인 내려놓기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러 나와서 중얼중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으면서 '회개'했다가, 나갈 때는 도로 챙겨 가서 요다음에 다시 같은 죄를 회개하고 털어놓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 '내려놓기'란 게 그런 것은 아닐지?

혹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잠깐씩 내려놓기 제스처나 착각을 했다가 도로 주워담기로 귀결되지는 않는가?


물론 내가 옛 주인으로 섬기던 마귀를 비롯하여 세상의 온갖 대상을 내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중요하다. 옛 자아의 삶을 바꾸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단순히 모든 것 내려놓았다가 되돌려놓기가 돼선 안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는다면, 가족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주님의 말씀도 우리가 자칫 오해할 수도 없지 않다. 그런데 주님의 말뜻을 바로 새겨들어야 한다. 대상보다는 옛 행실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보다 더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이다!

그래서 "내 주 되신 주앞에 나가"가 이해된다. 


그런데 이 노래를 계속 불러나아갈수록 '모든 것 내려놓기'가 더욱 애매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이 노랫말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는..돈이나 정욕도 있겠지만,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가족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가족을 어떻게 어디까지 내려놓는다는 것인지? 가장으로서 가족부양 책임을 저버린다는 뜻인지?

이쯤 되면 내려놓기가 무슨 뜻인지 아리송해진다. 

일단 내려놓았다가 도로챙기기가 되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주님보다 더 사랑하던 모든 것들 대신 주님을 가장 높이고 우위로 삼는다면 말이 된다. 주님의 말씀도 그 뜻이다. 


[ 이와 비슷한 딜레머를 노래 '나는 예수님이 더 좋아'에서 다룬 바 있다. 참고하길 바란다. -> http://truthnlove.tistory.com/760 ]


내려놓는다면 어디까지 내려놓는다는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독자 가운데는 "아따, 그 자식 말이 많네! 내려놓으라면 내려놓으면 되지 뭔 잔말이 많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장본인은 정작 뭘 얼마나 내려놓은 지는 모르겠지만.


내려놓기, 비우기를 강조하는 관상영성은 본래 초중세 수사들에게서 비롯됐다. 그들은 사실 가족이나 사회 따위를 훌훌 털어 버리고 광야 같은 수도원 사회의 고립된 삶에 진입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내려놓기를 맨날 고백하기가 보통사람보다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런저런 중세사 얘기를 읽어 보면 수사들도 여전히 물욕이나 육체의 정욕, 환영 따위를 버리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해골을 곁에 끼고 있거나 '바늘' 같은 기둥에 올라가 장시간 지내거나 채찍으로 자해하는 등 기이한 형태의 금욕으로 해소해보려고 몸부림들을 쳤다. 왜일까?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내려놓기의 개념이 애매하다는 말이다. 


'주님만 사랑해'라는 말도 알듯 말듯 하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뿐더러 평소 마땅히 이웃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뜻이라면 말이 된다. 주님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고 하셨지, "오직 나만 사랑해라. 그리고 끝~!"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무의식 중 주님을 이기주의자로 만들어선 안된다. 


따라서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는 결국 특별해석이 필요하다. "내가 주님보다 사랑했던 모든 대상들을 차순으로 내려놓고"가 맞는 뜻이다. '주님만 사랑해'도 어불성설이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모두 일차적으로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평소 목욕도 안할 것이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몸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부정하신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런데 그처럼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웃엔 나 말고 모든 사람들이 해당된다. 


그런데 그 모두에 대한 사랑을 한꺼번에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는 말을 잘 알고 있어야 좋다. 그것이 바람직하다.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위험한 이유가 그것이다. 

노랫말도 생각없이, 그때그때의 감정만 갖고 써선 안된다. 독자나 청중을 오해하게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내려놓기'의 개념이 위험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지적될 만한 부분은 지은이의 '사랑만능주의'적 성향이다. 오해 마라. 필자는 지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같은 말씀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가 주님이 거친 풍랑을 잠잠케 하신 모습을 되새겨 보면, 갈릴리 호의 풍랑을 잠잠케 하실 때, 말씀과 권능으로 하셨다. 물론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하시긴 하셨지만 말이다. 주님의 사랑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말씀, 주님의 권능이기도 하다. 실은 사랑보다는 후자 둘이 더 강한 개념이다. 


더 나아가 깊은 바닷속처럼 나를 잠잠케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세상이 모르고 줄 수 없는 내면의 평화이기도 하다(요한복음서 14'27). 즉 사랑 뿐 아니라 말씀/권능/평화가 모두 해당된다. 

이쯤 되면, 아마도 독자는 필자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내지 '심술쟁이'라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뭐, 할 말은 없다. 사실 필자는 따지길 곧 잘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아가.. 그 다음을 따져 보자.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 영혼의 반석이 주님의 사랑이기만 하며, 그 사랑 위에 우리가 서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우리 영혼의 닻(히브리 6'19), 우리의 반석은 곧 주님이시며(코린토A서=고전 10'4)..우리는 (사랑 보다는) 주로 진리 말씀과 약속 위에 선다고 한 성경의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히브리서 4'14). 우리네 찬송가 가사들 대부분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 모두를 사랑으로 대체해 놓고 있다. 모든 것을 사랑에 호소하는 양 보인다. 그의 시구를 보면 사랑이 모두인 양, "사랑이면 다 오케이"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자칫 성경의 양대 산맥인 진리와 사랑, 공의와 사랑 등의 균형을 일그러뜨릴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주님의 사랑이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할 수 없지 않지만, 오히려 주님의 평화가 더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더 걸맞다. 그런데 지은이는 평화를 사랑으로 대체해 놓고 있다. 

이것은 기존 개념을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풀고 싶어(?) 하거나, 부르는 이와 듣는 이의 감정을 오직 '사랑'이라는 한 켠 구석으로만 몰고 간다(?)는 인상이 든다. 

지은이는 혹 사랑이 아닌 평화나 권능, 말씀, 약속 등의 낱말을 과히 즐기거나 좋아하지를 않는가? 그런 말들에 대한 어떤 불편한 감정이라도 지니고 있는가? 

주님이 오직 사랑만이면 좋겠는가? 주님의 평화나 말씀, 권능, 약속 등은 지은이에게 별 매력이 없는 개념인가? 지은이는 주님의 진리 말씀보다는 사랑을 반석 삼아 그 위에 서는 것이 더 좋은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가 쓴 글, 내가 지은 글에 대해선 나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이 혹 가당하긴 하다 해도, 사실 성경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되뇌지만, 성경은 주로, 주님이라는 바위 위에, 그 분의 말씀 /약속 위에 굳게 서길 바라고 있다(마태복음서 7'24-29). 

물론 지은이의 표현이 아주 잘못됐다거나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표준적인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사랑만 강조하고 있지 않으며, 사랑만능주의는 더구나 아니다. 그와 비슷한 표현들은 독자나 노래하는 이들을 자칫 오도할 수 있다.  

이런 비표준적인 노랫말들이 자꾸 불림으로써 부르는 이들-특히 성경 지식이 깊지 않은 젊은이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주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대체한다는 개념이 자리잡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균형을 갖추어야 좋다. 

또 가사/노래 작가는 노랫말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노래를 잘 선택해야 좋다. 세상 음악은 무조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고 하나님의 감정에도 호소한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기가 높고, 대중성이 있다고 반드시 좋은 노래인 것도 아니다. 좋은 노래는 성경과 하나님의 표준에서 볼 줄 아는 시각이 교회와 성도 특히 음악사역자들, 교회 노래 선정자에게 있어야만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원칙이 교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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