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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이아손과 테살로니카 교회


               고대 테살로니카의 아고라(저자거리) 유적



글의 바탕본문: 행전 17'1-15, 테살로니카A, B서(살전/후) 


 

주후 1세기 당대 마케도니아의 최대 도시였던 테살로니카(현대의 살로니카)에 이아손(야손)이라는 성도가 있었습니다(행전 17'5. 비교: 17'1). 


[ 이아손(Ἰάσων)이라는 그리스 이름은 영어권에 매우 흔한 퍼스트네임, 제이슨(Jason)과 같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재선', '재성' 등 '재-' 자 돌림 이름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들도 선호하는 영명의 하나이죠. '치유자'라는 뜻의 이아손은 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온 이름입니다. ]


구교에는 기독교적 타당성을 위하여 만들어낸 다양한 설화가 많듯, 이아손의 경우도 마치 자기네 전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를 '성인'으로 떠받들면서, 그가 타르수스(다소) 출신이라는 둥 훗날 파울(바울)이 그를 타르수스 주교(감독)로 임명했다는 둥 온갖 전설이나 설화를 만들어 모시지만, 성경 밖의 이야기들은 별 근거나 신빙성이 없습니다. 단 그가 한 성도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대인인 그에 관하여 오직 당대 기록인 성경이 말하는 것만 믿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아손은, 파울(바울)과 실라(실루아노/실바누스), 티모테(디모데) 등 세 전도자들이 선교여행차 테살로니카를 방문하던 중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기 집을 피신처로 제공한 사람입니다(17'5~7). 성경은 그가 과연 끝까지 열성적인 신자였는 지를 따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 이상하게도 파울은 테살로니카 교회에 두 번 보낸 편지에서 이아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대신, 로마서에서는 동명의 동역자를 한 번 언급했는데(롬 16'23) 그나마 동일 인물인 지는 알 수가 없으나, 혹 파울이나 그의 친척과 서로 너무나도 가까운 사이여서 파울이 일부러 언급을 생략했을 수도 있었을 터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아손이 테살로니카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희생적 조력이 있었기에, 파울과 실라는 무사히 테살로니카의 위급한 지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17'10). 

 

선교사 파울 일행은 마케도니아의 두 번째 순방 도시인 이곳에서도, 첫 도시였던 필리포에서처럼 유대인들과 사이에 한 차례 '티격태격'을 겪습니다. 필리포에서 채찍형을 받은 것은 여태도 얼얼하게 톧증이 남았을 법한 모진 아픔이었을 터입니다(행 16'22,23. 참고: 테살로니카A서=살전 2'2). 비록 이적으로 간수장과 온 가정이 신자로 변화되어 결국 필리포교회의 초석이 되는 기쁨을 누리긴 했지만 말입니다(16'26~34).  



파울은 우선 평소 해 오던 관례대로 테살로니카 도심지의 유대교 회당을 찾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극우파 유대인 세력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파울과 실라, 티모테는 회당 주변 동네에 3주를 머물며, 연속 강의를 통하여 크리스토님이 수난 끝에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아나셔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예수님이 바로 크리스토(메시아)님이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거기 참석했던 경건한 헬라인 남녀들이 파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대로 믿고 그와 실라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파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신뢰하게 됐다는 뜻이죠(17'1~4).  


여기서 '경건한' 헬라인들이란 곧 헬라어(그리스어)권 내지 헬레니즘 문명권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른 바 '하나님 경외자'(God-fearers)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아손도 바로 이 경건한 헬라인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이아손이 본디 '유대인'으로서 '70인 제자들'의 한 명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구교측에 있어 왔으나, 성경에는 근거가 없음). 그는 파울/실라/티모테 등을 자기 집으로 모셔와서 편히 쉬게 하고 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독 유대인들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파울 일행을 따르는 광경을 보자 질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거리에 떠도는 불량배 무리를 떼거리로 불러와 시내를 온통 법석거리며 이아손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파울 일행을 사람들 앞에 끌어내려고 집을 온통 뒤졌습니다. 하지만 이아손이 워낙 파울 일행을 사전에 미리 잘 피신시켰는지 아무도 세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파울 일행을 놓친 유대인들과 불량배들은 이아손과 몇몇 믿는 형제들을 대신 잡아 끌고 동네 대표자들에게 갔습니다(17'5~7 참조). 

관리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무고로 고자질을 합니다: 


   "온 천하를 어지럽히던 이 자들이 여기에도 왔는데 이아손이 그들을 반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명을 어겨 가며 말하기를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우리는 당대 유대인들이 정작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이방인들보다 더 '못난이'들로서, 기독교와 이방인들을 모두 질투하고 모함하는 악심을 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들은 권능 있게 복음을 전하는 파울 선교사 일행이 가는 곳마다 "도시락 보따리를 싸 갖고 다니다시피" 추적하면서 이방인들 앞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을 내세워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자',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 또는 "온 도시에 소동을 일으키는 문제 인사" 등으로 책잡고 낙인 찍어 어디를 가든지 불리하게 만들려고 악을 쓰며 모함을 하고, 심지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려고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이 때나 여전히, (메시아를 받아들인 '남은 무리'를 제외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돕기보다는 거의 언제나 적대하고 훼방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악행을 '하나님 공경'의 표출 행위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파울도 훗날 이때를 추억하면서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대언자(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울 일행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모든 이들의 적대자가 되어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말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을 금지하여 늘 자기네 분량의 죄를 채우니, 진노하심이 끝끝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테살로니카A서=살전 2'15,16).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본래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역시 구원 받을 대상이고, 따라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영혼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이 모함을 들은 주변 무리와 지역 행정관들은 적지아니 수런거렸지만, 결국 이아손과 일행이 호소를 듣고, 보석금을 받고는 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이아손과 형제들은 어서 빨리 풀려나 파울 일행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터입니다(17'8,9). 


그 밤에 이아손을 비롯한 형제들은 파울 일행을 무사히 다음 목적지인 베레아로 전송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보다 앞서 파울 일행으로부터 이미 필리포에서 일어났던 일을 듣고,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모함으로부터 무사히 놓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테살로니카의 악한 유대인들은 베레아에서까지 가서 파울 일행을 못 살게 굴고 소동을 벌였기에, 형제들은 실라와 티모테는 머물려 놓고 특별히 파울만 따로 뱃길로 잘 호위하여 우선 그만 아테네까지 잘 인도하게 됩니다(17'13~15). 


물론 베레아에서는 큰 결실을 얻게 됩니다(11,12).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베레아교회에 대하여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이상의 아무 이야기도 읽지 못하게 되는데, 아마도 결국 최대 도시인 인근의 테살로니카 교회에 다들 흡수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테살로니카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을 제외한) 테살로니카 사람들 역시 베레아 사람들 다음으로 신사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아무튼 결국엔 테살로니카 교회가 마케도니아/아카야의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는 대표적인 한 교회가 됩니다(테살A 1'7). 

테살로니카 교우들은 파울 일행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상을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사도 일행 대신 잡혀가 잠시나마 곤욕을 치른 이아손과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섬김과 희생이 테살로니카 교회의 설립과 구축에 중요한 토대가 된 셈이죠.


테살로니카 A/B서는 파울이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에 머물 당시 실라 및 티모테와 합류한 뒤 다시 티모테만 별도로 테살로니카로 특별히 파견하면서 딸려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파울이 얼마나 테살로니카 교우들의 사랑을 고마워 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이내 재확인하기를 바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테살A서 3'5). 테살로니카 편지는 미래의 '휴거'를 미리 언급하는 등 매우 중요한 교리와 계시들을 소개한 문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테살로니카 교우들보다 더 신사적인 베레아 교우들의 이야기를 행전 밖에서는 그 이상 더 읽어 볼 수 없을까요? 다른 것보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은 희생을 통하여 살아있는 순교적 신앙으로 꿋꿋이 버티었기 때문에 베레아 교우들조차 그들에게 합류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묵상적인 베레아 사람들의 신앙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테살로니카 교우들의 강한 섬김의 정신이 서로 잘 아우러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테살로니카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카야에 번져 갔고, 이들의 좋은 소문이 주변 도시에 두루 퍼진 것입니다(테살 1'7,8). 그랬기에 파울이 한 두 번 테살로니카를 다시 방문하기를 열망했지만 마귀의 방해로 여의치 못했습니다(2'18). 이 두 통의 편지 도처에서 파울이 그곳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심경을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이 두 편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파울 일행의 테살로니카 사역활동의 내역은, 그들이 그곳에 불과 3주 남짓 머물 동안 계속 수시로 복음을 전하되, 느긋/느슨하게 방만히 행동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 일하면서 자급자족 했다는 것(2'9. 테살B서 3'7,8), 거룩하고 옳고 흠 없는 행동의 모본을 보였다는 것(10; B 3'9), '불법자'의 출현, 휴거 등에 관한 종말론과 기타 온갖 중요한 교리와 신앙 내용을 가르쳤다는 것 등입니다. 


파울 일행이 거의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듯, 테살로니카 교우들 역시 우상을 섬기던 이교를 버리고 신자가 된 뒤 동족 이방인들로부터 많은 괄시와 환난을 당했습니다(A서 1'6,9; 2'14; 3'4, B서 1'4). 파울이 아테네에서 티모테를 테살로니카에 도로 보낸 것도 그들이 시험과 환난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굳게 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A 3'3~7). 티모테는 과연 좋은 보고를 했고, 서로들 다시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테살로니카 교회는 신앙행실에 있어 여러 모로 모범이 되었고 특히 자체 교우들은 물론 타 교회 교우들까지 뜨겁게 사랑했습니다(A 4'9,10).  


파울은 테살로니카 교우들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언제라도 그들을 다시 만나 아직도 부족한 신앙적 과제를 보충하고 싶어 열망했습니다(A 3'8~11).   


그러나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로, 테살로니카 교우들 가운데도 약한 사람, 힘 없는 사람, 게으른 사람들이 있었고(A 3'14, B 3'6 이하), 특히나 파울 일행이 가르친 신앙 전례(傳例)를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파울의 경고 처분을 받습니다. 파울은 (후자인) 그런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특히 유난히 게을러 도무지 일하기 싫어하고 먹기만 하면서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은 교회(모임 장소)에서 먹지 말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훈계합니다. 파울이 테살로니카 체류 당시 자급자족의 모범을 보인 것은 그들 역시 그렇게 행하기를 바라서였습니다(A 4'11,12). 


그리고 파울의 편지의 교훈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지목하여 사귀지도 말고, 부끄럽게 하되 원수 같이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합니다(B 3'6~12). 파울이 특히 그들에게 거듭 강조한 것은 파울 일행이 가르친 성경 말씀과 신앙 교훈을 배신하지 말고 꼭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B 2'15; 3'4).


테살로니카에도 '주님의 날' 등 종말론 이슈를 갖고 쉽게 동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B 2'1~3a). 이 문제에 대하여 파울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파울이 받은 바 계시대로의 종말론을 재차 기술하고 있지요(B 2'3~12). 


파울은 첫 번째 편지에서도 종말 계시와 그에 대한 신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상세히 말한 바 있습니다(A 4'13~5'11).  


그밖에도 파울은 성윤리 등 타 교우들에게도 늘 하곤 했던 것과 같은 교훈들을 주었습니다(A서 4'3~8).

또한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기도 견딜 수 있게 힘을 북돋는 온갖 격려를 던져 줍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죠(A 5'12 이하).


   ..늘 선을 따르시오.

   늘 기뻐하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시오.

   범사에 감사하세요..

   

그러면서 파울은 말합니다:

"평화의 하나님은 친히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며, 또 여러분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크리스토님이 강림하실 때, 흠 없이 보전되기를~!" (5'23)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파울 일행은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늘 기쁘시게 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A서 4'1 이하). 그대로만 따라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그렇게 행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고 했나요?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 또는 자랑할 금관이 무엇입니까? 그 분이 오실 때 우리 주님 앞의 여러분이 아닙니까. 오,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과 기쁨입니다!" (2'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