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비평/음악

문제 작가들의 문제 찬송가들(2)


토머스 안 


문제 작가들의 문제 찬송가들(2)
-메이슨들의 작품들(A)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들, 더 나아가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들 중에는 우리가 알았든(?) 몰랐든(?), 싫든 좋든, 원하든 원치 않든, 프리메이슨들의 작품이 상당수 들어 있다. [ 비밀집단인 프리메이슨에 관해서는 다양한 비평 정보를 참조하기 바람. 단, 메이슨들의 자체 주장은 주의가 필요함.]
찬송가가 아닌 수많은 명 '성가곡'들 가운데는 더구나 더 그렇다. 예를 들면 널리 애창되는 성가인 '주기도'의 작곡가 앨버트 맬로트도 프리메이슨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찬송가/성가 전체를 죄다 "마귀의 것"이라고 싸잡거나, 기독교 전체를 부정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획일주의는 흔히 정통교회를 모두 부정하고 자기네를 정통 진리인 양 부각시키려는 이단들의 수법의 하나이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이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메이슨 작사자/작곡자들은 메이슨 신전 모임을 위한 '찬송가'를 쓰거나 거기서 연주하기도 했다. 교회나 성당, 메이슨 신전을 오가며 그러기도 했다. 예컨대 '대 바흐'(JSB)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천 바흐(JCB), (존과 함께 감리교 창시자였던) 촬즈 웨즐리의 아들 새뮤얼 웨즐리 등은 메이슨 신전의 오르가니스트였다. 가치관이 크게 혼동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메이슨들의 이런 작품들이 과연 진리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아니면 그냥 우리들의 정서와 생각 속에서만 그럴 뿐인지, 세상이면 또 모를까, 교회 안에서 메이슨의 작품을 부르고 연주해도 주님이 그냥 참아 주시고 묵인하셔야 하는지 등등의 물음이다.  


한때 한국 교계에서는 나운영/김동진 등 상당수 기독교계 음악인들의 '찬불가' 작곡이 문제시 됐었는데..그 훨씬 이전부터 프리메이슨들의 작품이 우리네 찬송가에 엄존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운영은 뒤늦게나마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했다고 하나, 이 메이슨들은 철저히 '회개'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뭘 너무 몰랐거나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헐, 또 시작이군! 도대체 왜 그러나..? 그런 걸 우리가 알아서 뭐 하게? 몰랐던 것으로 치겠다..." - 이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을 이런 때 적용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진실을 잘 모르는 것이 늘 약이 될까? 뭐, 그런 경우도 없진 않겠다. 하나님의 뜻으로 치자면,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 가운데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난 날 이런 것들을 모르고도 교회는 잘 해 나왔지 않나?" 라는 견해도 있다. 하기야 양화진의 일부 묘비 비문에서도 드러나듯, 또 6.25 때 부산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병원처럼 한국을 돕고 교회를 도운(?) 메이슨들도 없지 않다. 또..거금을 모 교단 등 교계에도 선뜻선뜻 내 놓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창업주인, 염소 수염 달린 할랜드 샌더스 '대령'도 프리메이슨 명사였다. 수많은 미국 체인 기업 창업주들이 끼리끼리 돕는 메이슨이었다. 요즘은 더 많은 기업체들, 더 많은 비밀단체들이 있으니 더 할 나위가 없겠다.  

그러나 그런 선의로 설령 도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공기를 마시우게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악인들을 좋게 보거나 악 자체를 좋아하셔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회개할 기회를 얻게 하거나 궁극적으로 망하기까지 잠시 놓아 두실 뿐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진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이 그러다가 죽으면 그뿐이다.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더 나아가 그 악이 교회의 빈 틈을 비집고 안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악이 선으로 포장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가 아니라) 모르게 침투해 있는 악도 되도록 빨리 분별/검증돼야 옳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모르는 게 약" 전략은 마귀도 잘 써 먹는 '플래시보 효과'와도 대동소이하다는 것. 무력화 전법의 하나라는 것이다.  

아무튼..우리 찬송가에 상당수 포함된 비교적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들의 작품들을 앞으로 계속 시리즈로 다뤄보려고 한다. (물론 시리즈를 할 동안 다른 글을 쉬는 것은 아니며, 다른 시리즈 역시 계속 병행할 생각이다.) 
한 가지 일러 둘 일은, 이 작품들이 그들이 메이슨이기 전에 쓴 것일 수도 있고, 또 자신들은 모르는 가운데 전/후/당대인들의 편곡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찬송가에 실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원 작가가 메이슨인 줄 모르고, 또는 알고도 실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이슨은 메이슨이었다.  



문제 작가들의 문제 찬송가(2)

'이 날은 주의 정하신 참 기쁜 날'
(21세기 새찬송가 46장, 통일찬송가 58, 개편찬송가 57, 옛'새찬송가' 68, 합동찬송가 51장) 

한글 악보: > (옛 찬송가 악보로 가사가 약간 다르다)

곡조 이름: '알링턴'(Arlington)
작곡자 토머스 어거스틴 안(Thomas A. Arne, 1710-1778)

이 찬송가는 위에서 보듯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우리 교계 찬송가집에 실려있으면서 예배용 찬송가로 애창돼왔다. 아마도 비교적 성경적인 가사 때문일 것이다. 영국 찬송시의 대가이자 청교도 목회자였던 아이쟄 와츠의 시(1719년 작)에다 역시 영국의 작곡가로 애국 노래 '다스려라, 브리타니아'로 유명한 토머스 어거스틴 안(Arne)이 쓴, 운율(미터)이 적당히 맞는 곡을 갖다 붙인 것이다. 

이 곡조 '알링턴'은 안의 오페라 '아르타크세르세스'(한글 성경의 '아닥사스다', 영어: '알타젉시즈', 페르시아어: '아르탉샤사')의 한 서곡 가운데 미뉴에트를 찬송가 형태로 편곡한 것이며, 랠프 해리슨(1784년)의 '성스런 하모니'(Sacred Harmony)에 해리슨 자신의 편곡으로 처음 실렸다. 본래 찬송가도 아닌 메이슨 작곡가의 춤곡을 적당히 편곡한 이런 곡이 찬송가로 쓰이다니 한심하다. 아무리 가락이 맞고 운율이 맞는다기로서니 그런 곡을 신앙인의 신앙적인 가사에 붙인 것이 과연 격에 맞는 것인지, 우선 해리슨의 동기부터 의혹스럽다(참고로, 해리슨은 장로교 목회자의 아들이었으나 자신은 이단성이 있는 아리우스주의 계열의 목사였다). 적당히 막 갖다 붙이면 다 찬송가가 되는가? 더욱이 이 곡조 '알링턴'은 같은 시인의 또 다른 가사인 '나는 예수 따라가는'(새찬 349장)에도 붙여졌는가 하면 그밖에 운율이 같은 또 다른 찬송가에도 붙여 쓰이곤 한다. 왜 이래야만 하는가? 
이 가사에는 이 곡 말고도 다른 여러 곡조들이 적용됐는데, 그런 곡 중에서 고르면 안될까?

한편 '다스려라 브리타니아!'(1740년작 관련 비디오 http://youtu.be/kwB_NlLXNE4 )는 안의 애국적인 가면극 '앨프리드'에서 나오는 노래로, 요새도 가끔 공식 이벤트에서 영국의 애국가처럼 쓰이곤 한다. [참고로, 영국은 공식 국가가 없다. ]
앨프리드는 앨프리드 대왕에 관한 스토리로, 처음엔 가면극 음악인 총7개곡으로 조지 1세의 등극과 어거스타 공주의 생일을 기념하여 공연됐으나, 성공에 힘입어 노래를 추가하여 훗날 오라토리오(1745), 오페라(1753)로 발전시켰다. 

안은 또 영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국가' 격으로 흔히 취급되는 '하나님은 여왕을 구하시길'의 오리지널, '하나님이 국왕을 구하시길'의 한 버전을 쓰기도 했다(현재의 곡조는 새찬 70장과 같음). 

안은 오페라/판토마임/가면극 등을 위한 무대음악을 중심으로 약 90 편을 썼다. 극음악을 즐겨 썼다는 점, 메이슨이라는 점에서 거의 당대인인 아터 설리번과 통하는 점이 있다. 


18세기 영국의 주요 작곡가의 한 명인 안은 1710년 런던에서 실내 장식업자이자 시립 회사 관리였던 할아버지/아버지 밑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빚 때문에 채무자 교도소에서 죽었으나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어 코벤트가든에 큰 집을 사고 아들의 이튼 칼리지에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생애 후반엔 대부분의 부를 잃고 드러리 레인 극장에서 엑스트라 역을 맡으며 푼돈을 벌기도 했다.  
 
안은 10대일 때 이튼 칼리지로 보내져 변호사 수업을 닦으려다가 이내 자신의 재능을 살릴 길을 발견하고 음악에 안주한다. 그는 온 가족이 잠든 동안 스피넽을 자기 방에 몰래 들여와 손수건으로 소리를 죽여가며 연습하기도 했고, 유권자유시민으로 가장한 채 이탈리아 오페라 갤러리에 들어갔다가 작곡가/연주가 마이클 페스팅을 만나 바이올린 주법을 배우고 옥스퍼드에서 핸델의 오라토리오 '아탈리아'를 듣는 등 안내를 받기도 했다. 아들이 악기에 능한 것을 본 아버지는 비로소 이를 허락한다.  

어머니의 천주교 신앙을 따라 코벤트 가든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영아세례를 받은 뒤 평생 천주교 신자로 지냈던 안은 따라서 국교회수장인 영국 왕의 왕실과 성공회를 위한 작곡은 금지됐고, 기악곡과 관현악곡을 중심으로 썼다. 그러나 런던 극장을 위해, 당대 흔했던 (독일 출신인) 조지 프레드맄 핸델의 국제적인 이탈리아 극단과 반대로, 모국어인 영국어로 상연할 수 있는 오페라를 쓰기 시작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돈도 벌었다. 1734~1750년 드러리 레인 극장의 전속 작곡가로(아일랜드), 또 더블린에서 2개 시즌을 보낸 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저 유명한 코벤드 가든 전속으로 활약했다.  
안 박사는 판토마임, 가면극 등 다양한 장르의 코밐 오페라를 위한 90편/곡과 기악곡, '아르타크세르세스'를 비롯한 오페라, 오라토리오 '아벨', '유딭' 등을 썼으나 극음악은 대부분 소실됐다. 그는 또 런던의 공원을 위한 음악을 쓰기도 했다. 오늘날은 쉐잌스피어의 연극을 위한 노래만 일부 남았을 뿐이다. 
이탈리아 메타스타시오가 발전시킨 진가극(opera seria) 형태를 따 영어로 만든 '아르타크세르세스'는 하이든이 감상한 뒤 영어 오페라에 탄복한(1791년) 케이스이기도 했다. 

안은 프리메이슨이었다. 특히 그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코벤트 가든이 당대 메이슨리 활동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더구나 적극적으로 메이슨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당대의 교황이 메이슨리를 금지했기에 구교도인 그는 이중적으로 제약을 받은 셈이었다. 영국 런던의 대영그랜드라지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프리메이슨 라지에서 안을 메이슨으로 확인하고 있으니까, "근거 없는 막연한 추정일 것이다"라는 추정은 먹혀 들지 않는다. 

 
안은 (독일 출신 음악가로 훗날 찰즈 웨즐리의 친구가 된 프레드맄 램프의 아내) 이사벨라 램프와 친자매 간인 아내 시실리아 영과 이혼했다가 죽기 얼마 전 가까스로 화해하기도 했다. 한 때 성악가인 또 다른 여성과 사귀다 헤어진 바도 있다. 프레드맄 램프 역시 안과 손잡고 극음악 활동을 썼다. 
안은 조셒 애디슨(새찬 78장 작사자)의 오페라 극본 '로자먼드'(1707, 헨리 2세의 숨은 연인에 관한 스토리)에 곡(1733)을 붙이기도 했다. '아벨의 죽음'(1755) 등 몇 편의 오라토리오도 썼다. 

안은 누이 수재너 마리아와 동생 '리처드'에게 노래를 가르쳐 훗날 자신의 첫 오페라 '로자먼드'(1733년)에 둘 다 출연시켜, 콘트랄토(최저음 앨토)인 수재너는 해당 역인 '미쉬즈 시버'로 명성을 떨친다. 오페라 대본작가 조셒 애디슨(찬송가  장 작사자)의 실험적인 리브레토에 기초한 '로자먼드'(대본은 1707년작)는 오페라로선 실패작이었다. 
 
안은 죽은 뒤에도 세인트 폴 성당에 묻혔다. 


작사자 아이쟄 와츠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한 찬송가 작가이니만큼 언급을 뒤로 미룬다. 그는 경건한 비국교도(청교도) 목회자 겸 시인이었고, 메이슨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찬송가의 3, 4절은 교리적/시제적으로 문제가 있다. 번역시도 원시를 거의 그대로 따랐는데..3절을 직역해 본다.  


   호산나, 기름부어진 왕께
   다뷔드(다윗)의 거룩한 자손께
   도우소서, 오 주님, 님의 보좌에서 
   내려오시되 구원을 가져오소서

(새찬송가 한글 번역)
   만왕의 왕인 예수께 호산나 부르세
   이 날에 주가 오셔서 다 구원하시리

가사의 문제를 보는가? 주님의 구원이 아직도 미래형인가? "다 이루었다", 즉 종결형이 아닌가? 아직도 보좌에서 다시 구원을 갖고 오셔야 하는가? 뭔가 찜찜하다. 

4절을 직역해 보겠다. 

   송축 받으실 주님, 은혜의 메시지를 들고 
   사람들에게 오시는 분
   우리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시러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네

   한글번역:
   큰 권능 가진 구세주 살 길을 주려고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주 함께 계시네

역시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의 시제상으로 문제가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보편구원주의적인 요소가 넘친다. 한글역에서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주 함께 계시네'라고 했는데, 과연 온 세상 만민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는가? 아니면 믿는 자들 속에만 계시는가? 이것도 교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문화예술비평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래 마라나타 괜찮나?  (37) 2014.01.23
찬송가 연구: 우리 주 십자가(533장)  (5) 2013.10.04
모든 것 내려놓고?  (8) 2013.02.10
찬송가-영혼을 건지는 열심을!  (6) 2013.02.04
기억하소서 주여  (1) 201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