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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구원론

한 번 구원=영원 구원?

 

 

 

한 번 구원=영원 구원?
-파울의 배신자들

 

 

김삼

 

 

기독교 구원론 담론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학설이 있어 왔습니다.

장로교 일각의 구원론을 대변하는 이것은 성경의 일부에 근거한 학설로, 주로 고전적인 칼뱅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학설은 하나님이 일단 구원하신 사람은 (외부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끝까지 이끄신다는 성경적인 바탕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사람이 그 구원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흐리고 흩어 놓을 수 있음을 간과한 맹점이 있습니다.

 


이 설은 내외적으로, 논리적으로 대강 다음 몇 가지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1.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곧 미래의 천국행이 영구 고정된다. 100% 완전보장!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구원은 영구히 흔들리지 않는다. 예컨대, 이단에 빠져도, 또는 일시 예수님을 부인해도, 언젠가는 구원 받게 된다. 믿어 구원받으면, 몽땅 (칼뱅의?)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2. 처음 받은 구원이 동시에 최종적 구원이다.
   3. 구원의 개념은 예외 없이 하나 뿐이다.
   4. 처음 받은 구원은 단번에 완성되며 천국 가기까지 줄곧 지탱된다. 특별한 구원의 여정이나 과정이 따로 없다.
   5.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므로 일단 찍어 놓은 구원 도장은 지워질 수 없다. 즉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란 것으로 구원을 망칠 수 없다.

   인간이 제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광'을 해 봐야 하나님의 구원은 바위 같고 타이태닠호의 거대한 닻 같이 끄떡없이 탄탄하게 그를 붙들어 주며, 온갖 상상 못할 죄와 타락으로 만신창이가 돼도, 결국은 죽은 뒤 천국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칼뱅주의 5대 교의의 마지막 교의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해당.)


 

....과연 그럴까요?

성경을 통해 다양하게 이런 '구원관'의 잘못을 입증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한 가지 방면으로만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도 파울의 배신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파울은 교회사상 선구적이고 가장 모범적인 선교사역자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의 사역의 중요성이나 규모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여러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파울 곁에서 그를 돕고 섬기다가 중도 하차하고 변절하여 떠난 사람들을 열거해 봅니다. 이들의 이름은 모두 파울의 사적 서신인 티모테 A/B서(디모데전후서)에 나타납니다.

 

   휘메나이오스(라틴식: 휘메내우스. 한글성경: '후메내오')
   (참고: 티모테A서=딤전 1'18~20, 팀B=딤후 2'17)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데르/알렉산더)
   (팀A 1'18~20, 팀B 4'14)

 

   필레토스(필레투스/빌레도)
   (팀B 2'17)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
   (팀B 1'15)
   예: 퓌겔로스(퓌겔루스/부겔로)

        헤르모게네스(허모게네)

 

   파울의 첫 (자기)변론 당시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
   (팀B 4'16)

 

   데마스(데마)
   (팀B 4'10)

 

   크레스케스(그레스게)?
   (팀B 4'10)


 

위의 수많은 무리가 다들 파울 곁에서 돕다가 그를 저버리고 떠나버립니다. 얼마나 기막힌 사실인지요.

파울이 애당초 믿음의 아들 티모테에게만 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운운한 것은 우선 가장 가까운 사이여서 말하기에 부담이 적었고, 둘째로는 이런 사실이 다른 성도들에게 자칫 상처나 회의를 줄까 봐 우려한 때문이었을 터이며, 셋째로 티모티에게 교훈 삼아 하나의 경종으로 울렸을 것이며(팀B 4'15), 넷째로는 파울이 이런 사실들이 하 기가 차서 내심 억울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외로워서 티모테에게 그런 심경을 토로하고 싶었던 때문일 것입니다(참고: 4'9,16,17,21).  

 

문맥적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을 뿐더러 파울을 돕겠다고 적극 나섰고 한동안 또는 오랫동안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나 어떤 동기로든 파울 곁을 떠나가 버렸고, 이들 다수는 복음보다 세상이 더 좋아서 믿음을 저버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데마스가 그 일례입니다. 

파울이 "다 나를 버렸고.."라고 한 어휘들의 의미는 파울과 복음, 주님까지 배신했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심지어는 복음의 은혜도 모른 채, 뒷발을 들어 파울을 적극 대적하고 따라다니며 방해한, 그지없이 고약한 악인으로 철저히 변질되고 타락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드로스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고전적 칼뱅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다 구원 받은 셈입니다(헉~!). 왜냐하면 이들은 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마 이럴지 모릅니다: "오~, 배신도 괜찮아!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일단 한 번 믿기만 하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다 끝내 붙드시고 이끄시고 천국에 데려다 주실 거야. 우리가 염려 안 해도." 그러나 바른 말일까요?

 

위의 사람들은 결코 비신자(=불신자)나 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파울 일행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짧게 또는 길게 파울의 동역자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파울은 성격상 함부로 동역자를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었지요. (훗날의 복음서 기자인) 청년 마르코스(마가)조차도 파울이 바르나바스와 심하게 다투고 결국 갈라져 서로 행보를 달리하기까지. 파울이 결국은 마르코스를 재발견하고 발탁하여 불러 주고 사랑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파울은 또 위에 나열된 사람들이 훗날 자신을 배신할 줄 미리 몰랐댔음이 거의 분명합니다. 추후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을 보면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하거나 그들의 잘못을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티모테B 4'16B).

 

 

문제는 파울에게 이처럼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들의 '완전/영원구원'까지도 주장하는 어리석은 신학 학설이 있다는 사실이죠. 그런 학설은 파울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웬지 그런 '구원관'은..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이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 노릇을 하다 만들어낸(?) 구원관 같지 않은가요? 그런 의미에서 신본적이기보다 역설적으로 인본적입니다.

그런 '구원관'의 가장 위험성은 신자가 맘대로 타락하고 심지어 배신하고 주님을 부인해도 일단 구원만 받아 놓으면 괜찮다는 식의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과연 파울의 배신자들이 모두 구원 받았을까요? 그중 한 명이라도 구원받지 못했다면 칼뱅의 가설은 깨져버리는 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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