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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칼뱅-아르미니우스 주의

칼뱅주의는 과연 성경적인가?(1)

 



칼뱅주의는 과연 성경적인가?(1)

-계 2,3장에 따른 반론

 

 

성령의 은총을 입고 나서는..그 어떤 인간의 주장이나 학설도 성경과 나 사이에 끼이지 않게 성령께서 감화를 주셨고, 나 자신 복종해 왔습니다. 티엘티를 개설한 주된 목적의 하나도 그것입니다.

요즘 며칠 새벽 요한계시록 앞 부분을 묵상해 왔지만, 이들 소아시아 7 교회에 주시는 교훈과 경고만도 묵상할수록 (성경 자체의 예정과 구원이 아니라), 칼뱅주의적 예정론/구원론은 힘을 잃습니다. 많은 부분 칼뱅이나 그가 존중하는 '선배'학자의 개인의 철학적 사고와 상상의 소산입니다.

[ 참고로, 장 칼뱅은 대다수 성경 권별 주석을 썼지만 요한계시록과 몇몇은 쓰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야코보서와 계시록을 성령님에 의하여 영감된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이건 교회에만 적용되지 개인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식의 어리석고 황당망당한 주장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요한계시록 2'1~7
-에페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절. 이하 성구는 개정역)

 

자..처음 행위를 갖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경고를 우습게 보면 안 되겠죠! 처음 행위를 갖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도, 처음에 받은 구원이 계속 유지된다?..이건 아닙니다.

 

 

요계 2'8~11

-스뮈르나(서머나)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 및 조건부 약속

 

주님은 이 교회를 주로 칭찬하시되, 조건이 딸린 약속을 하십니다.

즉 장차 받을 모진 고난과 박해를 견디고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금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 내포됩니까?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요계 2'14,15
-페르가모(=버가모)교회에 대한 경고

 

(발람의 교훈과 니콜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즉 그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우리와 대결하여 싸우시면 그야 우린 끝장이죠!

그러나 회개하면..이런 일이 없다는 것이죠.

 

 

요계 2'20 이하
-튀아티라(두아디라)교회에 대한 경고

 

(주님의 종들을 가르쳐 괴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칭 여대언가 이자벨=이세벨을 관용함에 대하여)

   "또 내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중략)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녀 이자벨 같은 자칭 대언자도 회개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무섭다는 것이죠. 이 사특하고 음란한 여대언가 이자벨도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버림받기도 예정된 대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은 또 중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각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지로 하는 일들을 살펴 그 행동대로 보상/보응을 하신다는 겁니다. 행동에 따라서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죠!

 

 

요계 3'2~6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에 불과한) 사르디스=사데 교회에 대하여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내가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에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라"

 

회개하고 일깨지 않으면 주님이 도둑 같이 이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 명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닌다고 약속하십니다(4절).

무슨 뜻일까요?
믿고 구원받아 신자는 됐지만 옷을 더럽히는 자는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지 못하게 된다는 경고이죠! 경고는 왜 있나요?? 경고대로 삼가지 않으면 뭔가 불행이 닥친다는 거죠.

 

이어서 사르디스교회에 대한 주님의 다음 조건부 약속을 눈여겨 보십시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샘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절)

 

생각해 보세요-무엇이 내포된 말씀일지. 분명히 이김을 전제로 한 약속입니다. 즉 이기지 못하는 자, 패배하는 교인들은 흰 옷을 입지 못할 뿐더러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주님이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 지는 자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약속이 결코 아니죠! 너무나 당연한 이 귀결을 독자는 간과하지 말기를~. 

 

 

요계 3'7~13
-필라델피아(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칭찬과 조건부 약속

 

교회마다 주님은 다른 모습을 나타나시는데, 이 교회에 대해서는 거룩하고 진실하셔서 [ 다뷔드의 열쇠를 지니신 분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 ]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의 경고에 따르지 않으면) 구원이 열렸다가 닫힐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이어서 주님은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십니다.

왜 이러실까요? 그야 필라델피아 교인들이 다 충성되기 때문이었죠! 그 다음을 잘 보세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8b)

 

무슨 뜻인가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는 교인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럴 경우 주님은 다뷔드의 열쇠로 문을 닫아버리시겠다는 겁니다.

필라델피아 교인들은 환난/시험의 때를 면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요? 굳게 잡지 못하면 면류관을 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 다음을 봅시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바꿔 말하면 무슨 말씀인가요? 이기지 못하는 자, 곧 지는 교인, 패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지 못하고 그냥 문 바깥에 버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할렐루야!)이 기록되지 못하고 버려질 수 있다는 경고가 되죠.

 

 

라오디케아 교회에 대한 경고(요계 3'14-22)

 

이제 끝으로 라오디케아 교회에 대한 경고를 보죠.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요계 3'15)

 

뭐라고 하십니까? 주님의 입에서 도로 토하여 내쳐질 교회 교인들이 있다는 것이죠.
라오디케아 교회는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했고(오늘날 대형교회들의 귀감?) 부족한 것이 없다지만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대다수 현대교회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라오디케아 교회에게 주님은 불로 연단한 금(믿음을 상징)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라오디케아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교우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여기서 주님은 비신자가 아닌(!) 신자에게 몇 가지를 시사하고 계십니다. 

 

1.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주님 편에서 스스로 그 문을 (강제로) 열고 무단침입하시지 않습니다!
주님 쪽에서는 그것/거기까지 밖에 하시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문을 열면'은 결정권과 권한이 우리에게 달린 조건절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닌 우리 쪽에서, 그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닫힌 맘문을 스스로 열어야 합니다! 열기까지 주님은 마냥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이게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강조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주님은 우리 밖에 문을 두드리시면서 우리가 열기를 바라고 있는데, 칼뱅주의자들은 한사코 주님이 문을 뻐개고 들어오시기까지 기다리겠다는 심사이니, 이 어찌 한심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요?

 

2. 여기서 우리는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라는 조건부를 눈여겨 보게 됩니다.
 
누구든지(anybody, any one)이지 "내가 택한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만.."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란 조건부입니다. 아무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다음 행동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도 있고,
-그 음성을 듣고도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우리 귀에 강제로 들려 주시고 강제로 문을 열게 하시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쪽은 어디까지나 우리 쪽입니다! 음성을 듣고서부터 문을 열기까지는 우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칼뱅주의자들은 실상 주님이 우리에게 강제로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문을 열게 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예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고, 듣고도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본절 하반절은 칼뱅주의자들이 비로소 안도(?)하고 반가워 할 부분인 듯 보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b)

 

놀라운 말씀 아닌가요? 앞에 있는 조건부가 이뤄질 때, 주님 쪽에서의 그 다음 행동으로 위와 같이 하시겠다는 것이죠.
여기서도 주님은 상호측이 할  파트-주빈과 초청자(우리)-가 각각 할 일을 명백히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는 것이죠. "내가 너와 더불어 먹는다.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본절에 나타난 주님과 우리-양자의 행동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쪽에서의 (은총의) 행동들:

   -(우리의)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심
   -(우리가 문을 연다는 조건 아래서)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더불어 잡수심

 

우리 쪽에서의 (수납이 필요한) 행동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들어오신) 주님과 더불어 먹음

 

이 얼마나 명백한 책임 할당이고 분담입니까!

그런데 칼뱅주의자들은..주님께서 문밖에서 잠시 두드리시며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그 음성을 듣지 않고 열지 않더라도 문을 강제로 열고(뻐개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잡수시리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기대를 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이 '절대주권' 및 무력하고 무의미한 자유의지에 더 적합할 법 하지 않습니까?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또 다시 "그게 아니다!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말을 돌려버리면 누구든 얼마든 딴 소리를 할 터입니다. 그래서 칼뱅주의권 안에도 별의별 갈래가 있고 유달리 교파들이 많은 것입니다.


 

끝으로 정리해 보면, 요한계시록 2'1~22 말씀엔  교회마다 조건을 단 조건절이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조건절들은 모두 우리 쪽의 결정 즉 우리의 자의지와 예상되는 그 활용의 결과에 해당하는 말씀들입니다.
이 조건들이 부합되지 못할 때 즉 우리가 그 사항들을 우리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실천하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닥치고 미칠 포텐셜한 위험과 위기와 극명한 미래들을 주님은 거듭거듭거듭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칼뱅주의자들은 "이미 택하신 교회, 택하신 신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끄떡 없이 지켜 주셔" 하는 듯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섭게 경고하신 5 교회들은 처음부터 예외로 따돌리시고 구원하시지 않기로 만세 전에 작정해 두신 신자들의 모듬체인가요??

그럼, 왜 구태여 5 교회 신자들에게 구구히/누누히 타이르고 어르시고 꾸짖으시고 무섭게 경고하십니까? 어차피 이미 망하기로 돼 있는 교회/교인들이라면 주님이 뭐가 답답해서?

왜 이 5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되찾아라, 회개하라, 돌이켜라, 열심을 내라고 하시나요?
타락해 가는 교회와 교인들도 뉘우치고 돌이키고 되찾고 열심을 내면 주님께서 계속 붙잡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7교회마다 꼬박꼬박 중요한 약속을 하십니다. 모든 일곱 교회에 공평하게 이기는 교인/신자들에게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미리 타락하기로, 버림받기로 예정된 교회라면 왜 하릴없이 일일이 이런 약속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또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매번 촉구하십니다. 귀 '없는' 자, 곧 귀 기울이지 않는 교회/교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간접 시사하는 말씀이죠.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은총과 긍휼(온정)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거저 구원을 오픈해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와 우리의 죄와 자유의지에 의하여 잃어가던(!) 구원을 되찾거나 확고히 하고 확신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달린 문제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들어와 더불어 함께 잡수시길 애타고 바라고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지만,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