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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방언.은사.신유

'더 큰 은사'는 사랑?


'더 큰 은사'는 사랑?

-사랑이 최고의 은사?



김삼




바탕본문: 코린토A서(고전) 12'31


원문(그리스어): 

ζηλοῦτε δὲ τὰ χαρίσματα τὰ μείζονα, ἔτι, καθ' ὑπερβολὴν ὁδὸν, ὑμῖν δείκνυμι.

(음역: 젤루테 데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 에티, 캍 휘페르볼렌 호돈, 휘민 데이크뉘미)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개정역)


"더 나아가 여러분은 보다 중요한 은사을 추구하시오. 아울러 훨씬 더 나은 길을 여러분에게 제가 보여드리지요."(필자 사역) 




사도 파울은 코린토A서(고전) 12장에서 교회에 필수적인 은사론을 좍 펼치다가 31절에서 갑자기 (이보다) "더 큰 은사(기존 한글역)"를 흠모하라고 하면서, 더 나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대다수의 주석가/신학자/설교가들은 이 '더 큰 은사'를 사랑으로 풀이한다. 그것은 주로 본 12장에 이어지는 13장이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얼핏 거의 단일한 진리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파울 자신, [더 큰 은사=사랑]이라는 공식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문장 자체만으로는 12'31의 '더 큰 은사'에 '?'가 붙게 된다. 정말 파울은 '더 큰 은사'가 13장을 주도하는 사랑임을 의미한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고 하기 전,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 갈 만한 점은 사랑이란 것이 과연 코린토A서 12장에서의 문맥과 톤(tone)대로의 은사의 하나인가?라는 것이다. 파울은 12장에서 교회의 지체 노릇을 하는 9가지 영적 은사들에 관한 계시를 말하면서, 아울러 직능적인 은사들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적 은사들과 직능적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그 한 가운데 사랑이라는 '은사'를 전혀 논하지 않다가, 끝 부분에서 불쑥 '더 큰 은사'와 '더 좋은 길'을 언급했다. 

이어서 이내 '사랑장'인 13장으로 이어지니, 자연히 더 큰 은사와 더 좋은 길-둘 다 사랑으로 인식하기가 쉽다. 과연 흔한 해석처럼 '더 큰 은사'와 '더 좋은 길', 둘 다 모두 사랑일까? 



'더 큰 은사'가 아닌 '더 큰 은사들'


많은 주석가들의 주장 및 설교가들의 적용과는 달리, '더 큰 은사'가 사랑일 수 없음을 바로 원문이 명료하게 보여 준다. 원문에는 '더 큰 은사'(타 카리스마타)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사랑들(loves)'이라고 기재되지 않는다. 사랑은 복수가 아니고 언제나 단수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신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여기서의 '더 큰 은사(들)'은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사랑일 수가 없다. 분명히 여기서 파울은 단수인 사랑이 아니라, 복수인 여러가지 은사들을 말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12장의 은사 말고  또 다른 은사들을 가리킨 것일까? 도대체 어느 것보다 '더 크다'는 말인가?


문법적으로는 그렇더라도 문맥적으로는 어떨까?

문맥상으로, 파울의 은사론(12장) -> '더 큰 은사(들)'와 더 좋은 길' -> 사랑론(13장)의 진행 과정은 필시 더 큰 은사와 더 좋은 길이 사랑임을 시사한다고 풀이하기가 쉽다. 



흔히 한국 교계에서는 더 큰 은사가 사랑이니까 "사랑이면 끝!"이라는 사랑 지고론(至高論) 같은 도식에 밀착된 나머지 은사무용(無用)론 쪽으로 기울어진다. 물론 은사무용론은 개혁주의에서 견지해온 소위 '종식론/중단론'(cessationism)과 직결돼 있다. 과연 파울은 13장에서 사랑지고론과 함께 은사무용론을 말하려고 했을까? 


14장을 양심적으로 진솔하게 잘 분석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개혁주의 쪽에서는 14장마저도 입맛대로 풀이하기가 일쑤이다. 개혁주의적 주장대로 파울이 은사무용론을 주장했는지 여부는 14장을 정직하게 묵상해 보면, 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파울은 본장에서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주장 같은 영언무용론, 영언금지론을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종식론/중단론자들은 자기네 어젠다 차원에서, 14장에서 영언 등에 대해 부정적인(?) 구절만 인용하는 반면, 긍정적 구절은 거의 언제나 언급하지 않고 제외한다. 그런 점은 양식적(良識的)이지도, 양심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더 큰 은사들'은 무엇(들)일까?

왜 파울이 그런 말을 했을까?


우선, 파울이 말한 '더 큰 은사들'은 12장의 은사론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12장 은사론을 초월하거나 탈피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큰 은사들'보다는 '더 중요한 은사들'로 이해해야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그게 뭣들일까?


파울의 은사 관련 계시를 읽어 보면, 9가지 영적 은사들 가운데서 더 차원 높고 중요한 은사들이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파울은 영언(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교회(또는 공동체) 발표용 영언(일명 '은사영언'/'대인방언')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 예언만 못하다고 말한다(14'5b). 

파울은 또 "나는 여러분이 모두 영언 말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예언을 하기를 바랍니다."(14'5a)라고 하여 예언이 더 진전된, 더 차원 높은 은사임을 시사했다. 또 영언(+통역)이나 예언보다 계시가 더 중요함을 내비쳤다(14'30). 


이처럼 파울이 더 차원 높은 은사들을 추구하라고 했음은 9가지 은사들중 현재의 것에 만족하지 말고 보다 더 한 차원 높은 은사들을 추구하고 흠모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9가지 은사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용어는 필자가 붙여 봤다. 


   계시은사:  영들의 분별,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구변(언변)은사: 영언, 영언통역, 예언

   이적(행위)은사: (은사)신유, (큰)믿음, (큰)권능


계시은사는 성령께서 특정 신비/비밀을 열어서 보여 주시는 은사들이다. 물론 이 계시들은 성경과 절대 일치해야만 한다! 

구변 은사는 말로 하는 은사들이다. 

이적 은사는 특정 권능을 행하거나 드러내는 은사들이다. 여기서의 신유와 믿음, 권능은 거듭난 일반 성도도 모두 갖고 있거나 흔히 체험하는 종류가 아니다. 성령께서 따로 빼신 사람들만 분여 받는 것이다. 특정 유형의 질병을 기도/안수 등으로 치유하는 신유, 남달리 특출하게 강한 믿음, 남다른 권능이다.   


위 은사들 가운데 영언과 영언통역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은 구약인들에게도 주어져 활용됐다. 



그런데 언뜻 봐서도 알지만, 각 범주의 각 셋씩의 은사끼리 서로 차원이 약간씩 다르다. 영들의 분별보다는 지식의 말씀이, 지식의 말씀보다 지혜의 말씀이 더 차원 높다. 

또 영언보다는 영언(플러스)통역이, 영언통역보다는 예언이 한 차원씩 더 높다.

아울러 신유보다는 (큰)믿음, 큰 믿음보다는 큰 권능이 더 차원이 높고 강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계급 차등적, 불평등적 의미가 아니며, 교회의 지체로서 필요한 기능 가운데도 조금씩 높낮이가 있다는 뜻이다. 가령 직능은사들 가운데서도 교사보다는 대언자들이, 대언자보다는 목자/감독이, 목자/감독보다는 사도가 더 한 차원 "높게" 느껴짐과도 같다. 또 다른 비근한 예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70제자보다는 12제자/사도들이, 12제자들 가운데서도 3제자가, 3제자들 가운데도 페트로(베드로)가 더 핵심이었던 이치와도 같다[각주:1].  



그러므로 파울이 보다 중요한 은사들을 구하라고 한 뜻은 자명해진다. 세 범주중 각 범주 가운데 보다 더 중요한 은사들을 추구하라는 뜻인 것이다. 


물론 개인이 추구할 것은 자기 몫의 은사여야 한다! 파울이 말한 뜻은 제 몫이 아닌, (더 좋아뵈는) 남의 몫의 은사를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개인에게 분여하시는(12'7,8a,11 참조) 은사들의 자기 몫들 가운데서 더 차원 높은 것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파울이 코린토 교우들에게 보여주리라 했던 '더 나은 길'은 무엇인가?

14'1에 있는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추구하면서 구하라는 것이다.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3'1~3 참조).

하지만 파울은 결코 '은사무용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 코A 13'8~10의 뜻도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11,12절 참고) 모든 은사가 유지된다는 뜻이지, 결코 종식론/중단론을 뒷받침하는 구절이 아니다.    


파울은 코A 13장에서 사랑을 영적인 은사라고 따로 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랑이 은사라면, 13'13에서처럼 믿음과 소망도 은사여야 한다. 혹자는 "바로 그렇다! 코린토A 12'9을 보라-믿음도 은사가 아닌가?" 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망은 왜 거기 은사 목록에 빠져 있는가?  

이렇게 구태여 따로 말하는 이유는 그동안 딴 은사 대신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장의 은사 리스트에는 사랑 은사가 따로 없으며, 전술했듯 더 큰 은사(들)도 복수이기에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영적인 열매이다. 갈라티아서 5'22이 이를 증명해 준다.  



필자로서는 코린토A서 12'31을 이렇게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되뇌지만, 이 성구에서 '더 큰 은사'가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은 길'은 사랑을 따라 은사 구하기가 맞다. 

이런 점을 특정 전제나 선입견/편견/오해가 없이 양심껏 바로 깨닫는 것이 성경 진리에 더 깊이 접근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1. 훗날 초기교회에서는 페트로 말고도 (주님의 동생) 야코보가 교회의 대표적 인사의 한 명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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