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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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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렇게 감기에 걸린 채로 살아라?"

언젠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비실비실 다 죽어가는 나를 보고 친구가 말했다.
뭔 소리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 봤더니, 친구는 끼들끼들 혼자 신이 나서 웃었다.
 
"눈빛이 좀 죽으니까 사람이 훨씬 대하기 만만해 보이잖아. "   
 
언제적 얘기인가. 편히 대하기에는 좀 강한 눈빛이라며 나를 수시로 구박하더니만,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나를 향해 임자 만났다는 듯 꺼낸 말이었다. 그 후로 감기에만 걸리면 생각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소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까지는 아니었어도 아무튼 그렇게 조금은 총기로 빛나던 시절도 있었건만, 감기에도 걸리지 않은 지금, 이 꼴이 대체 뭐람.
요한복음 한 구절 때문에 이리 절절매는 모습이라니, 행여라도 그 친구가 알면 온갖 야유는 다 하게 생겼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오래다. 언제 봤나.. 짚어지지도 않는다. 나나 저나, 무심했다.
우리는 제법 마음이 맞았었다. 매일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삶을 살아내는 그런 이야기 말고, 머리 속이나 가슴 속에 든 걸 꺼내어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머리 속 가슴 속과 바깥 세상이 달라, 커피잔 앞에 놓고 우울해 하던 날들도 많았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에미들 옆에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겨워서, 북새를 떨거나 말거나 엉망진창 집안을 어질러가며 애들은 지들끼리 맘대로 놀게 두고,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우울을 달래곤 했었다.
 
"울 아버지 끝내 줘.. "
"왜?"
"글쎄 날 보고 시댁에 가서 정의사회 구현하지 말래.."
 
푸하하핫,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 정말 끝내주는 아버님이네, 그러게 왜 시댁에 가서 정의사회 구현을 하고 그래.. 
셋째 며느리를 유독 편애한 시어머니, 친구는 둘째였고 첫째에게는 더 심하게 대했다던가. 그 시어머니의 공정하지 못 한 처사에 딸이 친정에서 흥분하자, 친정아버님이 그러셨단다. 너 정의사회 구현하려고 시집 갔냐? 시댁에서 그거 하려고 애쓰지 마라. 그 이후 우리는 기회만 생기면 그 말을 못 써 안달이었다. 어어.. 정의사회 구현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궁금하다.. 전화라도 해 볼까.. 어느 날 갑자기 성당엘 나가더니 지금은 아주 열심당원이 되었다던 소문만 바람결에 들었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렇지만 잠시의 마음 뿐, 그 친구와 얘기 나눌 여유가 지금은 없다. 나중에 언제 여유 생기면 하지 뭐.. 나중에 언제..? 언제든.. 아무 때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주님'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문제다.
도대체 주님은 왜 그러신 걸까. 왜, 왜, 왜? 왜?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2:40 표준새번역)  


요한복음 읽다가 딱 막혔다.
이렇게 한 주님의 마음을 모르겠다. 어림 짐작도 못 하겠다. 잘못 읽었나? 다시 봤지만 잘못 읽은 건 아니었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이 무슨 억하심정이신가, 주님은 순 심술꾸러기시란 말인가?
 
심술의 대명사 놀부 심술은 차라리 솔직하다. 호박에 말뚝 박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논두렁에 구멍 뚫고 비 오는 날 장독 여는 놀부 마음은 그저 못된 심술이려니 알겠는데, 저러시는 주님의 마음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눈을 왜 멀게 하셨단 말인가, 마음은 왜 무디게 하시고? 보지도 못 하게 깨닫지도 못 하게, 그래서 결국은 고침을 못 받게 하셨다? 왜? 인간을 끔찍히도 사랑하여 외아들도 내 줬다는 분이 대체 왜? 보지 못 하면 보게 해 주고 깨닫지 못 하면 깨닫게 해 줘야지, 전지전능하시니 그게 훨씬 어울리지, 나같은 사람이 심술 잔뜩 날 때나 할 듯한 행동을 대체 왜 하셨다는 말인가.  
 
지난 번 처음 읽었을 때는 이걸 왜 그냥 넘어갔을까. 그 때는 왜 이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왜 이게 궁금하지 않았을까. 주님이 내 눈도 멀게 하셨었나? 마음도 무디게 하시고? 설마.  
앞으로 이런 게 얼마나 나와 나를 헷갈리게 할지, 한심하다. 도대체, 성경도 책일진대 왜 이리 해독이 안 되는 거냐.
하기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분 마음을 내가 어찌 알랴. 내 마음도 자주 모르는데.
멀게 무디게 왜 하셨는지, 그건 순전히 당신 마음이다. 어쩌면 이건 독해라기보다는, 감수성의 문제일지 모른다.   
 
묵상이라고 했던가.
그는 나에게 묵상을 해 보라고 했었다. 묵상, 잠잠할 묵 생각할 상, 잠잠히 생각함.
대충 내 이해의 수준으로 받아들여 보자면, 그가 말하는 성경적 묵상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랑 사촌쯤 되지 싶었다. 성경의 내용을 붙잡고 깊게 생각을 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단다. 백 번 읽어 의미 파악이 되는 거나 내용을 붙잡고 깊게 생각을 하는 거나 어차피 다 바른 이해를 위한 거다.  

[속도를 쪼오금 늦추시지요, 지금 너~무 빠르십니다. 이제는 좀 깊이있게 읽으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부지런히 읽어 나간다 싶었는지, 어느 날 그가 권했다. 그랬을 거다. 그랬던 거 같다. 이왕 시작했으니 하는 데까지 해 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배움은 늘 나를 흥분시킨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군자도 못 되면서 마음만은 군자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이 내 심사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영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되어 진도가 빠른지 어떤지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일대일로 공부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깊이있게 읽어라.. 나는 몰랐지만 그는 그 때 이미 날 절반 이상 기독교인 취급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성경 읽기 생초보한테 깊이있게 읽으라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깊이있게?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주문이었다.
얼마나 읽었다고 벌써 깊이있게? 깊은 이해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지.  
 
[속도를 내기보다 반복해서 천천히 읽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성경의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반복해서 천천히 읽고 생각을 하면?
 
[그리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내 삶에 적용하란다.  
성경공부 조금 했다고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닐 텐데.
 
[물론 동의하지 못 하는 것들을 억지로 그러시라는 게 아니고 동의하는 것들을 그렇게 하시라는 거지요.]
 
후후, 가끔 그는,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간다. 이럴 때 그와의 대화는 아주 매력적이다.
 
[아는 것과 체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본주의 정신을 많이 비판하지만 실제 다른 것을 자본주의 대신 갖추어 그것에 중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생각과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재화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내 삶을 재구성하라니,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동의하지 않는 것을 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거였다. 동의하는 것들을 내재화하라는 말이라는 거였다.
성경에서 읽었던 여러가지 가치들 중 나는 무엇에 동의할 수 있지?

서로 사랑하라? 동의한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내 생각과 삶의 태도를 재구성해야 하나? 어떻게? 성경에 맞게?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 주고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대 주면서? 말도 안 된다. 사랑하며 사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사랑이 억지로 되는 건 아니다. 설령 생각이 있다손쳐도 내 의지로는 할 수도 없을 일이다. 그럼 자연히 생각과 삶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제자리인데, 이러면 동의하지 않는 게 되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고 메시지를 찾아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고를 갖추는 것이지요. 같은 곳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맞다, 묵상.
묵상을 해 보라고 했었지.
묵상을 권하면서 그는 제법 긴 얘기를 했다. 나는 그냥 보통 책을 읽듯 성경도 그렇게 주욱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던가 보다. 문자적 의미의 이해에 그치지 않고 삶에 적용하는 문제로까지 확장시키길 바랬나 보다. 그것을 위해 묵상을 권했을 거다. 들었을 때는 그냥 넘어 갔었다. 아이고 내가 성경을 놓고 무슨 묵상? 통과 통과, 했다.        
   
묵상을 한 번 해 봐?
주님이 왜 저렇게 심술꾸러기처럼 구셨는지, 잠잠히 생각을 해 봐?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면서?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의미 단위로 나누어 읽는다.
그러나, 뭘 붙잡고 뭘 생각해야 할지 막막하다. 묵상으로 불릴만한 밑천이 없다. 또박또박 읽어서 얻은 것은, 그저 문자적 의미의 재확인 뿐이다. 그 분의 심정을 짐작이라도 해 보고 싶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문제를 풀만한 정보가 없다. 묵상으로 될 일이 아니다.    
빌어먹을, 진짜 '빌어먹을'이다.
어쩌라고, 여기서 끝내라고? 아니면, 모르는 채로 그냥 넘어 가라고?
 
죄 없는 커피만 하냥 죽이고 있다.
하자는 묵상은 아니 되고 기운만 떨어진다. 몸이 가라앉고 기분이 쳐진다. 이거 혹시.. 정말로 감기 기운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 아냐?
뜻 모를 하나님 심술에 나만 골치가 아프다.  
 
 
후우..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기는 이미 끝났다. 학기 끝나면, 하던 공부 딱 멈추고 보던 책 다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 선반에 얹어두는 거다. 그리고는 잊는 거다. 묵은 학기는 그렇게 아쉽더라도 보내고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거다. 원래 그러는 거다. 얼마나 많은 방학들을 책 정리 노트 정리를 하면서 보냈었나.
짐 다 싸서 선반에 얹어두고 그만 끝내?  
그러나.. 새로운 학기는 언제 올지 모르고, 아니 언제가 되든 다시 오기는 올 것인지조차 모르고, 내 이번 학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강의가 남아 있다. 나는 그걸 아직 읽지 않았다. 그걸 읽어야 학기가 끝난다.
그냥 읽어 버릴 걸, 요한복음은 괜히 다시 시작했나 보다.

새번역의 성경책은 갖고 있는 게 없어, 컴퓨터로 읽으니 눈이 여전히 피로하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가끔 먼 산을 바라보아 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앉아 있다 보면 어느 결에 시간이 훌쩍 가 버리고는 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눈이 좋은 이유는 멀리 보기 때문이랬다. 시야에 막히는 것 없이, 촛점을 맞출 필요 없이 그저 허공을 한없이 멀리 바라보면 눈의 긴장이 많이 풀린다. 뻔히 알면서도 챙기질 못한다. 알면서 못하는 것이 어디 이거 뿐이랴만.

하늘을 본다. 허공을 바라 본다.
가능하면 멀리, 머얼리 시선을 둔다. 산이 있고 구름이 있다. 날은 아직 더운데, 하늘에서는 얼핏 가을이 감지된다. 어느 틈에 조금 높아져 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여름이 가겠구나.
가까이는 나무, 멀리는 산, 더 멀리는 구름, 그리고 하늘..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정말로 그 분이 만드셨을까.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그 분이, 왜 그들로 하여금 돌아서지 못하게 했나. 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했을까.  
 
아 그렇다, 그게 있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지, 생각을 미처 못 했다.
나는 잇몸을 찾아 나선다. 공부를 끝내면서 그가 나를 위해 해 준 몇 가지 안내, 그 중에는 성경관련 사이트도 있었다.
 
[이제는 제가 일일이 일대일로 해서는 오히려 진도가 안 나가는 수준에 오신 듯 합니다. 아주 풍부한 성경 설명과 부대 자료들이 많아서 갈증을 확 풀어줄 겁니다. 바쁘실 거예요.^^]
 
내 수준이 뭐가 나아졌다는 건지, 아무튼 그가 걸어준 링크로 들어가 바로 한 번 구경은 했었다. 복음서 네 권의 원어 설명들이 화면 가득 빼곡했다. 그 때는 기가 질려 얼른 돌아섰지만, 그 곳에 해설이 있을지 모른다. 복음서니까 있을 가능성이 많다. 좋아, 가 보자.    
   
앗 뭐야, 뭐가 이리 간단해?
있다, 그런데 아주 짧다.
아무리 계시를 내려도 눈치를 못채고 인간들이 말을 안 들어, 참고 참고 참으시던 하나님이 결국 징벌을 내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당신 뜻을 어기니까 하나님도 화가 나셨나 보다.
이런 건 말하자면, 괘씸죄다. 흠.. 하나님도 괘씸죄를 물으시는구나.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인가? 글쎄 뭐, 모르겠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그가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로서는 얼른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답은 찾았다. 찾긴 했는데 내가 한 고민을 생각하니 이건 좀 허무하다.
이 한 마디면 끝나는 것을, 애꿎은 커피만 잡았다. 발자크는 거의 평생을 커피로 연명했다는 설이 있던데 나도 그렇게 한 번 살아볼까나.. 그러면서 마신 커피가 얼마였더라.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나.
가자니 맥이 빠졌고, 말자니 그게 또 그럴 수는 없네?  
 

비나 한 번, 오지게, 쏟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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