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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관상영성

하나님은 신비체험을 용인하시는가? (영엔)


하나님은 신비 체험을 용인하시는가? 




필자: 레이 영엔 (검증가/기독교변증가/뉴에이지비평가/저술가)


다년간 연구를 해 오면서, 나는 '관상(觀想)기도'라는 용어를 접하곤 했다. 나는 (이 용어가 갖는 논리적 연상에 따라) 관상기도가 기도 중의 깊은 숙고를 의미한다고 생각했기에, 이것이 뉴에이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곧 바로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뉴에이지 가르침에서, 훈련받지 않은 자에게는 사물들이 늘 겉모습대로인 것은 아니다. 관상기도가 실제로 함의하는 필연적인 뜻을 다음 작가가 아주 선명하게 밝혀 준다. 


   "관상기도의 더 깊은 층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 안 가 공허, 텅 빔, 무(無) ... 심오한  신비적 침묵...생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황망하게도 나는 이 "신비적 침묵"이 뉴에이저들이 그들의 침묵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 -만트라와 호흡-으로 달성되는 것임을 발견했다! 관상기도란 '기도어' 혹은 '신성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단순한) 마음이 아닌 혼이 하나님을 관상하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관상기도 교사 겸 선사(禪師, zen master)인 예거 빌리기스[각주:1]가 다음을 전제하면서 이 사실을 보여준다. 


   "단어의 뜻을 떠올리지 마시오. 모든 신비가들이 주장하듯, 생각과 떠올림을 멈추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 단어를 조용히 '소리내면서', 모든 감정과 생각이 흘러나가게 하시오."


이 주제에 관하여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의 하나는 14세기의 고전 책자인, 작자미상의 "미지의 구름"이다. 본질적으로 초보자들을 관상기도로 초대하는 하나의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식이다. 


   "두 음절보다는 한 음절로된 짧은 단어를 고르시오 ... 이 단어를 가지고 님은 망각의 구름 아래에서 모든 종류의 생각들을 부수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전제된 것은 하나님을 정말로 알기 위해선 신비주의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기다리는 장소인 미지의 구름을 체험하기 위해 마음을 닫거나 꺼 버리는 훈련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인 우리가 자신들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안 되는가? 왜 이런 신비적 기도 훈련을 우리의 삶 가운데 들여 오면 안되는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사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어떤 사례들이 신비체험을 묘사해 주기는 하지만, 나는 인간이 주도하는 신비주의를 하나님이 용인하신다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합법적(성경적)인 신비체험은 늘, 특정 개인에게 주시는 특정 계시로서 하나님이 시작/주도하신 것이지 결코 의식을 바꿔가며 하는 방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1장 5절에서 사도 페트로(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트랜스(그리스어: 엨스타시스, 개정역: '황홀한 중', 개역: '비몽사몽')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트랜스 상태를 주도하고 활용하신 쪽은 하나님이셨지, 페트로가 아니었다. 


반대로 신비가를 정의해 보면, 내면의 신성과 접촉하려는 시도 가운데 (기계적인) 단순반복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용인 또는 보호의 바깥에서 스스로 트랜스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극히 위험한 어프로치에 끼어드는 셈이다. 게다가 성경 어디에서도 그러한 신비적 행습을 지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특히 구약에서) 그 분의 거룩하심과 그 분의 계획에 대한 존중심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목적으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어떤 의례들을 지정하셨다. 그럼에도, 성경에 하나님이 신비적 수행을 장려하셨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은 본래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신비주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내려고 앞서서 어떤 방법을 수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영적인 선물을 수여하신다. 


관상기도 옹호자들은 대뜸,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0)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 성구는 흔히 관상기도 증진에 이용된다. 이 논거는 일견 유용해 보이지만, "가만히(still) 있어"라는 단어의 뜻을 검토만 해 봐도 이 구절과의 그 어떤 관상적인 연결도 배제된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느슨하게 하다", "멈추다", 혹은 "줄이다"란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문맥상으로 어떤 일들에 대해 안절부절하기보다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라는 뜻이다. 그냥 느긋하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지켜보라는 말이다. 모종의 의식변성으로 들어감을 말하고 있는 구절이 아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거듭남은 그것 자체로 신비적이라는 사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즉 성령님은 한때 죽었던 사람의 영을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통해 생령(living spirit)으로 되살아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에서조차 하나님은 개인을 의식변성 상태에 놓지 않으시고 이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 모인 제자들이 "다들 성령으로 채우심(성령충만)을 받은 (4절)" 오순절 사건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성령님이 그들 위에 내리실 당시,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듦었(1절)"음을 유의해 보라. 이 모여듦은, 본장의 문맥상 지성적인 대화를 곁들인 신자들의 활기찬 모임이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어서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른 언변(영언/'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사건은 생각 없는 수다나 만트라에서와 같은 공허한 반복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오히려 군중이 몰려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하는 것을 듣는군요(11절)" 하고 놀라워 할 정도로, 중요하고 일관성 있는 스피취였다. 지켜보던 몇몇 다른 사람들은 제자들이 혹 의식변성 상태에 있지 않나 의심하면서, "저 사람들 새 술에 만취했네요(13절)"라고 말했다. 그러나 페트로는 곧장, 제자들이 모두 온전히 제 정신임을 확언함으로써 그 무리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음을 눈여겨 보라. 


그렇다면 응당, 제자들의 마음이 그 어떤 종류의 변경 상태에도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 다음에 페트로가 말씀에 나섰는데, 성경에서 가장 신중하고도 명료하게 표현된 스피취 가운데 하나이다. 확실히 이들은 트랜스에 빠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신약에 기록된 가장 의미있는 두 신비체험(거듭남과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렌즈로 볼 때, 의식변성 상태 따위는 결코 추구된 적도, 달성된 적도 없다. 사실 구약과 신약을 온통 다 뒤져 봐도 (계시)수신자가 완전히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허용하신 체험은 단 두 가지 유형-꿈과 환상뿐이다. 그리고 체험 케이스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다. 그 반면, 성경에 지적된 바 자기유도를 통한 트랜스의 경우마다 다음 성구에 요약된 그대로 모조리 가차없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인 예호봐(여호와/야웨)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민족들의 가증스런 것(행습)들을 본받지 마시오.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아들이나 딸에게 불 속을 지나게 하거나 점쟁이나 복술사, 마법사나 무당, 주술사나 영매, 심령술사 또는 초혼자가 있어서는 안 되오." (신명기 18'9~11 이하 성구는 역자 사역


위 성구에 쓰인 용어들의 히브리어 원뜻을 살펴 보면, (모쉐=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 대부분이 주술을 통한 (악령)호출에 관한 것이다. 또 이 문맥에서 사용된 주술이란 트랜스를 가리킨다. 역으로, 하나님이 트랜스를 허용/유도하실 때는 꿈이나 환상의 형태를 통해서이지만, 사람이 트랜스를 유도할 때는 주술 또는 최면 형식을 빌린다. 


기억해 두라! 성경 어디에도 침묵이 "하나님의 권능"과 동일하다는 구절은 없다. 다만 십자가의 말씀(코린토A서=고전 1:18)만이 가장 확실히 하나님의 권능일 뿐이다. 



  1. 독일인. 일본 선불교에 심취하여 선불교 산보교단에서 수행하면서 가르쳤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