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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크리스마스-청교도와 초기 장로교의 견해




크리스마스: 청교도와 장로교 견해


김삼 편역



미리 일러두기:


* 글의 전반부는 크리스마스 지킴에 대한 청교도(퓨리턴)들의 반대입장에 대하여 (현대의 성탄절 전통 반대학자인) 케빈 리드의 역사적 고찰을 거의 옮긴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는 리드의 글이 아니라, 미국의 청교도였던 인크리스 매터(하버드 대학 초기 학장)의 글을 대체로 간추려 옮겼다. 

* 중간중간 나타나는 [ ] 표 속 내용은 본 번역요약자(블로거)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대로 써 넣은 것이다. 

* 편역자는 이 견해들 전체에 완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교리들을 다 수용하진 않는다.), 대체로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대한 성경적인 반대 견해나 개혁은 율법주의적으로 표출되거나 강행되어선 안 된다.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옳다!  



청교도들이 크리스마스 축하를 반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중요한 점은 반대자들이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국가에 두루 분포됐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의 성탄절 반대는 3가지로 요약된다.: 1) 어떤 경배이든 하나님이 지정하신 대로가 아니면 거룩할 수 없고, 2) 비성경적인 축일은 주님의 날에만 국한된 신성(神聖)을 빼앗는 성향이 있어 주일날의 적절한 준수를 위협하며 3) 비성경적인 축일 준수는 로마 천주교의 특성인 예배상의 미신적/인위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


엘리저벹 1세 통치기의 토머스 카트라이트는 강력한 장로교 지도자였다. 그는 당대 교황주의자들에게 강력 대처했기에 교수직을 뺏기고 한때 영국에서 추방되어 대륙에서 지냈다. 1580년대 영국의 카톨맄 예수회(Jesuits)는 개혁정신을 뒤집으려는 온갖 종교간행물을 뿌리고 있었다. 1582년 교황주의자들은 당대 구교 중심지의 하나였던 프랑스 랭스에서, 교황권의 온갖 어젠다가 난외주에 포함된 신약성경을 펴냈다. 

카트라이트는 시민들과 사역자들의 요청에 따라 이 랭스 신약을 부정하는 반론을 문서로 제기했다. 그러나 휘트기프트 영국 대주교는 압박을 가하여 출판되지 못하게 했다. 영국 국교회의 근(近) 로마정책을 누르고 장로교-청교도주의가 승세할까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카트라이트의 반론은 1618년 네덜란드의 레이던에서 출판됐다. 이 책자는 천주교의 모든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대의 크리스마스 지킴이들과 이들의 배후에 있던 예수회는 예수님이 유다 절기 때 성전에 계셨던 기록인 요한복음서 10장을 갖고 교회제정 절기들이 마치 신적인 승인을 받은 양 주장했다. 그러나 요복 10장과 성탄절을 억지 연계시키는 설교가들은 적을 것이다. 그런 시도를 하는 설교가는 결국 '예수회'의 어젠다에 편승하는 셈이다. 


카트라이트는 요한복음서 10'22에 관해 교황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만약 그들이 이 절기(크리스마스)의 합법성을 단지 구주 크리스토님의 존재를 결부시켜 입증할 수 있다면, 오순절이나 기타 유대 절기 때 사도 파울이 복음전파를 위해 존재했을 뿐더러 그 당시 사역을 했다고 해서 합법적이라며 입증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수회 회원들은 하나의 관행이나 교회(성당)의 결정을 허용하고 지키는 것과 그것의 합법성을 승인/입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부터 배워야 한다. 따라서 이 교리의 밑둥과 그것으로부터 예수회 사람들이 길러낸 가지와 줄기는 잘려져야 하며, 땅에 쓰러져야 한다." 



1600년대 당시의 크리스마스 파티. 술병째 마시고 있다. 




갈라티아서 4'10에 관하여 카트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논급한다.:


"하나님이 그 어떤 피조물도 아닌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몸소 제정하신 절기들을 갈라티아 교우들이 준수하는 것을 파울이 단죄했거든, 하물며 사람이 사람의 영예를 위하여 꾸며 만든 [성인축일 따위의] 절기를 강요하는 교황주의자들이야말로 단죄 받을 처지가 어찌 아니겠는가? [지극히 온당한 지적이다. 카톨맄 측은 성탄절이 크리스토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테지만, 하나님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이 크리스마스에서는 사실 (작은) 아기 예수 곁에 있는 (큰) 마리아의 영예가 은근히 더 중시돼 왔다.] 유대인들은 앞으로 올 것의 그림자를 지켰다지만, 크리스토님이 이미 오신 것을 믿었던 갈라티아 교인들도 이미 오셨음의 상징으로라도 (절기를) 지킬 수 없었거든, (교황주의자들이) 이미 오신 주님[강탄]을 기념한다는 것도 하등 도움될 수 없음은 오죽하랴.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상징하는 뜻으로도 대림절이나 크리스마스를 지킬 수 없음을 간파해야 한다.]" 




"(중략 및 계속).. 사도들은 다른 성일에 관한 아무 언급없이 단지 제7일 대신 주님의 날을 제4계명이 요구한 바 평상의 영구적인 기념일로 정의한 셈이다. 비록 교회(성당)가 때때로 성일을 지정해도 그것은 영구법으로 만들거나 그것을 장기 지속시키려고 주님의 날 준수에 준한 그런 엄격한 복종을 요구할 만큼 양심을 묶을 수 없다.

오실 메시아님 자신과 그분의 구원과 영광스런 행적을 기념하려고 바쳐진 구약 절기들조차도 사도들이 제정한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교황주의자들이 치심하는 그런 저급한 절기들을 사도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나 있겠는가? 예수회원들이 제 아무리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을 도출한다고 해도, 가장 오랜 저술물이나 이 절기들의 오랜 나이도 이 축일들을 정당화해 주진 못한다. 그 절기들의 요람과 기원은 오욕스런 것이고 또 그래야 하며, 그 절기들의 그럴 듯한 계보도 잡히지 않으며 사도들로부터 비롯됐다는 충분한 증빙자료도 없다.(하략)"



록스버러 밸러드(민요) 모음의 삽화에 묘사된 1660년대 크리스마스 파티. 여러 남성들이 한 여성이 제공하는 '밀크 파티'에 참여했다. 담배도 피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카톨맄 예수회원들(Jesuits)이 바로 성탄절을 비롯한 온갖 절기들의 준수 어젠다의 주역임을 청교도들이 거듭 지적하고 있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 즉 신교가 구교의 크리스마스를 지켜주면 지켜줄수록 예수회 어젠다에 순응해 주고 있다고 봄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관측이다.] 



  윌리엄 에임즈


다년간 네덜란드에 살기도 한 영국 청교도였던 윌리엄 에임즈는 올바른 경배에 관한 몇 가지 근본원리를 이렇게 간추렸다: "어떤 제도적인 경배도 하나님이 그 창시자와 지정자가 아닌 이상 비합법적이다(신명기 4'1,2; 12'32). 가장 엄숙한 경배의 때는 이제는 매주의 첫날 곧 주님의 날이라고 불리는 날이다(요한계시록 1'10, 코린토A서=고전 16'2). 사람이 제정한 모든 축일들은 주님의 날 같은 성일로 간주될 경우 주님의 날 제정법칙에 위배된다."

                                                              

                                                                                         

에임즈는 죽기 얼마 전,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인간의 축제에 대한 재소송(1633년)'이란 책을 써 둔 바 있다. 이 책은 국교회측 존 몰턴과 존 버게스에 대한 반론이었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교회정책과 관련된 다양한 국교회 논증을 소상하게 반박했다. 예컨대 그는 예배의 영적 법칙을 말한다. 레빝서(레위기) 10'1에서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이 지시하시지 않은 딴 향불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다 저주를 받은 사실에서, 하나님을 경배한답시고 인간이 만든 제도적이고 인위적인 것들을 삼가야 함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이르미야(예렘)서 7'30,31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에서라도 몸소 명하시지 않은 것을 한 유대인들의 행각을 단죄하셨거든, 미신적 절기들을 지키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것 이상으로 더 반박할 이유조차 없다."고 썼다.  

에임즈는 또 다른 책 '주님의 날, 전들, 축일'에서, "사람이 만들어 낸 축일제절에 관하여 우리는 걸릴 것이 없다. 우리는 아무 절기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청교도의 입장을 전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려고 (독일/영국 개혁가) 마르틴 부처의 마태복음 12장 주석을 인용했다.


[카트라이트의 경우처럼, 에임즈 역시 요한복음 10'22,23의 봉헌절(수전절 곧 하누카) 사건을 다루었는데..그는 교황주의자 버게스와 몰턴의 견해에 대응하여, 주님은 이 절기를 준수하셨거나 승인하신 게 아니라 단지 그 무렵 슐로모 회랑을 거니셨을 뿐이라고 했다. 에임즈는 또 [16~17세기 반개혁가/예수회원/추기경에다 훗날의 '성인', '교회박사'로 추대된] 로베르토 벨라르미네에게 대한 유니우스의 답변 즉 크리스토님이 아닌 유대인 회중이 하누카를 지킨 것이라고 한 것을 인용했다. 크리스토님은 율법서를 읽으신 것도 아니고 단지 그날 성전에서 가르치셨을 뿐이었다.  에임즈는 이어서 교황주의자들의 논증의 근본적인 약점을 철저히 지적하면서, 천주교 절기에 관하여 걸핏하면 성경에서 막연한 증거를 찾아 유추하는 그들의 악습에 대하여 그런 성경본문이 걸맞거나 연계됨을 도무지 입증하지 못한다고 분석/비판했다.  


축배의 잔으로 시즌을 즐기는 청교도 당대 사회의 방만한 모습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 




교황주의자들은 또 예슈아서(수) 22장의 요르단 제단 건[일부 지족(지파)들이 임의로 요르단 강변에 쌓은 단이 무마/허용된 사건)을 빌미삼아 그들의 제절(諸節)을 옹호했고 20세기에도 성탄절 지지자들이 이를 이용했지만, 이미 앞서 에임즈는 이 성구가 도무지 그런 데 걸맞지 않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즉 이 제단은 단지 요르단 저편의 지족들도 같은 동족이고 함께 경배할 권리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경배에 즉시 활용할 지정된 예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 10장과 예슈아서 22장은 크리스마스와 아무 연관이 없다. 그 성구들이 교회(성당)가 경배양식을 제정할 권리를 전수해 주지 않는다. 구약 성구들 다수는 사람이 하나님의 경배에 뭔가 덧붙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신명기 4'2; 12'1~4,28~32, 레 10'1~3 등). 더 나아가 신교인들이 예수회원들의 크리스마스 옹호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아이러닠하게도 교황주의자들의 반개혁론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회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어젠다가 일부 성공하고 있음에 미소짓고 있을지 모른다. [필자의 이 말에 우리는 떨리지 않는가?]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으로] 득세했을 때, 재차 크리스마스에 눈길이 쏠렸다. 과거엔 대신 한 달간의 금식기간으로 정해졌던 그 날이 1644년, 12월 25일에 떨어졌다. 청교도가 주도한 영국 국회가 이 문제를 갖고 고심 끝에 국내 정세를 봐서라도 역시 금식과 기도로 하루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1647년 6월 국회는 성탄절과 기타 모든 (주일날을 제외한) 성일들을 철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랬다가 1656년 12월 25일이 다시 국회에 상정되자, 매튜스 대령, 로빈슨 의원, 윌리엄 스트리클랜드 경 등 주요 의원들은 반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국 초기 청교도들의 성탄절 풍속범 금지 공보. 5 쉴링의 벌금이 매겨져 있다(맨 끝줄). 

 


미국 청교도들


[청교도가 아닌] 분리주의자들의 1620년 미 대륙 상륙이후 일년이 지난 1621년에 성탄절 준수가 양간의 마찰을 일으켰으나 율법적인 단죄는 없었다. 17세기에 회중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적용하여 참 경배는 하나님의 지시만으로-곧 적절한 방도와 요소,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들로만 시행돼야 한다는 원칙을 굳혔다.   





미 건국초기인 1620년대 크리스마스 절기 풍속사범들을 훈계/경고하는 윌리엄 브랟포드 총독. '필그림'들 다수는 청교도주의와는 사뭇 다른 분리파(Separatists)였다. 



제2계명과 관련, 대요리문답은 하나님 경배에 딴 요소를 추가하는 것의 불법성을 확실히 했다. 총회의 '공중 하나님 경배지침서'(DPWG)의 부록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기독교 안식일인 주님의 날 이외에 그 어떤 날도 복음 아래서 거룩한 날로 지키라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 통상 '성일'(holy days > holidays)이라고 불리는 (천주교)축일들은 하나님 말씀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지속될 것이 아니다." 



  인크리스 매터(하버드 대 초기 학장)의 견해 



아버지 리처드 매터, 아들 커튼 매터와 함께 청교도 사역자/지도자 3 부자를 이룬 인크리스 매터(초기 하버드 대학 학장)는 비록 세일렘 '마녀 사냥' 재판에 관여돼 악명을 얻기는 했으나, 성탄절 전통에 맹렬히 반대한 청교도 지도자였다. 그는 1687년 런던에서 발행된 '현재 일부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불경하고 미신적인 관행-성경과 고대 및 현대의 신학자들이 단죄한 악'이라는 긴 제목의 책자에서 성탄절의 문제점을 성경적으로 파헤쳤다. 다음은 이 책자 성탄절 부분의 요약이다. 



   "순수한 사도시대 때는 하나님의 교회가 크리스마스 날 따위를 지킨 적이 없었다. 우리는 원시적 패턴을 지켜야 옳다. [교회시대 초기의 역사기록인] 사도행전이라고 불리는 성경 낱권은 크리스토님의 탄신일을 성일로 지켰다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마그데부르크의 루터파 역사학자들인] 세기사가(世紀史家)들과 기타 학자들도 초기 기독교인들 가운데 정해진 연례 성일 같은 것이 없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장 탁월한 고대 교회사가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 [일명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의 진솔한 관찰에 따르면, 부활절은 성탄제 훨씬 이전부터 지켜졌지만, 이 역시 사도들이 인준한 바 없다.  

교회 초기에 그런 날이 지켜졌다는 최소의 힌트라도 있었다면, [17세기 네덜란드 인문학자였던 게라르두스 요하네스] 보시우스가 세상에 그것을 말했을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성탄제론에서) 보시우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트로이가 어떤 손길로나마 구조될 수 있었다면, 바로 이로 인해 구조받았을 것이다." [보시우스가 그만큼 뛰어난 역사가였다는 말.] 그러나 보시우스는 크리스토 탄신제가 1세기 아닌 2세기에 지켜졌음을 인식했다. [천주교의] 고위 성직자들이 할 말을 다 한 뒤에라도 켐니티우스의 말이 옳을 것이다: "연례 크리스토 탄신제가 지켜졌다는 것은 가장 오랜 초기 기록엔 없다." 고대 사가들이 크리스토 탄신제에 관해 눈꼽만큼도 언급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s)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미신적인 명칭으로 알려진 것어서 개혁 연구가들이 혐오하기에는 충분할 터이다. 왜 신교인들이 하필 '미사'(mass)라는 명칭을 가진 것을 지녀야 하는가? 크리스토님과 미사 곧 크리스토님과 적크리스토를 결부시키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가!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귀며, 크리스토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되나? (코린토B서=고후 6'15).    

일부 예수회 회원들(또는 프랑스 랭스의 고위 카톨맄 인사들)은 그들의 옛 용어들과 명칭들 예컨대 사제, 제단, 크리스마스, 성촉절(Candlemas) 등등을 지탱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조언해왔다. 그런 것들에 의하여 그 이름에 딸린 것들이 제때 지켜지고 기억이 보존되게 하려고. 


크리스토님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것은 결코 입증될 수 없다!   


신교권의 (연대학 선구자였던 16-17세기 네덜란드의) 요셒 유스투스 스칼리제르와 (역시 거의 당대의 연대학자인 영국의 토머스) 리디어트, (독일의 연대학자/음악가/작곡가/천문학자 세투스) 칼비시우스, (프랑스의 고전학자) 이샄/메맄 카소봉, (네덜란드의 칼뱅주의 사역자/수학자/천문학자였던 필리푸스) 란스베르기우스(=필립 반 란스베르게), 독일의 칼뱅주의 신학자/철학자/음악학자/고전학자였던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 등 가장 앞선 연대학자들도, 파르캐우스, 스쿨테투스, 스판헤미우스, 호스피니안, 미국의 퍼킨스, 브로턴 등등의 신학자들도, 그리고 교황주의 최고 학자들조차도 모두 12월 25일 준수를 카톨맄 교회헌법 탓으로 돌린다. 페타뷔우스, 수와레즈, 아조리우스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게도 그 날짜를 감춰두었다. 아마도 (모세의 시신을 감추었듯이) 우상숭배 방지를 위해서일 것이다. 크리스토의 탄생에 우리보다 1400년 더 가까운 가깝게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그 날짜에 대해서는 그저 잃은 것 뿐이다. 3세기를 살았던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는 자신의 당대에 성탄절에 관해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고 증언해준다. 그는 크리스토님의 생일을 결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죄를 규명했다. 


더욱이 크리스토님의 탄신일을 기념하려고 위에서 언급한 이 축제일을 성당이 지키려고 한 미신은 본래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6일이었다. 에짚트의 수많은 교회들이 1월 5일을 지켰고 [초기가 아닌 후기의] 예루살렘의 신자들도 그랬다. 아르메니아인들도 1170년까지 그랬다. 글로싸 오르디나리아를 보면, 라틴/로마계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크리스토의 참 탄신일을 1월 6일로 봤다. 에피파니우스도 그렇게 봤다. 

12월 25일 준수는 로마에서 왔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 그랬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리스 교회도 처음엔 이를 따르지 않았다. (5세기에 활약했던)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설교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10년전엔 12월 25일이 지켜져오지 않았음을 밝혔다. 


교황주의 작가들이 흔히 내세우는 '프로톤 프세우도스'(원초적 실수)는 침례(세례) 요한의 아버지 자카리아(사가랴)가 '대사제'(대제사장)였다며 따라서 [유대력의] 티스리 달 제10일(9월 27일)에 사역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요한이 6월말에 태어났다는 말이 되고 결국 크리스토님의 탄생은 약 6개월 후인 12월 하순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자카리아는 대사제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때 사역했다는 주장도 입증될 수 없는 이슈이다. 


                            이스라엘의 한 가시 관목


심지어는 '예리코(여리고)의 장미' 기적설도 나돌았다. 즉 예리코에 장미꽃 같은 식물이 있었는데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 활짝 피고 그 다음날 졌다는 것. 트리부스 벤야민이나 기타 교황주의자들이 이것을 12월 25일 성탄설에 대한 놀라운 증언이라고 봤다. 그러나 벨로니우스는 그의 '데풀란티스 테라 상타이(성지 식물론)'에서 이 설이 수도원의 사기극이라고 반론을 폈다. 예리코에 흰 꽃을 피우는 가시 관목이 있긴 있는데, 마른 잎새가 습기에 젖으면 팽창하여 활짝 핀 것처럼 보이며, 수사들이 이것을 보다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물을 주어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토님의 탄신일이 그날임을 믿게 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알려주지 않은 탄신일과 탄생 시각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죄악스러운 일로, 12월 25일이 입증될 길이 없다. 또 만약 크리스토께서 한밤중에 태어나신 것이 맞다면 25일이 아닌 24일이어야 한다는 (수와레즈) 등의 설도 있다. 


그분이 9월말이나 10월에 태어나셨다는 유력설[? 매터가 가장 지지하는 설?]도 있고, 파울루스 데 미들부르고의 3월 26일설,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가 인용한) 4월 22일 설이 있으나 모두 근거는 미미하다. 리디어트는 5월 22일 설을 제기하며 프티 박사는 11월초를 주장한다. 스칼리제르, 칼비시우스, 렝프뢰르 등은 (베롤두스, 볼피우스, 호스피니안) 등과 같이 9월말 또는 10월초 설을 제기한다. [뤀 2'8과 잘 조화된다는 게 필자인 매터의 생각이다.] 목자들이 한 겨울에 바깥에서 자기 양떼를 지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대는 여름엔 덥지만 겨울엔 춥다(마태복음서 24'20, 시147'16,17). [역자가 성구를 추가한다: 노래들의노래=아가 2'11, 이르미야=예렘 36'22,23(유대력의 제9월 즉 가을철인 키슬레브 달은 추웠다. 특히 하순과 밤은 그렇다. 30절b. 요한이 '겨울철'이었다고 기록한 수전절=봉헌절(하누카)은 고대 키슬레브 달 25일이었다. 요한복음서 10'22,23), 유대인들은 지금도 서구의 크리스마스 시즌에 하누카를 지킨다! 아모스 3'15. 이상 역자 주] 그러나 (서구력) 9월이나 10월이라면, 바깥 양치기가 가능하다. 

더구나 황제 캐사르 아우구스투스가 하필이면 한 겨울에 온 로마 제국의 모든 신민들을 자기네 고국/고향으로 호적등록을 보낼 리가 없다(루카복음서 2'1). 


더욱이 크리스토님의 성육신을 상징하는 장막절은 유대력 제7월이다. 유월절이 크리스토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만큼 그 분은 그 달에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그렇다면, 장막절이 그 분의 탄생을 상징하니 그 달에 태어나셨다고 생각할 수 없겠는가? 또 같은 달(즉 유대력 제7월)에 여러 다른 축제가 있었으니만큼 바로 그 기간에 크리스토님의 탄생이 만민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만한 달로 걸맞은 것이다[참고: 뤀 2'10]. 같은 달에 또한 슐로모(솔로몬)이 성전으로 법궤를 모셔들였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일부 유대 랍비들은 메시아(=크리스토)가 에타님 달[곧 유대력 제7월, 왕들A=왕상 8'2 포로기 이후의 티슈레이 달과 같은 달. 서구력의 9,10월에 해당]이나 티스리(=티슈레이) 달에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메시아인 크리스토 예수의 탄신제를 12월 25일에 지키는 데 대해 그들은 메시아 잉태의 계절에다 출생을 대신 놓았다고 비웃어왔다. [그래서 더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관점은 퀴릴 알렉산드리누스가 증언한 대로,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침례/세례 요한의 출생을 파르뭍 달 28일 곧 4월 23일에 지켰다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럴 경우 크리스토님의 생신은 9, 10월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 매터는 요세푸스의 증언을 주로 의지한 스칼리게르와 칼비시우스의 논증과 크리스토께서 세계력 3927년에 태어났다는 주장 등을 따르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힌다.] 내가 단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크리스토께서 30세 때 공사역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이다(루카 3'23). 그리고는 3년반 사역을 하셔서 33살 중반기까지 지상생활을 하셨다(그는 다니엘서 9'27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월절 첫 달에 돌아가셨으니만큼) 그 분의 출생은 9월 말이나 10월초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준수자들이 12월 25일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모를 말을 하는 셈이다. 님이 오늘 낳을 아들을 이미 주셨나이다라는 말과도 같이 어불성설이다. 교황주의자들은 다양한 성인축일도 그렇게 정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엿장수 맘대로 식 절기 제정은 야로브암(여로보암)1세 왕도 앞서 저지른 것이다(왕들A 12'33).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 속에서 연례적인 한 성일을 지켜 크리스토님의 생신을 기념하라하신 적이 없다.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작업(work)이 아닌 말씀(Word)이다. [필자의 명언의 하나로 생각된다.] 하나님의 탁월한 일들이 주중에 이뤄졌지만 그렇다고 맨날 안식일로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 크리스토님께서는 그 분의 부활을 영구기념할 한 날로 안식일 후 첫날을 지정하셨는데, 만일 더 성일이 필요하면 더 제정하셨을 터이다. 크리스토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그 분 자신의 명예에 걸맞을 충분한 날들을 제정하시기보다 사람들이 추가로 뭔가더덕더덕 덧붙일까 봐 우려하신 것이다. [칼뱅 사람들도 지원한 바 있는 중세의 충실한 신교적 순교자들인] 왈도파(일명 발덴시스) 신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정해 놓은 것 이외의 어떤 성일의 준수도 감연히 거부했다. 칼뱅, (루터,) 다네오, 부처, 파렐, 비레 [+ 츠빙을리, 녹스] 등 위대한 개혁가들이 모두 주님의 날을 제외한 모든 성일의 철폐를 바랐다. 




순교적 신앙 때문에 천주교 신도들에게 고문과 처형을 당하는 왈도파(발덴시안) 신도들



[영국의] 어느 교황주의자는 청교도들도 개혁가들과 같은 입장임을 불평했다. 그런데 얀 후스나 프라하의 예로님도 같은 입장이었다. 벨짘 교회도 그러했다(1578년). 사도들도  신약시대에 이미 유대 절기 준수 행위를 단죄했다(갈라티아서 4'10, 콜로새서 2'16). 음식을 차별화 하듯 날과 달을 차별화하는 것은 복음 속에서는 이미 끝난 얘기다. 따라서 지금 와서 어떤 음식이 합법적/비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느니만큼 교황이나 어떤 교회(성당)가 특정일을 딴 날보다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로마서14'5,6). 사람이 만들어낸 그 어떤 성일도 모두 제2, 4계명에 어긋난다. 전술한 종교축일은 제도적 숭배행위의 일부이다. 따라서 성일을 만드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일이지 사람들의 손 안에 있지 않다. 


모르데카이(모르드개)와 에스테르(에스더)가 푸림의 날(부림절)을 제정했다며 일부는 반론을 편다. 수백 년 전 교황파가 왈도파에게 써 먹던 논법이었다. 그보다 후대에도 벨라르민, 세르바리우스, 보나르투스 등의 교황파가 신교에 대한 반론에서, 가장 최근[필자의 시대]에는 국교 고위인사가 비국교들에게 되풀이해 써왔던 수법이다. 

이에 대해 신교측 신학자 2명의 답이 있다. 1. 푸림의 날이 종교축일이었음이 입증될 수 없다. 유대 저술가들은 그것이 단순히 시민축전일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현재의 유대인들도 그것을 성일로서 높이지를 않는다. 유일한 정치축일인 셈이다. 2. 만약 푸림의 날을 종교축제로 삼는다면 인도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또한 크리스토님이 성전 낭하를 걸어다니셨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유다 마카비가 제정한) 하누카(봉헌절=수전절)를 승인/준수하신 표시인가(요복 10'22,23)? 꼭 그렇지는 않다. 주님이 하누카를 지키러 예루샬렘에 가셨다거나 지키셨다는 기록은 없다. 사도 파울이 오순절 전에 예루샬렘으로 서둘러 간 것(행 20'16)은 그 절기를 지키러 갔다기보다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하누카가 장로들의 전승(傳承)이었다면, 크리스토님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절기만을 인정하셨을 터이지, 전자를 승인하셨다는 표가 없다. 슐로모(솔로몬)가 성전을 짓고나서 성대한 봉헌식을 거행했지만 그후 연례 '성전봉헌일'을 지키라고 명한 것은 아니다. 포로기후 제2성전이 세워졌을 때(에즈라서 6'16)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구-신약 중간기의 외경에 나타난 바] 유다 마카비가 점령자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더럽혀진 성전을 복구하고 정결케 할 때, 향후 은총을 영구히 기념하려고 연례적으로 8일간(하누카)을 지켜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을 때, 자신의 주제와 사명을 넘어가 버린 것인지 아닌지도 의심해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은 '봉헌절'이라는 낱말 외에 유다 마카비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카비 당시는 계시가 끊긴 시대였다.] 일부 학자들이 분명히 관찰한 대로, 중간기에 유대인들이 다양한 금식일과 축일을 선정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근대 유대인의 하누카 축하



더욱이 유대인들은 제5월에 성전이 불탄 것을 기념하는 금식일을 선포했고 제7월에도 게달리아(그달랴)의 피살과 관련하여 그랬지만(제카리야서=슥 7'5), 다 임시적이었지, 영구히 [매년 반복하여] 지키라고 한 것은 아니다. [제카 7'1~14을 보면, 포로기 70년동안 제5,7월 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예호봐(=여호와)님은 금식이나 절기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것은 훨씬 이전에 주신 말씀들과 일치한다. 예: 예샤야후=사 58장 참조. 사실 모든 절기준수는 구약시대로 끝났다.].

 

   크리스마스 휴일은 맨처음 이교 축제와 아우러져 조작되고 제도화되면서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음을 (16세기말 스위스 취리히의 문화사학자, 요하네스 빌헬무스) 스투키우스가 그의 책, '고대인들의 축제'([De Antiq. Conviv.)에서 완전 입증한 바 있다. 

호스피니안도 'De Origene Festorum'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지적했다: 고대인들이 12월말에 크리스토님의 탄신제를 모두들 지킬 때 크리스토님이 정말 그 달에 태어났다고 상상하면서 그렇게 했는데, 당시 이교도들의 사투르날리아가 바로 이맘때 로마에서 지켜지고 있어서, 그런 이교축제를 기꺼이 기독교 안으로 변형시켜 들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성화될 리가 있는가?]  

그래서 12월은 '멘시스 게니알리스'(관능적인 달)라고 불렸다.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지켜질 동안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그래서 '사투르날리티아'로, 히에로니무스(제롬)는 '사투르날리움 스포르툴래'라고 명명했다. 이와 비슷한 관행이 크리스마스 때 유행했다. [루터는 선물 관행을 신교 성탄절 속으로 받아들였다.] 사투르날리아 축제기간에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방인들은 사투르나(새턴: 별은 토성으로 상징)의 기간을 '황금기'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기간동안 축제를 맘껏 즐기려고 노예 생활을 잠시 쉬고 주인행세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탄절에서도 비슷한 '악정(惡政)의 주인들'이라는 풍속이 일각에서 행해졌다. 바로 이 때문에 신교 학자들뿐 아니라 교황주의 글쟁이들도 크리스마스 휴일이 이교도들의 옛 사투르날리아를 이어받은 것임을 인식했다. 


크리스천들이 그런 풍속을 따라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이 금하고 있다. 예호봐(여호와)님의 백성은 이방의 길을 배우거나 그들의 관습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다(이르미야서=렘 10'2, 레빝서=레 20'23, 에제키엘서=겔 11'12). 이교 축제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미신에 동참하는 한 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책 '우상숭배 적대론'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한때의 신성한 제도였던 유대 절기 준수와 (이젠 더) 무관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교의 사투르날리아와 야누아리아(1월의 야누스 축제)를 받아들여? (그렇다면) 자기네 종교에 더 충실한 이방인들이 우리 것에 충실하지 못한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주일날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축제일을 지켜줌으로써 우리가 이방인이 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텐가?" 

우리는 이 축제의 이교성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군주/왕족들과 (평민/노예들의) 보호자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이교도들의 관례가 있었다. 변질된 크리스천들은 열방들의 관습을 그들의 주님과 통치자이신 크리스토님의 생신일로 만들어 지키기까지 상징화하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대다수 크리스마스 지킴이들이 이 축제를 그런 식으로 따라하는 것은 크리스토님의 이름에 여지없이 욕돌리는 것이다. [실제로 매터가 살던 뉴잉글랜드 등의 역사 속에 그런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세속인들 다수가 성탄 시즌을 그렇게 보내는 게 사실이다.] 이 '휴일'(holidays이라는 영어 낱말은 holy days 곧 성일에서 왔다)이라는 절기를 지키는 이들 가운데 거룩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가! 주연과 여흥/촌극, 카드놀이와 향락, 술주정과 떠들썩한 소동을 벌이는 이것-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드님이신 크리스토님이 그런 서비스를 즐기시겠는가? 



고대 로마의 이교 축제였던 사투르날리아. 술취한 여성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이교도들이 즐기던 것이 사투르날리아였기 때문이다. 사투르나(로마의 농경신. 그리스의 크로누스. 영어의 '새턴')는 게임의 신이기도 했다. 누군가 (Prin. Histriomastix 등에서) 말한 대로, '크리스토 탄신제' 때 역시 그런 불경/망령됨이 자행돼, 거룩한 크리스토님의 이름이 들어간 크리스마스(크리스토 미사)이기보다는 '사투르나마스', '바쿠스마스', 심지어 '사탄마스'로 불릴 만도 하다. 

퍼킨스가 그의 '신조강해'에서 지적했듯, 크리스토 탄신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내기보다 흥청망청 놀기, 주사위 굴리기, 카드게임, 가면극과 무언극 등, 대부분 온갖 방탕의 자유를 누리는 즐기로 지내지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고대 이교도들의 케레스 또는 바쿠스 축제와 닮아있다. 래티머가 그의 설교에서 말했듯, 사람들은 연중 내내 하던 것보다 더 많이, 이 성탄절의 12일 동안 크리스토님을 모독한다. 

이 축제가 이런 허랑방탕으로 아우러진다면, (성탄절 합법화) 탄원자들이 크리스마스 성일에 여흥으로 카드게임을 정당화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음이 놀랍지도 않지 않는가? 그것이 크리스토님을 높이는 길인가? 사도시대에 시작된 애찬은 (그 자체가 정당했지만) 방종한 남용사태 탓에[예: 코린토A서=고전 11'21, 페트로B서=벧후 2'13, 유다서 12절] [때로는] 신자들 가운데서조차 제쳐놓은 대상이었다. 

온 세상에 방탕의 홍수를 몰고 온 크리스마스 축일 준수를 삼가야 할 이유는 더 많이 있다. 이에 연계된 추문은 그것의 폐지를 외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케빈 리드의 견해임]


신대륙으로 건너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를 배척하고 1659-1681년 사이에 법으로 금지했으나 영국 식민지 총독 에드먼드 앤드로스가 다시 복구했다. 그러나 보스턴 지역에서 성탄절이 본색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중반에 와서였다. 

추리에 주렁주렁 선물을 매다는 등 성탄절을 호화롭게 발전시킨 빜토리아 시대 전까지 미국에서는 성탄절이 단지 구교도들, 성공회인들, 루터교도들에 의해 지켜졌다. 성탄절 선물 교환 관습은 루터가 12월 6일의 니콜라스의 날에 맞서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력설이 있다. 개혁가들중 음악 등에 대한 예술감각이 두드러졌던 루터는 눈밭 속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추리도 사랑했다. 



미국 장로교회 


[스코틀런드 장로교회의 표준을 그대로 따랐던 미국 장로교회는 초기에 명백히 크리스마스/부활절을 비롯한 천주교 성일들을 거부했다!]


예배지침을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1700년대에 미국에서 사용됐다. 예배지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본질적으로 부합하도록" 되어 있고 (필라델피아 대회 1729년), "경배와 훈련의 일반 계획"으로 승인되었다. (뉴욕, 1745년). 1758년 두 대회가 재연합한 뒤 이들은 여전히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고수했다. 


18세기 후반 새 예배지침이 마련되어 1788년 승인 채택됐는데 이 지침서에는 '금식일과 (추수)감사절의 준수'라는 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 장은 "복음 아래서는 기독교적 안식일인 주님의 날 외에 거룩한 날로 지키도록 복음서가 명한 바 없다."고 이전 진술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   



새뮤얼 밀러 


장로교 총회장(1806년)이었던 그는 훗날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교회사/교회행정학)로 발탁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의 '장로교 예배'라는 장에서 기독교권 안의 딴 그룹과 구별되는 장로교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주일 외의 각종] 성일들, 세례 때의 대부모, 견신례, 성만찬 때 무릎꿇기 등 국교회(성공회)와 교황권의 관행들을 거부했다. 


밀러는 왜 장로교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거부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하면서 먼저 예배의 정규적인 원리를 주목한다. 그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오한 규율로 삼으면서, "공적인 하나님 경배에서는 어떤 의식(rite)과 축하의례(ceremony)도, 계율과 본보기로도, 그 어떤 선하고 충분한 추론으로도 있을 수 없다." 그는 비성경적인 성일을 축하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결핍되어 있다며, 성경은 "그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고 썼다(콜로새 2'16, 갈라티아서 4'9~11).


밀러는 더 나아가 로마 카톨맄교에서 전래된 이교적 성일들의 기원을 지적하면서, "더더구나 그것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성이나 그것들의 교화성(敎化性)을 둘 다 배격한다"고 밝혔다. 또한 "성경이 명하지 않은 성일들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날에 마땅히 돌려져야 할 신성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미 밝혀진 바이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에다 더하는 것은 미신이다. 미신은 순수한 복종에 적대되는 것으로 늘 밝혀져 왔다"고 단언했다. 결론에서 밀러는 "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성일을 지킴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성일의 신성에 늘 적대적인 영향을 가하는 것으로 발견된다."고 자신의 논점을 재강조했다. 


이러한 새뮤얼 밀러의 입장은 19세기의 주류 미국 장로교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장로교와 얼마나 달랐는가?!] 그의 이러한 논의는 성경적 원리에 바탕을 두었고, 그 원리를 경배지침에 자연스럽게 응용하는 데서 우러나고 있다. 장로교에 관한 그의 책은 당시 총회의 출판부에 의해 발행되었고 여러 번 재발행됐다. 



스코틀런드에서 계속된 증거


스코틀런드의 (천주교/성공회) 성일에 대한 반대입장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제임즈 배너맨은 그의 책 '크리스토님의 교회(CoC)'에서 이 '성일'들을 다루면서, 성경적인 증거를 인용하고 예배지침 부록(ADW)에 관해 언급했다.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의 어조는 강력했다:


   "안식일(즉 주일)에 바치는 다른 예배가 없었고, 입술은 침묵을 지키고, 혀는 인공적인 찬양을 발표하지 않더라도, 매주 첫 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 하나만도 권위에 대한 신앙적 경의의 행동이고, 크리스토님 그 분에 대한 엄숙한 숭경의 행위일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교회의 평상 예배의 부분으로서 크리스토님께 대한 숭경 행위이다. 마치 크리스토님을 기리는 찬송가가 그 분에 대한 숭경의 표현이듯. 그런데 같은 원리를 성당이 만든 '성일'의 준수에 적용하여 평상적이고 지정된 신적 경배로서 준수한다면, 이는 그것을 만든 당사자인 사람에 대한 종교적 경의요, 인간이나 교회의 권위를 예배행위로써 인지하는 불법처사이다. 사람의 권위를 가진 한 날을 종교적으로 지킴으로써 우리는 그 권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요, 절하는 것이며, 그것을 제정하신 적이 없는 크리스토님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제정한 교회에 대한 경배의 일환으로서의 성일 준수를 하는 셈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 앞에서 거룩한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


이처럼 우리는 장로교가 크리스마스를 꾸준히 역사적으로, 확고한 성경적 고찰의 근거 위에서 반대해 왔음을 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와 유사하게 부패한 경배행위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입장을 견지한 사람들은 비단 장로교인들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침례교 설교가인 찰즈 해던 스펄전은 1871년 12월 24일[!] 설교를 이런 말로 열었다. 


   "우리는 때와 계절에 대하여 아무런 미신적인 존중심도 갖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소위 크리스마스라는 현재의 교회적 제도를 믿지 않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미사(mass)를 전혀 믿지 않고 되레 혐오하기 때문이요, 미사를 라틴어나 영어로 읽든 읊든 (우리랑은) 무관하며, 둘째로, 구주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모일(某日)을 지키라는 그 어떤 성경적 뒷받침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지킴은 하나님의 권위에 속하지 않은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된 항거와 거절


천주교/성공회의 성일에 대한 반대는 19세기 후반 내내 미국 장로교에 잔존했다. 남북전쟁 후의 남부 상황에 관하여 한 역사가는 이렇게 썼다. 


"아무러나 성공회와 루터회를 제외한 어떤 교회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북전쟁 이후 온 세대동안 남부의 신앙저널들은 크리스마스를 단지 예수님이 실제로 12월 25일에 태어났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만 언급하고 그쳤다. 또 장로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어떤 종교적 의미성을 가진 날로도 인정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미국 장로교회의 완강한 입장을 살펴 보자!]


'혹 정확한 날짜가 알려졌더라도, 또는 (12월 25일 같은) 모일이 그 어떤 특정한 지식도 없이 혹 공동합의됐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성일로 지키는 것을 반대한다. 반대할 만한 숱한 이유가 있어도 지금 한 가지만 언급하면, 경험상, 인간 권위에 의한 성일 제도는 아무리 의도가 순수한들 언제나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성일 곧 안식일을 등한히 여기게끔 이끌어왔다.'


[보았는가? 19세기 후반 미국 장로교회 사람들이 지켜본 경험으로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주일날을 등한히 여기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장로교회는 얼마나 정반대인가! 카톨맄 교회력을 덩달아 꼬박꼬박 지켜주면서 대림절/성탄절로 모든 것을 시작하고 또 연말의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해 가지 않는가. 참으로 금석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랬던 것이..그 다음 10년간(곧 1880년대)은 동일한 그 저널이 주변현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슬퍼하고 있다: 

"(천주교/성공회 축일이 신교 안으로 들어오는) 성향이 심지어 이젠 우리 교단에서조차도 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일반화되진 않았고 과도히 진전되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며,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준수 사례가 주변에 점증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경종이라도 충분히 필요하다."

이런 성향을 뒤집기라도 할 양, 1899년 미국 남장로회(PCUS)는 전술한 대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종교적 제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공적이고 노골적인 반대를 천명했다. 


그러나 조석지변이랬던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장로교회 안에서 다양한 크리스마스 관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주일학교의 경박한 성 니콜라스[즉 '싼타']가 등장하고, 교회 내 크리스마스 추리가 세워지고, 기타 축제적 요소가 출몰했다. 이러한 성탄절 준수 관행은 주로 교회의 저변 곧 회중의 센티멘털리에서 비롯된 듯 했고, 급기야 설교와 기타 분야로도 반영되는 등 폭넓은 수용으로 치달았다. 물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몰턴 스밑은 이스터(부활절)와 크리스마스가 사실 1940년대와 1950년대 말기까지는 남 장로교회 교회의 공식 달력에 나타나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그런 의전력(儀典歷)의 수용은 교회 안에 늘고 있는 배도(背道)의 표로 받아들여졌다고 스밑은 인용했다. 그러나 신학적 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태도의 변화가 왔다. 자유주의는 예배의 성경적 토대를 경시한 나머지, 진보파는 성일[의 유혹과 위험성]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이 이미 예배 문제에 대한 성경의 권위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비성경적인 종교준수를 비도전적인 매너로 쉽게 받아들여 실천하기가 일쑤인 허점을 쉽게 보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자유진보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자 일반 변증학이 예배의 방도에 대한 특정 해석보다는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복음주의권은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하여 교단의 장벽을 넘어서는 경향을 갖게 되며, 이 성향이 예배에 관한 중요한 교단적 차이점을 흐리게 만든다. 



 


글라스고의 스코틀런드 자유장로교회



진보파와 관계 단절을 한 뒤부터, 대다수의 보수계 장로교인들은 예배에 관한 결실 있는 토론에 대한 관심을 아까워 하게 됐다. 그러니 혼동은 당연한 귀결이다. 크리스마스 준수는 훨씬 더 큰 문제이 일부일 뿐이다. 

진보주의 눈사태와 복음주의권의 에큐메니즘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엽에도 크리스마스는 장로교회의 도전으로부터 완전 자유롭지는 못했다. 1962년 스코틀런드 자유 장로교회 대회(Synod)는 "스코틀런드 자유장로교회와 여타 장로교회의 차이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중 한 가지 상이점은 진보적인 스코틀런드교회가 관용해온 성일 준수에 관한 것이었다. 


자유장로교회는 스코틀런드 교회에 이젠 널리 일반화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준수라는 현대적 관행을 거부한다. 이러한 성일준수는 스코틀런드 교회가 (천주교/성공회의) 주교제와 더 가까운 관계로 향해 가고 있다는 징후로 간주된다. 스코틀런드 개혁시대에는 불필요할 뿐더러 비성경적인 이 모든 축일들이 교회로부터 내던져졌다. 



어디로?


전술한 바에 따르면, 몇 가지 결론들이 난다. 이 결론들은 성경적인 경배관(예배관)을 지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완전한 배척을 한결같이 지지한다. 성경구절들은 교훈과 본보기에 의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형태의 경배의 사용도 금하고 있다. 크리스마스는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더 물어 볼 딴 이유가 없어도 배척되어야 한다. 이 결론을 의심하는 독자는 하나님 경배에다 사람의 발명에 의한 추가를 하는 것이 불법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성구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신명기 4'2; 12'29~32; 레빝서(레) 10'1~2; 슈무엘A서(삼상) 13'9~13, 콜로새서 2'16}.


크리스마스는 이교 정신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게 했다. 이런 종류의 혼합물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공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금지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가운데서 그런 부패를 제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전과 우상이 일치합니까?..'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떨어져 있어라. 예호봐(여호와/야웨)의 말씀이다. 또한 부정한 것을 건드리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 " (코린토B서=고후 6'16,17 역자사역)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로마 천주교의 미신적 기념비이다. 이 전제를 무시하는 사람은 크리스마스 이브 때 교황의 미사를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등으로] 지켜 보라. 교황이 제대 주위를 뽐내듯 걸어다니며 '처방된' 말을 읊조리며, 빵과 포도주 등을 쳐들어 올려 알랑거리는 군중에게 상찬을 받는다. 이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교황제에 대한 현대의 밋밋한 자세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적 크리스토의 세대주의적 모델을 찾는 대신, 신교인들은 교황의 위험성에 다시 일깨어야 한다. 그는 "곧 적크리스토, 죄[또는 불법]의 사람, 멸망의 자식,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높여 크리스토님과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거스르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6. 참고: 테살로니카B서 2'3,4. 역자 주: 물론 테살B 2'3~10의 범주에 일부 해당하기는 하나, 성경이 말하는 대상은 보다 더 고유한 존재이다. 특정 교황도 아닌 전체 역대 교황들을 다 가리키는 듯 주장하면, 좀 막연하다.] 그 자이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우호적인 말을 포함하여, 교황적 미신의 모든 나머지도 교회에서 제해져야 한다. 크리스마스라는 말 자체가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의거하여) 교황제에 신뢰성을 더해주는 셈이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패한 경배 용어로부터 제해 버리시길 요구하신다(참고: 신 12'3, 미쯔라임출국=출 23'13).   



크리스마스 준수는 주님의 날의 신성을 절감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축전과 축하를 갈망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사실 하나님은 주님의 날 (및 성찬)을 제정하셔서 사람들의 이 중요한 갈망을 해소할 길을 여셨다. 사람들이 축일의 축제성에 그토록 매혹되는 이유 한 가지는 주님의 날이 흔히 그 날에 삼가야 할 활동들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날이 큰 기쁨으로 제대로 즐겨진다면, 다른 명절을 향한 열망이 많이 가셔진다. 


우리는 크리스토님의 부활의 날에 구속(救贖/redemption)의 위대한 진리를 크게 즐거워 함이 마땅하다. "이 날은 예호봐(여호와)님이 정해 주신 날; 다들 기뻐하고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일날과 '성일들'이 한데 얽혀 논란이 됨은 단순히 역사 속의 우연이 아니다. 하나가 두드러지면 다른 것들은 퇴색된다. 주님의 날이 경배에서 공정한 제 자리를 되찾게 되길!


크리스마스 제도는 그릇된 교회권력관의 면모를 지닌다. 하나님은 주님의 날을 정규적인 예배와 다 함께 그 분을 기념하는 날로 따로 구별하여 지정해 주셨다. 사람에겐 그밖에 딴 날을 '성화'하여 준수하게 할 권한/권위 따위가 없다. [지정하신 향불 외에 딴 향불은 불가하며 저주의 대상이다! 레 10'1,2; 16'12, 민 16'46] 따라서 크리스마스 준수자들은 성당/교회에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자체부여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새로운 예배법령을 제정할 교회의 권리를 시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크리스마스는 거짓된 신성요소(sacraments)를 구성한다. 구약의 축제의식과 축일들은 모두 크리스토님의 상징으로서 고안된 것이다. 그것들은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인시켜 주는 눈에 보이는 표상이었다. 이제 크리스토님은 이미 오셨으니, 구약 축전들은 준수할 성질이 아니다. 그 대신 크리스토님은 교회에 침례(세례)와 성만찬을 지킬 요소의 일부로 주셨다. 이 요소들은 우리의 구속의 영적인 실재를 확인하는 보이는 말씀 구실을 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비슷한 개념으로 성육신의 가시적인 기념물과 표상으로서 지키고 축하하는 것은 곧 전술한 주된 요소들의 역할을 강탈해가는 행위이다. 


크리스마스는 또 그릇된 정보와 부속물 남용의 소스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는 이 영역을 거의 미답(未踏)상태로 남겨놓았다. 매년 크리스마스는 성육의 실제 사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의 케이스가 된다. 인기를 끌려는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뒤틀어 제시한다. 예컨대 [탄생 당시엔 아직 오지도 않은.. 참고: 마태 2'16b] 동방 현인들을 으레 구유 앞에 모셔서게 하는 것이 그것. 크리스토님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함부로 다루어 성경 기록의 정확성을 마구 구겨 버린다. 


더욱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수많은 구유 장면들(scenes)과 종교적 이미지들이 공공 장소와 교회 건물, 가정 등에 세워진다. 이런 "새긴 상들"의 대량생산은 제2계명에 대한 뻔뻔한 위배이다. 성경에서는 '구유 안의 크리스토님의 그림'을 비롯한 그 어떤 이미지라도 제작이 금지되어 있다. [신약시대 초기교회 때도 그런 것을 만든 흔적이 없다.] 


날조된 '아기 예수'상에 키스하는 교황



크리스마스의 부수적인 남용은 너무도 흔하고 많이 알려져서 간단히 언급만 하련다. 미디어에서는 이 시즌이 터무니 없는 상업주의로 특징화되어 있다. 특히 어린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집단탐욕을 유발하며, 해마다 수많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보듯 총체적인 집단 방탕을 낳는다. 



신교인들에게 주는 결론


신교인들 특히 장로교인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를 남긴다. 개혁가들은 성경적인 뒷받침이 있다고 보장된 경배제도만을 시인하도록 허용해 놓은 영적인 경배법칙으로 돌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지지하는 입장은 이 개혁의 레거시(유산)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토록 어렵사리 쟁취한 정통 기독교의 초점으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한다. 


개혁 장로교 경배원리의 일관된 적용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거부를 요구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의 답 109는 "하나님이 몸소 제정하신 것 이외에 어떤 신중한 지지의, 어떤 종교예배도" 금하고 있다.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이슈가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므로, 교회의 공적 관행으로 승인되거나 관용되어선 안 된다. 

사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회중을 통해 크리스마를 격려하거나 용인한다면 자신의 안수 때의 서원에 충실한 게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각 가정을 부패한 경배관례로부터 지킬 의무가 모든 가정의 가장들에게 있다. 우리는 주님께 다음 교훈을 받은 아브라함의 보보기를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명하여 예호봐(여호와)님의 길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원리원칙에는"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 있긴 하지만, 신앙을 행동에 실제 적용하는 데는 속을 드러내지 않고 구차한 변명을 하며 넘어가려고들 한다. 그런 이들에게 길레스피의 말은 적절한 권고가 된다:


"여러분의 숨은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 어떤 축제의식들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떤 폐습들을 참아 줄 정도로 [오래] 음미하지 마시오. 공언과 행동-모두를 통해 그것을 입증하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표출하시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 엘리야처럼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더 오래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터입니까?'[왕들A=왕상 18'21] 모쉐처럼 물어야 할 압박감도 느낍니다: '예호봐님의 편은 누구입니까? 누구?'[미쯔라임출국 32'26. 옛 영어성경의 번역문구] '속지 마시오: 하나님은 기롱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갈라티아서 6'7]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오.'[마태6'2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