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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영화 노아, 볼 만한가?

환경보존을 위해 여차하면 사람을 죽이려고 창을 꼬나 쥔 애러노프스키의 '노아' 




영화 노아, 볼 만한가? 



필자는 '노아'를 여태 보지 않았다. 볼 시간 여유도 별로 없지만, 예고편 동영상과 이미 본 사람들의 비평을 본 뒤 보고픈 맘도 거의 전혀 없다(비평적 관람이 가능하겠으나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한 정보제공 차원에서 이런저런 관련 내용들을 간추려 여기 싣는다.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찬반 견해 표명을 환영한다.  



"2014년에 가장 기대됐던 영화" 하나가 크리스천들에게 큰 실망을 준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실망을 안겨 주기 쉬운 곳이다. '노아'를 보는 신자들의 관점은 물론 두 가지..긍정/부정으로 나뉜다. 그러나 긍정 쪽은 너무 억지스럽다. 마치 "오랜만의 성경 주제 영화니까 반갑다"는 식이다. 특히 전혀 경계 의식이나 검증 의식 없이 적극 관람을 장려/추천한 미 교계 명사들의 움직임은 정말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올바른 태도라 하기 어렵다. 


영화 '노아'의 트레일러만 본 사람들은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는 방주나, 과거 세실 B. 드밀의 영화 '십계'에서 (나이애거러 폭포 모습을 거꾸로 뒤집어 편집한) '홍해'를 묘사했듯 스펰터클한 "홍수" 장면 등을 보고 성경적인 작품인 줄로 "속기"가 쉽다. 뭔가 찜찜하고 수상쩍으면서도 말이다. 


'노아'는 비록 성경 관련 내용들이 들어있긴 하지만, 성경적인 영화는 아니다. 또 애당초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고 더 증진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채식을 위한) 채식과 환경보존 등 근래 유행해 온 뉴에이지 어젠다 쪽이 더 강하다. 감독인 대런 애러노프스키 자신이 지금껏 나온 (모든) "성경적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덜 성경적"인 영화라고 자평한 바 있다. 그럼 도대체 왜 만든 것인가? 목적이 뭐란 말인가? 그런 영화를 우리가 왜 블렄버스터를 만들어 가며 봐 줘야 하나?


"굉장한" 영화를 만든 감독마다 그렇듯, 애러노프스키도 이 영화를 통한 나름의 어젠다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신화적 무신론, 뉴에이지 사상, 오컬트인 유대 마법적 신비주의의 부각, 그리고 성경 진리에 대한 정면도전 또는 노골적인 무시이다. 

여하튼 간에 애러노프스키는 까놓고 무신론자로 자임해온 인사이다. 무신론자가 거룩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넌센스일 것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무신론자다(..I'm Godless)."라고 공표한 바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는 지구/땅의 신화 속 가야(Gaia) 신을 믿고 있다. 가야는 환경을 극히 중시하는 뉴에이저들이 숭배하는 '신'이다. 그렇게 보면 애러노프스키나 '노아'의 종교적 배경은 무신론적 범신론, 만유내재신론적이고 신화적 신념에 더 가깝다. 그것이 트레일러에서 잘 나타나지 않은 그의 '의표'라면 의표이다. 


영화 속에서 노아를 비롯한 출연자들은 전혀 '하나님'(God) 또는 '주님' 곧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이라는 명칭을 입에 올리지 않고, 의도적으로 계속 '창조주'라고만 말한다. 이것은 애러노프스키가 혈통만 유대계라는 점과 통한다. 노아에서 막연하게 표현되는 창조주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보다 환경만을 중시하는 신이다. 또한 인간의 죄와 타락은 무시되고, 오로지 지구촌 환경을 더럽히고 파괴한 데 대한 심판만 단행한다. 

영화 '노아'에서 진정한 '심판자'는 신이 아닌 노아 자신인 셈이다. 그는 환경을 더럽혀온 인간들을 적대하며, 아들 쉠의 아내가 아기를 갖자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을 경우 죽이겠다고 대어든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미혹하여 지구촌에 죄와 타락을 가져온 주 요인인 마귀의 범죄를 무시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러노프스키는 또 성경이 엄연히 밝혀주는 노아의 경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성경 속의 노아 


여기서 (영화와는 극적으로 대비되고 상반되는) 성경의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자. 영화 '노아'를 굳이 보겠다는 신자는 관람 전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성경 속의 노아를 꼭(!)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성경 속의 노아는.. 

- 아담의 경건한 아들로서 숨진 아벨 대신 하나님이 주신 아들 셑(창 4'25~26)과 그 뒤를 이은 경건한 계보에 속한 에노스..에놐..메투셀라(므두셀라)..라멬 등의 후손이었다. 


- 그는 죄로 타락한 당대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었다(구약성경 창세기 6'8). 


-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당대의 유일하고 완전한 의인이었다. 


- 하나님이 그 분의 의와 거룩 때문에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통탄하시다 못해 물로 심판하시되, 인류구원과 생명의 대물림을 위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고 노아 식구와 선별하신 동물들을 불러 들이셨다. 


- 노아는 또 사악한 당대의 죄악상과 다가올 심판을 경고한 대언자(선지자/예언자)였다. 자신과 가족만 살려고 발버둥질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설계를 따라 지은 방주가 홍수 위에 뜨기까지,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중재적인 도움기도와 방주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다(에제키엘=에스겔서 14'14~20, 비교: 페트로B=벧후서 2'5). 따라서 영화 '노아'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처단하고 쌍둥이 손녀를 죽이려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노아가 의와 복음의 전파자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다 들리워 올려진) 오랜 선조 에놐이 이미 당대의 죄에 대한 타락과 먼 미래에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경고한 전도자였다는 점으로도 간접 입증된다(창 5'21~24, 비교: 유다서 1'14). 노아는 직계 선조인 친증조부, 에놐의 경건과 의(義), 전도적 삶을 몰랐을 리가 없다(참고: 창 5'3~32)! 더구나 당대는 수 백 년씩 장수했기 때문에 경건한 선조가 후손들과 공존하면서 그들을 지도교육 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길었다.  


- 그는 홍수로 멸절될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기 가족을 구원했고,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였다(히브리서 11'7).


- 하나님은 직접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 그는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에 따라(창 6'18),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고 그대로 이행한(6'22; 7'5) 신앙인이었고, 따라서 거룩한 성도였다. 


-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약 100년간 방주를 지어 후대를 이을 자기 가족과 모든 동물의 씨를 보존한 사람이다. '환경지킴이'로서 환경파괴자를 심판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명에 의하여 홍수 멸망으로부터 보호 받아 대를 이어 가게 한 도우미였다. 바로 하나님과 노아와 그 아들들(쉠/함/야펱) 덕분에 오늘의 인류와 동물들이 존재하고 있다(창 9'18,19)! 

만약 영화 '노아'에서처럼 창조주님이 당대의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노아를 통해 단순히 '환경보존'을 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홍수심판을 하지 않고 지구촌을 죄와 타락상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신 채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지 않게만 신경썼을 것이다. 따라서 구태여 노아를 시켜 방주를 건조케 하실 필요가 없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애러노프스키는 가리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무신론자에다 유물론자인 탓에 죄와 타락이 환경파괴보다 심각해 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마귀와 죄, 타락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중대성을 무시/약화하고 있다. 


-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영구한 언약의 증거와 표상으로서 무지개를 주셨다. 세상은 무지개를 뉴에이지/동성애 따위의 표상으로 삼지만, 우리에겐 불의 심판 때까지 대홍수 심판이 없을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다(창 9'8~17).


- 예수님은 미래의 불 심판과 관련, 이와 대조되는 옛 물 심판 때 노아의 실존과 그의 의미성을 시인하셨다(마태복음서 24'38,39, 루카복음=눅 17'26,27). 


- 노아의 이름은 예언적이다. 그의 아버지 라멬은 아들을 낳자,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이 저주하신 땅에서 수고하며 고되게 일해 온 우리를 이 아기가 위로해 주리"라고 예언하면서 '노아'(=위로)라고 불렀다(창 5'29, 성구 사역). 라멬은 595년간 노아와 함께 지냈으므로 아들 노아의 나이 약 500세에 짓기 시작한 방주가 거의 완공돼 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을 것이며 (노아 나이 600세에 일어난) 대홍수를 보지 않고, 바로 그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애러노프스키는 여러 모로 다양하고 간교하게 성경을 뒤틀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


- 영화 속에서 타락한 천사들이 불꽃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와 괴물의 모습으로 지구인들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하지만, 성경엔 그런 기록이 없다. 애러노프스키는 싸탄과 그의 종자들을 최대한 선한 존재로 묘사하려고 했다(참고: 창 6'2). 


환경보존주의자인 노아는 환경파괴자들과의 전쟁에 개입돼 군대를 이끄는 일종의 장군으로, 네 팔 달린 거인족 즉 '네필림' 괴물들의 참전지원을 받는다. 이것은 애러노프스키의 신화적, 공상과학물적 상상의 소산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또는 이후의 신화적 공상물들이 꾸준했던 영향이 아닐까. 

성경에 따르면 그런 전쟁도 없었거니와 고대의 거인족 용사였던 네필림은 천사와 사람 사이의 하이브리드 같은 후예들이지, 신화적 존재가 아니다. 또 노아가 네필림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것은 마귀가 의인을 "돕는" 셈이 된다. 의인이 마귀의 도움을 받을 이유가 뭔가?

결국 감독과 출연진이 모두 영적인 진리에 무지한 나머지 가치관의 전도(傳道)가 아닌 전도(顚倒)에 몰입한 셈이 된다.     


- 영화 속에서 방주는 환경보존의 도구 구실을 하지만, 성경 속의 방주는 심판으로부터 생명이 구원 받아 남은 씨를 대물림하기 위한 도구였다. '서바이블'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언약/보호를 통한 구원이었다. 


- 영화 속에서 (셑의 후손인) 노아와 (카인의 후손인) 두발카인 세력이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경은 카인 후예의 족보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기에, 두발카인이 노아 당대인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또 카인은 아벨을 죽인 뒤 떠돌다가 에덴의 동쪽 노드(놋) 땅에 살았기에, 그 후손들도 동떨어진 지역에 오래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참고: 창 4'16 이하).   


- 영화 속 노아는 인명보다 동물의 생명을 더 아끼는 전형적인 뉴에이저이다. 그는 동물 사냥을 하던 남들을 3명이나 죽인 살인자이다. 이를테면 애러노프스키의 노아는 시종일관 환경보존을 위해 살인을 궁리하는 존재로 부각돼 있다. 지구촌 인구를 고의적으로 줄이려는 비밀집단의 어젠다와 서로 통한다. 

 

- 영화 속의 노아는 치열한 고심과 갈등과 투쟁 속에서 환경보존을 위해 절치부심 전력투구하는 모습이지만, 성경 속의 노아는 당대의 죄와 폭력 등 타락상에 가슴 아파하며 방주에 들기까지 주변에 복음을 전하던 의의 대언자/전도자였다. 


- 영화 속의 (노아의 조부) 메투셀라는 현인이면서도 마치 '반지의 제왕' 속의 (회색/백색 마법사) 간달프 같은 마법사/박수/영매 류의 인상을 주며 그런 구실을 한다. 그러나 성경 속의 메투셀라는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한) 경건한 의인 에놐의 아들로서, 역시 경건한 아들인 라멬을 낳고도 지상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었다(창 5'21~27). 영화 속 '노아'는 한적한 데 은둔해 있던 메투셀라를 만나지만, 성경 속의 메투셀라는 적어도 600년간 늘 손자 노아를 보고 지냈을 것이다(창 5'26~28 참조). 즉 메투셀라는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는 광경을 최소 100년간 사랑스레 지켜봤을 것이다. 


- 영화에서는 노아와 아내, 아들만 주역이고 며느리라곤 유일한 쉠의 자부가 낳는 쌍둥이와 함께 8식구(플러스 두발카인)가 되어 간다. 영화 속 노아는 방주 속의 식구들이 (환경을 망치는 후손을 낳지 않고) 결국 모두 불임이기를 바라는 형국이다. 

반면 하나님은 물 심판 후 방주 속 노아의 식구들과 동물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지구촌이 중다하고 번성하기를 바라셨다. 성경에서는 노아 부부, 아들 쉠/함/야펱 형제의 부부 세 쌍 등 여덟 식구가 처음부터 방주에 함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노아의 자부들은 타락한 자기 본가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시아버지 노아를 따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노아와 아들들의 경건을 보고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을 확신했음이 틀림없다! 또 그런 믿음의 자부들을 노아가 각별히 사랑했음이 거의 틀림없다. 

그러나 영화 속의 자부는 우여곡절 끝에 승선한 것으로 나오고, 특히 함의 아내감인 소녀는 노아의 냉대로 버림과 죽임을 당하는데 순전히 제작감독의 공상과 조작이다. 


영화에서는 쉠의 아내('일라')가 방주 속에서 쌍둥이 자녀를 임신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성경에는 노아의 아들들이 홍수 후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자녀를 얻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창 9'1,7,18,19,22; 10'1~32). 쉠의 경우 홍수 후 2년만인 나이 100세 때, 첫 아들 아르팤샅을 낳았다(11'10). 


이런 사실들은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얼마나 성경을 무시하고 간과했는지를 명증해 준다. 더 얘기해 본다. 



- 영화에서는 노아가 각성제 같은 약물에 취해 꿈 속에서 방주 건립의 비전을 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타락상을 보시고 직설적으로 의인 노아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다(창 6'13). 방주 구조의 설계도 직접 말씀으로 전달하셨다.    


- 영화 속에서는 노아가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지만, 성경 속의 노아는 홍수 후 필요했던 농사를 통해 자신이 경작하여 거둔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마셨다가 어쩌다 만취됐을 뿐이다(9'20).  



이 작품을 보면, 애러노프스키는 또, 여러 모로 신화와 카빨라(유대 비술/마법) 등 오컬트와 뉴에이지에 개입돼 있음이 거의 틀림없다. 


감독은 으레 스토리보다 자기 자신의 의지와 연계하여 작품을 만드는 예가 다반사이다. '크리스토의 수난'의 감독 멜 깁슨이 직접 자기 손으로 십자가에 대못을 박는 '카메오 출연'을 한 것처럼. 

애러노프스키는 이전에 노아에 관한 서사시를 써서 수상한 적이 있어서, 계속 나름대로 해석한 노아 주제의 영화 제작을 하려는 꿈에 집착해 왔다. 영화 속 노아가 방주 꿈을 꾼 내력처럼 그도 혹 약물을 통해 서사시를 썼거나 작품구상을 해 왔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성경을 고의로 뒤튼 잘못된 작품은 그가 만들다 보니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배태돼 온 것이다.  


- 영화 속에서, 대대로 보물처럼 간직돼 온 에덴의 뱀 허물(껍질)을 노아가 홍수 후 부적처럼 자기 팔에 감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에 전혀 없는 사실인 데다 하나님과 노아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입히신 옷은 (양 같은 짐승의) 털가죽옷이지 뱀껍질이 아니었다. 


왜 애러노프스키는 이런 괴상한 아이디어를 발휘한 것일까? 아마 ('크리스토의 수난'에서) 멜 깁슨이 엉뚱하게도 겥세마네에 뱀을 등장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특히 애러노프스키는 방주에 수많은 뱀떼를 투입하는데, 성경은 방주 속의 뱀이 단지 암수 두 마리뿐이었다고 밝혀준다(창 7'2,15). 뱀은 싸탄의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예수님은 당대의 유대인 위선자들을 '뱀새끼들'로 비유하신 바 있다). 애러노프스키는 방주와 환경보존을 통해 뱀이 크게 번성하기를 바라듯, 세상에서 악이 크게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영화 속에서 암시를 던졌는지도 모른다. 또 창세기 인간창조를 패러디한 고대 신화에서 에덴의 뱀은 '릴맅'이라는 여성/중성 악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언론 하아레츠가 지적한 대로, 애러노프스키의 '노아'가 성경의 노아와 매우 다른 이유의 일부는 그가 성경 아닌 유대 외경인 에놐서, 미드라쉬, 기타 신비주의 문서를 참조했기 때문이다. 가령 나무가 금새 자라나 방주를 지을 목재가 된다는 우화 같은 이야기는 에놐서에서 원용한 것이다. 

[ 성경보다 외적인 자료를 더 활용한 애러노프스키의 이런 성향 역시 '크리스토의 수난'에서 성경 아닌 수녀 카타리네 에머리히의 환상 수기를 참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아'는 또 진화론을 접목시켰다. 따라서 '노아'에서는 진화론의 전제 아래 창조주를 말한 셈이다. 카톨맄교가 그렇듯, 유대교도 창조-진화의 타협에 익숙해져 있다.  


영화 '노아'에서 홍수 전 세계의 상태는 셑의 후예와 카인의 후예라는 선/악의 단순 이원론적 구조이다. 선의 화신과도 같은 셑의 후손들은 살생과 육식을 삼가는 농경사회이고, 카인의 후예들은 육식과 살인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삶의 근거인 땅을 배반하고 산업사회를 이루고 산다. 이것은 환경보호주의/진보주의적 해석이다. 

반면 성경에 따르면, 비록 셑의 후예 가운데 두드러지게 경건한 사람들과 의인들이 있기는 했으나 셑의 후예 가운데도 카인의 후예처럼 악인들이 많았기에,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멸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영화 속에서, 노아는 파리조차 함부로 죽이지 않는 후덕한 환경보존자에서 냉혹한 사이코처럼 변해 간다. 이 영화의 절정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 내지 못하여, 실패했다는 자괴감과 깊은 우울에 잠긴다. 그래서 술과 치욕으로 세월을 보내며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자신을 챙기면서 사람이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변환될 수 있다고 "깨닫는" 순간 해가 떠오르고 무지개가 뜬다. 


이런 애러노프스키판 뉴에이지적 '회복'은 물론 성경에 전혀 없으며,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니 무신론자가 성경을 빌린 영화를 만든다는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영화 속에서는 또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은 동물들을 구하는 것이며 인류는 완멸돼야 한다고 판단한다. 노아의 가족도 임시로만 생존해 있는 것이다. 노아는 자부 '일라'에게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택과 옾션의 세계를 주셨다고 배우게 된다. 이것은 아르메니우스적 자유의지의 극단적 형태와도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애러노프스키의 문제는 다대하다. 그는 이왕에 영화 제작 동료들에게 영화 '노아'가 소위 "그림자 정부"의 인구절감 어젠다에 연계된 채, 유대 마법인 카빨라 및 외경 탈무드나 에놐서에 근거하여 제작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애러노프스키 역시 비밀집단에 연루된 명사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던져 준다. 그렇다면, '노아'는 모차르트의 '마적'과도 다름없는 선상에 서 있는 적크리스토적 작품인 셈이다. 

'노아'의 대본 원작자 중에는 라삐 드니스가 끼여있다. 그는 '유대교 신화, 마법, 신비주의'의 저자이다. 따라서 영화 '노아'엔 카빨라와 영지주의 등의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아울러 카빨라와 영지주의 등 오컬트는 비밀집단과 깊은 연계가 있다. 


수많은 한국 신자들이 성경적 주제의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거룩한 복음주의 미국인" 정도로 단순 추정하기를 즐기지만, 사실 성경 주제의 작품이나 영화 제작에 관여해온 많은 제작자들이 비밀집단에 관여돼 있었다.  

예를 들면, 엄청난 감동을 준 사상최대의 히트작인 '벤 허'(히브리어: 벤 후르)의 원작자, 그리고 훗날의 제작감독은 모두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이었다. 이렇게 볼 때 '벤 허'의 진정한 저작 및 제작 의도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 비밀집단 사람들이 더 설치며 앞장서 성경 주제의 영화를 만들어 왔다는 얘기이다. 


 

애러노프스키에 있어 노아는 최초의 환경보존운동가이며, 대홍수는 환경파괴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와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 성경의 대홍수 사건은 인류 전체의 죄악과 폭력 등 타락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러노프스키는 뉴요커와의 대담에서 '노아'의 강력 메시지는 바로 "지구온난화에 기인될 대홍수"의 전조라는 식의 운을 똥겼다. 즉 지구온난화는 남북극의 빙산을 모두 녹여버릴 것이며, 따라서 전대미문의 대홍수가 발생하여 빙하시대 결빙과는 반대의 위기사태가 벌어진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공해를 내뿜을 이렇다 할 기계도 없던 노아 시대 때 공해라면 인간의 죄악 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 애러노프스키는 침묵한다. 감독은 노아를 방패막이 삼아 '환경보존'을 떠들지만, 오늘날에 비해 말 할 수 없이 대기가 더 깨끗했던 당대에 '환경보존'을 내세울 만한 건덕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의 하나님은 분명히 노아 홍수와 같은 대홍수를 통한 인류전멸 사태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약속을 무지개로 확인시켜 주셨다. 또 노아의 가족의 생존으로 사실상 '인류절멸'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인류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가 있는 한 동식물들도 있다. 


라삐 드니스는 말한다. "애러노프스키의 오리지널 비전을 보고싶거들랑 그의 프랑스어로 된 만화 '노아'를 봐야 한다. 그것이 영화(즉 노아)의 콘티이다." 드니스는 또 예샤야후(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여섯 날개 천사에게서 네 팔 달린 타락한 천사 개념을 인출했다. 영화에는 또 천사가 아담에게 주었다는 보석인 '쪼하르'에 관한 말이 언급되며, 노아는 이 보석을 방주 속 어둠을 밝히기 위한 조명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히브리어 쪼하르는 창문을 가리키는 반면, 영화 속의 초하르는 마법의 보석, 곧 카빨라가 말하는 '깨달음'의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카빨라의 주요 문서명 하나가 '조하르'이다. 


영화에서 네필림, 타락천사와 동일한 존재인 영화 속 '지킴이들(Watchers)' 개념은 바로 외경인 에놐서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영화 '노아'는 성경의 스토리를 악용하고 환경보존 등 몇 가지 뉴에이지 이슈를 담아, 유대 신비주의를 가미하여 만든 할리우드 공상과학물에 해당한다. 성경의 가치관을 드높이기 위한 거룩하고 선한 작품이 아니다. 



한편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세상 표준으로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네 표준으로 볼 때 고상하기보다 쌍스러운 사람이다. 과거 '흑조'(Black Swan), '(꿈을 위한) 레퀴엠' 등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거의 다 'f---' 등 저질 욕설이 난무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작품들이다. 크리스천들이 기대하는 그런 "거룩한 영화"를 만든 경력이 전혀 없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애러노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천들이 이 영화가 비성경적이라는 말을 하더란 말을 듣고 흥분(?)하여 크리스천들에게 'f---ing'이라는 욕지거리를 거의 10번 가까이 퍼붓기도 했다. 그러니 비공개석에서는 아마 수 백 회도 더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자신이 남의 비평적인 말을 경청하는 겸손한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 단죄 받은 사악한 '뱀새끼들' 같은 다수계 유대인의 하나에 불과하며, 역시 회개하여 참 메시아님을 믿지 않고는 지옥 갈, 뻔한 인생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내용이 추가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