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영언(방언)론

영언(방언)은 아직 현존한다(정이철목사를 반박함)




영언(방언)은 아직 현존한다

-정이철 목사에 대한 반론



김삼  



이 글은 최근 웹 언론인 '뉴스파워' 또는 '아멘넽' 등에 실린 정이철 목사의 비평적 칼럼, '옹알거림이 외국어이고 영의 언어?'에 대한 필자 나름의 반론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정 목사의 그 글을 먼저 일독할 필요가 있다. 

 

[ 독자의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 영적/초자연적 개념으로 쓰인 언어에 대한 한글 성경의 '방언(方言)'이란 용어는 세상의 지방 언어나 사투리에 더 가까운 표기여서 혼동스럽고, 따라서 한글 성경 번역상 초기의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나름대로 '영언'(靈言)이란 용어로 대신한다. ]

 


정 목사의 글에 구체적인 반론을 하기 앞서 우선 서론적인 얘기를 좀 하련다. 이 글은 좀 길다. 독자의 끈기를 요한다. 긴 이유는 그동안 이 방면에 대한 본격적인 변증이나 반론이라고 할 만한 글이 별로 없었기에, 성경을 원용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양면작전: 무장해제와 광분

 

신자에 대한 사탄의 효율적인 주요 전략 하나는 '영적 무장해제'이다. 또 다른 전략은 미혹령(迷惑靈/seducing spirit)을 통한 성도의 혼란과 광분이다. 양면작전에 방불한 극과 극의 이 두 전략으로 마귀는 성도를 밀 까불듯 하면서 교회에서 성령님의 권능 사역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현실 교계를 보니 어쩌면 싸탄의 이 전략이 잘 먹혀들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셨는데도 현실 교회는 거의 다 미지근하되 무력하며, 일부는 뜨겁되 자칫 쉽사리 광분한다. 

근래에는 소위 '신사도개혁운동'(NAR)의 후유증에 몸살을 앓다시피해온 대다수의 성도들이 영적/초자연적이고 열띤 것은 다 이상하니 "안전 제일"이라는 생각 아래, 영적인 것을 열망하긴커녕 "난 어디까지나 말씀 중심이야"라고 몸을 사리며 조용하고 안일하게 지낸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여전히 '신사도' 영성과 '관상' 영성, 떠오름(이머징) 영성 등 온갖 희한하고 화려한 영성들과 교설, 운동에 휘말리고 사로잡힌 채, 비진리의 풀무불로 과열되어 있다.

 

왜 이럴까? 마귀는 예수의 보혈 적용, 성경 말씀의 효율적인 활용과 더불어 성령의 진리와 권능을 끔찍히 싫어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기 나라가 무너지고 망할 일을 마귀가 왜 좋아하겠는가? 적극 사전 봉쇄하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게 뻔하다. 아무튼 그래서 성도들은 "마귀들과 싸울지라!"라고 열심히 성경을 보고 찬송은 부르지만, 정작 말세지말에 앞서 사도가 경고하고 촉구한 영적 싸움은커녕 이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완전무장"=(전신갑주/온몸갑옷, 에페소서 6'10~18 참조)이 뭔지조차 잘 모르며, 자연히 데시근하고 미적지근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진리가 빠져 버린 초자연을, 사실상 성령을 흉내내는 더러운 친숙령(familiar spirit)인데도 성령인 줄 알고 열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양자 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권능이 거의 없고 미지근한데도 있는 양 착각하면서 자족하는 라오디케아 교회(참고: 요한계시록 3'14~18)처럼 돼 버리거나, 아니면 성령 아닌 엉뚱한 잡령에 시달리면서도 신나는 천국 체험을 하고 있는 줄 알기가 일쑤이다.

 

물론 우리 누구나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말씀 중심이라는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되 효율적으로 실천/활용하는 삶이며, 따라서 동시에 성령 중심의 삶이 필수적이다. 왜 성령 중심이어야 하는가?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聖子)님을 보내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신 뒤, 말세에 성자님을 통해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교회를 세우시고 일으키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 교회에 하나의 무기로 주신 것이 곧 성령의 권능과 은사들이다. 그러나 현대 성도 대부분은 이 무기를 쓰기보다는 이상한 '영성'들을 선호하거나 평소 설교나 편하게 듣고 영적인(옛 표기: '신령한') 노래보다는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운 찬양을 즐기면서 안일하게 지낸다. 또는 그 무기를 교회의 목적 아닌 자기 목적에다 오용하기도 한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은 증언자로 오셨고(요한복음 15:26, 행전 5:32)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기 원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코린토A서=고전 12:7). 성령께서는 그저 온유하셔서 설교에 잔잔한 감동이나 "얹어"주시며 주로 관망하시는 줄로 알고 지낸다. 그러다 가끔 갈급하거나 생각나면, 또는 모임에서, "오 성령이여 오소서!", "임하소서!"를 뜨겁게 부르짖긴 하는데, 이미 2000년전 지상에 내리신 뒤 줄곧 교회에 계신 성령님은 오히려 그 분의 뒤나미스 곧 영적 파워하우스를 통해 우리의 바람(願)보다 훨씬 더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진상을 알지 못하거나 그에 대해 무심하다. 그러면서도 라오디케아 교회처럼 스스로 건전하고 건강하다고 자긍까지 한다. 이것이 대다수 교회의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많은 교회들이 신사도 운동 탓에 성령 권능 면에서 많이 위축된 분위기다. "말씀 중심의 개혁주의가 제일"이라며 거기 안주하려 든다. 여기엔 인터넷의 역할이 다대(多大)하다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초기부터 신사도운동 비평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중 하나이며, 여러 이단비평가들에게 많은 영문 관련 자료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당시, 신사도운동의 불똥으로 향후 오순절교와 은사 계열은 물론, 영언자(방언자)와 은사자들의 정당한 신앙까지도 싸잡아 비판 받게 될 것이라고 충분히 예견하면서 우려했었다. 나는 오랜 영언자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최근엔 방언을 이단시하는 한글 사이트만 수백 만 개에 달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필자의 영언관은 한시도, 조금도 위축돼 본 적이 없다! 나의 영언은 친숙령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총임을 절대 확신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도 저런 대세에 편승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과 유튜브 동영상 등을 통해 근래 폭넓게 알려지고 있는 젊은 세대 이단비평가의 한 사람이다. 이단비평 사역자들은 교계를 해치는 이단들의 문제를 파헤쳐 알려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부 비평가들은 진일보 하여 영적이기보다 이성적인 판단 아래 교계의 다수를 이루는 정통 교회의 전통에 어긋나 보이거나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이단'시하는 자의적 월권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이단비평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무소불위의 진리가 아닐진대, 자기의(自己義)가 지나친 것 같다. 영언에 관한 비평과 단죄가 가장 진전된 경우가 이번 정 목사의 글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보다 못한 필자가 이처럼 반론에 나서게 되었다. 


다른 모든 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단비평가들 역시 나중 후회할 글들을 써서는 좋지 않다. 일단 써 놓고 뒤늦게 후회할 바에야 안 쓰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현대의 영언자들에 대한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성마른 판단과 단죄는 경박하고 섣불러, 제 얼굴 위로 침 뱉기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단비평권(圈)의 한 가지 맹점이랄까..는 신학적 원리와 말씀엔 퍽 투철하다지만, 그 실천의 결과로 필히 따르는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에 대해서는 단순히 '요주의'라는 경고 팻말만 붙여 놓고 경원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단비평권에는 말씀-신학과 말씀-권능 사이의 균형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성령의 실제적인 권능은 뒷전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교파/교단을 막론하고, 성경이 명증해 주는 성령 권능의 표출인 이적과 기사, 은사와 신유, 영언 등 영적/초자연적 요소들은 모두 사도시대 또는 계시 시대로 이미 "끝나", 성경 계시가 완결된 지금은 그치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소위 '종식론'(cessationism)이라는 원리를 그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특히 신사도운동 탓에 이단비평가들 대부분이 더욱 개혁주의에 집착된 것으로 보인다.  



영적 대안이 없는 신학

 

이런 개혁주의나 이단비평적 입장들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한 마디로, 정신적 대안은 있는데 영적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 목사도 자신이 거짓 은사라고 믿는 것들을 적극 경계할 뿐이지, 성경적인 참 은사에 관해선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못하고 있다. 그의 총결론은 "그냥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이 최고요, 안전 제일"로 요약될 뿐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권능사역은 최저요 가장 밑바닥이라는 얘기인가? 바닷가에서 안전 제일이라면 찰싹거리는 파도만 보고도 뒤로 물러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참 평화는 그 분의 품과 같은 깊은 은총의 바다에 풍덩 잠겨 맘껏 잠수도 하며 헤엄치는 것이다. 

   

대다수 교인들은 성경을 이성과 마음으로만 이해하고 강조할 뿐, 히브리서 4:12 말씀 그대로 성경 말씀이 영적/초자연적 권능을 발산한다는 진리를 모르고들 지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에 받아들이면, 영과 혼이 서로 쪼개어지듯 확연히 구분된다. 영과 혼의 구분에 관해서는 사도 파울도 밝히 말한 바 있다(코A 2:10~16; 14:2b,14,15, 테살로니카A서=살전 5:23b).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현대 교인들은 성경을 한사코 이성적/혼적/자연적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요즘은 '초자연'이라는 말조차 잘못 꺼내다가는 대뜸 색안경들 앞에 이단 취급 받는다. 그러면서 그걸 '말씀 중심' 신앙이라고 자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유감스럽게도 성도가 영적/초자연적인 권능에 대하여 되도록 무관심하고 무지하길 바라는 것이 바로 마귀이고 악령들이다. 반면, 현대 세속사회는 갈수록 뉴에이지적인 거짓 초자연과 신화 등에 나날이 탐닉해 가니, 얼마나 아이러닉한가? 교회는 신학으로 '드라이'해지고, 세상은 인터넷의 영향 때문에 뉴에이지와 신화적 사상으로 나날이 '영성화/종교화' 돼 가는 것이 현실이다. 무신론/진화론 따위는 조만간 발을 붙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 역시 마귀의 양면작전의 면모이다. 

 

종식론을 성경적이라고 믿는 대다수의 현실 교회는 말씀과 그로 인한 감동, 거듭남과 구원 사역만을 성령의 권능으로 자임하며, 나머지는 거의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마치 '성경, 구원, 천국, 그리고 끝!' 같은 분위기이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여 그것으로 충분하니 신유가 불필요하며, 성경전서와 메시지가 충만하니 영언 및 그 해석('통역') 따위가 필요 없으며, 해독제가 있으니 초자연적인 해독 같은 것이 구태여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예컨대 선교지나 오지에 의학과 의술, 해독제가 상비되어 있는 건 아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선교사가 독뱀에 물리면 어쩌겠는가? 마르코스복음서(맑) 16'18a과 실제로 이를 실천/입증한 행전 28:3~6을 진리로 의지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보다 종식론을 더 신봉한다면, 이런 시도마저도 안 하고 신자라는 사람이 하릴없이 맥 없이 죽어 가게 된다. 이 어찌 슬프고 통탄할 일이 아닌가?   



어제만의 권능?

 

혼동하고 오해하지 말자: 성령의 권능과 은사는 절대로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라: 서가나 책상에 먼지 쌓인 채 놓여 있는 성경전서 자체가 우리의 권능이나 영적인 무기가 아니다. 그 속의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믿고 간구하면서 실천하고 영적으로 활용해야 비로소 권능이 된다. 사도들은 우리가 바라보고 우러르기만 해야 할 신적 존재나 우상도 아니었고, 지나간 "아득한 옛날의 흔적'도 아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했고, 사도들도 순수인간이었기에 더욱 성령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은사가 필요했다. 우리도 사도들보다 더욱 연약한 인간이기에 똑같은 성령님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하다. 하물며 당대보다 더 죄악이 사무치고 당대보다 더 사탄과 그 종자들이 날뛰는 지금에랴.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은사나 영언 등 초자연적 권능은 모두 오직 사도시대나 성경전서 시대 이전만의 것이었다고 과거화 내지 신화화(神話化)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다른 모든 교훈들도 일부만을 제외하곤 모두 당대의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발상은 일종의 복음의 신화화이다.

 

현대 교회는 "(계시의 완결판인) 성경전서 한 권만으로 만족하옵니다"라며 자족하고 있다. 물론 성경은 기록계시로서는 가감할 수 없이 종결되었다. 사실 구약 시대에도 성경은 있었고, 초기 교회 시대에도 지난 날의 계시와 현재의 계시, 앞날의 계시들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구약인들과 초기 교인들에게 모두 권능이 필요했다.

구약에서 성령님의 이적적인 권능은 흔히 하나님의 "강한 손"(히브리어' 야드 카자크)과 "펴신 팔"(비즈로아 너투야)로 묘사되곤 했다(예: 신명기 5'15, 에제키엘=겔 20'34).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을 이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단지 성경전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이건 인본주의도 보통의 인본주의가 아니다. 구약인들은 물론, 주님과 사도들에게도 물 붓듯, 기름 붓듯한 성령의 권능이 필요했거늘(행 10'38), 우리가 어떻게 성경 한 권만 갖고 권능 없이도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님과 사도들에게도 성경책이 없었던 게 아니라 두루마리 성경책이 있었다. 그런데도 초기교인들은 말씀을 뒷받침할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절절히 간구하곤 했다(행 4'29,30). 

우리는 단지 완성된 신약만 더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추가된 이 신약 한 권이 권능이 없어도 되는 '권능 대체 티킽'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복잡하게 말고 간편하게 성경 한 권만 갖고 지내자"라는 편의주의 발상인지? 

 

우리 하나님은 늘 신실하시며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약속과 복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2000년전과 같이 그대로 적용된다. 대속과 구원의 언약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현대교회는 초기교회의 연장이지, 알맹이는 빼 놓은 불연속선상의, 여과된 모범만의 답습이 아니다. 초기교회가 영언을 했다면 하나님은 현대 교회도 영언을 할수 있게 해 놓으신 것이다.

 

이런저런 선교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지인 선교지에서는 때때로 아니 수시로 권능사역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문화지역일수록 크리스천들도 '문화화'되어 초자연적 권능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의심한다. 심지어 "귀신 놀음"이라며 적극 반대하기도 한다. 거의 전능한(?) 의술과 거의 전능한 환상적인 스마트폰이 늘 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의 권능과 은사 등은 그냥 기념이 되는 옛 문자와 화석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기교회에 나타난 성령사역의 패턴에 따르면, 영언이 없으면 예언 같은 다른 초자연적 은사도 없고, 하나님께 영적 비밀을 직고하는 "영적인" 기도(코A 14'2b. 파울은 이에 따라 그 누구보다 영언을 많이 했다! 코A 14'18)도 없다. 이 신비는 아는 신자들만 안다.     

 


미지근함과 자만: 현대 라오디케아 교회

 

대다수의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평소 '기도 꼬리표'로만 사용하곤 한다. 예수 이름의 무한 광대한 효능을 거의 전혀 깨닫지 못한다. 과거엔 성경 교훈 그대로(막 16'17a) 예수 이름으로 질병도 고치고 악령들을 무수히 내쫓았고, 가난하고 아쉬운 가운데 주님의 교훈(일독 바람: 마 18'18~20; 28'19; 맑 9'37~39; 16'17,18, 루카복음서=눅 10'17; 24'47, 요복 14'12,13; 15'16b; 16'23b,24,26, 행 3'6,16; 4'12,30; 5'16; 9'28; 10'48; 14'3; 16'18; 19'5, 코A 5'4, 야코보서 5'14) 그대로 예수 이름으로 온갖 것을 하나님께 청구하다시피 하여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쩔쩔 매며 예수 이름을 무서워하기까지 했으나(행 5'17,28,40), 오늘날은 주님의 이름을 통한 그런 권능 실천이 갈수록 드물어져 간다. 권능사역을 했어도 주님께 퇴짜를 맞은 사례였던 마태복음 7'22,23 등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현실의 빌미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 경배찬양 때마다 막연하게 입버릇처럼 "성령이여 오소서!", "임하소서!"를 부르짖어, 마치 성령님을 경배 참석자의 한 분 또는 무슨 경배의 들러리나 심지어 장식용으로 여기기가 일쑤이다. 증언자이신 성령께서는 정작 거듭난 신자 속에 계시면서 그 분의 권능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기를 바라고 계신데 말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에는 나날이 성령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코린토A서 12장적(的)인 채널이 점점 줄어 간다. 영적인 판별도 제대로 안 해 보고 걸핏하면 모조리 다 '이단', '귀신 놀음'으로 몰아붙이니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 분의 악령 축출 사역을 바리새들이 악령들의 두목인 바알제붑의 힘을 빌어 한다고 빈정대며 단죄한 적이 있다.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바리새들의 주된 임무는 성령 훼방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주 받을 현대의 바리새가 되지 않게 자신을 돌봐야 옳다. 

아무튼 하도 '마귀 방언!', '귀신 방언!', '옹알거림!', '이단 방언!'하고 떠들어대니, 자신이 애써 시작한 영언이 과연 성령의 것인지 긴가민가 의심하게 되어 안 그래도 평소 잔뜩 주눅 들어있다가 그나마 새벽기도회 때 혼자 담대하게 또는 쭈볏쭈볏 눈치를 보며 조금씩 영언을 하던 성도들도 이젠 잠잠해져 간다. "방언은 집에서 혼자나 할 것이지 왜 교회에서 그러느냐?"라고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는 목회자들도 많다.

 

그러나 사도 파울은 분명히 교회의 경배 때 (해석용 및 화답송 용도의) 영언이 있다면서 영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코린토 교우들 전체보다 더 영언을 한다고 밝혔다(코A 14'18, 26~27, 39~40). 파울이 금기시한 듯 보이는 영언은 오직 서로 자랑하며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마구 영언을 주절대는 무식한 경우뿐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 성구들이 모두 부정적으로만 뵈니, 신기하고도 안타까운 노릇이다. 결국 자기네 심사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든 초자연적 요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목적이며, 동시에 이것은 교회에서 초자연적 권능이라곤 가장 기초적인 영언부터 몽땅 다 몰아내려는 마귀의 효율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성령의 권능을 왜곡/오용하는 신사도운동은 더구나 성령 권능사역의 전선에 찬물 아니 X물을 끼얹다시피 해 왔다. 그래서 권능사역이나 은사/영언 따위의 영적 요소 이야기를 꺼내면, 웬만한 교인들은 "무슨 소리냐? 지금은 성경시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만다. 성경시대이랄 뿐 동시에 성령시대임을 망각하고 산다. 그래선지 지금은 신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이 고작 평소의 기도뿐이다. 사도들과 초기교회 성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풍부히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지냈으나, 오늘날은 예수 이름이 권능과 사역의 도구가 아니라 그냥 이름일 뿐이다. 사탄의 영적 무장해제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다는 인상이 드는 대목이다.


우리가 교회시대를 산다고는 하나, 마치 권능적 시대는 다 지나가버린(?) 양 지금은 '문화적 교회시대'가 되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이단비평가들도 대동소이하다. 종식론 원리에 충실하려면, 은사나 영언을 멀리 할 뿐 아니라 귀신 내쫓기나 신유 등 비문화적인(?) 행각은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도시대와 계시 시대로 끝났으니, 생각도 하지 말아야 옳단다. 결국 성경을 '반쪽'만, 아니 일부만 믿고 사는 셈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맨날 하던 거룩한 권능사역들이 지금은 다 케케묵은 원시요 거의 야만이 돼 버렸다. 성경을 통째로 믿는 신자는 희귀할 뿐더러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이다. 그러면서도 신학이나 영성 따위는 모두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를 강조 내지 강요하는 현실이다.  



소극적인 죄

 

죄에는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가 있다. 영어에서는 흔히 sins of commission and omission이라고 불린다. 나 자신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짓는 죄가 있다는 얘기와도 같다. 사도 파울은 그가 주님께 받아 코린토 교우들에게 전한 계시에서 특히 영적 요소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과 더 나아가 사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것들을 열망하라고 촉구하고 있다(코A 1'7; 2'14; 12'1,31; 14'1,39,40). 여기서 '영적 요소들(프뉴마티카)이란, 말 그대로 성령님과 그 분의 신비에 연계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이지, 물적/육적/심적/혼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근거에서, 나는 파울의 이 영적인 교훈을 신자인 우리가 가볍게 여겨 소홀히 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최소한 소극적인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회자, 사역자 등 교회의 지도자가 이에 대하여 잘못 가르쳐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의 뜻에 어긋나거나 반(反)할 경우, 물론 적극적인 죄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무익하다고 판명될 말이나 글을 함부로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마땅할 것이다. 심판 날 심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마 12'36). 하물며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거나 훼방하는 경우이겠는가. 수많은 다양한 미디어가 있고 정보의 바다가 넓고 깊다고 해서, 모든 생각과 모든 말이 다 정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크리스천들은 되도록 아니 오직 진리만, 참된 것만 정보로 흘려야 바람직하다.

 


선물과 약속: "너희가 보고 듣는.."(!)

 

성부 하나님은 성자(聖子)님을 세상에 선물로 주셨고, 성자님은 성령님을 교회에 선물로 보내셨다. 사도 페트로는 성령께서 내리신 오순절 그 날에 행한 즉흥 설교(행 2'1~37; 38~40)의 결론에서, 이 성령의 선물을 말하면서 이 약속은 당대인들과 그 자녀들은 물론, 모든 먼뎃사람들 즉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대상에게 하신 것이라고 명언했다(2'38a,39). 여기서 '먼뎃사람'들이란, 곧 시공간을 넘어선 세상과 미래의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선물과 약속은 막연하고 모호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당대인들이 현재 "보고 듣는(see and hear)", 시청(視聽) 차원의 것이었다(33절 참조). 바꿔 말하면, 페트로가 사도들을 대표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나머지 약 110명의 성도들은 잠자코 설교를 듣기만 했던 게 아니라 계속 영언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15절과 33절을 비교해 보라). 이런 놀라운 광경은 첫 교회가 세워진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 페트로가 로마 군인인 코르넬리우스(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벌어졌다(10'44~48). 유대인들의 동족에 비교적 가까운 숌론(사마리아) 교회를 제외하고는(참고: 행 8'5~25), 사실상 최초의 이방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코르넬리우스의 '가정교회'에서 페트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성령님이 내리셔서 거기서도 영언이 시작된 것이었다.

 

무슨 뜻일까? 성령님과 그 분의 '보고 듣는' 영언의 선물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온유하신 성령님께서 왜 은밀하고 조용하게 일하시지 않고 자못 감각적인 '시청' 차원에서 사역하실까? 그 분은 증언자로 오셨기 때문이다(참고: 요 15'26b; 요한1서 5'7,8a)! 증언자인 그 분은 반드시 나타내 보이시고 드러내신다. 바로 그래서 파울은 영적 은사들을 "성령님의 나타내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코A 12'7).           

 

성령님은 성부/성자님의 영이시므로,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같으시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랬다 저랬다, 수시로 변하시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변모' 발상이나 개념은 그 분의 신격과 말씀 자체에 모순된다. 어제의 그 분은 오늘의 그 분이시고, 알파이셨던 그 분은 오메가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다.  



신본적이 아닌 '종식론'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는 주로 신학계를 중심으로 마치 성령님이 변질되셨다는 식의 주장들이 있어 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첫 교회 당시의 오순절적 역사는 사도 시대 이후 끊기고 사라졌다는 소위 '종식론이라는 설이다. 사실 이런 사상은 카톨릭교 초기부터 있어 왔다. 주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신학을 발전시킨 소위 '교부'들이라는 사람들이 당대에 이미 그런 성령의 역사가 "흐릿하다"거나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끊겼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거의 20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발상과 사상이 교계에 만연해 있다. '교부'들이 카톨맄교를 비롯한 기독교에 기여한 바가 컸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과오 또한 다대(多大)하다. 그들은 오점과 실수가 많은 인간이었지, 결코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다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로마서 3'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그럴 듯한 신학 제설보다 성경에 더 밀착되어야 한다. 

 

이 '종식론'은 알고 보면, 성경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 대신 순전히 인간의 이성적/감각적 판단에 의해 비롯된 인본적인 발상이다. "지내고 보니 첫 교회와 같은 그런 현상은 이젠 더 없더라"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 통신'이 만들어 낸 오판이고 오보이다. 그것은 불신이지 진상이 아니다. 조금 전 밝힌 대로, '종식론'은 늘 변함없이 한결같고 신실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존재적 본성과 영원한 속성(屬性)에 어긋난다. 더욱이 일반 신학교에서 흔히 가르치는 교의신학(조직신학)의 신론과 성령론의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신학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신학은 잘못된 요소를 빼고 나면 여전히 유용하다! 특히 성경 원문을 다루는 성경신학은 그렇다). 페트로의 설교 그대로, 어제의 성령의 약속과 영언의 선물은 오늘날의 우리까지 포함한 '모든 먼뎃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사도시대만을 위한 짧고 단명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 점을 초기 '교부'들을 비롯한 종식론자들이 아직도 파악하거나 착안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첫 교회의 120명과 훗날 추가된 3,000명(플러스 기타), 역시 '보고 듣는' 시청 차원의 선물을 받은 숌론 교인들(행 8'5~25 참조), 전술한 코르넬리우스 가정, 다메쉨 근교 노상에서 변화 받아 성령 채우심을 받은 샤울(=파울, 9'17), 파울에게 인도 받은 에페소 교우들(19'6) 등 약속의 선물을 받은 이 모든 영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 누구나 이 선물의 약속대로 기본적으로 영언자들일 수 있고, 영언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약속과 선물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교인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가 목도하는 교계 현실이어서 답답하다. 그러나 진리는 거의 언제나 소수의 것이다. 진리의 길은 넓기보다 좁다. 다수가 진리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계약(언약)과 약속이란 것은 권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어도, 효과는 언제나 쌍방적이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질 것을 한 쪽이 굳게 믿고서 이행되게(fulfilled and executed) 해야 한다. 또 영적인 선물은 수여자의 일방적인 호의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태도가 관건이고 문제시 된다. 페트로가 분명히 모든 먼뎃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이 약속과 선물을 대다수의 교인들이 아직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은 최소한 소극적인 죄를 짓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것이 끊기고 중단됐다는 '성령변질설'과 '성령비영원설'을 성경 말씀을 대신하는 진리인 양 태연하게 천명하여 수많은 교인들을 호도해 온 종식론자들은 적극적인 죄의 범주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물로 주신 성령의 (영구적인) 영언을 "도시락 싸 들고" 부정하며 반대하고 다니는 지도자와 교인들을 하나님이 '죄 없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영언 이슈가 이전부터 늘 '뜨거운 감자'였는데, 지금은 이 감자가 나날이 다 달궈져 간다. 주된 이유는 한 마디로 영언자가 점점 더 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교계 비평가들의 단죄와 맞물려 오순절교와 은사 계열 사람들, 은사자/영언자들까지 덩달아 단죄되는 성향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영언의 사례들: 몽땅 이단?

 

좀 미안한 말이지만, 우선 이들 비평가들은 하도 자기의에 넘치다(?) 보니, 상황 판단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한국의 정상급/유명 목회자/부흥강사들을 비롯해 수많은 교계 인사와 사역자들이 현재 (외국어가 아닌) 성경적인(!) 영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주변의 수많은 목회자/사역자/성도들이 지금도 모두들 외국어가 아닌 영언을 하고 있다. 필자 자신 1985년 성령님의 은총을 입어 '첫 입'을 뗀 이후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날마다 영언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며, 필자의 가족이 모두 영언을 한다. 필자의 막내딸은 4살 때 이미 영언을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가족의 영언도 외국어가 아니다. 성령침례를 받고 시작하게 된 영적인 언어일 뿐.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 

필자가 거쳐온 모교회를 비롯한 3개 교회에서 사역했던 고(故) C(새 표기: J)모 목사는 널리 알려졌던 부흥강사이자 장로교 합동측 총회장을 지낸 분이다. 그가 젊은 시절 J 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린이들을 비롯한 교회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 영언 모임 같은 것을 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부인은 필자가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분으로 어린 나를 위해 치유안수 기도와 함께 영언 및 해석('방언통역') 기도를 해 주곤 했다. 어느 날 갑작스런 복통으로 그녀에게 안수를 받던 중 그 자리에서 복통이 즉시 사라지면서 영언과 해석이 나왔는데, "너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뜻의 내용이었고, 과연 정확하게 그 내용에 해당했던 필자는 그 영언과 해석을 100% 성령님의 음성을 믿고 받아들였으며 지금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또 구태여 (현 기자인) 필자의 시각으로 보지 않더라도, 지난 1980년대부터 90년대의 미주 한인교계는 '성령충만의 시대'로 평가된다. 현재도 건재하는 한국의 C모 원로목사나 H 기도원 설립자/원장이었던 고 L모 목사를 비롯한 한국의 국내외 부흥강사들이 LA와 뉴욬 등지의 굵직굵직한 한인 교계 집회를 이끌면서 수많은 영언자들이 생겨났고, 당시 J 목사, A 목사, H 목사, K 목사 등 필자도 잘 아는 뉴욕 한인교회협의회 및 목사회의 역대 회장들을 포함한 수많은 중진 목회자들도 (외국어가 아닌 성경적인) 영언을 시작한 바 있다. 정 목사의 논지에 따르면, 이들이 다 이단적인가?

 

특히 J 목사의 경우, 다년간 모 개혁신학교 교장을 지내온 철두철미한 보수 신학자인데도 그가 교협 중직을 맡아 있을 당시 미국인인 D. G. 목사를 초청하여 우드사이드의 N 교회에서 열린 집회 기간 중 강사의 호텔 방을 찾아갔다가 마침 호실 안에서 영언이 터져나와 방바닥을 구르며 한동안 사울 왕과 같은 경지(슈무엘A서/삼상 10'10; 19'23,24)를 헤맨 양, 강사가 유머스럽게 묘사했다. 

또 교협회장/목사회장을 모두 맡은 H 목사는 나의 형뻘 친구로, 현재도 날마다 때마다 영언을 하는 독실한 영언자/은사자이다. 오래 전 그와 내가 함께 다니던 미국인교회의 교우들도 90% 이상이 ('외국어' 아닌) 영언을 했다. 미주와 한국 교계의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이 현재 영언자들이다. 이 모두가 성령의 역사이겠는가, 아니면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주장처럼) 악령의 역사이겠는가?

 

현대 영언을 이단시하는 비평가들이 좀 놀랄 일이겠지만,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겸 이단비평가로 필자의 '절친'이기도 한 C모 목사는 필자에게 대강 이런 진술을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미국 유학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G모 교회 사역자로서 어린 중고등 학생들의 여름 수련회를 이끌면서 마르코스(마가)복음서를 강의하던 중 기도 시간에 참석자들의 거의 전원이 영언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렐루야로 반겼지만, 정작 그 영광스런 집회를 이끈 C 목사 자신은 긴가민가 의심하곤 했다. 현대의 영언을 믿긴 믿지만, 그런 유의 (괴이한?) 영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 목사에게 묻는다. 자신의 집회에서 영언 현상이 나타났다고 진술한 (이단비평가) C 목사는 촬즈 파햄을 이어받은 이단아인가? 자기가 이끈 집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도 정작 본인은 믿지 않는 C 목사의 태도는 정상적인 것인가? 그리고 현재 영언을 하는 필자와 가족을 비롯한 한국과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들과 수 억 영언 성도들은 죄다 이단인가?  

또 묻는다. 정 목사와 같은 노선을 걷는 이단비평가들의, 영언에 대한 판단은 곧 성부 하나님과도 같은 최종적 판단인가? 진정 영적인 판단인가?

 

이들 이단비평가들은 종식론을 포함한 개혁주의 사상이 표준적이고 가장 성경적이라는 노선에 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 현대의 영언을 부정하는 종식론 입장은 단지 개혁주의의 입장일 뿐 아니라 초기 카톨릭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대다수 교회와 교파들의 입장이다. 즉 개혁교회가 아니라 교계의 거의 절대 다수가 현대 영언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수가 진리인가?

 

그런데도, 영언자나 은사자 (기타 신유 등 현대에도 상존하는 영적/초자연적 이적과 기사, 신비를 믿는) 등의 현재의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 및 역사를 믿고 현재 체험하고 있는 성도들은 단지 오순절교/은사계열 교인들 뿐 아니라, 개혁교회권은 물론 모든 교파와 모든 교단에 두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영언에 대한 강성 비판은 어찌 보면 교계 단합을 해칠 뿐더러, 중도적/진보적인 교계가 자기네 시각으로 본다면 그들이 강조해온 '에큐메니즘'과도 모순된다. 단적으로 대표적인 오순절교 교단인 하나님의성회 등도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보수적이라는 남침례교가 현재 오순절 계열인 미하나님의성회(AG)와 교류하지 않는가? 에큐메니칼 교단의 비평가들은 하나님의성회를 비롯한 모든 오순절 교파와 교단들이 현재의 영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감연히 손가락질 하면서 단죄할 수 있을까? 그럴 용기나 의사가 있을까? 물론 필자는 에큐메니즘에 거의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식자들은 앞뒤를 가려가며 생각을 해야 하고, 발언자들은 사리판단을 잘 하면서 말을 하고, 필자들은 더군다나 인터넷 지면에 오래 남는 글을 신중하게 써야 할 것이다. 자칫 자신들이 미숙하고 어리다는 판단을 받는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이다.   



[영언=외국어]?

 

정 목사의 논지는 일견하건대, 세 겹 얼개 내지 삼중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성경의 영언은 외국어이나 현대의 영언은 외국어가 아니므로 성경적인 영언이 아니며, 따라서 현대 영언을 외국어가 아닌데도 외국어라고 했던 파햄 등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영언자들은 모두 파햄을 이어받은 이단아들에 불과할 수 있다는 암시를 똥기고 있다. 

이 주장은 여러 모로 모순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것도 자체적인 모순 말이다. 논리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모순은 (사도)행전의 영언이 외국어로 보이지만 파울의 계시에서의 영언은 결코 외국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순을 피하려고 종식론자들은 첫 교회와 코린토 교회의 영언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결국 첫 교회의 성령님과 파울의 성령님이 다른 분 또는 단기간의 '시대' 차이로 "변질"된 분이었다는 어이없는 주장과도 같다.

 

영언이 '외국어'라는 주장은 이미 오래 묵은 것이지만 전혀 비성경적이다. 기본 논리로도 하등 가당치가 않다. 우선, 영언은 성령께서 애당초 범(凡) 교회에 주신 성령침례(성령세례, 참고: 코A 12'13)와 언변에 의한 초자연적 언어이지만, 외국어는 초자연적인 언어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한국어가 영적/초자연적인 언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정 목사는 "옹알거림을 옹호하는 어떤 사람은 '배우면 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무슨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가?'라고 반문한다"면서 "그런 말은 교묘하게 본질을 왜곡하는 간교한 말이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말에 동조하는 필자로서는 왜 그 말이 '간교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으로, 정 목사의 논술을 '간교한 것'이라고 필자가 뒤집어 간단히 단죄할 수도 있다. 그래도 되겠는가?

 

정 목사가 빗대어 한 표현인 '옹알거림'이라는 말을 영언자의 입장에서 좀 재론해 본다. 사실 어떤 인간도 옹알이로 언어 생활을 시작한다. 옹알이를 하지 않고 유창하게 말을 시작하는 아기는 단 한 명도 없다. 마찬가지로 영언도 거의 대부분 일종의 '옹알이'로 시작된다. 처음부터 마치 유창한 외국어처럼 들리는 영언도 있긴 하지만 그다지 흔치가 않다. 그보다는 "럴럴러...", "다다다...", "바바바..." 형이 더 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옹알이식 영언은 초기 영언의 일부 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성령침례를 받던 날, 혀가 굳어지면서 더(Duh)!'라는 외마디로 영언을 시작했다. 필자도 영언인지 거의 확신이 없었으나 나를 도운 사역자는 분명히 그것이 영언이라고 밝혀 주었다. 물론 현재는 '유창'하게 들리는 영언이지만.   


정 목사와 같은 '영언=외국어' 주장은 특정인이 마음만 먹으면, 예컨대 한국어 등 특정 외국어를 하는 외국인 신자가 자칭 '(진짜) 영언'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거나 위장할 위험성마저도 있다. 외국어를 웬만큼만 배우고서는 자신이 '영언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은 전혀 영적인 언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외국어 영언을 하는 신자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여태껏 필자가 돕거나 안수 또는 함께 기도하여 영언을 시작한 모든 신자는 한결같이 외국어가 아닌 영언을 했다. 그럼, 필자도 파햄을 대물림한 이단인가? 

역지사지로, 필자는 비교적 논리에 밝다고 자신하기에, 정 목사와 혹시 일대일로 만난다면, 지금까지 이 글에서 펼쳐온 논리만으로도 정 목사를 얼마든지 확실한 이단(?)으로 몰아가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이단을 그렇게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외국어라는 지상언어는 영적인 초자연적 언어가 결코 못 된다는 점이 비평가들의 중대한 혼동과 착각이다.  


둘째로, 지상 언어인 외국어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새 언어"(맑 16'17a)가 아니다. 바벨탑에서 흩어져 버린 언어의 후예 격인 인간의 낡은 언어들은 결코 영적이거나 초자연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하늘에서 낡은 언어의 찌꺼기를 내려 주시겠는가?!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전도서 1'9~11), 따라서 낡은 언어인 지상의 외국어나 지방언어들은 그 영적인 "새 언어"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비평가들은 행전의 영언은 곧 '외국어'였다고 한사코 우겨대니, 주님의 새 것과 땅에서 말하는 낡은 '새'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나 보다. 그렇다면 혹시 장차 올 새 하늘, 새 땅도 외국 하늘, 외계인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는가?

 

[영언=외국어]라는 등식을 내세우려면, 120 성도가 말한 첫 영언이 당시까지 지상에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언어라고 해야 그나마 약간이라도 먹혀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진 새 언어인 영언이 정작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도 잔존하는 언어라면, 결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새 언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겨댄다면, 우리 주님을 잘못 알고 지내온 셈이다. 

주님이 새 언어라고 하셨으면 말씀 그대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언어'이다. 그리고 어학적인 언어가 아닌, 영적/초자연적 언어이다. 따라서 이단비평가들을 비롯한 종식론자들의 [영언=외국어] 주장은 성경적이긴커녕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영언=외국어]일 수 없는 이유

 

그렇다면, 이제 남은 토론은 왜 성경의 영언이 외국어가 아니냐는 것일 터이다. 성경의 영언이 지상언어가 아닌 단적인 이유는 사도 파울의 계시 속에서 영언은 전혀 외국어로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울은 분명히 이 언어가 (초자연적인 해석은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밖에는 해득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며, 심지어 영언자 자신도 (해석은사 없이) 자기 마음으로는 모른다고 했다(코A 14'2,14). 외국어를 하는 은사자 자신이 그 외국어의 뜻을 모르며, 해석은사자도 은사가 내려지지 않으면 그 뜻을 모른다니, 온 세상 천지에 외국어도 이런 외국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것을 '지상언어'라고 하다니, 종식론자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되어 있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고대 바벨탑에서 몸소 흩어버리고 혼잡케 하여 다분화 시켜버리신 그 땅의 구태의연한 언어를 하늘에서 다시 새롭게 중생시켜(리사이클링 하여?) 다시 땅으로 도로 내려 보내주신다 생각하면, 신선하다는 감각도 의식도 들지 않는다. 그런 것이 어떻게 주님이 말씀하신 새 언어일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얼마든지 지상의 언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다! 비평가들은 권능의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셈이다.

 

그 다음으로는 지상언어인 외국어가 영적 경배의 특별 방편일 수가 없다. 경배의 방편은 비록 모국어도 되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진 새 언어인 특수 언어가 영과 진리로 하는 경배와 영적인(옛 표기 '신령한') 찬양의 방편으로 쓰였다. 숌론 교회의 경우 '영과 진리의 경배'는 주님이 쉬카르(수가) 성을 방문해 그곳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신 그 예언(요복 4'23,24)이 바로 행전 8'4~25에서 이루어진 모습을 본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초기 교회의 하나인 코린토 교회의 경배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코A 14'26). 당대 교회에서 했던 영적인 찬양(옛 표기 '신령한 노래')은 바로 영언으로 화답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영언화답송'을 하는 교회들이 간혹 있다. 필자가 다니던 미국인교회가 바로 그러했다.

 

그 점이 구약교회와 다른 점이다. 구약 광야교회와 왕국시대 성전은 모든 경배를 오직 종족언어이자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만 진행했다. 그러나 첫 교회를 제외한 신약 시대 초기의 교회는 기존의 히브리어보다 옛 종주국의 언어인 아람어/그리스어 등을 썼고, 그 후로는 다양한 언어로 갈래를 틔운다. 하지만 첫 교회가 모든 후배 교회에 모범을 보인 것은 바로 모국어 외에 (외국어 아닌) 영언을 썼다는 점이다. 만약 초기교회에서 교우들이 거주하는 해당 지방의 언어가 아닌 외국어를 경배 때 영언으로 썼다면, 예컨대 소 아시아의 교회가 히브리어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통역했다는 얘기인데, 모슨 영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다음으로, 파울이 말한 바 코린토 교회를 비롯한 초기교회에서 사용된 영언해석은사(일명 '방언통변 은사', 코A 12'10끝, 14'26~28)도 오늘날의 외국어 통역이 아니었다! 또 해석은사자는 오늘날의 외국어 통역사가 아니었다! 만약 코린토 교회에서 외국어로 히브리어 영언이 터져 나왔다면, 그 해석을 위해 이스라엘 모국인 또는 통역가가 낫겠는가, 해석은사자가 더 낫겠는가? 해석은사자는 특정 외국어가 아니라 오직 교회 내지 성도 모임에서 수행되는 영언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코린토 교회의 영언이 "서로 달랐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파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 식 영언을 했을까, 자신이 계시받은 자기식 영언을 했을까? 그가 본디 예루샬렘 교회 출신인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으면서 성령 채우심을 받지 않았는가? 그 영언과 자신의 영언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예루살렘 교회의 첫 영언이 왜 외국어가 결코 아니었는지를 성경상으로 논증해 보련다. 첫 교우들 120명의 주류를 이룬 어부 출신 중심의 갈릴리 사람들이 평생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그것도 유창하게 한다면 해외에서 온 국제 유대인들로서는 실로 놀랍고 사뭇 존경스런 일일 터이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 저들이 단기간에 외국어 수업이라도 했다는 말인가..?"라고.   

오순절 그 날 이 요란한 영언 현장에 몰려온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유창한 외국어를 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분명 마치 낮술에 취한 사람처럼 주절주절 읊어대는 '옹알이' 식 영언을 하는데, 자기네 귀엔 자기 지역 방언으로 들린 것이다. 행 2'8a,12,13 원문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현대와 같은) 중얼중얼 영언을 하는데, 그들의 귀엔 자기네 방언으로 들렸다는 말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는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을 갖지, 결코 "대낮부터 술취했나, 왜 저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날 오순절에 일어난 상황은 정말 그럴 만 했다.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쑹얼쑹얼 대는 말이 자기네 귀에는 자기네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당시는 유다와 주변국가들이 모두 종속국가였기에, 어쩌면 웬만한 현대사회보다 더 국제적인 사회였다. 당대 유대인 대다수가 하던 아람어는 물론이고, 모국어인 히브리어, 당대 국제 공통어인 그리스어,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던 소아시아의 각 지방어, 로마 제국의 본래 언어인 라틴어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흔했다. 코르넬리우스 가정에서 터져나온 영언들도 당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외국어(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였다면, 시쳇말로 "그닥" 감동스러울 것도 없는 셈이다.

 

정 목사는 "배우면 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무슨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가?"라는 말을 비웃다시피 인용했지만, 사실 당대인들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부대끼며 접하던 것이 최소한 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소아시아어 등 국제언어의 소용돌이였다. 그런데 영언마저 보통의 외국어라면, 뭐가 그리 대단했겠는가? 하늘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겠는가? 오히려 실망스럽고 환멸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한 영언이 "당시까지는 자신이 몰랐던 외국어였기에 새 언어였다"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거기 몰려든 해외 유대인들 가운데는 유대 출신들도 있었다(행 2'10). 갈릴리 사람들도 포함된 유대 지방인들의 유대어(곧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외국어인가?! 그리고 120명이 제각기 외국어를 했다면, 몰려든 국제 유대인들이 최소 16개 지역(파르티아/메디아/엘람/메소포타미아/유대/카파도키아/폰투스/아시아/프리기아/팜필리아/아이귚트(애굽)/리비아/로마/크레테/아라비아) 출신들인데, 120명이 15 계열로 분류되어 최소 15개 외국어를 했다는 말인지?  



왜 외국어처럼 들리는가?

 

자,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 몰려든 해외 유대인들이 놀랐던 [ 나는 그냥 영언으로 지절거리는데도 상대방은 유창한 자기 모국어로 들리게 되는 ] 그 언어현상의 시청각적 면모는 오늘날도 존재하는가? 오늘날도 선교지에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수많은 증언들을 듣고 있다. 식인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다가 대뜸 사로잡혀 먹히게 된 선교사들이 묶인 채로 마지막으로 영언기도를 하자 그 소리를 토속어로 알아 듣고 추장부터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믿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비행기 속에서 옆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도 그의 언어를 알 수 없어 영언으로 기도하는데 상대방의 귀에 모국어로 들렸다는 얘기, 훈련 받던 러시아의 한 연병장을 찾은 믿는 나그네가 허락을 받아 지휘대 위에서 울면서 했던 영언 기도에 군인들이 무릎 꿇고 엉엉 울며 회개하게 한 이야기.. 등등 여기 해당되는 에피소드가 무척 많다.

 

그 무엇보다 필자가 직접 현지에서 거의 겪다시피 한 실화를 말해 보련다. 

1980년대말 '마마 퀑'이라는 중국 교계 인사가 뉴욬 한인 교계 연합 행사의 강사로 섰다. 집회 기간중 필자는 친구가 이끄는 찬양의 키보드 반주를 맡아 했다. 어느날 밤 집회가 끝난 뒤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던 강사에게 한국 교인 한 명이 다가가 말을 건네는데, 분명 중국어를 몰랐던 그가 영언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퀑 여사의 말이 놀라웠다. "님은 분명 중국인도 아니시고 (중국어를) 배우신 것 같지도 않은데, 유창하게 우리 말을 하시네요."  



행 2장의 상황은 바로 이것이었다. 전능하신 성령께서는 외국어가 아닌 '옹알이' 영언도 외국인 상대방에게는 유창한 모국어로 들리시게끔 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시냐고? 그 분은 그럴 권위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왜 이단처럼 보였는가?

 

이제 끝으로, 그럼 파햄이나 기타 인사들이 정이철 목사가 단죄한 대로 모조리 마냥 사악하고 그릇된 이단으로 보이는데도 그것이 어떻게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발(始發)이 되었는지를 필자 나름으로 설명하련다. 

완전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누구나 털면 먼지 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누구나 허를 찌르면 찔리게 되어 있다. 파햄이 문제 인사인데도 왜 그런 역사가 일어났는가? 그것이 악령의 역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성경 공부에 침잠해온 애그니스 오즈먼 양이 혹시 성경 말씀대로 안수를 하면 뭔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와 무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늘 신실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에 몰몬교에서 놀라운 시간이 벌어졌다. 여러 몰몬교도들이 어쩌다 외부 교회에 연결되어 영언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몰몬교 안에서 은사파를 이루다 결국 진리의 영에 이끌려 몰몬교를 탈퇴해버렸다. 


필자 자신 교계 명사들을 비평하면서 열매와 뿌리를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해 왔지만, 극적인 이단 단죄는 삼가해 왔다. 열매와 뿌리가 좀 이상하다고 해서 돌아가며 모조리 '이단'으로 단죄하면, 종국에는 이단 아닌 인사가 몇 명 남지 않고 말 것이요,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며 이전투구하다 급기야 아비규환을 이룰 지도 모른다. 이단 단죄는 마구 남발할 성질이 아니라,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권위적, 최종적인 리조트여야 한다. 

파햄이 이상했다고 해서 오순절교 사람들과 모든 은사자/영언자들이 다 이단적이라면, 10억 가까운 그들은 모두 아예 천국과 인연이 없고, 개혁주의자나 종식론자들에게는 천국이 떼어놓은 당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역사 속의 영언 부재?

 

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역사 속에 거의, 영언 사건 같은 것이 없었을까? 우리가 역사를 다 알지도 못할 뿐더러 카톨릭교 중심으로 흘러오고 구성된 현재의 '교회사'가 바른 교회사도 아니다. 역사는 뒤집어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영언 사건이 있었는지를 전능하지 못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 '부재'는 성령님 탓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탓도 아니었다! 

사실 역사 속의 이런 영언 '부재' 현상은 바로 성령 권능의 초자연을 이상하게 여긴 인간의 불신과 의심 탓이었다! 온유하신 성령님은 결코 인간을 강압하며 역사하시지 않고, 그 분의 말씀대로 믿고 실행할 인간이 나타나기만 오래오래 기다리시며 바란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테면 오즈먼의 순수하고 단순한 요청이 성령의 파워하우스에 플러그를 꽂는 접촉점이 된 것이다.

 

왜 지난 역사 속의 숱한 '부흥'이나 대각성에서 영언이 전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영언이 전혀 없을 리가 없지만, 지도자들이 수상쩍게 여기고 여기저기 영언이 터져 나오는 것도 적극 막았기 때문이다.

 

다른 종식론자들처럼 정 목사도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등 후대 교부들이 영언/은사 따위의 종식을 가르쳤다고 믿지만,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서머나교회 감독 폴뤼카르포스(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는 (자기 스승과 그 스승의 스승처럼) 분명 영언을 비롯한 초자연 은사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Ante Nicene Fathers", vol 1, Irenaeus Against Heresies, bk 2, ch. 32, sec. 4, p. 847.). 일부 이론가들이 종식론의 시조로 삼아 온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그의 신국론 등에서 영언 등을 비롯한 초자연적 이적들이 당대에 미약하여 "불분명하다"고 했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다(참고: 아우구스티누스, 요한1서 설교 제6화, 신국론 제22권 참조. 불확실론과 종식론과는 확실히 서로 다른 이야기이다.  



맺음글

 

오늘날 지상엔 수 억의 영언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일부가 혹 '마귀 영언'을 받았을지언정 대다수는 정상적인 거듭난 신자들이다. 왜냐 하면 영언은 오직 거듭난 성도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을 귀, 읽을 눈이 읽는 독자들은 귀 기울여 듣기를. 

정 목사를 비롯한 비평가들은 신학적 선입견을 따라 성경을 뒤틀지 말고 성령님의 애당초 뜻 그대로, 제대로 알고, 영언과 은사들을 갈망하게 되기를.

 

필자는 단언한다. 지상에서 영언을 '외국어',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며 의심하여 시작하지도 써 먹지도 않던 신자들은 100% 후회할 것이라고. 그 까닭은.. 영언은 하나님께 내 영이 내적인 비밀을 직고(直告)하는 영적 모르스 부호와 같은 긴요하고 소중한 도구이기 때문이다(코A 14'2b). 우리 모두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그 날, 후회 없이 "제가 땅에서 계속 영언을 하게 하셨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파울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