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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컬트&오컬트

ICC-한 문제종교집단의 성쇠(盛衰)1


킾 매킨의 젊은 시절




ICC-한 문제종교집단의 성쇠(盛衰) 1




국제크리스토의교회(국제그리스도의교회, ICC)는 이단성 집단의 하나이다.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Boston Church of Christ) (이전 시대의 명칭대로) 크로스로드크리스토의교회(CCC)라고도 불리는 ICC는 지난 1978년 킾 매킨(Kip McKean)에 의하여 창설되었고[각주:1] 현재 추종자 1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주로 대학가에서 추종자들을 리크루트 해 왔고, 캠퍼스 어드밴스(CA), 엎사이드다운 클럽(UC), 알파 오메가, 크로스로드 운동, 캠퍼스 크리스천 무브먼트(CCM) 등이 다 같은 계열이다. [단, 미국 기독교 주류계에 속한 크리스토의교회(COC), 본래 다른 흐름인 연합크리스토의교회(UCC), 독립크리스토의교회(InCC*)와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매킨은 ICC를 '왕국'이라고 주장해 왔다. ICC는 추종자를 세뇌하는 '제자화'(discipling)라는 타이트한 통제 시스템을 이용해 왔다. 이 제자화는 대체로 수많은 피해자를 낸 파괴적 시스템으로 알려져 왔다. 이 그뤂에 의한 문제성 활동이 많았기에 수많은 대학들이 캠퍼스 내 활동을 금지해 왔다. '세계전도자'라고 불리는 매킨은 심지어 사도 파울(바울)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년 전 창교자 매킨이 사임한 뒤로는 자신의 과거 독재적 죄와 오만 타세 자신이 창설한 ICC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그후 ICC는 추종자들의 이탈 흐름을 막으려고 주요 지도자들이 지난 날의 학대와 실족에 대한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 매킨의 오른팔 역할을 한 알 베어드가 새롭게 ICC를 통제하고 있다. 그동안 ICC의 '바티칸'형 구심점 역할을 해온 LA그리스도교회 장로인 그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변화할 것을 다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어떤 변화일지는 미지수다. 


베어드와 동료들이 낸 사과 성명은 "우리의 많은 약점과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교회는 여전히 놀랍다"고 말한다. '주님의 교회'? 그 교회가 ICC라는 뜻일까? 이에 대해 그들은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 대로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임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분의 하나뿐인 보편적 교회에 누가 있는지 결정하시게 해야 한다...오직 한 교회가 있으니, 하나님이 누가 거기 속해 있는지를 아신다."고 막연하게 유보적으로 말한다. 



다음은 탈퇴자들의 ICC 비평사이트 '리빌'이 밝혀 주는, 전형적인 ICC 학원포교 광경.


(신학기가 시작되는 점심시간. 한 신입생이 주위를 돌아보며 누구랑 점심을 할지 고민하는 빛이다. 두 선배가 다가선다.)

선배: 가서 점심 먹을래?

신입생: (반색을 하며) 예, 배고파요.

선배: 그럴거야. 우리도 식당으로 가던 길이야.

(신입생과 선배들, 식당에 마주보며 앉는다)

선배: 존이랑 나는 오늘밤에 열릴 파티 얘기를 하다가 널 봤어. 캠퍼스 밖에 있는 친구 집에서야. 너도 갈래?

신입생: (신이 나서) 아, 재밌겠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광경은 다양한 포교 씬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ICC는 학원가에서의 도발적인 포교방식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는 '디사이플링'(제자만들기)은 훨씬 더 강렬하고 치밀하다. 일단 교인이 되고 나면 동료 대학생과 직장 동역자들, 기타인들에게 포교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ICC에 빠진 학생의 가족과 옛 친구들은 흔히 이전과 다른 학생의 태도(무시, 또는 집요한 졸라대기, 설득 등)에 놀란다. 일단 ICC에 들어온 사람들은 멘토 격인 선배 '디사이플러'(제자만듦이)의 감독을 받는데, 신입생은 디사이플러와 계속 통화를 한다. 이 통화 문답에 질려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다. 대학생활이나 경력, 기타 개인적인 목표는 완전히 뒤로 미루거나 보류된다. 


ICC는 '제자'라 불리는 추종자들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실제에 있어 이 헌신이란, 제자의 디사이플러/멘토와 그뤂 리더는 그 제자의 삶에 대한 주된 결정을 대신 맡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결정에는 개인의 전공과목 선택, 대학 선정, 졸업후 직종 고르기, 데이트할 이성, 심지어는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까지도 포함된다. 


ICC는 매우 능률적으로 새 추종자를 포섭한다. 개종 성공율이 세계 어떤 종교단체보다 더 나은 그룹에 속할 정도이다. 그런데 일단 얻은 추종자를 유지하는 능률은 좀 떨어진다. 한 ICC 리더는 (떠난) 과거의 멤버가 현 멤버들보다 더 많다고 추산하여 근래 ICC의 성장율 침체를 시사하기도 했다. 



ICC(ICOC)의 역사


국제크리스토의교회(ICC)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뿌리인 미국 주류계의 크리스토의교회(COC)를 이해해야 한다. ICC는 뿌리 역사 특히 1990년대 이전의 과거사를 적당히 무시하고도, 지난 1967년 수백 명의 단일 회중으로부터 훗날 6개 대륙에 300여 지역 집단과 85,000명의 교도들을 보유할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교주(특히 첰 루커스)의 부적절한 성적 행동, (킾 매킨 등의) 불가능할 만큼 드높은 기대감에 의한 탈진, 학대적인 행정에 따라 급감하여 1995년에는 탈퇴한 멤버가 현존 멤버의 2배에 달했다. 2000년대 초반 현재 약30만이 탈퇴한 상태였다. 그후 ICC는 1987년 이전에 떠난 추종자들을 '옛 신자'로 계수하지 않고 있다. 


ICC는 본래, 현재 미국 주류계 신교 교파의 하나인 크리스토(그리스도)의교회(COC, Churches of Christ[각주:2])에서 갈라져나왔다. ICC 또는 COC측은 그후 약 20년간 서로를 차별화하기 위해 ICC라고 부르고 있다. (ICC는 그밖에도 1950년대 하나님의 성회에서 시작된 '제자화'운동과 1960년대말로부터 1970년대에 활발했던 지저스피플 리바이벌에도 영향을 받았다.) 


주류계인 본래의 COC는 미국 남부와 중서부 지역의 '바이블 벨트'에 집중 분포돼 있는 근본주의 그뤂의 하나로, 1800년대 '환원운동'으로 불리던 보수적인 종교운동에서 비롯했다[각주:3]. [이 환원운동에서 추가로 파생된 교단으로는 독립 크리스토교회(CC)와 크리스토의 제자들(DOC)-둘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연합크리스토교회(UCC)와는 기원이 매우 다르다. 한국에도 1927년 COC의 입장을 받아들인 몇몇 '그리스도의교회' 교단들이 있다. 참고링크: http://scissurl.com/5/qy0  크리스토의 교회의 특징은 원래 악기 사용을 금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 교회가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무(無)악기파와 유악기파로 나뉜다. ]  


크리스토의교회의 환원주의는 다소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불러와, 교리를 개발하거나 모종의 전통적 관행을 개시할 권위가 교회에 없다고 봤다. 모든 권위는 이론상 크리스토님으로부터 직접 비롯되며, 실제로는 기록된 성경에서 비롯된다는 개념 아래, COC는 모든 신약후 계시나 성령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지로(指路)를 거부한다. 주류계 COC는 사도신조 등에 나타난 니케네 교리를 반대하지 않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인간의 신조라고 믿어 ,예배 때 사도신조에 따른 '신앙고백' 등을 하지 않는다.  

COC는 대체로 성삼위일체 교리를 따르지만, 일부 사역자나 교사들은 성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데도 특별히 분열의 동기는 되지 않았다. 


크리스토의교회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고, 죄를 회개해야 하고, 예수 크리스토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고, 죄 사함을 위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소위 '다섯 손가락 실천'을 믿는다. 그들은 신자들만 침례를 주기 때문에 영아나 유아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은 또 침례의 행동이 실제로 회개한 신자를 구원해 준다고 믿는다. 비록 물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행전 2'38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결과다). *) (제임즈왕 성경 유일주의자(KJVO) 피터 러크만은 COC를 이단적이라고 5대 면모를 들어 주장했으나, COC 측이 반박한 바 있다.)  


크리스토의교회는 매주일 성만찬을 한다. 그들은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을 믿지 않고, 개혁교회의 입장처럼 크리스토님의 몸과 피가 상징이라고 믿는다. COC는 "누룩 없는 빵"(주로 유대식 빵인 마쪼)과 "포도나무 열매"(포도주스)를 성찬의 요소로 사용한다(COC 대다수는 술/알코올 음용을 금하므로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COC 계열 교회는 교회내 여성의 역할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어린이 성경교실만 가르치거나 여성그뤂에서만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 따라서  '여성 카운슬러', '여성 사역 지도자' 같은 역할은 ICC의 창안이다. 그러나 COC의 좀 더 나이든 여성들은 ICC 만큼의 여성사역을 한다.  


COC 계열 교회 대다수는 예배 때 악기사용을 비성경적이라며 거부한다. COC를 독립크리스토의교회(InCC)와 가름하는 주된 행습이 이것이다. 독립크리스토의교회의 신앙 및 행습은 COC와 매우 유사하며, 그들 다수는 'Church of Christ'*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COC 계열 교회 대다수는 (간음 또는 비신자 배우자에게 버림받은 경우를 제외한) 이혼과 재혼을 금한다.  


이상은 COC 신앙 및 행습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과거 약 30년간 주류계 COC는 1950~60년대의 엄격한 교리적 신앙들을 많이 폐기했다. 이것은 아마도 여타 주류계 교파/교단과 특이하게 다른 점들이 새 신자들을 매료시키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크로스로드 운동 초기 당시, COC는 절대주의와 함께 오직 COC만 참된 크리스토의 교회요 크리스토의 사람들이라는 배타적 믿음 아래 여타 교파에 소속된 '교단 교회'들을 분열적/이단적이라고 보고, COC 사람들 다수는 여타 교파에 속한 교인들이 구원받지 못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었으며, 강단에서도 그런 메시지가 드물지 않았다. 


이 절대주의는 모든 신학적 이슈에 적용되었다. 교인들 대다수는 균형 감각이 결여되어, 예배 때 악기 사용 금지 같은 작은 교리도 부활 같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만큼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COC 교인들은 여타 교파 교인들로부터 늘 고립되었고 새 신학사상으로부터는 물론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 다수는 C.S. 루이스 같은 20세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작품을 읽고 더 오픈된 마인드를 갖게 됐다. 이래서 COC의 근본주의 입장은 다른 교파들보다 더 늦게 외부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ICC 역시도 환원운동과 COC의 용어와 개념 등을 활용한다. '환원' 곧 회복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환원운동의 또다른 용어인)"신약적 기독교"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운동이라고 자임한다. ICC는 교단과 교파 분화는 죄악이라고 보고 거부한다. 그리고 오직 성경을 선호하고 교리와 신조, 신앙진술서 등은 분열적이므로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ICC의 기본 신학과 성경해석학은 대부분의 경우 COC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유사하다.  



초기의 ICC: 크로스로드 운동 시기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와 크로스로드운동은 ICC의 초기 공동체였다. 크로스로드크리스토의 교회는 1967년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에서,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는 약 12년 후인 1979년, 매서추세츠주 렉싱턴에서 시작되었다. 주요 이벤트별 타임라인을 보면, 크로스로드 시기에는 1967년 첰 루커스가 크로스로드에 임용되었고, 1972년 킾 맼킨이 침례를 받았으며, 1977년 매킨과 롸저 램 두 사람이 기성교회인 메모리얼드라이브크리스토의교회에서 쫓겨난 뒤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를 시작한다. 1982년에는 뉴욬크리스토의교회가 개척되며, 80년대 중반기에 루커스가 크로스로드에서 해고되고, 얼마 후 매킨 역시 크로스로드로부터 부정시 된다. 1987년 이후 '교회대(大)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매킨이 로스앤젤로스로 옮겨가며 보스턴운동은 '국제크리스토교회'로 공식 자칭된다.  

 

크로스 로드 운동의 지도자 첰 루커스


이에 따라 ICC는 1979년 보스턴크리스토교회의 시작을 창교 시점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바깥 사람들은 그보다 12년전 플로리다 게인즈빌의 14가(훗날의 크로스로드)크리스토의교회를 그 시초로 본다. 1967년 교회의 장로(감독)들은 첰 루커스를 캠퍼스 사역자로 고용했고 루커스는 즉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게인즈빌 캠퍼스에서 '캠퍼스 어드밴스'라는 이름의 사역을 시작한다. 루커스는 동시에 두 소스에 따른 멘토링(디사이플링) 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첫 소스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루이스 오르티즈가 성공적으로 써 먹던 일대일(1-over-1) 제자화 구조였다. 당시에 같은 게인즈빌의 다른 패러처치 지부인 마라나타미니스트리(일명 '생명나무')와 네비게이토가 같은 방식을 쓴 바 있으나 후에 두 후자는 의무적 디사이플링이 흔히 학대성으로 변질돼 버리는 사례 탓에 이 시스템을 내버린다. 

두 번째 소스는 롸벑 콜먼의 '전도 매스터 플랜'에 따른 것으로 '디사이플링' 또는 '목양(shepherding)'이라고 불렸다. 이 시스템은 마태복음서 28'18~20에 따라 1. 제자 만들기는 크리스천 삶의 일차적인 골이며 목적이다. 2.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며 사람들을 개종시켜(즉 크리스토의교회에서 침례를 주어), 크리스토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친다는 식이었다. 3. 이에 따라 제자 만들기 과정은 새 신자 한 명에게는 보다 성숙한 신자 한 명을 멘토 또는 '기도 파트너'로 할당하여 온전한 복음을 가르치되 후배는 선배를 따르고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루커스는 여기에다 한 술 더 떠, 4. 제자 만들기는 하나님, 교회와 제자화 과정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루커스는 많은 추종자들을 그냥 자기네 삶대로 놓아두면 온갖 딴 방향으로 흩어져 가 버리는 현상에 주목했다. 어떤 사람은 뉴욬에 직장을 구하러 간다고, 어떤 여성은 LA에서 학교를 시작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케냐에서 교회를 개척했다는 말들을 했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들을 COC로 귀속시켜 충성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바로 이것이 크로스로드와 20년 후의 ICC가 공유하는 시스템 상의 유사점이다. 

즉 ICC의 포교(전도) 중심 바이블스터디 소그뤂(크로스로드에서는 '소울 토크' 곧 영혼의 대화라 불렸다), 디사이플러('기도파트너'), 묵상시간(QT) 갖기, 급진적 기독교('전적 헌신'), 세상(또는 최소한 이 세대)을 향한) 필수적인 전도명령 등은 모두 크로스로드에서 왔다.  


그 결과는 가히 놀라웠다.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 개척 이전 12년 동안은 크로스로드크리스토의교회와 (크로스로드 형) COC '캠퍼스미니스트리'가 세계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교회'들이었다. 그러나 빠른 성장만큼의 부작용도 찾아왔다. '전적 헌신'을 한 젊은 제자들이 흔히 "미지근하고 영적으로 죽은" 선배 교인들을 우습게 여기고 깔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영적 교만과 시건방짐은 처음부터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 왔다. 이에 따라 선배 교우들과 지도자들은 이 제자화 운동에 관해 우려하기 시작했으나, 제자화 지도자들은 그런 우려를 무책임한 것으로 보고 무시했다. 이에 따라 보수적인 주류계 COC 사람들은 크게 긴장감을 느꼈다. 


1977년, 텍서스 휴스턴의 메모리얼드라이브크리스토의교회는 일리노이 주에서 소형교회를 이끌도록 후원해 왔던 두 젊은 크로스로드 사역자를 전격 해고했다. 그 둘은 메모리얼 드라이브의 장로의 아들이었던 롸저 램과 킾 매킨이었다. 교회 장로들은 램과 매킨이 거짓된 속임수 교리를 가르치고 통제술을 증진하기에 재정지원을 철회한다고 공문에서 밝혔다. 이 공문은 COC내에 점증해온, 크로스로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였다. 1979년 크로스로드 사람들은 이제 더는 COC내에서 자기네 방식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자, 캠퍼스 사역체들이 심각하게 분열되고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매킨은 딴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자신에게 크로스로드 방식의 교회 재생을 해 주도록 요청하는 보스턴 교외의 한 작은 크리스토교회를 발견하고 이에 선뜻 응한다. 쇠퇴현상으로 폐쇄 직전 상태였던 그 소형 교회는 캠퍼스 사역을 통한 매킨의 능력을 주시하고, 그와 그의 팀에게 전적으로 교회를 맡겼다. 바로 그래서 보스턴크리스토교회가 설립된다. 



보스턴 시대(1979~1987년)


1980년대 초기에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급기야 모든 COC 계열 교회와 다른 제자운동교회를 초월할 정도였다. 1981년에는 뉴욬에다 첫 지교회를 개척한 데 이어 이듬해 쉬카고와 영국 런던에도 개척했다. 이듬해 2년 동안에는 세계 주요 지역에 여러 교회를 추가로 개척했다. 또한 주류계인 COC 안에 재침투해 '재건'을 명목으로 일부 교회들을 적대적으로 점거한 데 이어 '재건'을 위한 지도자들을 보스턴에서 훈련시킨 뒤 파견했다. 


보스턴에서 훈련받은 팀에는 전도자 1명과 몇 명의 인턴들이 포함되어 새 도시에 파견되었다. 전도자와 1~2명의 사람들이 스태프가 되어 보스턴에서 봉급을 받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스스로 직장을 찾아 자비부담으로 사역하도록 요구당했다. 1980년대 초기 팀 멤버들은 자원봉사자들이었다. 훗날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팀 멤버들을 선정하되, '소명자'인지 아닌지를 가렸으나 본인이 거절할 경우 문제가 심각했다. 이 기본 패턴은 현재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1982년까지 보스턴은 크로스로드를 제자화운동의 실제 센터로 삼아왔다. 크로스로드는 교회개척을 지속했으나, 보스턴이 개척한 뉴욬/시카고/런던 등지의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전세계에 교회 개척을 하고 있었다. "이 세대에 세상을 복음화하라"는 매킨의 커리즈머적이고 감성적인 설교에 자극받아 새 선교 팀들이 부단히 형성되어갔다. 


크리스토의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뭔가 일어나고 있는" 보스턴운동에 고무되어, 학교를 옮기거나 직장을 관두고 집을 팔거나 가족들을 데리고 보스턴으로 몰려들었다. 보스턴으로 옮겨간 주류계 COC 사람들 중에는 제리 조운즈와 고든 퍼거슨도 있었다. 그러나 조운즈는 1년 후 떠나서 보스턴에 관한 3권의 비평 도서를 써 냈는데, 책에서 그는 일부 지도자들이 매킨을 '사도'로 받들 정도라고 폭로했다. 

반면 퍼거슨은 1986년 보스턴에 합류하여 현재까지 머물고 있으면서, '교회재건' 방법론을 계발해 내어 1987년 '대 재건'운동 때 선을 보였고 1990년대에는 활성화되지 못한 교회를 위한 집합적 재조직에 활용되었다. 


크로스로드는 1985년 첰 루커스를 전격 해임하여 큰 충격을 자아냈다. 이유는 루커스가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했다는 것. 상당수 인사들은 이 조치에 반발하여 상부의 조작 여부를 의혹시했으나 추후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사실 루커스에게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크로스로드 지도자들이 다 눈 감아 오다가 더는 참아주지 못할 수위에 이르자 비로소 공표했다는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실상 이 운동의 창시자는 매킨이 아닌 루커스였지만, 계속 성적인 문제를 일으켜 왔다. 다른 대다수의 문제집단처럼 ICC도 이유야 어떻든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러 지도자들의 행실이 지도층에 의해 관용되어왔다. '리빌'에 따르면, ICC 지도자들은 전도자나 리더의 언행 때문에 책임을 지워 문책을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일종의 온상이 되어온 셈이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ICC와 COC 사이의 격간은 점점 넓어져만 갔다. 동시에 ICC는 킾 매킨의 보스턴 그뤂과, 매킨의 독재성과 전제주의적 구조에 식상한, 나머지 사람들의 그뤂으로 내적 균열이 커져갔다. 탈퇴한 옛 멤버들과 COC 사람들 다수는 매킨 방식의 끔찍한 영적/정신적 '학대'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던 1986년, 얼 베어드는 자신의 모교인 애빌린크리스천칼리지(ACC)의 교회성장학 디렉터, 플래뷜 이클리 2세 박사에게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의 현상학적 성장을 연구해 주도록 의뢰를 했다. 이클리는 주류계 COC 사역자이면서 보스턴 파의 지지자였다. 베어드와 여타 보스턴 지도자들은 이클리 박사가 주류계와 '컬트' 그뤂들을 비교연구한 끝에 컬트 그뤂의 경우 간단한 심리테스트인 MBTI(마이어즈-브릭 스타일 지수)를 통해 컬트 멤버들의 인격이 그뤂의 기준 또는 교주의 이미지인 싱글 타잎으로 집결되는 현상을 밝혀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클리는 보스턴크리스토의교회 사람 다수에게 이 심리테스트를 실시했고 또한 주류계 COC 사람들과 기타 몇몇 교단 사람들 상대로도 했다. 이클리는 ICC가 컬트라는 점증하는 비난이 보스턴의 현상학적인 성장율에 대한 질투에 기인한 오해라고 믿었기에 ICC를 방어해 주고 싶었다.   


이클리는 정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사결과, 보스턴이 현저한 '퍼스낼리티 쉬프트'를 보여*) 여태 들어온 외부의 비난이 심각할 정도로 사실이라는 것과 학대적 행각을 완화하기로 한 '변화'의 약속도 지키지 않은 것을 본 그는 마지못해 조사 결과를 출판했다. 그러자 보스턴측은 이클리를 교회의 적으로 여겨, 교도들에게 그의 강연 초청과 그의 저술물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이클리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의 관련 집필 내용을 주류계인 COC에 알려, 산하 교회들에게 ICC를 적극 경계하게 만들었다. 보스턴운동은 이제 위험한 과잉성장으로 보여졌다. 

보스턴측은 수개월 후인 1987년, 본래 보스턴측이 개척하지 않은 COC의 모든 제자운동권 회중들에게 '재건'을 요구했다. 이것은 현재의 모든 리더들은 당장 사임하고 보스턴으로 와서 훈련받는 한편, 보스턴측이 파견하는 리더십 팀들이 가서 해당 교회를 차지하게 될 것을 의미했고, 이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은 운동권에서 축출됨을 뜻했다. 

이클리의 심리 테스트 결과는 보스턴운동과 주류계 COC와의 관계를 완전 단절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었다. 대다수의 운동권 교회들은 보스턴측의 요구에 승복했지만 상당수 교회는 거부했는데, 그중 시애틀의 노스웨스트COC와 크로스로드교회가 있었다. 그냥 승복한 교회에서는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는 사람들의 엑소더스가 일어났는데 그중 다수가 오랜 옛 멤버들이거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도자들이었다. 


이즈음 킾 매킨은 ICC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제자로서의 수(受)침례'를 처음 공식화했다. 즉 개인이 받는 침례가 유효하려면, 후보자가 침례의 목적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며, 크리스토님을 따르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기로 완전 헌신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크리스토님 따르기와 리더에 대한 복종은 동격으로 여겨졌다). 침례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갖고 침례 받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여겨지지 않게 되었으며 이는 또한 주류계 COC 사람들을 참 크리스천으로 보지 않는 근거가 되었다. 그 결과 보스턴측이 개척한 교회에서는 재침례 흐름이 일어나 수많은 고위 지도자들이 재침례를 받았다. 수상쩍게도 킾 매킨은 재침례를 받은 적도 없고, 그것을 공표한 적도 없다. 


탈퇴자들은 1986-1988년 기간을 대재건기(GR)라고 부른다. 동시에 이때 ICC와 기존 COC 사이는 완전히 깨졌고, 양측은 서로를 차별화했다. 



  1. 본래 크로스로드는 첰 루커스에 의해 시작됐다. [본문으로]
  2. 원래는 침례교에 속해 있던 토머스 캠블과 그 아들 앨릭잰더 캠블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두 캠블의 사상을 이어받은 교파는 그밖에도 제자교회, 크리스토의제자교회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캠블 부자 외에도 바튼 스톤이 비슷한 환원운동을 펼치다 서로 통합됐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