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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도행전

스테판의 순교와 메시지




스테판의 순교와 메시지


참고 본문: (사도)행전 6~7장



[이 글은 설교가 아니다.]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Stephanos). 

흔히 줄여서 '스테판'(한글성경 음역 '스데반'. 영어 '스티븐')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성경에 의하면, 성령강림 이후 교회시대 최초의 집사의 한 명이자 첫 순교자였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님의 은총으로 수적으로 크게 배가된 첫 교회-예루샬렘 교회가 매일 빈민구호사역으로 과부와 나그네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국내파/히브리계 과부들만 맨날 혜택을 받고 해외파/헬라(그리스)계 과부들이 따돌림 받는다는 불만이 일자, 사도들의 지시 아래 구호사역 등을 전담하여 관할할 일꾼으로서 온 성도가 7 집사를 선출했고, 사도들은 다만 기도와 말씀/가르침 사역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7 집사는 스테판을 비롯, 필맆(빌립), 프로코루스(브로고로), 니카노르(니가노르), 티몬(디몬), 파르메나스(바르메나), 니콜라스(니골라)[각주:1] 등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름 다수가 그리스어 계열인 것을 볼 때, 교회 지도층은 헬라계 신자들을 전보다 대폭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집사'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는 일꾼/청지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집사 제도를 마련하게 된 취지와 의의는 교회의 대내외적인 일선사역을 맡아하는 사람으로서였다. 티모테A서 3'12 이후에서 보듯, 집사직은 그후 모든 교회에 공통된 제도가 되어갔다. 티모테A 3장을 보면,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던 훗날, 집사직은 감독직과 함께 상당히 엄격한 규준과 조건, 자격을 갖춘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직분의 중요성을 뜻함이지, 계급의 고하를 풍기는 뉘앙스가 아니다. 교회의 다른 직분들과 마찬가지로 집사는 어디까지나 일꾼이며, 결코 계급이 아니다! 집사의 의미와 가치는 교회의 허드렛일부터 중요한 일들까지 다양한 잡무를 맡아 하는 데 있다. 직명이나 명칭에 있지 않다. 바티칸 교황청처럼 다양한 '사제' 직제를 계급 삼아 운영하는 '교회'는 매우 잘못된 집단이지, 참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집사인데, 이런 막일은 일반 교인이나 하는 것이지.." 하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 부엌의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 등 '막일'도 감독/장로/목회자로부터 일반 교우에 이르기까지 직분의 '고하' 개념을 막론하고 성도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 한다! 또 한국 교회가 이름 뒤에 직함을 (마치 계급처럼) 불러주고 들어주는 칭호도 마냥 습관화 되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사실 매우 어색하다. 본래는 모두를 이름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서구의 대다수 복음주의 교회는 그렇게들 하고 있다. 



스테판은 누구였나?


아무튼 스테판은 7 집사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모든 면에서 두드러진 성도였음이 분명하다. 행전의 기자 루카의 면밀한 기록을 보면, 그와 또 다른 집사 필맆은 맡은 바 기본 임무인 구호사역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거뜬히 해 내는 일인다역 같은 사람이었다. 실로 교회에 긴요한 모범집사-일꾼다웠다. 그는 성령과 믿음뿐 아니라 은혜와 지혜도 가득하여, 교회의 대변인 겸 기독교 변증가 구실을 하였다. 12사도들과 함께, 성령에 사로잡혀 권능적인 초기교회를 대표하는, 정말 놀라운 인물이었다. 


스테파노스라는 이름은 '왕관/면류관'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는 정말 하늘 상급인 의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들 중 하나라도 얻을 만한 그릇이었다고 생각하면 참 예언적이고도 걸맞은 이름이 지어진 셈이다. 

스테파노스라는 이름은 명백히 그리스어 이름이기에 필시 그는 히브리계 유대인이었기보다는 헬라계(헬라어권 또는 헬레니즘권)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7집사들이 맡은 일이 애당초 히브리계-헬라스계 과부 구호 문제로 겪은 갈등의 해소를 위한 것이었기에 스테파노스는 헬라스계 신자들의 지지로 우선적으로 선출되었을 법하다. 


행 6'8 이하를 보면, 스테판은 권능도 가득하여 크고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세간에 행하였다. 스테판이 이적과 기사를 행한 것이 헬라스계 유대인들의 반발심을 사게 된 것으로 미뤄보아 애당초 그의 권능사역이 아마도 주로 헬라스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특히 교회에 대해 비호의적인 일부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물론 성령의 권능 사역을 하는 스테판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신비한 역사를 이성적으로만 보는 눈길 탓이었다.

 

오늘날 교회를 봐도, 목회자 외의 교우들이 정상적인 권능/은사 사역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상투적으로 좌시하다 못해 심지어 위험시 하기까지 하는데,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관행이다. 참 교회는 마땅히 이런 일꾼 겸 권능 사역자들을 두고 있어야 한다. 또 그런 권능사역자들은 충성과 열성으로 하되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겸손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 나타난 현상만을 갖고 자랑 삼는다면, 오늘날 비정상적인 권능사역인가를 하는 신사도들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들은 마태복음 7'22,23의 경고와 의미를 재음미해야 마땅하다. 또 성령을 흉내내는 친숙령들과 거짓 영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이런 권능 사역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적어도 영적인 안목과 분별력을 갖고 대신 이런 은사자들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고 관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현대교회의 현실이자 비극이다.   


스테판을 특히 질시하는 헬라스계 유대인들은 '자유민'(라틴어 리베르티니)이라고 불리는 해외파 유대인들과, 당대 북 아프리카의 퀴레네와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와 킬리키아 등지의 출신자들이었다. 이들은 스테판에게 시비와 논쟁을 걸어왔으나 스테판의 지혜로운 답변을 능히 당해 내지 못했고, 그 사실이 자신들을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이 회당파들은 물론 유대교 회당에 속한 무리들이기도 했으나, 회당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명사 '시나고게'에 단지 한데 모인 무리와 집단이라는 뜻도 있다. 

본절이 뜻하는 회당의 수는 하나라는 설, 3개라는 설, 최다 5개라는 학설들이 있다. 



적대세력


리베르티노 즉 자유민이란,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어왔다. 첫째로, '리베르티니'라는 명칭 자체가 라틴계 용어이므로 과거 종주국인 로마의 종들 또는 노예였다가 풀려난 유대인들의 후손이라는 설이다. 폼페이우스 대제의 통치 당시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힌 적이 있어 그중 다수가 나중 로마 시의 티베르 강 너머 정주해 살면서 자신들의 기도소, 회당 등을 보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사기(Ann. ii. 85)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의 유대인 추방 당시를 기록하면서 "(한때) 4,000명의 자유민들 또는 자유계급"이 한꺼번에 사르디니아로 축출됐다고 묘사했다. 


두 번째로는, 이들 자신들이 태어날 때 유대인이었다가 로마군에게 노예로 사로잡혔다가 해방된 사람들이라는 설이다. 폼페이우스는 유대를 정복한 뒤인 주전 63년, 유대인 다수를 로마로 보냈다고 한다(Suet., Tib., 36; Tac., Ann., ii., 85; Philo, Legat. ad Gaium, 23). 이 유대인들은 훗날 주인들이 놓아주어 로마에서 자유롭게 살고 티베르 강 너머에 정착하도록 허용됐다는 것이다. 퀴노엘의 'loco'에 따르면, 필로는 이들을 '자유민', 또는 '풀려난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또 프톨레미 1세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아이귚트(에짚트)에 노예로 사로잡혀 갔다가 정착한 바 있다. 


또는 자유민으로 태어났거나 로마에서 자유를 획득한 유대인들일 수도 있다. 당대 소아시아의 수도로 자유도시인 타르수스(다소)에 태어나면서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던 사도 파울(샤울)처럼 제국 치하의 어느 자유도시 출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만의 회당을 갖고 있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아랍어 역 성경은 '코린토계 사람들'이라고 옮겨져 있어 그리스의 코린토 출신인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세 번째로는, '리베르티나'라는 지명으로서 그 지역 출신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본문 뒤에 잇따라 다른 출신지역명을 나열한 문장 구조가 뒷받침해 주는 설이기도 하다. 천주교 초기 사기 하나를 읽어 보면, "리베르티나의 카톨맄 주교 빅토르가 말하기를 '거기 단합이 있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장소를 가리킨다면,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리베르툼이라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런 막연한 지명 출신들이 예루샬렘에 많이 살았을까라고 의혹시하기도 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Ῥωμαῖοι ἀπελεύθεροι' 곧 '로마 자유민들'이라고 옮겼다. 


아무튼 이들 상당수는 고국의 예루샬렘에 돌아와 거주하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와 회당을 보유했고 이들의 회당은 '자유민들의 회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폼페이 시대 때 '자유민들의 회당'이라는 명칭이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부 학자는 스테판 자신이 본디 리베르티노 출신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복음을 받기 전 분명히 헬라스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퀴레네인들은 물론 명백히 아프리카 북쪽 해안 리비아 부근의 퀴레네 출신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고: 행전 2'10; 13'1). 복음서에도(마태복음서 27:32, 마르코스복음=맑 15'21) 이 지역 출신자들을 말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들 역시 당대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북아프리카 아이귚트의 알렉산드리아 시에 살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리아는 주전(BC) 332년쯤 알렉산데르 대제가 창건한 도시로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인구가 많았고, 적어도 30만명씩의 자유민들과 노예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는 알렉산데르 왕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이 도시의 특정지역을 할당해 주었다고 주장했다(Antiq.: Rom. 14'7; 14'2, 대(對) 아피온, Rom. 2'4). 퓔로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역중 2개에 최소 1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분포돼 있었단다. 오마르의 아므론 장군도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킬 당시 거기 4만명의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구약의 그리스어 판인 70인경(Septuagint: LXX)이 바로 이 도시에서 번역되었다. 


당대 기록을 보면, 예루샬렘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가르무 가문은 (성전 지성소의) 진설병 제조 전문인이었으나 비법을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인들은 아이귚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계) 장인들을 데려다 비법을 전수했다..아브티네스 가문은 향 전문가였으나 제조법을 비밀로 지켰기에 현인들은 역시 알렉산드리에서 장인들을 데려다 향 제조법을 익혔다."  



킬리키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방으로 지중해의 퀴프로스(한글성경의 '구브로') 섬 북쪽으로 떨어진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의 수도는 타르수스(한글역 '다소')로, 다름 아닌 사도 파울의 고향이었다(행 9'11). 그러므로 바로 이 무리들 가운데 청년 샤울이 끼어 있었음이 거의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비교: 행 7'58; 21'39).     


당대의 한 기록을 보면 "투르시안(또는 놋 장인 즉 구리공들, 또는 타르수스인들, 또는 알렉산드리아인)의 회당에 일어난 일로, 그 곳은 예루샬렘이 있었는데 R. 엘리에제르에게 팔았고 그는 거기에서 온갖 사업을 했다"고 적혀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Antiq. xii 3. 4.), 킬리키아의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대제 당시 소아시아로 끌어들인 유대인들의 후예들일 수 있다. 


이들 헬라어권 유대인들이 모두 당시 예루샬렘 일대의 회당에 다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당시 예루샬렘에는 최소 460~480 군데나 되는 회당이 있었다니 이들끼리 모여 경배한 곳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일부 학자들은 '480'이라는 숫자가 탈무드 신비학에서 비롯됐다며 단지 히브리어 '충만'을 가리킬 뿐이라고 한다). 그즈음 티베리아스에만도 12개의 회당이 있었고, 회당의 최소 구성인원은 10명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들 자유민, 퀴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킬리키아인, 아시아인 등 5개 계열 사람들은 스테판의 강렬한 복음 메시지와 그의 권능사역에 대해 처음엔 호기심 반 거부감 반씩을 갖고 그에게 나아와 이런저런 시비조의 질문을 던지며 논전을 걸어왔으나, 도무지 아무도 그를 능히 당해내지를 못했다. 스테판이 매번 지혜와 성령으로 답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슬기로움은 매우 중대하고 요긴하다. 불신세계인 세상과 종교계를 향하여 교회를 대변하고 옹호하고 변증할 슬기로운 사람은 이 시대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영적 지식과 권능으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압도하는 스테판 같은 신자가 교회에 꼭 필요하다. 교만에서가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상대를 침묵하게 만드는 권위와 권능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현대 신자들은 복음을 쑥스러워 하거나 "수줍어 하여" 세상을 두려워 하면서, 스테판처럼 세상을 압도하긴커녕 자신이 먼저 침묵해 버린다. 결국 크리스토님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셈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런 교인들은 제 십자가를 지고 크리스토님의 뒤를 따르는 참 제자가 못 된다.  


그런데 세상과 종교계를 향한 우리의 답변은 스테판처럼 지혜와 성령으로 해야 한다. 머리가 좋거나 정보에 '빠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복하는 지혜로 할 말을 잘 가려가며 답해야 한다. 그러려면 필히 성령 충만해야 함이 당연하다. 오늘날 교계 단체를 보면 순전히 자기 머리로 답변하는 듯한 대변인들이 흔하다. 우리가 머리를 안 쓸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러나는 지혜를 가장 우위에 두어야 한다. 바로 야코보서 1'5이 약속해 주는 지혜이다. 


성경에 지혜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지만 정작 말씀이 보장해 주고 약속해 주는 그 지혜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지없이 불행한 사람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결국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리킨다. 세상적이고 인위적인 약삭빠름이 아니다. "머리를 잘 굴림"이 아니다.   


그런 지혜를 지닌 사람은 함부로 제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스테판의 말을 보라. 사도 파울의 말을 보라. 어디 자기 생각으로 점철된 언변이던가? 자신의 입심 또는 말 힘을 믿는 웅변이던가?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그 숱한 유대인들이 스테판의 말을 당해 내지 못했는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답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그것이 가능하냐고? 어떻게 가능하냐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예컨대 시편 119편을 보면, 기자의 마음은 그런 신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신자들은 대답을 하기 앞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기보다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주님께서는 말세에 순교적인 참 성도가 할 말에 대하여 이미 성령강림 이전에 중요한 교훈을 미리 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그대들을 (당국/법정에) 넘겨 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오. 그 때 그대들이 할 말을 (성령께서) 주실 테니까."(마태복음서 10'19)  


그러나 성령충만한 신자라도 늘 완벽할 수는 없다. 사도 파울에게서 우리는 뜻밖의 고백을 본다: "내가 여러분들과 함께 있을 당시 약하였고 두려워했고 몹시 떨었댔습니다."(코린토A 2'3 이하 성구 사역) 성령 충만하고 늘 승리적이던 파울이 왜 돌연 이런 초라하고 빈약해 뵈는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왜 그랬을까? 당시는 그가 헬레니즘의 발상지이자 헬라스 문명권의 총 본거지인 아테네를 거쳐간 뒤였다. 그는 아테네의 도로변에 즐비한 우상들을 보자 의분에 차서 대뜸 길가와 장터에서 그리스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유행 밖의 토핔은 아예 다루지를 않는 한량들이었고 다들 궤변가들이었다. 그런 자들과의 그런 토론이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그 다음 목적지인 코린토에서의 이런 진솔하고 실제적인 회고를 담은 고백에 비춰 볼 때, 아테네에서의 파울의 모습은 그다지 승리적이진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아테네에서는 파울이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만큼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왜냐하면 파울 자신이 이런 추가적인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과 나의 전도가 설득적인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나심과 권능으로 하였음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다 바탕을 두게 하려던 것입니다."  

곧 이어 파울은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관하여 위대한 해설을 해 주고 있다(코A 2'6~16). 유대인들에 대한 스테판의 답변은 바로 이 지혜였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헬라인들인 코린토 교인들에게는 매우 요긴하고 의미심장한 교훈이었다. 왜냐 하면, 당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적 지혜를 가장 중시하는 지혜의 사람들로 자부했고 자기네가 그 지혜로 세계 문명권을 한 손에 쥐고 있다고 자임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결여된 그들의 지혜란 것은 결국 대부분 우상숭배에서 귀결된 신화적 궤변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 세상도 그런 지혜를 여전히 중시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모든 철학의 시발점과 기초로 삼기 때문이다. 머리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다 그리스 신화부터 읽으면서 헬라 철학을 공부한다.

그런 그리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접근해 가려면 당대의 그레코-로만 사회의 공용어인 헬라어부터 활용해야 했다. 그리고 신화 속에 죽어있는 철학적 지혜를 자랑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는 지혜로 대응해야 했다. 


거짓 증언


여하튼 유대인들이 이런 질문과 함께 시비를 거는 태도와 방식, 버릇은 어제 오늘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예전부터 참 선지자들과 예수님께 그래왔었다. 게다가 이들은 궤변을 일삼는 그리스 철학과 문화에도 익어 있는 헬라어권 사람들이었음에랴. 그런데도 스테판에게 대꾸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머쓱해진 이들은 스스로 낮아지고 늦추는 것이 아니라 되레 화를 벌컥 내며 노골적으로 달려들게 된다. 약이 올라서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는 식이다. 예수님 이전부터 참 대언자를 멸시하고 참 메시아까지 받아들이지 않던 사악한 유대인들은 본래 이래왔다. 이게 곧 마귀 싸탄의 태도이고 행동 방향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물론 있다. 유대인뿐만 아니다. 죄악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게 당연하지만, 문제는 심지어 교회 안에도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지 그들처럼 악으로 갚으면 안 된다. 우리의 태도는 바로 스테판 같고, 사도 파울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들 헬라스계 유대인들은 자신들중 아무도 스테판을 당해내지를 못하자, 홧김에 그에게 터무니 없는 누명을 씌워 무고(誣告)하기로 작심을 한다. 이왕 크리스천들을 적대할 바에야 막 나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돈으로 사서 스테판이 모쉐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엉뚱한 악소문을 퍼뜨리게 한다. 더 나아가 예루샬렘 시민들과 지도자들을 충동질하여 스테판을 냉큼 붙잡아 당대 유대의 종교 법정이자 공의회인 산헤드린으로 강제로 끌고 간다. 


거기서 그들은 한 술 더 떠 매수한 거짓 증인들을 법정에 내세웠다. "이 작자는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도무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또 이 나자렡(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쉐가 우리에게 전해 준 규례를 뜯어 고치려 한다고 그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고 주장했다. 

정당한 법으로 본다면, 사람을 무고(無故)히 무고하는 자들이 범죄자들이다! 그러나 스테판이 억울하게 이렇게 되어가는 상황은 결국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첫 순교자로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해외파 유대인들에게나 국내 유대인들에게 예루샬렘의 성전이나 율법 전승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짓 증인들은 이 두 가지를 핵심 논제로 내세워 스테판을 거짓 규탄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언젠가 실제 건물을 헐고 율법을 파괴할 것처럼 이를 테면 음모론을 꾸민 셈이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어 보라고 하신 쪽은 크리스토님이셨다(요한복음 2'19~22). 성전을 헐듯 크리스토님의 몸을 무너뜨려도 되살아나셨다는 영적인 진정한 의미성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 가치 개념을 발산하지 못했다. 얼마나 비(非)영적인가! 언필칭 부활을 믿는다는 파리세들에게도 크리스토님의 부활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아테네에 파울이 전한 부활의 개념이 그 철학적 이방인들에게 웃음거리나 호기심거리로 밖에 아무 의미가 없었듯 말이다(행 17'31,32). 



그렇게 그들에게 마구 끌려가 법정에 선 스테판의 얼굴은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찬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담대하고 안색이 훤하여 누가 봐도 천사 같았다. 천사의 얼굴이나 복장의 대표적인 특징은 빛이 난다는 점이다(마태복음서 28'3, 루카복음 24'4, 행 12'7). 스테판의 얼굴은 이 때 모종의 "인격적"이거나 인위적인 표정 때문이 아니라, 마치 시나이(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하느라 하나님을 뵌 모쉐의 얼굴처럼 초자연적 광채로 빛났을지도 모른다(미쯔라임출국기=출 34'29~35). 그의 이 표정을 본 사람들은 혹 마음 한 구석 찔리는 정도였을지 모르지만, 그 표정을 정말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사람은 바로 청년 샤울(사울)이었을 것이다. 스테판의 천사 같은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스테판 투석형에 한 몫 했던 '죄인들의 괴수'로 나중 변화된 그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을 터이다.



산헤드린을 주재하는 대사제(대제사장)가 물었다. "이것이 사실이오?" 즉 (거짓) 증인들의 주장이 옳으냐는 물음이다. 스테판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7장 한 장을 다 차지하는) 일장 변론을 펼친다. "부형(부형) 여러분* (원문은 여러분, 형제들과 아버지들), 들으십시오"라고 시작하는, 설교와도 같은 긴 메시지이다. 사도 파울도 자신의 변증에서 '부형'(父兄)이라는 용어를 썼다. 

물론 지혜가 가득한 스테판이기도 했으나 사도도 아닌 집사가 한 설교라기엔 너무나 탁월한 내용이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는 너무나 거침없이 줄줄 히브리족의 선조 아브라함때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간추려 훑고 있다. 어떤 설교가나 웬만한 역사학자보다 나은 웅변이고 안목이다. 



스테판의 메시지


스테판의 메시지 내용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역대 족장들로부터 모쉐 이후에 이르기까지 회고해 보고, 그들 모두가 오실 메시아를 고대했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메시지 끝 부분은 여태도 메시아를 믿음으로 받지 않는 유대인들의 강팍함을 준엄하게 꾸짖는 내용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90% 이상의 세계 유대인들을 향한 변함없는 진리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스테판은 (2절에서) '영광의 하나님'(Ὁ θεὸς τῆς δόξης 호 테오스 테스 돜세스)이라는 명칭을 썼다. 히브리어 '엘 하 카보드'에 해당하는 이 문구는 시편 29'3에도 쓰였다. 우리 말 성경 개정역 등은 원문의 단어 '호스테'를 "보여"라고 약간 어정쩡하게 옮겼으나, 분명히 영광의 하나님이 몸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아브라함이 영안으로 볼 수 있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성삼위를 대리한 성자님이셨다고 할 수 있다. 성부님은 영원히 늘 보좌에 계시며 인간이 볼 수 있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자님이 독자적 행동을 취하셨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소위 '양태론(modalism)' 주장과는 달리, 이처럼 성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함께 행동해 오셨다는 의미이다. 


왜 스테판은 메시지 첫머리에 영광의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할까? 우선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거나, 성전에만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은 아님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대인들 특히 해외 유대인들의 의식은 율법과 예루샬럄 성전에만 딱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본디 이를 초월한 하나님이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스테판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은 이렇다 할 화려하거나 버젓한 경배 처소도 없이 맨 몸으로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렸음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쇼므론(사마리아) 쉬카르 성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예루샬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신 말씀에 상응하는 교훈이다. 


아울러 이스라엘 선조들의 원래 출신지역이 야콥이 친척 라반의 집에 머물렀던 하란(파딴아람)도 아니고, 아득한 이방 땅인 메소포타미아인데도 거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이다. 카나안, 이스라엘, 예루샬렘에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호봐 샴마(거기 계시는 예호봐님)이시고, 원하시면 어디에나 계실 수 있고, 우리  속에도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죄덩어리인 이 땅에도 내려오셨던 분이 바로 예호봐로서 임마누엘 되어 오신 예수 크리스토님이셨다! 그러나 유대인 대다수는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음을 믿지 않고, 오로지 예루샬렘 성전에만 임하실 수 있다고 굳게 믿고들 있다. 


한편 아브라함-야콥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 대다수는 워낙 오래-약 450년간이나-미쯔라임(아이귚트/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지내다 보니, 그 곳을 마치 늘 아늑한 고향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카나안으로 이끄시면서 도중에 훈련까지 시키시는 것이거늘, 목이 곧은 그들은 종살이 하면서 먹던 생선/오이/참외/부추/파/마늘 따위를 못내 더 그리워하며 그리로 되돌아가고파 몸부림쳤다. "미쯔라임에 있을 때가 더 좋았는데.." 하곤 했다. 하나님과 모쉐에게 복종하는 대신, 뒤를 돌아보며 미쯔라임을 향하곤 했다(7'38). 하나님 나라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 소돔과 고모라를 아쉬워하며 뒤돌아본 롵의 아내처럼 영적인 소금기둥이 될 뿐이다.  


이런 백성 가운데는 모쉐와 예슈아, 칼레브 등 몇몇 심지가 곧은 지도자들 외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없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과 모쉐를 버리고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이런 금송아지 우상종교는 훗날 야로브암(여로보암) 1세의 북이스라엘 왕국이 끝내 패망해 가는 주요인이 돼버렸다. 

이 불순종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테판이 성령 안에서 행한 영적 증언(7'42)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셨고, 그들이 광야에서 40년간 행하는 척 한 겉껍데기만의 희생제물을 인정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들이 광야에서 40년간 희생예물과 제물을 드린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신다. 

여기서 스테판은 아모스서(암 5'25'26)의 예언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외면하신 근본원인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희망들을 찾아 갈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대언자 아모스가 처음 폭로한 듯한 중요한 증언이다. 이래서 하나님도 그들이 우상인 천체를 섬기도록 내버려두셨다!


42절의 '테 스트라티아 우라누(천군/하늘 군대)'는 히브리어 '제바 하 샤마임'(만군/萬軍)과 같은 문구로 한글 성경에서 '하늘의 만상'이라고도 옮겨졌다. 제바 하 샤마임은 흔히 천군천사들을 가리키기도 하나, 상징적으로 하늘의 무수한 뭇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자주 대했다. 광야는 별들이 가장 맑게 보이는 장소의 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거치면서 하나님을 흠모하기보다 미쯔라임을 그리고 밤하늘에 유일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이 별들을 우러러보며 숭배했다. 반면 고대의 의인 요브(욥)는 천체경배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쳤다(요브 31'26~31).

그러나 이스라엘은 후대에도 다양한 천체들-시쿹(또는 싸쿹, '장막'), 키윤(또는 케반, 레판/렘판) 같은 별 형상을 만들어 섬기곤 했다. 몰롴/몰렠 역시 천체 우상의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43절은 원문의 의미가 다양하게 옮겨지곤 하는 난해 구절의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천체숭배를 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천체숭배에 관해, 모쉐를 통하여 이렇게 경고하셨다: 


"또한 그대는 하늘로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 위의 모든 천체에 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마오. 그것들은 여러분의 하나님 예호봐님께서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이라오"(신명기 4'19). 


즉 참 신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에 불과한 것들을 신으로 받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명령에 순종한 경우가 드물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순수하기보다는 늘 저런 우상들을 의식하고 바친 무의미한 제사이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께 경배할 때 눈과 마음에 불순한 우상들을 두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경배 이끔이나 메시지 선포자가 하나님보다 회중을 더 의식한다거나, 경배의 참 대상자이신 그 분보다 음악 등 경배의 요소들을 더 높인다거나 하나님보다는 관심이 가는 이성 등 특정인에 대하여 더 신경 쓰고 배려한다거나, 복의 시혜자이신 하나님보다 복 자체를 더 염두에 둔 예물, 또한 평소 삶 속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모시지 않는 것, 하나님의 청지기이기보다 나 스스로가 경제주권을 틀어쥐고 있는 모습,  등은 필시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분의 말씀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복종의 태도로 나아갈 때, 그러고도 곧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과 닮아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 이끌리지 않을 때 자칫, 그리고 걸핏하면 생각 밖에 쉽사리 우상숭배자가 되곤 한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이기보다 얼마나 더 신학적, 감성적이고 시각적, 심리적이기 일쑤인가?! 성경 속의 신앙 선배들처럼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현대인이랍시고 얼마나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려"대는가?! 소위 '신사도'들처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보다는 그 분이 주신 권능이나 은사를 얼마나 더 높이는가..?! 열매에 대한 아무 분별이나 검증도 없이 교계 특정 명사들, 성경 말씀 자체보다는 그들의 책이나 동영상 등을 얼마나 추켜 세우고 받드는가?  


그럴 때 물론 성령님이 말씀과 영감으로 일차 깨우쳐 주시지만, 유감되게도 우리가 거기 응하지 않고 순복하지 않을 때,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듯 하나님은 우리를 '별 숭배자'들로 "냅둬"두신 채 그냥 관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우상숭배자, 천체받듦이가 되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성령께 복종하자! 예수님을 바라보자! 진정 영과 진리, 믿음과 희생/헌신의 예물로써 참 경배, 살아있는 경배를 하자! 그리고 진실과 믿음이 결여된 틀과 껍데기만의 경배행위를 탈피하자. 하나님을 늘 최우위에 모시자!



43절과 연관하여 현대 이스라엘 국기에 그려진 6각형의 소위 '다뷔드(다윗)의 별'은 의외의 상징이다. 6각별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오컬트와 연계되어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 6각별에 대한 존숭심이 '장난' 아니다. 유대인들은 엄존하는 십계명의 제 1, 2계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별 떠받듦이들인가? 6각별은 유대계 유렆 경제구루인 롵촤일드 가문의 전통적인 문장 즉 그들의 성(姓)이기도 한 로트쉴트('붉은 방패')의 실제였다는 설도 있어 왔다. 6각별은 5각별과 함께 비밀집단들이 신성시하는 대상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이 6각별은 다뷔드의 후손이자 참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님과 전혀 무관하다는 진실이다. 따라서 주님이 참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이 정체모호하고 괴이한 6각별은 사라질 것이다. 



이 메시지에서 스테판은 "여러분의 형제들 가운데 나 같은 대언자를 세우실 것"이라는 모쉐의 예언을 귀띔하듯 상기하고 있다(7'37). 또한 모쉐에게 말씀하신 사자(천사/메신저: 7'38), 모쉐에게 말씀하신 그 분을 강조하고 있다(7'40). 바로 메시아로 오실/오신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다! 



성전숭상의 죄악


이스라엘/유대인들의 별 숭상, '몰렠 장막' 숭상은 성전 숭상과도 직결된다. 

(48~50절에서) 스테판은 결정적으로, 성전 숭상을 하는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장소나 건물 등은 경배의 대상물일 수 없다. 그러나 현대 교계에서도 건물숭상 정신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단순한 모임 장소인 교회당을 슐로모(솔로몬) 성전처럼 떠받들거나 교회당 안의 특정 장소를 구분하여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게 성역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목회자나 사역자들 또는 교인들이 새벽 기도 때는 아무래도 교회당에 나와야 더 은혜가 되고 힘이 난다는 둥, 예배 때는 '금 자리', '은 자리'인 앞 자리, 가운뎃자리에 나와 앉아야 더 복을 받는다고 하여 뒷 자리나 옆 자리에 앉으면 그만큼 은혜에서 떨어지는 "덜떨어진(?)" 교인이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거나, 


교회당을 화려하게 드높이 지어 겉만 봐도 찬탄하고 우러러 보게 만드는 시각화 정신도 발견된다. 대형 십자가를 걸어 놓고 주위를 조명으로 장식해 놓아 은근히 단순한 상징 이상의 전시효과를 발하기도 한다. 새벽기도 모임 때는 어둠 속에서 조명 십자가가 일종의 위로자나 이끔이 구실을 하기도 한다. 


설교가들이 등단하는 드높은 강단과 강대상 등은 값비싼 자재로 잘 다듬어 깔고 닦아 꾸민 곳으로 '평신도들'이나 어린이 등의 접근/출입이 흔히 제한되는 구역이며, 교회에 따라 흙먼지 묻은 신발이나 발냄새 나는 양말이 아닌 슬리퍼로만 오르내리게도 한다. 성당 제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교회당 전체가 대체로 성역화되어 걸인이나 술꾼 등 교인 아닌 '외부인'들이 함부로 출입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거룩한 예배장소"이므로 평소에도 음식 휴대가 금지되거나 아이들이 거의 전혀 뛰놀 수 없게 하기도 한다. 뛰노는 아이는 성역으로부터의 금기/추방 대상이다. 주일학교 구내에서 장난감놀이 등도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그러면서도 강단에서 경배 겸 어른들의 눈요기(?)를 위한 무용 등은 용허된다. 


과연 이런 정경이 성령강림 직후 초기교회의 모범이고 정신이었을까? 이런 현상들은 일종의 성전숭상 행위가 아닐까? 겉껍데기 경배 정신이 아닐까?


교회당에 다니고 나오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성도의 교제 때문이지, 특정장소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다. 성도의 만남과 모임이 교회이지 장소 자체가 교회가 아니다. 꼭 버젓한 장소가 있어야만 교회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거의 우상숭배적이다. 그럼 '옥외예배'는 버젓한 장소에서 할 것이지 왜 바깥에서 하는가? 


참 경배는 특정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그 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자들이 모이고 주님께서 계신 곳이 곧 교회이다! 버젓한 장소야 있든 없든 말이다. 의식의 발로(發露)는 그 분에게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인위적이고 율법적인 전통이나 공상이어선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주의, 건물지상주의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오늘날에도 현대 이스라엘이 소위 '제3성전' 건립운동을 통해 성전숭상주의를 자행하고 있다. [오해 말라. 필자는 반이스라엘주의나 반쉠족 정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들이 지으려 하는 제3성전이 곧 '에제키엘 성전'일 수가 없다.] 일부 크리스천들 특히 주권주의자/'신사도'/킹덤나우 운동가들 등 '복음주의자'들도 제3성전을 건립을 돕고 있으나 이 '성전'은 유일한 참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와 전혀 무관하다. 그들만의 또 다른 '메시아'를 위한 것이다. 



51~53절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 분노폭발의 정점이다. 참 메시아에 관한 내용이기에 그렇다. 절정이자 총결론이자 본론이기도 하다. 스테판은 이 메시지 시종일관 목숨을 내걸고 있지만 특히 이 대목에서는 그러하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의인이고 장본인이신 예수님을 사실상 너희들이 죽였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메시아 살해 행위는 천사가 전해준 율법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결론짓는다.  



스테판은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지 않고 한사코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무리"라고 지칭한다. 표현이 자못 신랄하다. '목이 곧다'는 말은 겸비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뻣뻣하여 굽힐 줄 모르며 따라서 순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라삐의 돌칼로 몸의 할례는 받았지만, 성령의 '불 칼'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이다.

말씀과 복음을 통한 귀의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이다. 거듭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할례 받지 못한 고대 히브리인들이 아브라함 언약과 상관이 없었듯,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 역시 예수 크리스토와 상관이 없다. 


바꿔 말하면, 마음의 할례, 귀의 할례를 받아야 겸비해진다.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아브라함과의 언약-예수 크리스토를 통한 새 계약-에 들어와야 사람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 

그러기 전엔 옛 우상숭배자의 타락한 마음 그대로일 뿐이다. 옛 광야 선조들처럼 성령을 거스리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처럼 영적 할례를 받지 못한 교인들이 수두룩하다. 아니 우리 자신들이 가끔 또는 자주 그런 상태에 드나드는 지도 모른다. 낮아지고 겸비하여 회개할 일이다. 

  


순교


아무튼 스테판의 메시지 이 대목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더는 그의 메시지를 들어 줄 수도 참아 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 크리스토라면 이가 갈릴 정도로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찔렸다.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러 오신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서 16'8). 하지만 그 찔림은 그들의 회개를 도출해 내진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아이러닠하게도, 그리고 유일하게도 그들 중 오직 두목이요 증인 격인 샤울만은 달랐다. 그는 불과 얼마 후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쉨으로 가던 길에서 난데없이 공중에 빛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의 전격적인 '부딪침' 이후, 비로소 "가시채를 뒷발길질" 하던 처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니 그 '가시채'를 끌어안고 몸엣가시까지 얻고 아파하면서도 가시관 쓰신 그 분을 위해 삶과 목숨을 바치게 된다. 정통 유대인이고 파리세 중 파리세였던 그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이고 혁신인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훗날 파울이 된 샤울은 예루샬렘 유대인 회중 앞에서 지난 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내가 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각 회당에서 구타했습니다. 또 주님의 증인 스테파노스가 피를 흘릴 때 저도 곁에 서서 찬동하고 그를 죽이는 무리의 겉옷을 지킨 줄을 그들도 압니다.'"(행 22'19,20)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으신다. 예수님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찾으시지만, 박박 우기며 거부하다가 끝내 항복하고 예수를 위해 몸 바쳐 일하는 '아이러니'들도 찾으신다. 



아무튼 스테판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도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이를 으드득 으드득 갈고 있었다. "저 놈을 죽이는 것밖엔 딴 길이 없다"는 지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즈음 스테판은 순교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성령이 넘치는 가운데 영안이 열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자,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이 보였고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 순간 그는 소리높여 외쳤다: "보시오, 하늘이 열려 인자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산헤드린 공의회를 무시한 채 귀를 막고 한 마음으로 달려들어 스테판을 잡아채어 성밖에 끌고 나아가 내던져 두다시피 하곤 거기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첫째로 자신들이 보기에 괘씸하기 이를 데 없고, 이젠 정말 죽어 마땅한 신독자(神瀆者)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스테판은 무수한 돌덩이로 맞아 얼굴과 몸이 처참하게 으깨어지면서도 고통을 모르는 듯 계속 외쳤다: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과도 같은 기도이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외친 뒤에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모든 순교의 귀감이 된 모습이었다. 이 생생한 순교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샤울 곧 파울이었다. 



순교의 열매


그러고도 스테판의 순교는 본격적인 예루샬렘 교회 박해의 계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유대와 쇼므론(사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가고 사도들만 남았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유대인들은 스테판의 장례를 치러 주고 몹시도 슬피 통곡했다. 너무나도 아쉬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흩어져 떠난 신자들은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이 평소 개처럼 여기던 쇼므론땅에도 도달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스테판과 함께 모범 집사였던 필맆이었다! 필맆은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으로써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스테판의 순교의 피 위에 쇼므론 교회가 탄생한 셈이다. 


이 쇼므론 교회의 탄생은 바로 주님이 쉬카르 성 야콥 우물 곁에서 한 죄많은 여인에게 하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요복 5'21~24) 한 현장이 되었다. 

할렐루야!



이처럼 참 순교의 피에서는 언제나 전도와 선교의 복된 열매가 맺어진다. 

순교는 아프고 슬프고 끔찍하지만, 그 열매는 아름답고 대가도 찬란하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참 신자들이 순교를 하고 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숨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 순교의 피에서 더 찬란한 복음 꽃이 피어날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을 의에게로 이끌어준 그들도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다니엘서 12'3b)  



  1. 사족일지 모르나 7 집사들 가운데 니콜라스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고 명시돼 있고,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이 경고하신 문제집단인 '니콜라스당'이라는 호칭에 그의 이름(동명이인?)이 부정적으로 쓰여,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 주님과 교회를 배신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가 유대교 또는 이교에서 사제제를 따다 교회 안에 도입했다는 설이 있어 왔다. 훗날의 또 다른 니콜라스는 소위 "산타클로스"가 되어 '성탄절'마다 아기 예수 버금가는 영예를 대신 가로채어 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