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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누구에게 보일 것인가(마6'1-6)




누구에게 보일 것인가

사람? 하나님? 

선행과 기도-두 가지 처신



참고성경본문: 마태복음서 6'1~6



여기 두 가지 처신이라는 선택이 있다. 

지금 나의 선행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인가, 하나님께 보여 드리기 위함인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는데, 잘 해야 한다. 

바른 처신이어야 한다.  

골라 하기에 따라 서로 엄청나게 다른, 두 가지 엇갈리는 결과로 나뉘기 때문이다. 

하나는 땅의 상, 하나는 하늘의 상이다! 

자, 둘 중 어느 쪽을 바라고 어떤 처신과 행동을 할 것인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위 본문은 신자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내용으로 이른 바 '산상교훈'의 일부이다. 여기서 주님은 특히 구호(구제)사역과 기도를 할 때에 신자의 처신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신다. 선행과 기도를 하나님에서 할 것인지, 사람들 앞에 보일 것인지에 관해서이다. 이것은 세상과 사회, 교회에서 살아가면서 늘 대인 관계와 대인 접촉을 갖는 공동사회인이자 동료 교우들인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은 오늘날, 바로 지금, 우리 성도들을 상대로 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도를 하든, 구호사역 등의 선행을 하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남을 돕는 착한 일을 하거들랑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하라고 하신다. 


"헐~"..이 어찌 놀랍지 않으리오?! 어떻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를" 수 있겠는가?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가능할 법한 일인가? 왼손이 남을 돕는 착한 일을 할 동안 오른손을 등 뒤로 숨겨 두겠는가? 그런다고 숨겨지겠는가? 


여기서 두 손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가상해 보자.


왼손: 야, 오른손.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오른손: 뭘..? 아무 것도 아냐.

왼손: (뭐야 뭐야..나 '촉(觸)' 되게 좋아.) 너 지금 뭔가 좋은 걸 하고 있는 거지?

오른손: 아냐,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왼손: 지금 뭔가 하고 있는데, 분명히?    

오른손: 아 증말..야 오른손, 제발 모른 척 해 줘.


주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상황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떤가? 


왼손: ...

오른손: 어이, 왼손아. 뭐 하는겨?

왼손: ...

오른손: 얼레? 웬 유구무언이여?

왼손:...

오른손: ?? 헐, 으뭉스럽기는..


혹 이런 상황은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까 주님의 그 말씀은 그 분 특유의 강조성 비유이다. 다소 과장스럽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그 정도로 남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런가? 평소 착한 일을 하면서 몰래 하긴커녕 뭔가 드러내고 남에게 자랑하거나 심지어 과시하지는 않는가? 그럴 경우 우리는 사람의 칭찬은 받아도 하늘 상급을 잃는다. 


이것은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이다. 남에게 의식적으로 보이려고 착한 일을 할 경우 땅에서 이미 상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거기 해당하는 하늘 상급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래는 하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처신에 따라 놓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 남에게 보이고 보이지 않고에 따라. 


땅의 상과 하늘의 상.

- 생각해 보라. 이거 얼마나 기막힌 갈림길이고 서로 판이한 전환점인가! 과연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분명, 마땅히 후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육을 가진 우리는 후자보다 전자에 더 입맛이 당기기 쉽다. 왜? 전자가 더 현세적, 감각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먼 미래의 것으로 여겨지기가 쉽다. 

우리는 자칫 멀게 느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보다 왠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주위 사람, 동료 교우들로부터 칭찬과 호평, 갈채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게 바로 땅의 상이다. 하늘 상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주님 당대의 유대인들, 파리세(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흔히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땅의 상을 중시했다. 하늘 상급이 있다는 것도 아예 의식치 않았을지 모른다. 그만큼 사람들로부터의 상찬을 즐기고 누리다시피 했으니까. 늘 주위의 시각을 의식하며 지냈다. 뭔가를 보여 주고 뭔가를 듣는..늘 그 맛에 살았다.  


직접 길거리의 상황을 보자. 

그들은 네거리, 저자거리 같은 장소의 한 가운데 또는 동구 밖에 서서 우선 쇼파르(양각 나팔) 따위를 불어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그러모았다. 꼭 옛날 우리네 원님 앞에서 '나발' 불 듯이 말이다.


유대인들의 신경은 쇼파르 소리에 예민했다. 고대로부터 위험신호나 개전 신호, 또 축제나 명절의 개시신호음 등으로 자주 쓰였기 때문이다. 뿌~ 하고 길게 불어젖힐 때, 지나가던 모든 행인들의 귓전과 눈길을 모을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어, 뭔가 있구나", "호오, 구제를 하시려나 보네" 하고 눈이 둥그래진 사람들이 다가올 터였다. 


그리고는 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시혜자는 수혜자들에게 내심 "자 자 자, 어서들 오셔. 내가 도와 주지, 이렇게! 허~, 어서들 받게. 이왕이면 남들의 눈총이 하나라도 더 꽂힐 때 받으란 말야. 구경꾼이 하나라도 더 몰려와서 쳐다볼 때 받으라니까. 너그러운 이 몸이 베풀어 주시는 거니까." 


- 이러기가 십상이었다. 그리고는 귀를 잔뜩 모으고는 뭇 누리의 되바라진, 입바른 칭찬과 아양과 아부 따위를 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기분과 만족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자신의 하늘 미래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땅 위주, 지상 중심의 선행을 하나님은 상급감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해 봐야 사람들의 관심과 사람들로부터의 예찬, 인간의 영광으로 그칠 뿐이다. 그리곤..끝이다. 위로 오르거나, 하늘 상급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반면, 어느 신자가 아무도 모르게 극비리에 남을 도와 줄 경우는 다르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홍보나 광고 행위가 없이-아주 몰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이나 도움이 꼭 필요한 동료 교우들을 돕는다고 치자. 이 때 그의 선행은 천사들에 의하여, 마치 날개가 돋힌 듯 고요히 위로 위로 올라가 행위록에 기록되며,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대가와 상급을 받을 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얼마나 극적(劇的)이고도 극적(極的)인 대비인가! 정말 천지차-땅과 하늘의 차이인 것이다. 서로 완전히 극과 극, 정반대의 차원이다. 

땅의 상과 하늘의 상이 그처럼 다르다. 


성경은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신다.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신다. 

위(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일랑 생각하지 마라고 한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도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땅의 상급인가, 하늘 상급인가? 

그렇다. 후자를 택해야 한다! 전자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

전자의 결과는 존중과 선망, 인기와 한 때의 칭찬 등 한정적이고 일시적일 뿐, 영원하지가 않다. 언젠가는 잊혀질, 덧없고 경미한 것일 뿐이다. 그런 상급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받는 것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명예 좋아하는 세상 자선가들, 박애주의자들, 비밀집단 사람 등은 그런 칭찬을 좋아한다. 몰래 하든, 보이며 하든 남을 돕는 것을 멋지다며, 통틀어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불러 준다. 또 재원을 동원할 경우 면세 등 실리적이고 물리적인 혜택도 따르기 때문에 꿩 먹고 알 먹기로 해 낸다. 영어로 Fame, honor, and applaud...이런 것들-visible results-을 바라며 베푼다. sizable material이라고 할 만한 것들만 노린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이 하늘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를 날개가 없다.  

받을 것을 이미 땅에서 자기가 다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받을 상급의 뚜껑이 거기서 닫혀 버린다. 그 상급은 언제나 그것으로 끝이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단명하다. 뭐,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나. 그래도, 아무리 "오, 나의 영예와 이름이여, 영원하여라~!'라고 노래를 하고 기대를 해 봐도 실상은 아니다. 혹 땅에서 영구할지는 몰라도, 도무지 영원하지는 않다. 상상은 자유이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우리가 혹 땅에서 칭찬 듣기를 좋아한다면, 자신을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한다. 혹, 인기중독증, 칭찬 받기 중독증에 걸려 있지는 않은지. '킹왕짱' 환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나 같이 착한 일 많이 한 사람 있나 어디 나와 보라고 해" -뭐 이런 착각에 사로잡혀 있지나 않은지. 


기억하자: 선행과 남 돕기의 코드는 '몰래'이다. 이거, 정신 차리고 지키지 않으면, 남이 쳐다보고 칭찬해 주는 것에 솔깃하여 귀를 기울일 동안, "김밥 옆구리 터지듯" 하늘 상급거리가 솔솔 다 빠져나간다. 땅에서 아무리 챙겨 봤자 손해다. 철저히 손해다! 되는 장사가 아니다. 정신 차리자! 


그런데 여태 잃었더라도, 바로 지금 만회할 길이 있다. 지금부터라도 여생에 숨은 금자탑을 쌓아올리면 된다. 오직 하늘 상급을 목표로, 극비의 선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장차 하늘에서 번득이는 금면류관, 별빛 같이 빛나고 영원한 상급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얼마나 큰 저축이요, 적금이며, 가치 있는 실리인가! 하나님이 완전보장해 주시는, 그야말로 하늘표 '축재'인 것이다. 


땅의 모든 것들은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혀도 그렇다. 구체적인 것 같은데도 어디까지나 한시적이다. 감각적, 물리적, 가시적인 것들이 오히려 허상적이고 허탄하다는 것이다. 


반면 눈에 뵈지 않는 천상의 것들이 더 구체적이고 더 실리적이고 영원하다. 이 역설의 진리를 우리는 느끼고 깨닫고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영적으로, 성령에 의해서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질 해 봐야 절감되지가 않는다. 



금식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애당초 자랑삼아 금식을 시작하거나 금식을 하고 나서 "금식을 풀었다"고 노골적으로 통보하는 교우들이 있다. 미안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결과는 '꽝'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금식을 할 때도 바깥에 표시 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느군가 알아보게 주린 표정이나 애처로운 '우거지 상'을 짓지 말고, 되레 화장품을 써 가며 도무지 표시 안 나게 하라신다. 머리에 기름도 바르고 환한 웃음과 편한 기색을 지으라는 것이다. 표시 내고 광고를 하면 애써 일껏 한 금식도 땅의 상급으로 그치고 만다는 얘기이다. 


하나님은 기도도 갚아 주신단다. 햐, 기도를 갚아 주신다니, 정말 힘 되는 말씀이 아닌가! 기도는 그냥 무상으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떡인가? 홀홀히 볼 게 아닌 것이다. 


단, 기도를 하되,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서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단 둘이 속삭이듯 말이다. 그야말로 코람 데오(Coram Deo)의 상황이다. 


문제는.. 새벽기도회, 심야/철야기도회를 하는 한국 교회에서다. 과연 내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그 와중에서도, '골방'에서 하듯 몰래 하나님 앞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한국 교인들만의 도전이기도 하다. 외국엔 새벽기도는 있을망정 새벽기도모임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교회를 제외하고.


주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곤 하셨다.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고 울부짖는 기도도 하셨다. 예슈아(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들, 일부 왕들도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기도하곤 했다. 시편 기자들도 그랬다.


남들이 본다고 해서 물론 다 헛된 기도는 아니다. 슐로모도 다뷔드도 그랬다. 그러나 남들이 덜 보는 기도, 눈에 덜 띄는 기도일수록 그만큼 더 가치와 효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하는 기도일수록 진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도를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 옛날 파리세(바리새인)들은 동네 어귀에서, 네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깃과 술 등 장식이 달린 거나한 의례복 차림으로. 사람들의 눈에 번쩍~ 띄기 위해서. "오, 거룩해 뵈는군. 보기 괜찮은데.. 아, 듣기도 괜찮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하지만 쇼오프성, 시위성, 과시성 기도는 아니올시다이다.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왕 할 바에야 왜 손해 보는 기도를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알 수 없는 언변으로 하는 영언(방언) 기도의 가치를 높이 사게 된다. 영언-그것은 내 영이 오직 하나님께만 아뢰는 일종의 단독 채널이다(코린토A서=고전 14'2). 놀라운 특권이요 특혜이다! 그러나 자랑삼아 영언을 해선 마찬가지로 안 된다. 역시 사람의 눈과 귀를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 



선행과 기도, 금식...

이 모두를 알차게, 보람 있게 하자.

그렇게 할 길은 남 몰래 살며시 하는 것이다. 

되도록 아무도 몰래.

왼손과 오른손조차도 서로 "모르게" 말이다. 


그러노라면 하늘 나라의 내 상급의 금자탑이 날로 쌓여가고 높이 솟구칠 것이다. 

생각할수록 얼마나 흥분되는 결과인가! 

얼마나 황홀한 결실인가! 

얼마나 보람찬 가치인가?


이 다음 하늘 나라에서 부끄러운 구원만 받는 우리가 되지 말자.

뭔가 영원히 기림 받게 될 쪽을 택하자. 그러기 위해 오늘 바른 선택과 바른 처신을 하자. 한 가지라도 남 몰래 착한 행동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