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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선지서

절체절명 속 감사




절체절명 속 감사

-구약성경 다니엘서 제 6장 참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은 점점 더 서로 감사할 줄 모르는 세태가 되어갑니다. 

심지어 어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상대방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는데도, 아무런 고마움의 표시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심하기 짝이 없네..라고 느껴지더군요. 현대인들 다수는 이 무심증에 걸려 있습니다. 


마귀와 그의 세력은 절대로 감사라는 두 글자를 모릅니다! 

그들의 사전엔 그런 항이 없습니다. 오로지 무심과 원망과 불평불만, 미움과 욕질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인간에게 무심함과 불(不)감사 정신을 더욱 심어주려고들 애씁니다. 


고마움 없이 무심하게 살아가며, 은혜나 은덕 따위는 빨리 잊어버리려는 것이 오늘날 다수의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지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인간답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은 아무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우리는 진정 서로 감사합니까? "좋을 때 감사는 누구나 한다"는 말처럼, 신자들이 서로 주고 받는 게 있고 기분이 좋을 때, 감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기쁜 일, 신나는 일, 행복한 일이 일어나면, 쉽게 터지곤 하죠. 또 일 년에 한 번, 추수감사절에 하는 이벤트 성 감사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가볍게 할 수 있을 터입니다. 


하지만..성경과 기독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신자들에게 요구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늘 변함없이 하는 전천후적인 감사이지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감사로써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시편 95'2).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히브리서 11'6a). 

바꿔 말하면 믿음의 감사가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뜻과도 같지요.


우리는 불만스러울 때, 누군가가 자칫 미워질 때, 슬플 때, 가난할 때, 괴로울 때, 어려울 때, 어두울 때, 억울할 때, 두려울 때........ 

- 그럴 때도 하나님께 쉽게 감사합니까? 아니면 어렵사리라도 감사합니까? 


사도 파울은 모든 일에 늘 감사하라고 격려합니다(에페소서 5'20, 테살로니카A서=살전 5'18a). 

또 이왕 감사할 바에야 넉넉히, 넘치게 하라고 일러줍니다(콜로새서 2'7b). 

모든 일에..? 

언제나..? 

넘치게 감사하라..? 

- 이거, 적지 않은 도전이죠.


바로 그래서 감사는 우리의 믿음의 잣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음이 보다 큰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죠. 그러기에 대언자 하바쿡(하박국)은 이렇게 노래로 고백합니다(구약 하바쿸서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 나무에 맺힌 게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 안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난 예호봐(여호와)님 안에서 즐거워하리!

   내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 



더 나아가 절체절명의 절대 위기, 뻔한 죽음의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은 분명 보통 믿음이 아닐 터입니다. 


바로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그는 바벨론 때로부터 메디아/페르시아 시대를 거쳐 살던 유대인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와 계시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슬기롭고 총명하다 보니, 이방 나라의 역대 제왕에게 총애를 받아, 평생 정상급 고관으로 제국을 다스리면서 각별히 대우 받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죠!

그러다 보니 다른 동료 신하들의 질시도 덩달아 받아야 했습니다.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다라야바우쉬(=다라야후쉬/다리오/다리우스) 왕 때 특별히 그랬지요. 당시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120명의 고관들 위에 있던 3명의 국무총리들 중 한 명이었는데, 왕은 그중에서도 특히 현명한 그로 하여금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은 "헐~, 유대인 놈을? 그럴 수야 없지" 하면서 그를 적극 제어하고 성토하려 듭니다. 


그중 특별히 나쁜 신하들은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급기야 왕까지 꼬득여, 적법한(?) 과정을 거쳐 "합법적으로" 죽이려고 간계를 꾸민 것이죠. 즉 향후 30일간, 신과 다름 없는(?) 왕 외에는 신이든 사람이든 그 어떤 대상에게라도 기도할 경우 사자굴에 처넣기로 한 것입니다. 또한 이 금령을 조서로 만들어 어인(御印)을 찍고, 메디아/페르시아의 '개정불가' 규례를 따라 다시는 고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왕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대제국의 군주조차도 나라의 원칙에 따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응해야만 하는 처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사실 이 모두가 악한 신복들이 다니엘을 의식해서 한 짓거리였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정황을 이미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꿋꿋했습니다! 문제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사실을 뻔히 알고도 귀가한 그는 홀로 윗방에 올라가 예루샬렘으로 향한 창을 열어 놓고 전부터 으레, 늘 해온 대로 변함없이,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체포되면 그대로 사자밥이 되어 죽을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다니..이 얼마나 놀라운 감사입니까!


그를 모함하는 악한 무리들이 이 모습을 놓칠 리가 없죠. 


   "그럼 그렇지! 제깟 놈이 어떻게 우리 손아귀를 벗어나. 넌 이제 끝장이다." 


다니엘의 사저 주변에 몰래 숨어 엿보면서 '빈틈'을 노리다, 이 결정적인 고소감을 포착한 그들은 왕에게 빠르르 몰려가 곧장 고자질을 합니다. 다니엘이 금령을 어기고 자기 신에게 하루 3회씩 꼬박 꼬박 기도한다는 거죠. 


간신들의 이 말에, 왕은 비로소 "아차, 내가 속았군! 으흐, 이거 큰 실수를 했네. 그들이 다니엘을 해코지하려고 꾸민 계획인 것을..."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정직하여 늘 아껴오던 신복인 다니엘을 죽게 하다니 실로 후회막급이었지요. 그래서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떡한다? 어떻게 하면 다니엘을 살려내지?" 


왕은 하루 종일 이리저리 궁리해 보며 고심을 해보지만, 어느 새 해질 녘이 되고 맙니다. 

오로지 다니엘을 처단할 일심으로 여태 뜸들이며 기다리던 작당 무리들이 해가 지자 또 다시 왕에게 나아와 개정불가의 금령을 단행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칩니다. '다니엘 제거!'라는 비밀구호에 모든 것을 건 자들이었지요.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보려야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라야바우쉬 왕은 하는 수 없이 악한 신하들의 말대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도록 명령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지극히 아끼고 총애해 온 왕인지라 답답하고 안타깝고 애석한 마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오릅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은 활활 타는 눈길을 던지면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말을 건넵니다. 


   "(다니엘, 내가 어쩌다 그대를 이렇게 사자굴에 던져넣긴 하오만, 나를 용서하오..ㅠㅠ) 그러나 그대가 늘 섬기는 그대의 신께서 꼭 구원해 주시길~!"    


자, 이제 다니엘은 영락없이 곧 죽게 되었습니다. 

악한 무리들은, 다니엘이 던져지는 즉시 잡아 먹도록 사자들을 며칠 굶겨 두었기 때문입니다(참고: 단 6'24).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였죠! 사람들은 다니엘을 던져넣자마자 돌을 굴려 굴 어귀를 막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돌문에다 어인과 귀족들의 도장을 쾅쾅 찍습니다. 왕이든 누구든 건드리지 못하게. 

시쳇말로 "상황 끝"인 셈이죠.


과연 다니엘은 무서운 사자들이 웅크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자굴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감사는 그 정도로 상황을 초극하는 감사였을까요? 



아마도 다니엘은 그즈음 늘 섬기는 하나님 안에서 과거 일을 연상했을 터입니다. 그 옛날 바벨론 제국 시절, 자기와 함께 포로로 잡혀온 세 유대인 친구들-하나니야, 미샤엘, 아자리야[각주:1]-의 고백이 떠올랐을 것입니다(필자의 글 세상이 감당 못한 소년들 참조 >). 그들 역시 다니엘과 함께 당대의 제왕 네부칻네자르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은 죄목으로 미운 털이 박혀 풀무불 구덩이에 던져지기 전, 그들이 이렇게 외쳤던 일 말입니다:


   "혹여 그 분(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우리를 건져내시지 않아도) 폐하는 아십시오. 우리는 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님께서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도 않겠습니다!"


결국 세 유대인 청년들은 네부칻네자르의 분노와도 같이 극도로 펄펄 끓는 풀무불 속에 내던져졌지만, 그들과 직접 함께 하신 '신들의 아들' 같은 성자(聖子)님의 도움으로 마치 불 속을 냉방 속 거닐 듯 이리저리 거닐면서 머리털 하나, 옷 한 올조차 타거나 그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참고: 단 3장)! 

 


아무튼 다라야바우쉬는 궁으로 돌아가자, 밤새도록 슬픔에 잠겨 침식을 아예 모두 걷어치우고, 그저 안절부절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사자들이 다니엘을 갈기갈기 찢어 먹었을까? 아니야, 살아계신 그의 신께서 그를 지켜주셨겠지. 그래도 혹시나..??-이런 생각만을 수도 없이 거듭하면서 말입니다. 


이튿날 새벽이 밝아오자마자 왕은 급히 사자굴로 달려갑니다. 

슬픔에 울음 섞인 큰 소리로 다니엘을 부릅니다: 


   "오, 다니엘!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종이여! 그대가 늘 섬기는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그댈 거뜬히 건지셨는가?" 


물론 다니엘은 살아 있었고, 왕에게 힘차고도 반갑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다라야바우쉬 왕의 기쁨이란!!



왜일까요? 

다니엘은 변함 없는 감사로써 하나님의 보호망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 버리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몸은 신비롭게도 그 무서운 사자들 사이에서 옷 한 가닥 찢기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감사 때문이었지요. 

반면 진노한 왕이 살아난 다니엘 대신 사자굴에 처넣은, 그 발칙한 음모의 주인공 고관백작들과 그 일가들은 사자굴 바닥에 채 닿기도 전, 주리고 또 주린 사자떼의 엄청난 포효와 날카롭고 힘센 발 갈퀴에 움켜져, 그 거대한 이빨 아래 와삭와삭 뼈까지 바수어 먹혀 버렸습니다! 살아남은 다니엘과는 너무나..대조적이었죠.  



고대엔 예루샬렘 성전에 하나님께 전문적으로 늘 감사제를 올리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호봐(여호와)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에 특별한 감사를 그 분께 올리는 레빝(레위인) 음악인들이었지요(연대기A=역대상 16'7이하,41; 23'30; 25'3b; 연대B 5'13; 7'6). 오늘날의 성가대에 해당하는 무리였습니다. 왕과 사제들이 올바로 서 있는 한,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남 유다의 예호샤팥(여호사밧) 왕 때도 위기 속 감사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과는 고대에 피를 나눈 먼 형제 족속이면서도 늘 앙숙지간인 모아브 족과 암몬 족이 마온 족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때 예호샤팥 왕이 하나님께 간구한 뒤 하나님의 영이 한 레빝 음악인에게 임하여 승리의 예언을 하십니다. 왕은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가대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혀 유다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이렇게 외치게 합니다:


   "예호봐님께 감사하라! 그 분의 인자하심, 영원함이어라!"


이 감사 찬양이 시작되자마자 하나님의 복병이 암몬/모아브/세일 연합군을 쳐서, 한 명도 없이 몽땅 자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칼 한 번 쓰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직 감사찬양으로써 원수를 이긴 예호샤팥과 백성들은 그저 웃고 즐기며 이리저리 전장을 누비며 들판의 이삭 줍듯 전리품을 줍는데, 물건이 너무 많아서 사흘 동안이나 거둔 뒤, 나흘 째 베라카(='송축')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감사가 낳은 이적이었지요.


이들의 감사 전통은 훗날 바벨론 포로기 후 귀환/재건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집니다(네헤미야서=느 12'24,38,40,46 참조). 



레빝들이 백성들 대신 감사로써 섬기던 시절은 율법시대와 함께 종결되고, 이제 그들의 감사가 우리 성도 개인과 교회의 감사가 되었습니다. 

절체절명 앞에서 끄떡없고 두려움 없이 우러난 다니엘의 감사, 전쟁 위기에서도 찬양과 감사를 앞세운 예호샤팥 성가대의 감사가 오늘날 우리들의 감사가 되길 바랍니다. 


   예호봐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어라!



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다고 말합니다(시편 116'15).

더구나 고인이 천국 갔다고 확신할 때,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혹여 고인이 천국에 갔다는 확신이 들지 못하고 왠지 불안해도 이미 늦은 일. 뒤늦게 누굴 상대로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 땅에 남은 우리만이라도 더 깨닫고 더 열심히 믿어 천국 갈 기회가 남아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늘 감사합시다! 

역경 중에도 감사합시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 믿음의 감사를 드립시다! 


늘 감사제를 드립시다. 

불평과 원망일랑은 아예 우리의 믿음 사전에서 제거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1. 바벨론 명: 샤드랔, 미샼, 아벹느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