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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오 예루샬렘! (메시아계보대장정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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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독일 여행가가 그린 7세기경의 예루샬렘(위)과 현재의 '다윋 탑'(아래 )

성경에서 '예루샬렘' 만큼 귀에 익은 지명도 드물 터입니다. 찬송가와 찬양곡/성가에도 예루샬렘이란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예루샬라임'에 더 가깝죠. 뜻이 뭘까요? 끝이 '-샬라임'이니까 샬롬이 연상되고..그래서 평화와 직결된 이름임을 직감하실 겁니다. 예루샬렘의 뜻은 분명치 않아서, 평화의 거주지, 평화의 집, 평화의 가르침, 평화의 백성 등 다양하게 추정됩니다.

히브리인들 그리고 지금의 유대인들은 샬롬을 매우 자주 쓰지요. 하기야 그들의 인삿말도 그것이니까요. 우리의 "안녕~!"처럼 만날 때와 헤어질 때 흔히 씁니다. 영어의 '세일렘'도 본래는 어원이 같다지요.

성경엔 평화 개념이 들어간 이름들이 퍽 많죠. 다윋의 아들 중에도 압샬롬과 슐로모(솔로몬)가 있습니다. 압샬롬은 아브샬롬/아비샬롬-즉 '평화의 아버지'란 뜻이지요. 히브리의 아비/아빠는 한국의 아비/아빠와 같으니까 한글과도 비슷하지요.
평화의 아버지는 결국 하나님을 암시합니다. 슐로모는 그대로 평화이고요. 헤롣 왕 앞에서 춤을 춘 대가로 침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샬로메의 이름 역시 (무섭게도) 평화와 관계됩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산 사람도 많지요.


다윋 성
 

다윋 왕은 유다 왕국의 수도 헤브론에서 7년 반 다스린 뒤 다시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 전국의 왕으로 추대된 얼마 후 예루샬렘으로 천도합니다(슈무엘B=삼하 5:1~3).

예루샬렘은 카나안 주요 도시의 하나였고 지족(지파) 별 땅 기업 분배 당시 유다 지족에게 맡겨진 구역이지만 이곳은 예부스 족의 철옹성이어서 오래도록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5:6 이하, 참고: 예슈아=여호수아 15:63).

다윋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다윋과 부하들이 그 성을 치러 갔더니 예부스 사람들이 단단한 성벽만을 믿고 이렇게 흰소리를 해댑니다.

    "넌 여기 못 들어 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라도 너 정도는 물리쳐!"

터무니 없는 장담이었죠. 다윋이 누굽니까? 그의 누이 제루야의 아들인 요압 장군이 제일 먼저 쳐 들어 가고 다른 장군들도 뒤따라 들어 가서 순식간에 성을 차지하고 맙니다(연대A 11:6 참조).
결국 다윋은 찌온 산성을 뺏고 '다윋 성'이라고 이름하고 밀로(Millo)에서부터 안으로 성벽을 둘러 쌓았습니다(슘B 5:9).

'찌온'은 "양지 바른 산 언덕"이란 뜻이지요. 이후 예루샬렘과 찌온은 야웨 하나님이 가장 자주 부르시는 이름들이 됩니다. 

예루샬렘은 이때부터 한동안 이스라엘-유다의 수도이지만, 슐로모가 범죄하고 아들 레호보암 왕 때 나라가 남/북 둘로 나뉘면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는 사마리아가 되고 예루샬렘은 유다의 수도로 계속 남아 있게 됩니다.


고대사
 

예루샬렘은 퍽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다윋이 뺏기까지는 수 백 년간 카나안 7족의 하나인 예부스 족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훨씬 전인 기원전 4000년경 오펠이라는 산언덕 동네가 있었다는 추정입니다. 오펠은 본래 그냥 낮은 언덕 등의 뜻인데 예루샬렘 곁의 경우 '하 오펠'(the Ophel)로 고유명사화 됐습니다(연B 27:3). 

캐틀린 케니언 등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600년경 서쪽 쉠족들이 여기 도시를 세웠다고 믿습니다. 또 노아의 아들 쉠과 아브라함의 선조 에베르('히브리'의 원명으로 추정)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도 있습니다(창 11:15).

그러던 기원 전 약 2000년 고대 카나안의 도시국가 '샬렘'의 왕이던 멜키쩨뎈이 있었지요(창세기 14:18-20, 시편 110:4, 히브리 5:6-11, 6:20-7:28). 히브리어로는 '말키쩨뎈'에 더 가깝습니다. 말키는 '멜렠'처럼 왕이란 뜻이고 쩨뎈은 의로움의 뜻이지요. 즉 이 사람은 의로운 왕인 동시에, 샬렘 왕이니까 평화의 왕입니다. 아울러 그는 가장높으신하나님(지존자, 히브리어 '엘 엘리온')의 사제였습니다.

그가 다스리던 도시국가 샬렘이 지금의 예루샬렘이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봅니다. '샬렘'은 평화의 뜻도 있고 조화/온전의 뜻도 있지요.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와 또는 소돔 왕 베라를 만났던 '왕곡' 즉 왕의 골짜기인 샤베에 가깝고(창 14:17)..따라서 멜키쩨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살렘을 다스려 왔다고 볼 수 있지요. 그 정확한 역사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이곳 모리아 산에 붙인 이름 야웨 이레의 '이레'와 멜키쩨뎈의 샬렘을 따서 예루샬렘이 됐다는 유력한 일설도 있습니다. 바빌론 부근의 도시국가 아카드의 문서엔 '우루살림'으로 적혀 있습니다.

멜키쩨뎈이 왜 샬렘에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매일 경배하는 대 사제이면서 아브람을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을 만나 축복해 주려고요. 그리고는 아브람이 바치는 십일조를 받았지요. 성경에 나타난 첫 십일조 케이스입니다. (십일조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가 믿든 말든. 까닭은 멜키쩨뎈부터가 초율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제도에 묶이지 않으시니까 더구나 역설적으로 십일조는 유효합니다)

족보도 태어난 날도 죽은 날도 없는 멜키쩨덱을 구약 시대의 성자님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히 7:3). 또 어떤 사람들은 쉠으로 보기도 하지만 쉠이야 족보가 확실한 사람인데 말이 안 되죠(창 10:21~31).

어쨌든 지금 여기선 이 얘기가 본론이 아니고..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멜키쩨뎈이 예루살렘의 오리지널인 샬렘의 창건자요 '터줏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역사가 오랜 도시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후로 살렘을 다시 방문해서 멜키쩨뎈과 재회했다든지 십일조를 챙겨 꼬박꼬박 바쳤다든지 그런 말이 없습니다. 아브람과 멜키쩨뎈의 만남은 그냥 '1회용'이었나는 생각조차 듭니다.
아브람은 멜키쩨뎈의 존재에 관한 어떤 영감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았음이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샬렘이 중요한 근거지가 되리라는 예고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다윋 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잡고 외아들 이짜크를 죽여 제물로 바치려던 그 장소가 샬렘의 핵심 요지였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모리아 산이지요(창 22:2). 이 모리아 산은 바로 슐로모가 훗날 성전을 짓는 자리가 됩니다(연대기B=역대하 3:1).

여기 하나님의 깊은 신비가 간직돼 있습니다.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짜크를 거의 바쳤던 모리아 산을 아브라함이 '야웨 이레'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산에서 준비되리"란 계시가 있습니다. 또 이짜크 대신 제물이 될 수양이 덤불 수풀에 뿔이 걸린 채 발견됐습니다(창 22장 참조). 

자, 이 모두가 시사하는 것들이 뭘까요?
하나님은..

    1. 아브라함 당시 이미 하나님의 성산을 멜키쩨뎈을 통하여 준비하셨고
    2. 아브라함이 이짜크를 바친 바로 그 참 믿음과 순종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며
    3. 이 성산은 아브라함 후손들 중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윋 대에 와서 하나님
       왕국의 그림자인 이스라엘-유다의 성산 (즉 다윋성/찌온), 수도가 되고
    4. 다윋의 아들, 하나님께 사랑받는(예디디야) '평화왕' 슐로모가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것이며..(슘B 12:25)
    5. 아울러 하나님이 준비하신 거룩한 어린양, 메시아와 참 평화의 군주이신 예수
       크리스토가 이곳 골고타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실 것이 예비됐습니다.
    6. 그리고는 바로 거기서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사람들에게 온전한 기름부음을
       주시고
    7. 교회를 통해 땅 끝까지 온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뤄집니다.


이 모두가 예루샬렘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으로부터 예루샬렘의 존재는 실상 예수 크리스토와 교회를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했지요. 아울러 평화의 왕 슐로모는 장차 오실 평화의 군주 예수님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슐로모나 '야웨의 사랑받는 자'라는 예디디야라는 이름 등이 모두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후기사

예루샬렘은 그 후 기원전 586년 바빌론 군대에 정복 당해 성전도 파괴되고 왕족과 사제들, 음악인 등 국민 다수가 포로로 잡혀 갑니다. 50년이 지난 뒤 하나님의 뜻으로 페르시아 왕 코레쉬(페르시아어: '쿠루쉬', 한글성경: 고레스)가 일부 유대인들에게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라고 허락합니다. 이 성과 성전 재건은 약20년이 걸려 결국 70년째인 516년까지 일부의 포로 생활은 계속됩니다. 

그후 몇 세기 동안 다시 유다의 수도와 예배 중심지로 존속하지만,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데르 대제가 페르시아 제국과 함께 예루샬렘과 유다도 접수하지요. 그후 프톨레미 1세 치하의 프톨레미 왕조에 넘겨졌고 기원전 198년엔 셀레우키드 분봉 지역의 안티오쿠스 3세 치하에 들어 갑니다.

그러나 168년 유다 대 사제(대제사장) 마타티아와 다섯 아들을 중심한 마카비아 봉기의 성공으로 예루샬렘을 되찾아 152년 하스모네아 왕조가 세워지지요. 그후 로마가 강해져 에돔(=이두메아) 족 출신인 헤로드 대제를 유다 분봉왕으로 세웠고, 헤로드는 성전 건축과 함께 성벽을 강화하고, 왕궁을 짓고, 성전산을 강화합니다.

하지만 유다-로마 전쟁이 발발해 서기 70년경 예루샬렘은 티투스 장군(훗날 황제)이 이끄는 로마 군에게 함락 당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 130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도시를 로마화 하여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꿉니다.

하지만 '바르 콬바'(Bar Kochba) 반란이 일어나 3년간 예루살렘이 일시나마 다시 유다 수도로 탈환되지요. 그후 135년 다시 로마군에게 재함락되고 유대인들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그러던 4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는 이곳을 기독교 성지화 하여 '성묘교회당' 등을 건축합니다. 638년 아랍 족이 다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이 일시 쫓겨나지요. 7세기말 칼리프 아부드 알 말리크는 아브라함이 이짜크를 바친 추정되는 모리아 바위를 지키는 '바위의 돔'(마스짇 쿠밭 아스-사크라)을 짓기 시작합니다. 이후 약4세기 동안 아랍 족이 지배합니다.

1099년. 제1십자군에 의해 예루샬렘이 포위돼 안에 살던 무슬림/유대인들 대다수가 피살되고 상당 기간 정복됐다가 여러 번 무슬림 측에 다시 뺏기곤 합니다. 1187년엔 십자군이 살라딘에 패배합니다. 1228~1244년엔 살라딘의 후손 알 카밀이 신성로마황제 프레데렠 2세에게 바칩니다.

1244년엔 다시 카와리즈미 투르크 족이, 1260년엔 마멜루케 족이 지배합니다. 1517년엔 오토만 투르크 족에게 다시 점령됩니다.
1917년엔 예루살렘 전쟁 끝에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 육군이 점령하고 1922년 국제연맹(LN)이 밸포어 선언을 통해 영국에게 맡겨 새로운 유대 국가 창건을 도운 결과 유엔의 도움으로 1948년 독립합니다.   

그러나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결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구역과-트랜스요르단 구역으로 분리된 채로 남습니다. 1949~1967년 사이에 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일부,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에 속해 있다가 1967년 '6일 전쟁' 때 동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1980년엔 완전히 단합된 수도 예루살렘으로 선언하지만 아랍계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동 예루살렘을 장차 팔레스타인 '독립국'의 수도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땅의 예루샬렘 자체를 '성지'로 생각하고 땅의 유대인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것을 '복음주의적 찌온주의'라고 합니다만. 다윋이 땅에 살아 있다면 고개를 내저으며 한심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의 참 예루샬렘은 하늘이지 땅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모두 땅이 아닌 하늘의 성지를 목표로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히 11:8~16).

세속인들과 일부 유대인들은 지평좌표/경위도 선상의 예루살렘의 위치가 북위 31도 47분, 동경 35도 13분임을 강조하는데..

    31 47 + 35 13 = 66 60 이 됩니다.

혹시 장차 적 크리스토의 수괴 '짐승'의 본부가 예루샬렘이 된다는 뜻일까요? (계시록 13: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