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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떠오름(이머징)영성

매클러런, 수 몽크 키드, 클레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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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클러렌, 몽크 키드, 클레이본

등댓길 뉴스 1

수년전 '등댓길뉴스'는 미국 나자렡 교단 총감독에게 레이 영엔의 책 '벗어나는 시대'를 보냈다.
6명의 총감독들 중 짐 딜 감독은 그 책을 읽고 나서 영엔의 경고에 "동의한다"며 가장 두드러진 치하를 했다. 당시 등댓길 측은 딜 목사/박사에게 일부 나자렡 대학들이 관상가 연사들을 초청, 학생들 앞에 관상영성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귀띔했다.

오늘날 나자렡 대학들은 그때보다 더욱 더 깊이 관상영성(또는 '영적 형성' spiritual formation)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나자렡 교단 교회 교수들과 대학 총장/학장들이 딜 박사의 견해를 함께 나누지 않는다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2월 7~9일 아이다호 주 냄파의 놅웨스트 나자렡 대학교는 '떠오름'(Emergent) 영성의 지도자이자 관상가인 브라이언 매클러렌을 연사로 초청했다. 3월28~29일엔 샌디에고의 포인트 로마 나자렡 대학교에서도 강의한다.
떠오름 교회의 선구자 격인 매클러렌은 수년전 목회자에서 은퇴, 각 대학교/대학에서의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게 변해야' 투어를 하고 있다. 동명의 책 '모든 게..' 홍보선전 차원에서다.

지난 수년간 많은 대학교 인사들이 관상가들을 포함한 다양한 연사들을 초청하는 이유를 학생들이 서로 다른 견해 앞에 노출돼 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해 왔다. 그러나 그 '이유'라는 것은 도전 받아 마땅하다. 까닭은 우선, 떠오름 영성가들을 초청한 대다수 학교에서 관상/떠오름 영성이 '대화'라는 선호성 낙점을 받아, 아무런 도전도 토론도 숨김도 유보도 경고도 없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무차별 뿌려대기 때문이다. 

최근 뉴잉글랜드 한 기독교 대학의 학생이 '등댓길'에 흥미로운 전화를 걸어 왔다. 학교에서 지난 4년간 계속 관상가들과 떠오름영성 저술가들의 초청강의를 수시로 들었다는 것.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그런 책들을 읽도록 강요하고 교수 자신의 견해를 강의로 알리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긍정적인 데다 학생들에겐 질문이나 도전할 기회를 거의 도무지 주지 않았다. 더욱이 관상/떠오름 영성 저술가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꼬치꼬치 따짐성 질문을 받고 공적으로 폄하되기 일쑤라고 그는 전했다.   

성경의 경고와 지시에 따르면, 브라이언 매클러렌에 관하여 당연히 정당한 질문들이 던져져야 한다. 매클러렌은 예수 크리스토의 대속 교리를 거부하며 지옥 교리를 '하나님에 대한 거짓 선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과연 그가 놅웨스트 나자렡 대학교와 포인트 로마 대학교에 와서 강의할 때 학생들이 미리 그의 문제점에 대한 경고를 받고 나서 할까?

매클러렌은 성공회 사제 앨런 존즈와도 입맞춤 한다. 존즈는 그의 책 '기독교 재 상상'(Reimagining Christianity)에서 십자가의 교리를 '악성 교리'라고 해코지 했다. 그는 사람에게마다 "있는" 범종교적 영성을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고대 기독교의 한 가닥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신적 신비' 안에 사로잡혀 사람 속마다 영이 계시고, 재어야 할 해석의 깊이가 거기 있으며..대 성당에서 우리는 붇다의 길을 따르고 힌두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빵을 떼어'(성찬을 가리킴: 역 주) 나눠 주게 됩니다."(89쪽)

매클러렌은 지난 2006년 동정녀 탄생 등 기독교 핵심 진리를 부정하는 범종교 영성가 마커스 보그와 팀을 이룬 적이 있고 보그를 "드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과연 학생들이 이런 점을 사전에 알게 될까? 십중팔구는 학생들이 매클러렌의 '좋은 포인트들'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받을 것이다.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지 말라는 관상영성 옹호자들의 가장 흔한 논점이니까.

그렇다면 차제에, 역시 인기 높은 관상가/연사 수 몽크 키드에게 생긴 일은 어떻게 봐야 하나? 학생들을 관상영성/떠오름영성에 노출시켜야 좋다는 기독교 대학 교수들과 스탶들에게 몽크 키드 케이스는 좋은 경고가 된다.

수 몽크 키드는 본래 보수적인 남침례교 주일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 한 동료 교사가 그녀에게 현대 관상선구자 토머스 머튼의 책을 전했다. 책을 읽고 난 몽크 키드는 삶이 극적으로 변해 버렸다. 세계관과 신앙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관상기도에 희열을 느껴 적극 실천하고 수많은 관련 도서를 읽고 수많은 '성스런 낱말'들을 만트라처럼 반복했다. 그래서 마침내 신비적 각성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하나라는 숨은 진리를 깨달은 것을 말하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일부요 그들은 우리의 일부입니다..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면할 때..우리는 거룩한 땅 위에 선 것처럼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거기 계시는 듯 반응해야 합니다."('하느님의 기쁜 놀라움', 233, 228쪽).

여기서 몽크 키드는 신자들과 비신자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주의 필수 전제인 "그대는 거듭나야 한다"(요복 3:7)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녀가 신비주의적 보편구원론을 지녔다는 것은 힌두교 인사 '나마스테'(나는 그대 속의 신을 존경합니다)를 크리스천들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명백해진다(같은 책 228~229쪽 참조).

몽크 키드는 유니티교회나 종교과학 교회 등 형이상학적 문제성 교회를 다니진 않았다. 그냥 보수적이고 편안한 침례교회 세팅 안에서 '새 영성'을 발견했다! 더구나 자신의 보편론적 영성을 발견했을 때 틴에이저가 아니었다. 지성적이고 성숙한 가정 여성이었다.
기독교적 영적 성숙을 위한 진기하고도 '긍정적'인 어프로치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은 수 몽크 키드 같은 감수성을 지닐 확률이 많다. 분별력이 결핍된 사람들에겐 큰 위험인 것이다. 겉으로 경건하고 영적으로 상냥하게 보이는데 실제로는 기독교 진리에 정반대되는 무시무시한 배후를 지닐 수 있다.

몽크 키드는 위의 책을 쓴 몇 년 후 또 다른 책 '이견자인 딸의 춤'(The Dance of the Dissident Daughter)을 썼다. 1,2번째 저서에서 몽크 키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썼다. 그러나 3,4번째 책은 기독교보다는 위카(wicca, 일명 '마교')에 더 걸맞은 영적 견해로 바뀌었다.
몽크 키드는 이제 예수 크리스토 보다는 '소피아 여신'을 경배한다.

"우리에겐 또한 땅의 성스러움을 드러낼 여신 의식이 필요하다..물질이 영감을 받아 신성을 호흡한다. 땅은 살아 생동하고 성스럽게 된다..여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의 성스러움을 제공한다."(162,163쪽).

이같은 관상기도 배후의 세력을 결코 가볍게 봐 넘길 수 없음을 수 몽크 키드의 다음 기록에서 느낄 수 있다.

그 사역자는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책을 들고 있었다. 성경책은 마치 굴뚝새가 앉은 것처럼 손 위에 놓여진 채 펼쳐져 있었다. 그는 성경은 신자의 삶의 유일한 궁극적인 권위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라.

나는 기억한다. 그때 배꼽 2인치 아래 한 곳에서 어떤 느낌이 솟구쳤음을. 그것은 열정적이고 결정적인 느낌으로 파도처럼 내 중심으로부터 퍼져 나가 나의 살갗이 그것으로 진동할 정도였다. 느낌을 영어로 옮길 수 있다면 이 느낌은 '노!'라는 낱말이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내적인 앎이었다. 그것은 내 속에서 "노, 노, 노!" 라고 소리쳤다. 내 삶의 궁극적 권위는 성경이 아니다. 그것은 한 책의 두 표지 사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들에 의해 쓰여 시간 속에 동결돼 버린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 밖의 어떤 소스로부터가 아니다. 나의 궁극적 권위는 내 혼 속의 신적인 음성이다. 마침표.(76쪽, 영엔의 '벗어나는 시대' 제7장에서 재인용).

같은 책에서 수 몽크 키드는 하느님/신은 모든 것 심지어 배설물 속에도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관상가 토머스 머튼의 책이 그녀를 그 지경까지 끌고 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냉정히 물어야 한다. 과연 브라이언 매클러렌이 나자렡 교단 학생들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그리고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탓입니다..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크리스토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일시라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 속에 늘 지속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티아 2:4,5)


등댓길 뉴스 2

기독교 사학인 시더빌 대학교는 2월 11일 떠오름영성가/저술가 쉐인 클레이본을 데려다 연설을 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뒤늦게 돌연 취소됐다. 잔 데이비스 학교 홍보담당 디렉터는 "캠퍼스 안팎에서 클레이본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어 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일 예정됐던 행사 이름은 클레이본의 책 제목 대로 '불가항력적인 혁명'. 이 책의 판매 수익금은 브라이언 매클러렌의 모 교회나 신비주의 동조자인 토니 캠폴로에게 가게 돼 있다. 이 책 서문은 진보파 정치운동가 짐 월리스가 썼다. 월리스는 일각에 '기독교 중도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동성애자 그룹과 친근한 진보주의자다.

[고 테레사 수녀 등을 열렬히 받드는 박애주의자 클레이본은 연전에 뉴욕한인교회협의회 청소년분과 주최로 청소년 할렐루야대회 강사로 초빙돼 하루 '설교'한 적도 있다.]

그런데 시더빌의 한 교수는 행사 취소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사상계의 능동적인 참여자, 비평적 사고가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는 또 "클레이본의 방문은 우리가 갈망해 온 여러가지 흥미롭고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대화에 불을 당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대생 역시 큰 유감을 표하면서 "그는 참 훌륭한 분이고 그의 책은 위대한 사상을 지녔다"고 찬하하기도. 그러나 정말 나이스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구태여 거짓교리를 증진시켜 온 사람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대다수 사람들은 떠오름 영성이 뭔지를 잘 모른다. 뭔가 다른 기독교인데도 '기독교'로 주장되는 것을 바로 보는 감각이 둔해진다. 현재 많은 젊은 한인교회들도 가담해 있는 떠오름교회 그룹의 떠오름영성의 추진력은 신비주의다. 신비주의 없이는 떠오름교회 운동조차 없을 것이다.   

랃니 람니 박사(전 시애틀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는 뉴에이지 크리스천이다. 그는 자신의 관상기도 기간 동안 무엇이 생겼는지 솔직하게 밝혔다.

그가 접촉한 '지혜의 근원'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

"나는 그대가 이런 하나됨을 가르치길 원한다. 단합과 한데 아우름을 향한 나의 부름으로써 이것을 온 세상 앞에 들어 올려 주길 바란다. 종국에, 이 모든 사람들의 하나됨의 증인은 현존하는 어떤 장애물도 끌어내릴 것이다."

예수 크리스토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구원받은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그 차이를 구분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그러나 람니에게 말한 그 영은 핵심적인 한 가지를 밝혔다.

"침묵이 바로 그곳, 내가 일하는 그 환경이다."

여기 주목하라!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일하지 아니하신다. 성경엔 그런 구절이 없다. 친숙령들(familiar spirits)이 그런다. 친숙령들은 매우 영악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잘 알려진 한 뉴에이저는 다음과 같이 친숙령들의 작용을 밝힌다.

"우리는 떨림으로 교감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일한다. 단순하고 진지한 사람들은 우리의 영적 움직임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현 신앙 체제의 컨텍스트 안에서만 그렇다."

'떨림으로 교감하는'이라는 말은 말마디의 반복 또는 호흡집중을 통한 생각의 정지-내적, 정신적 침묵-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바로 그것이 그들을 매혹시킨다. [위 수 몽크 키드가 배꼽 아래 느낀 떨림도 비슷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열린 문이다. 그것이 틸든 에드워즈가 '머나먼 동양적 영성으로 가는 다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복음주의 교회 안으로 주입되고 있다.

만약 시더빌 학생들과 교수들이 떠오름교회 배후의 숨은 실재와 영적 구조를 파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과 조화되지 않는 다른 영성에 말려든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무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또 내 목숨을 나 자신에게는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달려갈 길과 내가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바 사역 곧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그 일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기 위해서."(행전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