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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영화평 '그들 모두를 단죄한다'

             1971년작의 한 커트 



영화평 '그들 모두를 단죄한다'

-누가 우리의 참 희생양인가?



김삼 



웬만해선 독자들에게 영화를 권하지 않는다. 은연 중에라도 영상물로 세속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탓이다. 내가 글로써 가끔 영화를 다루는 것도 구태여 감상을 권하기보다 대중이나 교인들이 선호하는 작품의 문제점을 비평적 시각에서 직시하라는 뜻에서다. 


잔소리 같지만, 다른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되도록 '아웉사이더'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령 기독교 영화라도 그렇다. 인사이더가 아니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할지 몰라도 그게 안전하다. 물론 성경은 당연히 인사이더로서 대하면서 말이다. 또한 모든 문화예술을 포함한 대상물들을 파울(바울) 사도가 제시한 필리포(빌립보)서 4'8의 기준에 따라 대하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도리라고 믿는다.  



제목: Atunci i-am condamnat pe toţi la moarte (1971)

(그리고 난 그들 모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길이: 103분 

해당 동영상(고화질/1편) > 

                       2편 >  


            (저화질/전편) >


감독: 세르주 니콜라에스쿠

주연 배우: 암자 펠레아(바보 '이푸' 역)

            크리스티안 소프론(소년 역)


참고: 같은 작품의 리바이벌인 새 버전 영화, 'Condamnat la viaţă'(단죄받아 생존하다. 미국판: A Farewell to Fools, 안녕 바보들아, 2013)도 나왔다(트레일러: > ). 2013년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했다.  




루마니아 세속 영화인 'Atunci i-am Condamnat Pe Toti La Moarte'(원제: 그리고 난 그들 모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1971년작/72년 배급)는 독자들에게 감상을 권할 만한 작품이라고 판단되어 여기에 다루게 되었다. 이 여름, 한가로울 때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어놓고 봐 보기를 바란다. 


이 작품은 한국에는 거의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 루마니아 영상문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거장 세르주 니콜라에스쿠가 감독한 이 영화는 1970년대 루마니아 최고작의 하나로, 주는 느낌이 적지 않다. 감독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티투스 포포비치의 단편소설 'Moartea lui Ipu'(이푸의 죽음) 및 대본을 바탕으로 했다. 

원작 자체가 구성이 좋고 주는 교훈도 많아 충분히 수상감(?)이었고 영화도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제작 당시 공산주의 사회였고 특히나 니콜라에 차에세스쿠 대통령의 장기독재 등의 부정적 상황이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니콜라에스쿠 감독 자신이 당시 독재에 항거운동을 펼치던 인사의 한 명이다. 


배역으로는 주인공 격인 바보 '이푸' 역의 암자 펠레아, 소년 역의 크리스티안 소프론, 이온 베소이우 등이 출연했다. 사실 내용상 소년이 더 주인공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펠레아는 극/영화에서 연기가 탁월한 수상 배우이고, 당시 소프론의 귀여운 연기가 일품이다(물론 현재는 중년 배우이다!).  


이 작품의 감상은 비교적 모든 연령층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도중 어린이가 무기를 소지한 모습이나, 어린이 앞에서 어른들이 술을 마구 권하고 들이키는 모습 등은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리바이벌 버전 포스터



세계 제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년경. 그러니까 루마니아가 점령군인 독일 나치 치하에 있던 당시가 시대 배경이다.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마을에 사는 11세 소년 엘레브는 삼촌인 요안과 숙모에게 입양되어 자라고 있었다. 아빠는 대전 초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가 비참하게 살해됐다. 

삼촌 요안은 마을의 점잖은 정교회 사제인데, 그를 사랑할 줄도, 뒷받침할 줄도 모르는 교구민들에게 내적으로 늘 불만이다.  


엘레브는 자기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대신 동네 바보로 알려진 어른 토도르(별명 '이푸')와 시간을 보낸다. 토도르는 본래 프랑스 군인이었다가 대전 당시의 부상으로 기억력이 손상된 뒤 이 마을에 눌러 살아왔다.


둘은 세대차 같은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함께 낚시도 하고, 어쩌다 획득하여 숨겨 놓았던 장총과 기관단총 등 이런저런 실제 무기를 장난감처럼 들고, 전쟁통에 폐허가 된 동네 어귀에서 프랑스 대혁명 당시를 흉내내는 등 전쟁 놀이를 즐긴다. 

토도르는 엘레브가 (바로 아래서 설명되는 사건으로 얻은)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갖고 노는 줄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즐기고 웃기만 한다. 이 마을은 전에 약간의 항거로 나치에게 대량살상을 당한 바 있다. 



어느 날 엘레브는 밀밭 속에 있다가 독일 기마 장교가 말을 타고 밀밭을 온통 누비며 짚단을 타넘는 등 혼자 훈련하는 것을 보고 몰래 숨어 총 쏘는 시늉을 하던 며칠 후, 말이 혼자 달려가는 모습과 장교가 길에서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권총을 탄창째 빼어 숨긴 뒤 신고를 한다. 

장교 시신의 장례식에서 지역 독일군 사령관은 범인이 내일 아침까지 나서지 않으면, 마을 주요 인사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한다. 주요 인사들이란 교구사제인 요안 부부, 시장, 마을 의사와 공증인 등을 포함한다. 


그 날 밤 요안은 거나한 연회를 열고 동네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다. 평소 경멸과 조롱만 당해온 토도르도 웬일인지 최초로 초청되어 영예로운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의사는 토도르를 즉석 급진단을 하더니 그의 가난한 생활이 그를 망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사실 이 바보가 장교 살해의 거짓 범인이 되어주어 마을 사람 모두를 살려 달라고 할 심산이었던 것. 


참석자들이 연거푸 권하는 술잔과 음식에 설득 당한 토도르는 마침내 희생양 되기를 수락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동네의 '명사'가 되어 있음을 느끼자, 요안에게 자신을 즉석 시장으로 추대해 모의 장례를 치러 달라고 부탁하더니, 막판에는 자기 가문의 노인들과 환자, 장애인들을 위한 돈과 땅까지 요구한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갑자기, 나치 군대가 마을에서 모두 철수해 버리자 온 마을이 해방의 환호성을 지른다. 그 와중에 토도르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동네 사람들 대신 겪을 뻔한 죽음을 벗어난 때문인지, 영웅이 될 기회를 놓쳐버린 아쉬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간밤에 온갖 아첨과 향응을 하며 희생양이 되어주길 간청하던 요안과 마을 대표들은 어느 새 평소의 본심으로 되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토도르에게 조롱의 말을 던지고 지나간다. 


삼촌을 비롯한 그들의 위선을 본 엘레브는 치를 떨며 마음 속으로 그들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던 끝에 급기야 숨겼던 권총을 꺼내어 '탕'...! 한 발을 발사한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는 단순하고 비교적 정갈한 터취로 그려져 있다. 그 점에서는 마치 이솦 우화 한 편 같기도 하다.

소년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채 친척 집에서 슬픔 속에 살아가면서도 '바보 이푸'와 서로 정과 마음이 통하는 소년다운 순수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강압과 위선, 부정 등에 반발하는 강인한 면모를 보인다. 

몰래 무기를 숨겨 놓고 언젠가는 써 먹을 기회를 노리는 것도 범죄적인 호기심보다는 적국과 어른들의 강압과 부정 등에 대한 이런 자유정신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떻든 어린이의 살상용 무기 소지는 가공할 비도덕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된 얼개의 하나인 희생양(scapegoat) 테마는 참된 희생양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을 연상시킨다. 물론 작가가 이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국의 주요 인사가 이곳에서 살해된 탓에 마을은 총체적인 학살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그래서 구원의 생명길이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마을 전체를 대신할 하나의 희생양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희생양이 되기를 원치 않고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고 자신들을 대신해 줄 그 누구-남만 찾으며 적극 몸을 사리다가, 평소 잘 아는 동네 '얼간이'를 "딱 걸맞은" 희생양으로 삼아 적국 장교의 살해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든다. 



주님께서도 온 세상 사람들의 죄와 악의 대가, 곧 피값과 생명값을 대신 치르려고 오셨고, 나서셨다. 

이푸는 마을 지도자들에게 설득 당하고 향응을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점차 희생양이 되어가지만, 주님은 처음부터 온 세상을 위한 속죄양이 되시러 기꺼이 아버지께 명을 받아 세상에 오셨고, 겥세마네에서의 피땀 흐르는 기도를 통해 결국 최후 결단을 하시고 수난하셨다. 


주님의 지상 사역 도중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들을 거론하면서 유대교와 민중의 미래를 우려하자, 그 해의 대사제(대제사장) 카야파스(가야바)는 온 민족을 위해 하나의 제물로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예언처럼 말했다(참고: 요한복음서 11'46~52). 

   "온 민족이 망하는 것보다야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르시오?"


카야파스가 한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기보다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었다. 즉 예수님이 유대 민족을 대신하여 죽게 되리라는 것, 자기 민족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려고 죽으신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루마니아 마을 사람들을 위한 희생양 감을 찾아 억지 춘향을 시키려던 사람들을 부추기는 데 종교지도자인 사제가 앞장을 선다. 작가는 이런 사회를 보는 객관적 시각을 순진하지만 짧은 삶 속에서 어른들의 부정적인 문제점들을 겪어온 한 소년의 시각 속에다 설정한다. 


그러나 소년이 유일하게 친근하게 지내온 바보 이푸도 마냥 바보만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온통 멍청이로 알아온 그 이푸가 향응을 받으면서 갈수록 "생명의 대가를 위한 대가"를 한껏 늘려가고 있는 양이다. 


반면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 수난을 치르시는 데 대한 모종의 심적이거나 물적인 '대가'를 바라시긴커녕 상상조차 하시지 않으셨다. 아무 이해타산 없이 그냥 자신의 생명을 온 인류를 위해 몽땅 거저 주셨다! 

오히려 키스 한 번으로 주님을 희생양으로 팔아넘긴 이스카리옽(가룟) 유다가 알량하게도 세속적이고 가히 사탄적인 자신의 머리로 계산한 스승의 '몸값'을 대신 받아 챙겼다가 그나마 일말의 가책으로 도로 게워냈다고나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궁극적으로 죽음 이후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크나큰 하늘 영광을 염두에 두셨다는 진리이다. 



이 작은 마을에 갑자기 하루 아침에 해방이 찾아온 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노린 극적인 반전이다. 

이푸가 술 기운과 환상, 꿈 속에 밤새껏 쌓아올린 영웅주의 및 대가의 드높은 희망의 상아탑은 졸지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은 해방의 안도감을 즐기면서 고스란히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런 이푸의 모습을 비웃는다. 

적은 떠났지만, 각자의 마음 속의 죄라는 적은 고스란히 남아 더 큰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온 것 같은데, 오히려 다른 절망이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소년의 거대한 비극적 실망과 환멸! 어른에 대한 단죄! 그리고 이 모두를 뭉뚱거린 미지의 표적을 겨냥한 한 발의, 형벌의 총성! 



세상 사람 모두는 단죄를 면할 수 없다. 바보 이푸와 소년을 포함한 모두가 죄인이다. 그 죄책도 피할 길이 없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푸와도 같다. 신자들도 전에 그랬다. 자신의 죄의 과거와 현재 자신의 속에 웅크린 높은 바벨탑과도 같은 죄의 발상을 잊어버리고 모르는.. 

몸만 잘 되면 다 잘 된 줄 아는 겉만의 해방을 참 해방으로 믿고 지내는..

이 '불편한 진실'을 심지어 마을 사제조차 보여주지 못한다. 스스로도 죄 속에 갇혀서. 

이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단 하나의 희생양이 대신 당해 준, 단 하나의 거대한 심판으로 모든 죄책와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참 희생양, 예수 크리스토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존하면 된다. 그 분이 모든 '이푸'들의 죽음을 대신해 주셨다.  


-오직 그것만이 모든 단죄를 면하고, 몸의 해방뿐 아니라 깊은 마음과 영의 해방까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기회이다. 

미안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평자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성경이 말해 주는 진리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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