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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영화평 '워룸' (2)






영화평 워룸 (시리즈 2)


먼저 본 '워룸' 영화평(2)은 세계관 평론가인 저스틴 피터스의 평을 원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많은 부분에 공감해서다.


영화 '워룸'을 제작한 스티븐/앨릭스/쇄넌 켄드맄 삼형제는 이전에도 '플라이휠'(2003), '거인들과 맞서기(Facing the Giants)'(2006), '방화벽(Fireproof)'(2008), '용기(Courageous)'(2011) 등 친가족적, 친기독교적 작품을 줄줄이 내놓은 팀이다. 


이번 작품은 표면상 개봉 첫 주말 제작비의 3배 넘는 1,100만 달러를 벌어들여 일단 '성공작'으로 평가되었다. 


피터스는 크리스천 영화 장르에 대해 의심쩍은 바가 많아 켕긴다는데, 본 평자 역시 마찬가지다. 



줄거리(플롵)


토니 및 일리저벹(엘리자벳) 조던과 그들의 열 살 난 딸 대니엘, 그리고 부동산 고객에서 크리스천 친구로 발전한 클레어러(클라라) 부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 조던네 부부 생활은 위경에 처해있다. 약품 판매원인 토니는 업무상 수시로 여행하는데 딸에게 관심이 적다. 교계의 문제 명사인 관상영성가 프리실러 셔러가 역을 맡은 일리저벹은 클레어러의 집에 찾아가, 부동산 마켙에 클레이러의 집을 내놓는 문제로 대화를 하다 집안 사담(私談)까지로 치닫는다. 


나이든 과부인 클레어러는 '워룸'(전투실)이라고 이름 붙인 골방 속에서 치열한 기도를 올리는 독실한 신자이다. 그 속에서, 인류를 괴롭혀온 모든 악의 출처인 마귀와 전쟁을 치른다. 작전지도에 깃발을 꽂는 대신 클레어러는 자신의 전투실에 기도제목과 성구를 꽂으며 적을 꾸짖는다. 그런 클레어러는 조던 가족의 붕괴 위기를 알고 일리저벹에게 그녀만의 워룸에서 가족을 위한 전투에 들어가기를 권한다.  


일리저벹은 새로 발견한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를 통해 바뀌어간다. 어느 날 일리저벹은 '전투실'에 있다가 남편 토니가 딴 여자와 레스토랑에 있는 것을 봤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고 즉각 남편을 위한 기도에 들어간다. 하나님께 남편을 멈춰 달라고. 하나님은 토니에게 복통을 주셨고 토니의 불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얼마 후 토니는 직장에서 해고됐으나 아내로부터 기대했던 분노와 빈정거림 대신 사랑과 격려의 말을 듣게 되고, 아내의 변화를 읽은 그 짙은 감동이 결국 토니 역시도 바꿔 놓는다. 토니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데 이어 아내와 딸에게 용서를 빌고, 조던네는 이제 회복의 궤도로 급귀정하게 된다. 


토니가 해고된 직장의 상사가 몰랐던 일은 그동안 토니가 회사의 약을 몰래 훔쳐 팔았다는 비밀. 이왕 해고됐으니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건만 토니는 민감한 양심에 이끌린 나머지 옛 상사를 만나 자신의 좀도둑질을 고백하고 배상금 조의 돈을 치른다. 상사는 토니를 감옥에 넣을 수도 있건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조던네 가정은 이제 그 이상의 가시밭 형국을 모면하고 회복 단계로 들어선다. 토니는 수익성은 적지만 새 직장을 얻었고, 가족은 주님 안에 더욱 단란해져가며, 클레어러 부인의 집은 어느 목회자 부부에게 팔렸다. 이 모두가 전투실 속 '전투' 때문에 잘된 것이란다. 



장점 


켄드맄 형제의 딴 작품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장점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겉보기에 전체 인상이 깨끗하다. 나쁜 말투도 없고 (토니와 여인의 수작 말고는) 어떤 부정적 암시도 없다. 배우자의 정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부부 언약의 신성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막는다. 품성과 미덕, 결속과 건실, 이타심 등을 높인다. 가족의 중요성, 교회 정기출석의 필요성도 부각시킨다. 


클레어러 부인은 매력적인 성품에다 성경 읽기와 기도, 그리고 영적 전투를 중시하는 도우미이다. 이 영화는 또 사람은 성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온전히 개혁할 수 없는 진리를 가르친다. 클레어러는 또한 일리저벹에게 죄와 예수님의 대속사역,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서의 부활, 그리고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복음적 요소들을 말한다. 그러나 친절하게 부연 내지 확대 설명이 되지 않는 링고(전문용어) 정도로 남아 있다. 



약점


이 영화의 최대 약점 내지 악점은 관상영성가들의 등장이다. 이에 대해선 본평 전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피터스는 이 작품의 실패의 일부는 교리와 신학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는 이 실패를 5가지 '아웉(Outs)'으로 묶어 다루었다. 


피터스는 티투스서(딛) 2'4,5를 인용하면서 파울이 결혼한 젊은 여성들을 가정 일꾼으로 묘사한 것에 유의한다. 가정 일꾼이라면 그 섬김은 주로 바깥이 아닌 집안이라는 것. 영원한 진리인 성경 잠언 31장도 집안을 바탕으로 바지런히 가정사업을 하는 현숙한 아내를 노래하고 있다. 


피터스는, 영화 속 일리저벹이 대신 바깥을 나도는 부동산 에이전트인 것에 주목한다. 만약 집을 중심으로 에이전트 일을 잘 해 낸다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터. 그러나 엄마가 일에 주로 몰두하니까 학생인 딸의 생활에 대해 자연히 소홀하다. 엄마 아빠가 다 딸에게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데 이 가정의 주된 문제점의 하나이다. 


세상은 주로 흔히 젊은 여성들을 집밖으로 불러낸다. 이들 다수는 남편에게 내침을 받아 지내거나 심지어 남편이 '바깥양반'다운 구실을 못하는 정황에 놓여 있다. 피터스는 "젊은 여성이 집 바깥 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절대적 필요성이 없는데도 바깥을 택할 경우 성경적인 원리가 깨진다는 것. 피터스 말로 이것은 마이너 이슈가 아니다. 

성경적인 바람직한 여성의 역할을 희생시키고 바깥으로 나돌 경우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라는 게 피터스의 안목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독여성들의 생각은 다양할 것이다. 



둘째로, 워룸은 신학적인 시간배열상으로 하나의 '열차 잔해'라고 피터스는 지적한다. 일리저벹은 클레어러와의 첫 만남에서 토니와의 결혼생활이 깊은 스트레스 상태라고 실토한다. 그러자 클레어러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 왔어요?"라고 묻는다. 이 물음이야 잘못이 없지만, 먼저 일리저벹이 얼마나 복음을 이해하나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로 보면, 일리저벹도, 남편 토니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박약하다. 일리저벹은 교회에 단지 가끔 다닐 뿐이고 성경엔 '문맹' 수준. 또한 삶 속에 이렇다 할 만한 신자로서의 영적인 열매가 없다. 


다음으로 일리저벹이 클레어러 부인에게서 복음을 듣고 직설적이고 협소해지기 시작할 때다. 토니가 외도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귀가하자, 준비한 식상에서 남편을 바라보며 '기도하실래요?'라고 묻는다. 이 장면만 본다면 토니는 마치 거듭난 것 같다. 토니는 그동안 딸인 대니엘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기적이었고 시건방졌고 절도범이었으며, 자신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자신만 알았고 경건한 아픔도 없었으며 거룩과 순결에 대한 애정도 지니지 않았었다. 성경을 편하게 무시했다.

근래에 와서야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일리저벹은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상실된 남편으로서 할 수 없는 무엇이다. 


피터스는 여기서 기도란 것은 개종 때의 기도 말고는 구원받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피터스의 개혁주의적 견해는 일리도 있지만 어폐도 없지 않다. 하나님은 구원 받지 못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겉으로 봐서 구원받은(?) 듯한 파리새인의 기도보다는 누가 봐도 죄가 산더미처럼 많은 세무사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는가(루카복음서 18'13)? 집에 있던 맏아들보다 돌아온 탕아를 아버지께서 더 반기시지 않았는가? 누구 누구의 기도를 받으시고 안 받으시고에 어떤 절대기준이라는 것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본다. 

여기서 일리저벹이 토니에게 바란 기도는 회개기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상영성가들이 기도를 헤프게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느 종교인이건 상관 없이 저 안쪽 내면의 어떤 깊은 대상을 향해 '기도'하면 그 '기도'가 상달된다고 믿곤 한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기독교와 불교의 기도의 차이가 뭔가? 


지금 토니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구원을 위한 기도와 회개 기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할 만한 능력이 토니 개인에게 있나 없나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만 아시는 사안이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나아와 부르짖는 모든 죄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이 경원하고 혐오하시던 대상은 평소 골목 길 같은 데서 기도를 잘 하던 파리새 같은 사람들이었다. 참 기도는 일원화하기 어렵다. 의식적인 '기도문' 같은 기도 말고 말이다.  


그러나 단 하나, 일원화되는 기도가 있다. 영언(방언)이다! 영언은 그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면 하나님 앞에 자신도 모를 하늘언어로 아뢰면 다 응답되는 기도이다(참고: 코린토A서 14'2). 그런데 이런 완벽하고 완전한 기도를 젖혀 놓고 무슨 '관상기도', '향심기도' 따위를 찾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왕 기도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말해 보자. 평2에서 참조하듯, 이 영화에 '일리저벹'으로 출연한 셔러 등은 관상기도를 평소 즐기고 강조해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비록 작품 속에서라도 그런 기도를 시도하고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난 별로, 또는 전혀 없다고 본다. 영화의 '감동'이야 어떻든 말이다. 

신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왜 성경에 엄연히 강조된 영언은 다들 빼 놓는 것인가? 하나님이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뜻을 무시해서이다!



아무튼 신학적 순서가 잘못돼 있다는 피터스의 말에 일부 동의한다. 사실 켄드맄 형제들이 신학에 얼마나 밝겠는가? 그들은 제작자일 뿐, 신학자는 아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된 문제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관상가들을 주요 인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관상기도의 보편화 성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관상영성의 보편화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예컨대 수많은 미국 대학교들, 심지어 신학대학원들이 관상기도를 공공연히 가르치고 있다. 관상기도의 뿌리는 모른 채로 말이다. 그들이 안다고 해도 실상 모르고 있다. 관상기도는 대상을 중시하지 않는 지극히 신비주의적인 기도이다. 


우리, 솔직히 얘기해 보자. 

소위 광야수사 안토니 등 고대의 관상가들은 당대의 세계수도 알렉산드리아에 몰려든 잡교들의 명상/기도 관행을 본받았음이 거의 분명하다. 비성경적인 중세 신비가들의 성향도 대동소이하며, 현대 관상기도 선구자들인 곧 토머스 멀튼이나 헨리 나웬, 토머스 키팅, 리처드 로어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초종교적, 종교혼합적 인사들이었고, 신교 관상기도의 촉매 같은 역할을 해온 리처드 포스터 역시 보편구원설을 믿고, 이교/잡교 인사들과 더불어 함께 부담없이 어울리는 '종교혼돈적' 인사이다.     


뭘 말하는가? 관상기도는 일종의 다원종교적, 초종파운동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독교적 관상영성, 신교적 관상기도를 논해 봤자 쓸모없다. 같은 뿌리이므로 언젠가는 그 뿌리로 돌아가게 돼 있다.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다! 100% 없다. 

관상기도는 동시에 심리적, 심리학적, 심리주의적 기도이다. 현대 관상가들의 다수가 심리학자나 정신치유사들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도는 심리학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영언기도 역시 오로지 영적일 뿐이다.  

일리저벹이 제 아무리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에 몰입한다 해도 관상 영성에 뿌리를 둔 것이면, 주인공이나 출연자나 제작자, 감독 등 본인 생각이야 어떻든 그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들이 기독교적(?)인 깊은 감동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 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가? 진정 거듭나고파 울부짖는 죄인의 기도인가? 진정 하나님 앞에 나의 껍질도 벗고 발가벗은 듯 적나라하게 자신을 내놓는 기도인가? 아니면 참으로 성경 진리대로 성령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인가? 가장 이상적이고 영적인 영언은 내가 하는가? 하면 얼마나 하고 있는가? 파울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물음에 대한 올바른 자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피터스는 또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죄가 죄답게 규명되지 않는다고 따진다. 이 말은 옳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뭘까? 관상영성 자체가 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죄를 중시한다면, 관상가들이 타 종교 신비가/명상가들과 아울릴 까닭이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기도의 중요성, 죄의 중요성 등을 무시한 채 건성으로 기독교 냄새만 풍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레어러처럼 영적 싸움을 중시한다면 죄와의 치열한 싸움도 중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죄와 싸우는 치열한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다. 시쳇말로 겉모습 기도와 회개의 '생쇼'일 뿐이다. 겉모습으로만 관객들의 감동을 얻어내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다. 오로지 이 진리를 아는 사람만 죄의 무게를 아는 신자이다. 그 무게를 알아야만 하나님의 용서와 아가페 사랑의 무게도 알 수 있다. 


죄의 무게를 별로 못 느끼는 사람은 죄를 세상 탓, 마귀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천주교 신자들이 주일마다 의식적으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고 부르짖는다 해서 진정 죄의 무게를 느꼈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사제 앞에 '고백성사'라는 것을 하는 정도로, 마리아나 성인이나 천사들에게 대신 기도해 달라고 해서 죄가 해결됐다고 믿는 이상은 '내 탓이오'의 '탓'의 심각성을 깨닫기 힘들다. 



피터스는 또 클레어러나 일리저벹이 자기네 '전투실'에서 마귀를 적대(대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마귀를 적대하는 것은 옳다(야코보서 4'7, 페트로A 5'9, 에페소 6'11).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마귀를 감히 대적할 수 없다"는 식의 일부 잘못된 '개혁주의' 발상은 성경에 어긋난다. 적대하라는 마귀를 적대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잔말인가? 또 적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클레어러와 일리저벹이 마귀를 적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과연 어느 정도로 마귀를 제대로 적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마귀를 제대로 적대한다고 믿지를 않는다. 관상기도 자체가 이교적인 뿌리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또 마귀 적대의 잘못된 현장을 소위 신사도개혁운동(NAR)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과거 오순절 운동에서 해오던 관행을 모조리/골고루 갖다 써 먹지만, 그들의 뿌리가 주권주의적이고, 구약적이고, 잘못된 이상 올바른 마귀 적대를 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마귀 자신이 주권주의 발상을 선호하며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와 그 졸개들은 자기네가 구축해 놓고 벌여놓은 방대한 메이트릭스와 영적인 다이내믹스를 통해 인간들을 중심으로 한 세상 속의 시스템에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질 수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성시화운동' 따위가 생긴 것이다. 


필자가 늘 하는 얘기지만 성시화 운동이 가능하다면, 이미 소돔/고모라부터, 니네베(니느웨)부터 성시화됐어야 하며, 칼뱅의 제네바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암스테르담도 그랬어야 한다. 현재의 예루샬렘이 성시화되었는가? 바티칸이 그런가? 아니면 마귀가 한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인가? 과연 예수 재림 전 이 세상이 하나님의 왕국화, 성시화 될 수 있을까? 그 해답으로 예컨대 요한A서 2'15~17을 읽어 보라. 이에 대한 철저한 성별의식과 분별이 우리에게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일리저벹이나 클레어러는 마귀가 지옥에 있는 것으로 믿지만, 마귀는 바로 우리네 현세 속에서 지내면서 공중 권세 잡고 있는 존재이다! 일리저벹은 마귀에게 대화하기를 "너 이제 더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 집의 주님이시니까 여기 네가 있을 자리라곤 이젠 더 없다. 우리 가정을 그만 놔 두고 네가 속한 지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오류 투성이 신사도적 명령기도이다. 

사탄을 적대하는 기도가 없을 수는 없으되, 지금 세상 임금과 세상 신으로서 현세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이 언젠가라면 몰라도, 지금 바로 지옥에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바로 이 점에 영화제작팀과 감독, 출연자들 그리고 영화대본과 작가의 영적 무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받아 덩달아 '아멘, 아멘'을 제창하는 크리스천 관객들의 무지와 아울러.  


사탄이 지옥에 "돌아가지" 않고 들어가는 때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명시된 대로이다(특히 10절). 그때까지는 페트로가 말했듯 마귀는 여전히 여기저기 두루 누비고 사자처럼 울부짖으면서 삼킬 대상을 찾고 있는 참이다.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성도까지도 미혹하여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사탄과 그 종자들의 궤계이며 전략이다. 


피터스는 또 우리가 악령/귀신이라면 몰라도 그들의 대왕 격인 마귀에게 직접 대 놓고 명령하거나 꾸짖을 수 없다고 지적하는데, 성경에 따르면 바른 생각이라고 본다(참고: 유다서 1'9). 마귀를 대 놓고 힐난하고 명령하는 식의 '적대기도'에 기초한 잘못된 영전(靈戰)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사도 계열이나 늦은비 계열이기가 십상이다. 이 영화에서는 클레어러나 프리실러 셔러가 그러고 있다. 


또한 피터가 지적하는 것은 요한복음서 10'10에서 도둑을 흔히 마귀로만 해석하기 십상인데, 마귀 뿐 아니라 거짓 목자, 거짓 교사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뭐든 마귀 탓만 할 게 아닌 것이다. 


예수 이름을 마구 함부로 남용하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자의 필수 도구요 무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이름을 '마술'처럼 쓸 게 아닌 것은 매일 이 이름을 위해 죽어가는 순교자들이 전세계에는 많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론에서는 저 유명한 연대기B(역대하)서 7'14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성구는 흔히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미국이 국가적으로 회개하면 니네베처럼 나라 상황이 개선될 줄로 믿는 데 상투적으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주권주의적, 구약적 발상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하신 신정국가였던 고대 이스라엘에 쓰였던 이 개념이 오늘날 세상 나라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위의 말씀의 컨텍스트는 성전을 봉헌한 슐로모(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신 결과로 이스라엘에 적용된 내용이지, 지금 시대의 아무 세상 나라에 적용될 수도, 그럴 리도 없다. 따라서 종교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바티칸의 정치적 발상도 한낱 주권주의적 오류에 불과하다. 


피터스가 지적하는 또 한 가지는 기도골방의 개념이다. 영화에서 '전투실'로 쓰인 방이다. 예수님이 골방에서 기도하길 권유하신 것은 사실이다. 또 그런 방이 있어서 안 좋을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태도이고 마음가짐이지, 꼭 골방에서 기도해야 기도이고 전투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저 말씀을 하신 이유는 기도도 남들에게 드러내 놓고 하는 외식적인 파리새 때문이었던 것이다. 


피터스가 전한 대로, 증언뉴팍스(ENF)58 방송에서 마커스 조니 램 부부가 애런 펄먼을 통해 켄드맄 형제들을 인터뷰하면서 영화를 그 전 주말 봤다는 펄먼이 흥분한 나머지 울기 시작했고, 그의 삶이 바뀐 끝에 집에 돌아가자마자 옷장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자기 '전투실'로 만들었다는 고백에 스티븐 켄드맄이 감탄했다는 스토리가 웃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 좁은 옷장 전투실 안에서 매번 마귀를 퇴치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파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매일 골방이나 옷장 속에서 기도하면서 마귀를 적대했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없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피터스는 마지막으로 촬즈 스펄전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분별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정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옳음과 거의 옳음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