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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성령을 소멸치 말라?

 

 

 

 

 

물음

 

테살로니카A서(살전) 5'19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시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님이 소멸되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뜻일까요?
그리고 성령님은 신자에게서 떠나실 수 있나요?

 

 

 

 

 

 

 

 

 

신자들이 흔히 혼동하곤 하는 주제입니다.

먼저 정확한 의미 파악을 위해 이 구절의 원문을 분석해 봅니다.

 

   τὸ Πνεῦμα μὴ σβέννυτε,
   음역: 토 프뉴마 메 스벤뉘테

 

위에서 "소멸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스벤뉘테'의 원형(기본형), '스벤누미'는 (불길을)끄다, 꺼뜨리다, 꺼버리다 또는 억제하다, 억누르다, 질식시키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스벤누미의 파생어들은 신약 성경에서 모두 8회(마태복음서 12'20; 25'8, 마르코스복음 9'44,46,48, 에페소서 6'16, 테살A 5'19, 히브리서 11'34) 나타나는데, 이 모두가 (불을) '끄다'라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동사의 영역들도 모두 quench, extinguish, stifle 등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 한자어를 그대로 쓴 '소멸(消滅)'하다는 어휘는 뒤의 '멸'자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으로도 쓰여 자칫 오해하기 쉬운 개념입니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꺼질 '소(消)'는 우선 불이 물로 꺼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방(消防), 진화(鎭火)에서처럼 말입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며 성삼위일체의 제 3위이십니다. 따라서 영원 불멸이시며, 처음부터 나중까지 계신 하나님(티모테A서=딤전 1'1, 계시록 1'8)은 사라지거나 자멸하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분이 영원 불멸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인간에게 부활/불사/불멸의 생명을 주실 수도 없겠지요. 

 

자 그렇다면, 이 성구, 테살로니카 5'19은 다른 성구들과 모순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본 성구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늘 기뻐하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 이것이 곧 크리스토(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님(의 불)을 꺼뜨리지 마시오.
   예언들을 멸시하지 마시오.
   모든 것을 잘 헤아려 좋은 것은 붙잡으시오.
   모든 종류의 악은 멀리하시오.
   (테살A 5'16~22 사역).

 

흡사 짧은 경구나 잠언 같은 이 구절들 한 가운데 19, 20절의 두 부정문이 끼어 있지요.

 

   성령님(의 불)을 꺼뜨리지 마시오.
   예언들을 멸시하지 마시오.

 

이 두 구절을 서로 대조해 보면, 결국 예언들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듯 성령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적 두드러짐이나 죄악을 통해 그분의 역사/활동/사역을 "꺼뜨리지" 않아야 하다는 교훈임을 느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마시오."(에페소서 4'30a)라는 말씀과도 조화됩니다.

 

그렇다면 유한한 인간이 과연 전능하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꺼뜨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구체적 실례를 들어보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샤울(사울)은 왕으로 공식 기름부음(anointing)을 받기 전, 먼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슈무엘A서=삼상 10'6'9). 물론 신약시대처럼 성령님이 그의 속에 들어오셔서 온전히 내주(內住, indwell)하시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와 함께 하시는 사역적인 기름부음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그가 교만해져 이런 기름부음의 은혜를 저버리고 계속 불순종과 악을 저지르자, 성령님이 근심하시다 결국 그를 영원히 떠나시고, 그 대신 하나님이 허용하신 악령이 그에게 작동하게 됩니다(참고: 슘A 13'1~13; 15'10,11,19,26,35; 18'10; 19'9).

 

샤울에게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이제 그의 후임자 다뷔드(다윗)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역시 사역적인 기름부름이죠. 그러나 다뷔드도 큰 죄를 범하고 나자(슈무엘B서=삼하 11장 참조), 전임자 샤울에게서 성령님이 떠나버리신 사실을 새삼 생생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거두시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간구했지요(시편 51'11).

 

이처럼 구약인들에게서는 성령께서 떠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인들은 다릅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속에 영구히 머무시게 된 이래(요한복음서 14'16),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주인, 부활의 주님으로 믿고(참고: 로마서 10'9,10) 그 분의 영을 모셔들임으로써 일단 신자 속에 머물기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구약인의 경우처럼 떠나시지 않고 그 속에 영구 거주하십니다. 다만 그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 예수님을 부인할 때 성령께서도 계속 거주하실 이유가 없겠지요(티모테A서=딤전 4'1).

 

주님의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한(요복 15'4~6),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거나 떨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가지인 우리가 나무이신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경우입니다.
또한 계속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도장 찍힌 양심이 돼버리면, 성령님의 사역을 경시하고 멸시할 뿐더러 그 분을 근심하게 해 드려, 결국 그 분에게 내침과 버림을 당하고 철저히 타락한 사람이 돼 버릴 수도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3'12,13; 4'1; 6'4~8. 참고: 요한계시록 2'21). 

 

주권적인 사랑의 하나님도, 이처럼 인간의 의지적이고 지속적인 타락을 어찌하실 수 없어 그냥 두시는 경우가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에 제때 회개해야 좋은 것입니다.
요컨대 대다수의 경우,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의지를 발휘하여 마땅히 할 것을 제대로 해야 하나님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역사하시진 않지요.

 

그래서 우리는 반복되는 지속적이고 의지적인 범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양심에 불도장이 찍힐 때,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