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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산 제사'란 어떤 뜻인지요?




물음 


로마서 12'1에서 "산 제사"란 과연 어떤 뜻입니까? 




해당 본문을 원문에 좀 더 가깝게 옮겨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온정으로써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의 몸(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하고 살아있는 희생제물로 바치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합리적인 섬김입니다."(로마서 12'1 사역)


사도 파울(바울)은 여기서 새롭게 된(즉 거듭난/중생=重生의) 결과로 오는 변화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파울은 하나님의 온정으로써 우리를 권유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헌신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 제사는 수동적 입장이 되도록 타의적으로 강요할 수가 없는 성격입니다. 그런 것은 율법주의이기 때문이지요. 


흔히 컬트적 마인드를 가진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구절을 갖고 교인들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가 있습니다. 가령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종/사자이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기 말에 절대복종하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이 성구 말씀은 지도자가 교인들에게 자신의 '비전'이나 뜻에 따라 달라고 강압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온정으로 성도의 자발심에 호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상대 교인이 그 호소를 듣지 않고 응하지 않을 경우, 일단 그냥 그것으로 그칩니다. 그 이상 어떤 강압을 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마음을 갖고, 함께 그 분을 바라보면서, 함께 섬기는 심정으로, 자발적인 헌신을 호소할 때만 통할 수 있는 성구이고, 그래야 바람직합니다. 또한 지도자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고요.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나지 않은 육적인 신자들에게는 결코 적용할 수 없는, 적용해선 안 될 내용입니다! 교회의 집단이익을 위해 마구 적용하다간 부작용만 일어나게 됩니다. 오직 거듭난 사람에게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산 제물'이라는 문구에서 일부 인사들은 구약 시대 때 각(脚) 떠서(to cut into pieces) 바친 동물 번제(불 위에 구워서 바치는 제사)를 연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번제물의 상징은 "무조건적 순종"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파울이 여기서 강조한 것은 역시 자발적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제를 해설한 레빝(레위기)서 1장 기록을 참고해 보면, 번제는 사제들이 먼저 동물 위에 안수를 한 뒤 죽여서 각 뜬 뒤에 불에 구워 바쳤다고 돼 있지요. 

무엇을 뜻함일까요? 이것은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인간을 대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짐승을 각 뜨듯(부위별로 갈라 나누듯) 두 팔을 좌우로 벌리시어 매달리시고, 손과 발을 못박혀 피를 흘리시고 창에 옆구리를 심장 쪽으로 찔리셔서 또한 물과 피를 흘리셨지요. 그러므로 죽여서 각 뜨는 피비린내 나고 처참한 제사는 예수님이 이미 우리 대신, 대표로 감당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누구나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그 분과 한 몸(하나/연합)이 되어 더불어 함께 장사된 것이죠. 

 

여기서 잠시, 구약적 제사와 이 성구가 말하는 신약적 제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 봅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는 예물입니다. 성도들도 거듭난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구별'이란 성별(聖別)과도 같은 말로, 거룩하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구약의 제물이 엄격히 구별되고 온전한 동물을 바쳤듯, 우리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 위해선 이 세상 및 세대, 죄악으로부터 (영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참고 성구 예: 코린토B서=고후 6'14~7'1; 요한A서=요일 2'15~17).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합당한 제물이 되기 위해선 우리의 몸과 혼이 구별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예: 코린토A서=고전 6장 참조). 

그런데 과거 동물제사 시대와는 달리, 이제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온전히 씻김을 받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또한 늘 수시로 짓는 죄도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신 그 분을 통해 그 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또, 구약에서 예호봐(여호와)님께 바치는 제물은 그 분이 받으실 만한, 흠향하실 만한, 기뻐하실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죠. 우리가 드리는 예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당연하겠지요! 제물은 우리의 몸뿐 아니라 경배와 찬양, 헌금과 헌물도 포함됩니다. 기도도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의 제물입니다. 더 광역적으로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삶도 그러할 터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제사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제 차이점입니다. 


과거의 제사는 죽인 동물을 제물로 드리던 제사였습니다. 또한 사제(제사장)들이 인간의 죄 대신 제3자인 동물을 대신 바치는 제사였지요. 

반면 오늘의 제사는 살아있는 우리 자신의 몸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직접 바치는 제사입니다! 오직 크리스토님께서 앞서 향기로운 제물을 자신을 드리셨기에 그 분을 따라 우리도 우리 몸을 희생하는 제사이죠. 여기서 희생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실 믿음의 헌신을 가리킵니다!


또한, 과거의 제사는 하나님의 선민이 율법과 제도(제사법)에 의하여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제사는 복음에 따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크리스토님의 중재로 복음과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제도 특히 제사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젠 더 율법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무시하고 맘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와 의식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과거의 제사는 거의 타의적, 의무적인 제사였지만, 현재의 제사는 성령님의 권고와 하늘 대사제의 중재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구약 때도 감사와 기쁜 맘으로 드리는 감사제와 낙헌제가 있었지요. 파울이 이 정신을 모를 리가 없겠지요. 

[ 파울은 비록 이스라엘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인 타르소(다소)에서 태어났어도 예루샬렘에서 자라면서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기에 웬만한 그 누구보다 율법과 제도를 잘 알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이었다. 그는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라틴어 등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흥미로운 것은 파울이 1절에서는 주로 '소마' 곧 몸을 다루고 있고, 2절에서는 '누스', 마음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파울은 마음까지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할까요?


몸은 기본적으로 외부와 쉽게 접촉되는 감각과 본능과 육정 등을 지녔기에, 거듭나고 나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지 않을 경우, 가장 쉽게 타락할 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짐승이 아닌 인간은 몸만으로는 조절이 안 되기에, 타락한 현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이 새롭게 변화받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를 필요가 절대로 있습니다! 우리의 영(프뉴마)과 마음은 몸을 조절하고 다루고 통제하는 주체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변화받지 않으면 영이 여전히 죽어있어, 혼/마음/정신/심리도 몸과 함께 타락한 본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파울은 본절 끝에서 '그것이 곧 여러분의 합리적(또는 이성적)인 섬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후반절은 그 다음 절과 잘 연결됩니다. 물론 여기서의 '섬김'은 하나님께 대한 섬김을 가리킵니다. 


이 문구-'여러분의 합리적인 섬김'에 해당하는 원문 "텐 로기켄 라트레이안 휘몬"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번역과 해석이 있습니다. 

한글 개정역은 단순히 "너희의 영적 예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서는 '영적인 예배' 외에도 '합당한 섬김', '온당한 예배', '합리적인 예배', '논리적인 경배', '이성으로써의 섬김', '이성에 의한 섬김', '이성의 예배', '정신 차린 섬김'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원어 "로기켄"의 뿌리라고 할 '로고스'는 이성과 논리, 말씀 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구를 '영적인 예배'라고만 옮겨 단순화할 경우, 앞서 주님께서 요한복음서 4장(특히 21~24절 참조)에서 시사하신 미래의 영적 경배와 약간 상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예배는 우선 영과 진리(구역: '신령과 진정') 곧 성령과 말씀으로 하는 섬김의 개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파울이 말한 이 부분은 영과 진리로 하는 경배 자체나 전체이기보다 그 경배의 일부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희생과 헌신은 물론 그것 자체로도 제사이긴 하지만, 영과 진리의 경배를 위한 예비과정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쇼므론(사마리아)의 쉬카르(수가)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예언하신 그 영과 진리의 경배는 오순절 강림 때 초현되어 쇼므론에까지 이어져갑니다(요복4장과 행전 8'4~19 비교). 그러므로 쇼므론의 어느 누구보다도 쉬카르의 그 여인이 이때 주님의 말씀을 실감했을 터입니다!  

이 경배는, 말씀은 물론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언(방언)을 동반합니다(참고: 행전 2'4,33,38; 8'15~19; 9'17b; 10'44~46; 참고:11'16,17; 19'2~7; 로마서 8'26,27; 유다서 20b, 코린토A서=고전 14'2..26; 에페소서 5'19; 콜로새 3'16 등). 


우리는 성경에서 파울 사도님이 자신을 '전제'(奠祭, drink offering)로 바친다는 말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필리포서 2'17; 티모테B서 4'6). 여기서 전제란 민수기 등에 수많이 나타난 낱말로, 구약 시대 때 포도주를 하나님 앞에 부어 바친 제사이며, 따라서 파울이 자신의 피를 바침, 곧 순교를 상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울님의 전제는 이상의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드려야 할 산 제물 이상으로 더 차원 높은 제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치겠다는 신앙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