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교회가 잘 모르는 성령님



교회가 잘 모르는 성령님




이 글의 제목은 장난이 아니다. 다소 엉뚱해 뵈는 제목일지 몰라도 필자의 오랜 생각과 아픔의 여정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독자는 알기 바란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을 잘 모른다. 아니 몰라도 너무 모른다!

현실 교회는 그 분과는 거의 다른 신을 섬기는가 할 정도이다.  

이렇게 말하면, "넌 성령님을 얼마나 잘 알기에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는가?" 물을 것이다. 

난 성령님을 아주 잘 안다고 단언하지 않겠다. 너무나 깊고 신비로운 분이시니까. 

다만 성경을 내가 아는 만큼의 성령님만을 말하더라도, 대다수의 현실 교회가 아는 성령님과는 한참 다르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성령께서 기자들을 통해 몸소 쓰신 성경이 말하는 그 성령님은 다시 임하시거나 또 다시 오실 분이 아니라, 이미 이천년전부터 임하셔서 우리에게 와 계신다! 교회에 임재해 계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현대교회는 "성령이여 오소서!", "임하소서!", "내리소서!", "임재하소서!"라는 하소연 같은 구호를 외쳐가며, 마치 하늘에서 내리시는 새로운(?) 성령님을 모시려는 듯한 소동으로 바쁘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현대교회가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한 구석에 가만히 모셔놓기만 한 성령님은 그저 혼자 통탄하시고 답답해 하실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오순절보다 퍽 오래 전인 그 분의 수난 하루 전, 예루샬렘 마르코스(마가) 요한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할 테니, 또 다른 위로자(보혜사)가 오셔서 영.원.히.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이오."(요한복음서 14'16)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오셔서 계속(!)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그 후로 지금까지 지상에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좀체 믿지를 않는다. 긴가민가 하면서.


이미 임하여 와 계신 성령님은 안 믿고, 자꾸만 위로부터 (재차) 임하여 달라고, 오시라고, 내리시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 현대교회의 아이러니다. 

특히 교회당에서 그러고들 있다. 특정한 교회당에 (하늘로부터) 임하여 달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착각의 탓일 법하다. 



흔히 교인들이 생각하는 성령님의 강림은 마치 카르멜(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간구하여 내린 불과 같은 개념 같은 것이다. 


성경을 보면, "임하소서"라는 말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드물다. 한 번 성경을 검색해 보라. 몇 안 된다. 

그런데 한국교회서는 이 말을 너무나 자주 사용한다. 특히 찬송가와 경배찬양에서 그렇다.  

엘리야에게 내렸던 그 불처럼 성령께서 임하시어 달란다. 

그 불조차도 카르멜 정상의 돌제단 위에 딱 한 번 내렸건만, 한국 교인들은 시시때때로 임하여 달라고 호소한다. 


더군다나 그 불이 곧 성령님은 아니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제단 위에 제물을 태우도록 하늘에서 내려주신 불일 (왕들B=왕하 18'38)뿐. 

그러나 짐짓 그 불을 성령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의 생리에 맞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노래한다. 



   갈멜산 제단 위에 불로써 나타나신 

   엘리야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

   내가 지금 주 앞에 울부짖나이다

   불로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간곡한 기도에 불로써 응답하소서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눈물로 울부짖는 엘리야의 기도에

   불 내려 응답하심은 여호와 하나님

   주여 지금 이 곳에 불을 내리소서

   우리 몸과 마음을 불사르소서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간곡한 기도에 불로써 응답하소서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멘


    -'엘리야의 하나님'(김보훈 작시/작곡) 일부



명백히 이 노래는 [엘리야의 불=성령] 등식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수 천 년 전 카르멜 산봉에서 엘리야의  제물을 불사른 그 불이 다시 내려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불살라 달라고 간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참고: 왕들A=왕상 18장). 간곡한 기도에 불로써 응답하소서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적어도 성경에 따르면 이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신약에서 성령이 불과 연계된 예는 성령께서 지상교회에 영원히 임하신 오순절의 기록인 행전 2'3이며, 불의 혀처럼 나타나 보였다. 이것은 영언(방언)과 직결된 상징이다. 

같은 날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또 다른 묘사는 급하고 드센 바람 소리 같다는 표현이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을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끄셨고,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도 했다(미쯔라임출국기=출 19'18). 또 심지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말씀도 있다(신명기 4'24; 히 12'29).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곧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각주:1] 같은 화신(火神)이거나 불의 화신(化身)은 아니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침례(세례) 요한은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마태복음서 3'12). 그런데 여기서의 불은 심판을 가리킨다는 것은 문맥으로 자명해진다. 즉 예수님이 장차 불심판을 하신다는 예언인 것이다. 그러나 신자 속의 죄를 불태운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따라서 [불=성령]이라는 공식은 성립되기 어렵다. 성경에 의하면 그렇다.


이 불 개념과 연계하여, 한국교회는 자주 '뜨거운 성령님'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성경엔 "핱(hot)한" 성령님에 관한 그런 표현이 없다. 성경을 깨닫거나 성령님이 임하시고 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피차 뜨겁게 사랑하는 역사는 물론 있다(루카복음서=눅 24'32, 페트로A=벧전 1'22).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님이 뜨겁고 화끈한 존재라고 묘사하기는 그렇다. 


엘리야는 아마도 하나님을 불 같은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들A 19'12에 따르면, 오히려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적어도 그 때, 세미한 음성으로 존재하셨다.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한국 교인들은 엘리야의 불과 같은 성령님을 보내달라고 늘 간구한다. 엘리야에게 내린 불과 같은 성령님을 자주 임하게 해 달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엘리야의 불처럼 떨어지길 염원하는 것이다. 

여기 한국 교회를 비롯한 현대교회의 큰 오해가 있다. 이천년전 오신 성령님은 하늘로 오르내리시면서 우리가 빌 때마다 엘리야의 불처럼 재차 새롭게 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주님 말씀 그대로 이천년전 오셔서 현재 참된 교회 즉 거듭난 신자들 가운데 계시는 분이다. 


교계의 말썽꾼의 하나로 알려져온 타드 벤틀리 같은 신사도들은 '프레쉬 파이어'(신선한 불)과 같은 새로운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자주 강조한다. 웃기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하나님, 과거에 역사하신 그 성령님은 낡은 불이라는 것인가. 다 인간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성경은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어제와 오늘, 언제나 한결 같은 분이시라고 명언해 준다. 



또..성령님께서 신자들의 속을 들락날락 하시면서, 신자가 죄를 지으면 나가셨다가 죄를 회개하면 다시 들어오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설교가들이 상당수 된다. 믿거나 말거나. 

심지어 죄를 지으면 성령님이 나가시고 그 자리에 사탄이 들어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설교자가 있기에 하는 소리다. 


성령님에 관하여 흔히 일부 부흥강사들의 안수와 연계된 오해가 또 있다. 안수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성령님이 "임하시게 된다"는 식이다. 

일단 오해부터 풀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표현은 구약적이다. 그 때는 그랬다. 간절히 구해야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이후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지상에, 교회인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시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모셔들이기만 하면 된다. 할렐루야! 사도 파울(바울)은 팔을 벌리고 세상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계시를 전달한 바 있다[각주:2].


그런데도 수많은 사역자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 "만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구약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 분명히 하나님은 세상(비신자들)과 화해하시길 바라며 기다리고 계신데도 말이다.  

주님께선 우리가 단지 마음문을 열고 바깥에 기다리며 문을 두드리고 계신 그 분을 영접해 들이길 바라신다.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안수하여 쓰러뜨리기를 즐기는 일부 부흥강사들이나 신사도들은 자신의 안수와 쓰러짐이 곧 성령을 받게 하는 일종의 마력 내지 매짘인 줄로 착각하곤 한다. 안수받는 교인들 자신도 쓰러짐이 곧 성령을 받는 순간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쓰러지지 않으면 성령을 못 받은 것처럼 오해하곤 한다.

물론 필맆 집사의 전도에 이어 쇼므론(사마리아)을 방문한 사도 페트로와 요한도 안수로써 성령을 받게 한 예가 있다. 아나니아도 샤울 곧 훗날의 파울에게 그랬고, 파울 자신도 에페소 교인들에게 그랬다. 그러나 그들이 죄다 쓰러졌다는 기록은 없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성령님은 우리가 거듭나 구원받을 때, 성부님과 주님의 영으로서 모셔들이는 것이며, 그 때 들어오셔서 우리를 다스리는 성삼위일체의 영으로서 내주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영언(방언)이라는 것은 성령의 첫 채우심(충만)을 받을 때 발생하게 된다[각주:3]. 이 성령의 내주와 충만이 동시적일 때도 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자마자 영언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받아 모시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영언을 시작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당일, 그리고 그 후 쇼므론(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님을 받아 모실 때[각주:4], 샤울이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 채우심을 받을 때[각주:5], 코르넬리우스(고넬료) 가정이 페트로(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을 영접할 때, 에페소 교우들이 파울에게 안수받아 성령님을 모셨을 때[각주:6], 그들 모두가 영언을 했다! 이 사건 모두가 서로 사이에 수 년 또는 수십 년 간격을 두고 발생했다. 뭘 뜻하는가? 변함 없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뭔가?!

성령님을 모시고 나면 영언을 하게 된다는 진리에 대해 의혹하거나 부정하려는 신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영언은 은사의 하나일 뿐"이라며 "영언은 내 은사는 아니다"고 주장하려 든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 120명의 신자들이나 쇼므론 신자들, 코르넬리우스 가정 교회 교인들, 에페소 교우들 전원이 영언을 은사로 지정받았기에 영언을 말한 것인가? 


왜 주님은 마르코스(마가)복음서 16'17a에서 영언을 믿는 사람들(즉 신자들)의 표징이라고 하시는가? 

왜 영언이 신자의 표징들의 하나인가? 주님이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가?

파울의 계시를 읽어 보면, 은사로서의 영언은 따로 있다(참고: 코린토A=고전 12')! 은사영언은 그야말로 성령님이 지정하신 사람들만 "받는" 것이다. 교회에서 은사영언을 말할 경우, 많아도 일시에 3명이 순서를 따라 영언을 말하고 반드시 영언해석 은사자에 의하여 해석/통역(통변)돼야 한다. 

그러나 행전에 나열된 위의 사건들처럼 일반 영언은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나 시작하게 되어 있다. 


은사영언과 일반 영언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전자는 하향적/공적/교훈적/선포적/예언적인 영언인 반면, 후자는 상향적/기도적/개인적(사적)/경건용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령님을 받아모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영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천년전 오시고나자, 교회는 마치 거대한 발전소 같은 초강력 뒤나미스의 존재를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다. 전기코드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기만 하면 전등이 커지고 냉장고가 작동하기 시작하듯, 교회는 늘 계시는 성령님을 의존하기만 하면 그 분은 교회에 역사하시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는 이 진리를 의혹하고 있다. 

성령님은 답답하셔도 비둘기 같이 온유하신 분이어서 인간이 의지를 발동하기까지는 그냥 지켜보고 계신다. 바로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사실상 의존할 능력이 없다"는 사탄이 준 거짓 믿음을 지닌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천년전 임하셔서 지상에 계신다!

그 분은 거듭난 신자들을 중심으로 지상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다. 

사람은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고, 그 분의 영이신 이 분을 모셔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 분은 우리를 위로/격려/권고/꾸중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이끄시며, 함께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시며, 영언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권능을 주시고, 각종 은사를 나누어 주셔서 교회를 위하여 활용하게 하신다.  

그 분의 권능을 활용할 길은 성경 말씀대로 그 분을 기꺼이 환영하고 믿음과 의지로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신다. 

교회가 그 분의 권능의 발전소를 활용해 주길 바라고 계신다. 

 

할렐루야! 



  1. Hephaestos. 로마 신화의 불칸(Vulcan)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2. 예: 코린토B서(고후) 5'18~20 [본문으로]
  3. '방언'은 잘못된 번역어이다. 하늘로부터 내린 새 언어인 이 말은 지방언어 또는 사투리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본문으로]
  4. 행전 8'17~20을 보면, 마술사 쉬몬은 쇼므론 신자들이 성령을 받아 모시면서 영언을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 틀림없다. 비교: 행 2'33 [본문으로]
  5. 샤울(나중의 파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을 때 영언을 시작했음은 그가 훗날 코린토 교우들 전체보다 더 영언을 말했음으로써 반증된다(행 9'17. 비교: 코린토A 14'18. [본문으로]
  6. 행 19'6 [본문으로]

'김삼의 연구묵상 > 캪튼's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구속적 칭호들  (5) 2018.07.20
사랑의 은사?  (5) 2018.06.14
여호수아의 청렴결백  (6) 2015.07.17
성육신의 신비  (23) 2014.12.29
기독교 초보 교리를 아는가?  (12) 2014.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