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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You Raise Me Up은 성가?

뢰블란과 쉐리 


You Raise Me Up은 성가?



김삼




You Raise Me Up(이하 YRMU)은 세상은 물론 교계에서도 폭넓게 불려온 노래의 하나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끈끈하게 계속 불리고 있다. 놀랍지 않게도, 많은 사람들이 본디 기독교 곡인 줄로 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가락이나 가사나 풍부한 감정을 자아내는 노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이 곡을 곧 기독교 노래로 만들어 주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YRMU는 일부 크리스천이 생각하듯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그런 노래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노래일 수 없다. 이유는 작시자, 작곡자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외려 모두 뉴에이저이기 때문.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천이란 성경 말씀대로 거듭난 사람을 가리킨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이 지은 노래가 기독교 노래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선 안 된다. 이렇기에 현재까지 우리가 불러온 수많은 찬송가와 복음송, 경배찬양, 그밖에 많은 기독교 노래들도 정직하고 진솔하게 검증돼야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You Raise..가 창작된 과정과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자. 

아일런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수 피눌라 쉐리와 둘이서 뉴에이지 두오 '비밀정원'을 구성해 활동해온 노르웨이 피아니스트/작곡가, 롤프 뢰블란(Rolf Løvland)이 써서 지난 2002년 처음 소개한 이 노래는, 본래는 '침묵의 이야기'라는 기악곡이었다. 침묵의 이야기? 뭔가 관상적(觀想的)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타이틀 자체가 뉴에이지적이라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그렇다면 '비밀정원'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각주:1] C. 오스턴 마일즈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에서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고 노래한, 예수님과 성도-단 둘의 친교 장소인 기도의 정원을 가리키는 것일까?

다음 링크(>)를 보면, '비밀정원'이나 YRMU가 모두 뉴에이지 음악으로 분류된 것을 볼 수 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침묵의 이야기'는 뢰블란이 아일런드 소설가 겸 가사 작가인 브렌던 그래엄(Brendan Graham) 첫 소설인 '제일 까만 고추'(the Blackest Pepper)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곡했다. 

그랬던 차,  '비밀정원'은 아일런드의 대 기근 중 아름다운 여인 엘런 루아 오말리의 삶을 그린 그래엄의 서사시적 소설, '가장 하얀 꽃'과 '불의 원소'를 읽고 나서 그래엄에게 침묵의 이야기에다 가사를 붙여달라고 의뢰하기에 이르럿다. 그래엄의 이 작품들은 하나님의 아닌 자신의 힘으로 역경과 싸워 이겨 나간다는 인간 승리를 말하고 있다. 당연히 기독교소설이 아니다.  


뢰블란 자신이 작곡자 겸 작시자인데도 노르웨이어가 아닌 영어 가사를 바란 것은 켈트적 정서를 그린 데다 영문 오리지널이 좀 더 포퓰러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래엄 자신 작곡가이기도 해서 둘의 정서와 기대는 잘 맞아떨어졌다. 



가락 


뢰블란 자신이 밝힌 대로, You Raise..의 가락은 본래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온 아일런드 민요, '런던데리'(Londonderry Air, 일명 '오 대니 보이'(O Danny Boy) 상당량을 딴 것이다[각주:2]. 뢰블란은 아일런드 가락의 편린을 엮어넣어 느린 가락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가 오랜 민요이기 때문에 그 유사성 내지 표절성(?)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많은 명곡들이 기존 노래를 활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바로 이 점이 아일런드 유수 작가에게 접근한 이유의 하나는 아닐까? 


한 가지 내적으로 분명해 뵈는 점은 잉글런드와 웨일즈, 스코틀런드 등 브리튼 인접국가가 서로 나눠온 고대 켈트 족의 민속적 정서라는 공통점을 이 노래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도 뉴에이지송에 더 가깝지, 원칙적으로 기독교 노래일 수 없다. 아무리 연주자들이 뭐라고 해석하더라도 말이다. 때로는 처량하게 느껴지는 고대 켈틱 관행들과 가락 등은 기독교보다는 뉴에이지에 다분히 더 근린적(近隣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각주:3].  


작곡가인 뢰블란이 애당초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기독교성을 지니려거나 드러내려고 이 곡을 쓴 것은 전혀 아니었다! 뢰블란 자신이 이 곡을 처음으로 녹음할 때 '비밀정원'이라는 자신의 '뉴에이지' 앙상블을 통해서 했다. 

그런데도 그의 수많은 노래 중 이 곡이 기독교 정서를 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둘의 다양한 앨범에 담긴 노래들을 들어보기 바란다. 

https://youtu.be/8A-EarF2OZg 

https://youtu.be/PaoPzDW2m2A (실연광경) 

https://youtu.be/XB97k312nDw 오리지널은 아니겠지만, 이 동영상에 곁들인 그림까지도 너무나 뉴에이지적이다! 응당 뉴에이지 곡인 줄 알기에 이런 그림을 담았을 터이다). 짚시 음악 또는 중국 민속음악 냄새가 나는 것도 있다. 


저기 과연 무슨 성곡이나 찬송가 또는 기독교음악이라고 할 것들이 있는지? 그냥 클래시컬하거나 세미 클래싴 같은 뉴에이지 곡들이다. 상당수는 영화 배경음악 같이 통속적인 감각도 지니고 있다. 



뢰블란이 이 노래에서 일부 본떴다고 밝힌 '대니 보이'는 기독교 노래인가? 아니다. 혹 그 노래를 갖고 누가 적당히 복음성가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랬다고 해서 기독교 노래가 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YRMU 역시 전혀 기독교적 생각이나 감각 내지 정서, 또는 기독교적 배경으로 쓴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로, YRMU는 가장 먼저 뢰블란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연주됐다. 뢰블란과 쉐리, 둘은 앨범에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한 노래들도 담고 있다. 




가사 


더 큰 문제는 가사다. 그래엄의 이 시는 기독교적이라는 오해를 자주 낳곤 한다. 그러나 그래엄 역시 뉴에이저에 가까운 사람이지,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는 곡에 계속 반복되는 'You'의 정체성이 뭔지 말하지 않는다.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정의해라"가 답일 것이다. 엿장수 멋대로 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역시 뉴에이지의 특성이다. 



YRMU가 기독교 곡으로 둔갑한 데는 크리스천 앙상블 '셀라'의 영향도 있다. '셀라'는 대명사 "you"가 곧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나름 정의한 나머지 이 곡을 기독교성가로 녹음했는데, 놀랍게도 곧장 크리스천 뮤짘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 점에서 크리스천들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분별을 잘 해야 한다. 


동일한 노래가 뉴에이지 앙상블로도 녹음되고, 크리스천 앙상블로도 녹음되어 각각 빜 히트를 친, 이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하는가? 그밖에도 수 백 명의 서로 다른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녹음할 정도로 대중성과 인기도가 높다. 물론 그들 다수가 무슨 무슨 '차트'의 상위를 장식했다. 하지만 이 아티스트들 대다수는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다.  

크리스천이 볼 때, 이런 것이 바람직한 현상인가?



크리스천 비평가인 S. C. 무니는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각주:4].

 

  "이 노래의 그 어디에서도 'you'의 정체성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You'에 관한 언질들은 그야말로 그 누구든, 자신이 바라는 그 무엇으로든 만들어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하리망당하다. 사실 많이들 그렇게 해 왔다..바로 이 노래의 존재는 '뉴에이지'(송)로서 출발했고 그래서 그들(뉴에이지) 서클을 매료시키는 힘을 확산해 왔다.


예컨대 (어느 뉴에이저의) 다음 소감을 살펴보자.


초점으로 이끌어주는 안내자의 얼러주는 목소리, 그 음악의 부드러움과 가사의 미묘한 의미에 귀기울이자, 나의 몸은 내가 오래 경험하지 못했던 관조와 희열의 세계로 이끌렸다. 그 경험의 첫 머리에서 정말 노래에서 비친 그대로 나는 실제로 '다운'되고,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으면서 내 혼은 너무나 지쳤다. 설명 못할 정체상태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듯 느껴졌다. 내가 내 몸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자, 풍부한 깨달음이 내게 다가왔다. 그 진리를 내 속에 '잠시 앉아 머물게' 놓아두자, 굉장한 안도와 격려의 감정을 내게 안겨주었다. 음악 중심의 이 집중이 완성되자 나는 두뇌의 엄청난 뒤범벅을 겪지 않고 내적인 평화와 만족의 감정을 느꼈다."



무니가 인용한 내용은 한 마디로 YRMU에 대한 뉴에이지성 연구 감상문이다. 사회복지사들의 개인정체성과 전문성 전환을 증진하기 위해 바이오영성 음악을 에너지론에 집중시켜 활용하기, 즉 내성적 감정이입의 파워를 연구한 내용이며, YRMU는 그 대상곡의 하나이다. 


여기 나타나는 '진리' 어쩌고 하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진리가 결코 성경 진리와 같을 수 없다! 


독자도 이내 느끼겠지만, 이 사람이 겪은 것은 뉴에이지적 감흥 현상이지 성령의 감동이 아니다. 만약 YRMU가 진정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노래라면, 뉴에이저가 이 노래를 태연히 부르거나 듣긴커녕 겁을 먹고 달아나거나 충격을 받든지, 거듭나기까지 변화되든지 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저 감상자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서 저런 '감동'을 먹을 수가 없다. 신자가 아닌 세속인이고 뉴에이저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작가 자신들은 이 노래가 기독교계에서 불려져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또 뉴에이저인데도 일부 크리스천 연주가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이 자못 트리키하다.



가사 분석


다음은 필자가 음율에 맞춰 한글로 옮겨 본 것이다. Raise는 올리다, 들어올리다, 일으켜 세우다, 높이다, 기르다 등 다양한 뜻이 있다. 필자는 원문 단어의 음절(syllable)에다 한글 글자 수를 맞춰 '높이다'로 옮긴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오 나의 혼 낙심하고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 속에 내 맘 눌릴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리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곁에 님이 와 앉기까지


  There is no life - no life without its hunger; 

  그 누구나 굶주릴 때가 있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불안 속에 가슴 뛸 때 있네

  But when you come and I am filled with wonder, 

  님이 오고 놀라움 그득할 때

  Sometimes, I think I glimpse eternity.

  나 때때로 영원을 엿보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님은 날 높여 산에 서게 하며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날 높여 폭풍 속 걷게 하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님의 어깨 위에서 난 강해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날 높여 더 큰 나 되게 하네


  -필자 사역



어떤가? 이만하면 딱 크리스천 노래 같지 않은가?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님/You는 그 어떤 누구일 수도 있다는 게 다름 아닌 작가들의 입장이다. 그 누구일 수도 있고, 누구라도 괜찮다는 거다. 이게 바로 뉴에이지의 특성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나 괜찮다"는 게 뉴에이지 세계의 '와일드카드(*.*)'라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건 비밀집단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다. 비밀집단에서는 가입자들에게 누구라도 지존자(Supreme Being)를 믿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지존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건데, "아무 종교의 신이라도 좋다"는 게 비집의 입장이다. 딱히 누구랄 게 없다는 식이다. 



위 가사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오 나의 혼 낙심하여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 속에 내 맘 눌릴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리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곁에 님이 와 앉기까지


낙심하고 지칠 때, 괴로움으로 짓눌릴 때, 우린 누구에게 나아가는가?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 나아오라, 내가 그대들을 쉬게 해 주리"라고 하신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뉴에이저/관상가 브렌던 그래엄은 뭐라고 하는가?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릴 테니, 님이 와서 내 곁에 잠깐만이라도 앉아 주오." 하지 않는가? 


방향도, 과정도 서로 다르다. 주님은 그 분께 나아가면 쉬게 해 주리라는 약속을 해 준다. 이 약속과 쉼은 항구적이다. 주님의 참 평화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반면 뉴에이저는 예수님께 나아가겠다는 게 아니라 "침묵 속에"(!) '님'을 기다린단다. 그 누군지 알지도 못할 님을 말이다.  

이 침묵이 뭔가? 이런 세속적/종교적 명상에 있어, 침묵이란 신비적 체험의 딱지 같은 것이다. 중세 관상가들도 맛보던 것이다. 

이를 테면 오늘날 기독교계까지 침투한 관상(contemplation)이며, 뉴에이지에서는 초월명상(TM)이나 요가, 미로명상(labyrinth)같은 체험이다. 침묵 속에 기다리노라면 '님'이 온다는 것이다. 그 '님'이 뭘까..누굴까? 해석에 따라 다를 터이다. 


님이 내 곁에 와 앉기까지..? 일종의 '경지'이고 신비체험이다. 뉴에이지 전문가들은 명상 수련자들의 경우 약 20~30분만에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런데..누군가 내 곁에 앉은 느낌? 섬뜩해진다. 



  다음을 보자.


  There is no life - no life without its hunger; 

  그 누구나 굶주릴 때가 있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불안 속에 가슴 뛸 때 있네


위에서 굶주림이 뭘까?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우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금식도 있고 단식이란 것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를 닦기 위해 일부러 굶기도 한다. 심지어 오늘날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헝어 게임, 헝어 서바이벌 게임 따위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것과 함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되어 배부름과 해갈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준다.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금식은 묶인 것을 풀어 주는 등 선을 행하기 위해 필요하며, 바로 크리스토님이 그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세상종교에는 단식도 있고, 명상 후 시장끼 같은 것이 찾아온단다( 예: > ). 어떤 뉴에이지 명상가들은 특정 '세션'의 명상 후 꼭 배고픔을 느낀다고 한다. 명상이 '배고픔 호르몬'인 그렐린(ghrelin)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일부 명상가들은 심한 주림을 느낄 정도란다. 이 때 먹는 것 대신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단다. 

말하자면 세상이 말하는 배고픔의 의미성과 해결은 성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직역하면, "불안한 심장마다 너무나 불완전하게 박동하네" 정도다. 심장은 단순한 심장 이상의 것이다. 죄된 인간의 마음은 다 이렇다. 성경은 애당초 인류의 죄로 인해 질병과 저주도 왔다고 설명해 준다. 다른 대다수의 병들처럼 심장병도 궁극적으로 죄로 인해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But when you come and I am filled with wonder, 

  님이 오고 놀라움 그득할 때 

  Sometimes, I think I glimpse eternity.   

  나 때때로 영원을 엿보네


그 누군지도 모를 님이 찾아와 내 맘이 경이로움에 찰 때, 때때로 영원을 엿보는 것처럼 생각된단다. 

이것에 대해 한 비평가(정말 이름을 몰라서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때 당신은 '신적인' 황홀경에 들어가 시공간도 초월하는(=감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경지는 약물 사용으로도 가능해진다."

'비틀즈' 등 많은 명사들의 약물 사용 체험기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경과 시공간을 초월해 둥 떠 있는 듯한 행복감이 느껴진단다. 그래서 그 상태가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그 맛 때문에 철모르는 인간들이 문제의 약물을 사용하곤 한다. 



필자가 너무 단면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도움 밖에서, 그 외에 어떤 고상함이 있다고 생각되나? 기독교 밖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된 모종의 저런 '경지'가 있다면, 그건 악령이 갖다주는 것일 터이다. 신이나 천사를 가장한 '친숙령'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화적인 어떤 존재에게서?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저런 경지를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굉장한 상상이고 공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막연한 신적 존재라면, 일시적인 단물효과, 대안효과, 위약적(僞藥的=placebo적) 위로는 갖다줄지언정 영구적이고 진정한 위안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시적이나마 그런 '위로'를 맛보고 나면 더욱 더 명상에 매진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절창한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님은 날 높여 산에 서게 하며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날 높여 폭풍 속 걷게 하네



나를 일으키고 높여 산들 위에 서게 하고,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게 하고.. 마치 성경 속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듯 한가? 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강해진다고? 목동의 어깨 위에 걸친 양을 상상케 된다고? 그래서 그 양이 강해진다고? 내가 나 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되도록 일으켜 준다고? 이건 성경 속의 이야기보다 신화를 연상시킨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필요에 따라 아브라함이나 모쉐 같은 사람들을 산 위에 세우시기도 했다. 주님 자신도 높은 산에 오르신 바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높여주시는 분이다(시 3'3)! 선지자 에제키엘 같은 사람을 산들 정도가 아니라 공중에 높이 들어올려 낮은 데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영안으로 보여주시기도 했다.[각주:5] 그러나 그건 기록 계시를 위해서였다. 기록계시가 이미 오래 전 마감된 상황에서 그런 체험들이 과연 수시로 필요할지?  


오히려 저 가사는 대신에 신화 속 신들이 마치 체스를 두듯 거대한 손가락으로 작은 사람을 집어 올려 산들 위에 놓는 상상이 가지 않는가? 또는 '걸리버 여행기' 속에서 대인국 사람이 러뮤얼 걸리버를, 또는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을 집어 올리기나 하듯. 참, 사족이지만,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턴 스위프트는 성공회 사제이자 프리메이슨이었음을 아는가? 


오늘날 세상이 얼마나 신화를 강조하는가! 새삼 놀라지 않는가? 문학 작품도, 영화도 신화적 소재를 다루지 않는가? 초월적, 초능력적 존재를 다룬 볼 거리와 전자게임이 얼마나 많은가. 이게 다 뉴에이지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뉴에이지 천지인 것이 사실이잖은가.

 

그게 아니고 정신적/심리적 세계에서 그러하다고? 산 위에 오르고 싶으면, '사운드 오브 뮤짘' 속의 수녀원장이 '산마다 오르라'고 노래했듯 그냥 애써 오르면 되지 않겠는가? 왜 '산들' 위에 오를 필요가 있는가?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그래서 자아성취감을 맛보려고? 

여기서 산이란 것은 뉴에이저들이 추구하는 hight state 또는 무아경 같은 최고의 몰아 경지를 암시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뉴에이저들 상당수는 약물 사용으로 그것을 성취하기도 한다.   



'님'이 '나'를 폭풍 이는 바다 위로 걷게 한다고? 페트로(베드로)도 물론 주님의 명령과 믿음으로 잠시 물 위를 걷기도 했지만, 이내 실패해 주님이 건져주셨다.[각주:6] 그러나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걸으라 명하셨거나 걷게 하시진 않았다. 


왜 '님'이 '나'를 들어올려 하필 위험하고 거친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게 하는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파선해서 헤엄치는 대신에 바다 위로 걷게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님은 누군가? 하나님은 그러신 예도 없고, 그러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폭풍의 위험을 알면 피하면 되는 것이고, 피치 못할 폭풍을 만났다면 구조를 요청하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할 터이다. 


그게 아니라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 시 세계나 정신 세계 속에서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은 어떨까? 남이 못하는 것을 하니 으쓱거림과 교만이 아닐까? '님'에 대한 '폭풍' 경탄이 일까? 이래서 더더구나 '님'은 신비주의 속의 신비한 도움 또는 신화적 존재 같이 느껴진다. 


상징주의 또는 심리적 세계에서 폭풍은 감정과 생각을 가리킨다고 한다. 풀기 어려운, 풀지 못하는 문제나 갈등, 또는 역경과 시련을 암시하기도 한단다. 의사전달 상의 어려움과 당혹감/곤혹 따위를 뜻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폭풍 속을 뚫고 바다 위를 걸어 전진한다는 것은 모종의 통쾌한 해결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이나 흥분의 포화 상태, 또는 그런 감정과 흥분의 강하고 급박한 표출을 비유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요새 한국사회 신유행어로, 뭔가 굉장한 속도나 수위로 불거지는 일 앞에 '폭풍'이라는 낱말을 무슨 접두어처럼 붙여쓰기도 한다. '폭풍수면'이라는 합성 단어가 그 한 예이다.  



성경에도 폭풍 얘기가 잦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겁 주는 갈릴리 호수의 폭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재우셨다. 한때나마 어리석었던 의인 요브(욥)는 폭풍 속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자 비로소 깨달아 변화됐다[각주:7]. 그런가 하면 아하브와 예제벨의 박해로 쫓겨 다니며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지내던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은 폭풍이 아닌 세미한 바람 속에서 그를 불러 주셨다[각주:8]


그런데 이 노래의 주인공은 폭풍 이는 바다 위를 님이 걷게 해 주신다고 노래한다. 거센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거뜬히 걸어간다는 것은 상황을 이기거나 초극한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를 해결했거나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다. 


이건 성경과는 다른 양태다. 성경은 폭풍 같은 역경을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거하게 하신다. 그러나 구태여 폭풍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을 필요는 없다! 왜 폼 잡고 거길 걷는가?  

그래서 이 부분 역시 뉴에이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님의 어깨 위에서 난 강해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날 높여 더 큰 나 되게 하네



성경에 이런 표현은 없다. 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바 양 100 마리를 가진 목자의 비유(루카복음서=눅 15'5)에서, 그 목자가 한 마리 잃은 양을 기어이 찾아 즐겁게 어깨에 메고 온다는 대목은 있다. 목자의 어깨 위에 놓여도 그 양은 여전히 약하고 여린 양이다. 어깨 위에 올려진 순간 강한 양이 됐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지은이는 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기 님은 연인 같은 대상으로는 그다지 걸맞지가 않다. 


"더 큰 나 되게"한다는 부분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비평가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 속의 '자라투스트라' 같은 초인 또는 (앨리스 A. 베일리,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등이 강조한) 초(超)진화적 고등인간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명백히 이것은 성경이 말한 바 거듭나거나 성화된 인간은 아니다. 대신 드높은 의식 상태의 달성 내지 소위 '득도의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을 볼 때, 노래 YRMU는 분명 성경적인 노래가 아니며, 뉴에이지에 훨씬 더 가깝다. 



참조: 가사가 비슷한 딴 곡


이것을 계기로 뢰블란과 그래엄은 '비밀정원'을 위한 여러 노래를 합작했다. 그중 The Things You Are to Me란 노래에서 반복되는 'You' 역시 막연한 대상이어서 가사 분위기가 YRMU와 흡사하다. 

다만 뢰블란의 가락이 YRMU와 달리 우수 또는 애수에 차 있는데, 실은 후기 낭만기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작품인 파반(Pavane, Op. 50)[각주:9]의 가락을 상당량 딴 듯 한 느낌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선적으로 프랑스어로 옮겨져 불린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The Things You Are to Me를 번역해 본다.[각주:10] 이유가 있어서다.  

원문 가사는 다음을 참조하라: >



  나를 위한 님의 것들



  나의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모래 알갱이마다 

  내 손에 쥔다 해도


  여태도 결코 셀 수 없었으리 

  날 위한 님의 

  모든 것들의 양을 잴 수 없네

  내가 하늘을 그려 

  그림을 매달아 말린대도 

  그 하늘이 곧 

  날 위한 님의 모든 것들의 

  장려한 디자인과 

  하나의 영원한 사인이 되길


  후렴

  님은 여름바람에 얹혀오는 태양

  가을이 가져오는 저무는 해

  온갖 것 속에 보이는 기적과 신비

  그것이 곧 나를 위한 님의 것


  때로는 밤에 깨어나 

  갑자기 두려워할 때

  님은 나의 가장 흐릿한 환상

  그러나 님이 손을 뻗쳐올 때

  나는 다시 보네

  날 위한 님의 모든 것을


  -필자 사역



어떤가? 위 가사의 'You' 또한 언뜻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그런 신앙적 감흥/감정과 이 가락은 그다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성가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가락의 분위기만 따진다면, 이 노래는 성가이기보다 오히려 미국 노래, 'All the Things You Are'를 연상시킨다. 제롬 컨이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작시한 이 곡(ATYA)은 제목도 거의 똑 같지만(!), 주 가락(코러스 부분)이 하향적 동형반복으로 돼 있어, 뢰블란(포레)의 것과 유사하다. 나는 작곡가이기도 한 그래엄이 이 노래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통된 성격의 대상인 'You'와 함께 서로 가사 분위기가 비슷한데도, YRMU은 기분이 '엎'되는 '오 대니 보이'와 비슷한 가락이어서 성가 같고 이 곡은 가락 때문에 성가 같지 않다는 생각은 뉴에이지 노래를 모르는 데서 온 착각 탓으로 보인다. 



가사를 보면 웬지 창조주를 노래한 성가 같기도 한데, 곡은 아니라는 것이다.[각주:11] 따라서 그래엄은 처음부터 성가를 쓸 생각으로 이 가사를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해가 가는가?

그렇다면 이 노래(The Things)의 'You'는 누군가? 하나님이든 신이든 그 누구든-아무라도 상관 없다는 게 그래엄의 입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YRMU의 'You'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그래엄은 거듭난 신자?


뢰블란은 뉴에이저이지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래엄에 대해 아직도 긴가민가 헷갈리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 스토리를 소개한다. 그래엄이 저 노래 You Raise를 갖고 2015년 11월 26일 이벤트를 가졌는데, 로마 천주교의 도미니크 수사회에 속한 뉴브리지 대학의 채플('성 유스타스 성당')에서 그 대학 합창단과 앙상블도 초청하여 가진 행사로, 아일런드 암협회와 성 브리지드 호스피스를 돕기 위한 자선 목적도 있었다. 


  

그래엄은 구교와의 교류에도 아무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즉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뜻이다. 


관련 글

https://truthnlove.tistory.com/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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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에 대해 추후에 추가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2. 링크된 동영상 속의 그뤂 '켈팈 우먼'은 뢰블란의 여러 노래도 불렀고, '비밀정원'의 켈트적 특성도 잘 나타내준다. [본문으로]
  3. 참고로..고대 켈트 종교는 드루이드 교와도 연계가 있다. [본문으로]
  4. 맄 워런의 사상을 추종하는 목적영성가이다. 그의 '목적영성'까지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 이 평은 대체로 건전하다. 정확하게 문제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에제키엘=에스겔 11'24. [본문으로]
  6. 마태복음서 14'24-33 참조 [본문으로]
  7. 요브서(욥기) 38'1, 40'6. [본문으로]
  8. 왕들A서(왕상) 19'11,12 [본문으로]
  9. 링크 속은 파반의 성악 버전 [본문으로]
  10. 음절에 맞추지 않았다. [본문으로]
  11. 포레의 파반도 원래 무곡인데도 불구하고 합창 버전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세속적인 내용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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