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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문학

정과정곡과 시편42

 출처: 나무위키



정과정곡과 시편42



김삼




정과정곡 / 정서(鄭敍)



  내 님믈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山)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달 아으

  잔월효셩(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과(過)도 허믈도 천만(千萬) 업소이다

  말힛마리신뎌

  살읏븐뎌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   *   *


  내가 님 그리워 울고 다니며 지냄이 

  저 산의 소쩍새와도 같군요

  *그게 아니라시며 설령 거슬려 하신대도 (아~!)

  지는 달, 새벽 별이 (제 속을) 알 터입니다

  넋이라도 님과 한데 아울리고파 (아~!)

  *우기시고 별렀던 분이 대체 누구셨더라

  아무 잘못도 허물도 (제겐) 없는데도요

  *(그 약조가) 말짱 (헛) 말씀이시려나

  *아무렴 이젠 서러울 뿐, 아!

  님께선 벌써 저를 잊으시나 보죠?

  오(그리 마소서) 님이여, 이제라도 돌이켜 제게 귀기울이고 사랑해 주소서.


   <필자 사역>


* 표가 붙은 줄은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다. 본래는 한자가 태반인 이두(?)였다가 이조 때 옛 한글로 옮겨졌을, 이 시의 좀 더 정확한 본문과 자세한 내력은 다음을 참조하라

file:///C:/Users/User/Downloads/정서,정과정.pdf



정과정곡(鄭瓜亭曲)이란, 12세기의 고려왕조 제18대 왕인 의종(毅宗) 때의 문신, 정서(鄭敍)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고향인 동래에 유배를 가, 오이밭[瓜田]을 일구고 정자를 짓고 지내면서 임금을 못내 그리워하여 썼다는 시다[각주:1]. 오이밭 정자라는 뜻인 '과정'은 그의 호여서, 후세 사람들이 이런 제목을 붙였다. 조선 때 귀천을 막론한 사회에서 많이 불렸다고 한다. 고려 가요 중 작가가 분명히 밝혀진 유일한 노래이기도 하다. 


멋들어진 우리네 옛 시의 하나이다. 정감이 넘쳐 읊노라면 절로 눈물이 솟곤 한다. 군주에 대한 신하의 절절한 그리움과 흠모의 정이 뼈저리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이조 때 정철의 두 미인곡[각주:2]에 잇대어진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충신이 임금을 그려 읊은 노래)와, 유배지에서 부른 이른 바 '유배가'의 효시로 쳐 진다고 한다. 

 

그런데 의종과 정서의 상관관계는 상상 외로 복잡하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면, 그의 마음을 순수한 충신연주지심이라 하기엔 좀 무리가 있어 뵌다. 

정서는 본래 의종의 이모부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의종의 아버지인 17대 선왕 인종(仁宗)의 후비(後妃), 연덕궁주(훗날의 공예태후) 임 씨의 매서-여동생의 남편)-이었다. 


왕후는 학문에 밝고 도량이 넓은 둘째 왕자, 이왕경(李王暻, 훗날의 대녕후)을 사랑해 태자 책봉을 바랐고, 왕후의 매서인 정서 역시 경을 추대하려 했으나, 인종은 장자권을 선호하던 신하들의 압력을 받은 끝에, 유흥과 오락을 즐겨하던 맏아들, 왕현(王晛)에게 차기 왕위를 물려 준다. 그가 의종이다. 


의종은, 내시낭중(內侍郎中)인 정서가 대녕후와 서로 자주 오가며 파티를 가질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기에 이를 질시하고 경계하는 외척들과 주변 정적들이 이를 악용해 '역모' 죄로 참소를 하자, 결국 의종 5년째인 1151년, 정서를 동래로 유배 보내어 버린다. 의종은 떠나는 정서에게 "오래지 않아"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약조하지만, 지키지 못한 채 훗날엔 다시 거제로 이배시킨다. 문신들을 편애한 의종은 그러나  정중부, 이의방 등에게 무신정변을 당해 결국 자신이 거제도로 유폐되면서, 정서와도 해후하게 되는, 일대 아이러니의 비극을 겪는다. 


정과정곡에서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듯, 의종은 가히 '의종(疑宗)'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우들과 그 측근들에 대하여 의심이 많았다. 바꿔 말하면 노래 작자와 그의 그리움의 대상인 임금이 서로 의심하는 사이였다! 의종은 의종대로 아우와 이모부 사이를 비롯한 측근들을 자주 의심했고, 정서는 정서대로 오래 약조를 지키지 않는 임금이 행여나 다시 불러주실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는 한편, 일말의 경원과 한도 품고 있었다. 바꿔 말해, 의심과 불신, 기대와 원망이 오벌랲된 지은이의 감정이 이 시에 담겨있다는 뜻이다. 


사실 의종과 정서 사이엔, 이 시에 숨겨진 듯한 절절한 깊은 애정이 자리잡을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나 실제적이고 사회적인 교감은 그다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정서 자신이 처음부터 왕현 대신 아우인 왕경을 선호했기에, 설령 의종이 그를 이모부답게 존경하고 탁월한 재능을 흠모했거나 훗날에 거제에서 만나 화해했다 해도 둘 사이의 갈등과 정치적 앙금이 아주 가실 리는 만무했다.  


어찌 보면 이 시는 애증의 쌍곡선이 절묘하고도 치열하게 교차하는 정서의 '정서(情緖) 백서'라고 할 만 하다. 묵혔던 감정의 응어리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치 다 드러냈다고 할 만큼 과감하고 적나라한 고백이며,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미학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괄목시할 절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겉으로는 멀리 떨어진 임을 그리는 여인을 연상시킬 법한 이 노래가 바로 의혹의 씨앗이 되어, 왕에 대한 '불경'이라는 식의 시사 내지 암시로 받아들여져 외려 유배기가 늘었으리라는 일설도 있다. 남은 기록이 많진 않으나, 고려 때부터도 이미 여악(女樂) 기녀(妓女)들의 연모시 따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종 초기, (한때나마 왕위 경쟁자였던) 대녕후와 비밀리에 어울려 허물없이 놀기를 즐겼다는 정서는 민감한 시기에 조신하게 처세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녕후를 좋아한다는 내색을 덜 했어도 유배를 면했을지 모른다. 세상에서는 좋은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든 정서가 의종을 과연 애증 속에서 역설적으로 맘 깊이 흠모하여 저 시를 썼는지 의문이다. 시의 표현 자체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지은이는 고독한 유배생활을 겪어온 지난 날을 시방 회오하면서 아쉽고 억울한 소회도 있겠으나, 앞으로 여차저차 왕과 화해하고 행여 기회를 틈타 신하로서의 삶을 만회해 볼까 하는 생각도 약간은 엿보인다. 



이제, 성격은 많이 다르지만 구약성경의 한 노래를 들어 본다. 



  -악장에 붙여: 코라 후손들의 마스킬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며 헐떡이듯 

  그렇게 나의 혼은 님을 찾으며 헐떡입니다. 오, 하나님!

  내 혼이 하나님-살아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네; 

  언제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뵐까? 

  사람들이 날더러 온 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 

  나의 눈물은 낮이나 밤이나 내 음식이 돼 버리네

  내가 전에 명절 쇠는 무리를 이끌어 

  기쁨과 감사의 목청 높여 가며 

  하나님의 집으로 행렬져 가던 일을 추억하니, 내 맘 무너지네

  내 혼아, 어찌 그리도 낙심하고 어찌 내 속에서 불안해 하나? 

  넌 하나님을 소망하거라 난 그 분의 도움과 존재를 아직 찬양할 테니.

   (하략)

  <필자 사역>



구약 시편의 제 42편 앞 부분이다. 필자 나름대로 원문에서 옮겨보았다. 

오해 말라. 필자는 지금 정과정곡과 이 시편을 같은 수준과 차원에 놓고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전자는 세속인이 읊은 일개 창작품일 뿐이나, 후자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감동하여 계시로 내리신 찬양 시편 노래다.  

그러나 두 노래 사이에 공통점이 없지 않다. 이 시편 노래 역시 하나님께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읊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절대자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바탕 삼고 있다. 의종처럼 하나님도 왕이시고 모든 왕들 위의 왕이시지만, 세상의 여느 왕과 절대로 다르다는 것을 시인의 노래 흐름에서 느낄 수 있다. 시인의 절실함은 그래서 그만큼 강하고 강렬하다.  


푸석푸석한 모래흙처럼 어설픈 상대방에 대한 정과정의 막연한 기대감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셔서 엄존하시는 상대방께 대한 절대 신뢰를 여기서 느낄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에 네게브(Negev) 같은 광야에서 헤매다 목이 마를 대로 바짝 마른 사슴이 한 가닥 시냇물을 찾으며 헐떡이듯, 그렇게 글쓴이의 혼이 대상자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같은 자연이로되, 시편 작가는 헐떡이는 사슴을 글머리에 끌어들인 반면, 정서는 산 접동새를 거든다. 우리네 소쩍새나 두견 역시 목이 타듯, 피를 토하듯 애타게 "우는" 소리인데 왠지 한이 서린 듯한 느낌이다. 한 구전 설화는 이 새가 '솥 적당~!'이라고 구슬피 우는 이유를 며느리를 구박하는 못된 시어머니 탓에 밥솥이 작아, 끼니 때마다 밥을 하고도 불쌍한 며느리만 못 먹다 굶어죽어 된 새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설화에 기초한 김소월의 '접동새'는 아홉 오라비의 홑누이가 "의붓어미 시샘에" 죽어서 된 새라고 한다. 두 설화 모두, 쓰라리게 사무친, 서슬 퍼런 한이 내재돼 있다. 

이에 따라 정서의 산 접동새도 한의 개념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한 마디로, 의종에게 일말의 한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시 42의 사슴 자체는 얼핏 아무런 내재한이 없는 거 같아 더 순수해 뵈지만, 시편 기자에게도 한이라면 한이 있다. "내가 언제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뵐까?"라는 탄식과, "사람들이 날더러 온 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내 눈물은 밤낮 내 음식이 돼 버리네"라는 울분과 통탄 말이다. 원수들의 그런 비방은 뼈를 짓이기는 듯 했다(42'10).  

하지만, 울분과 통탄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직한 보장()과 반석이신 하나님을 이처럼 갈망하는 이에겐 반드시 해갈이라는 대가와 보상이 따른다. 이것을 본 시편 8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낮엔 예호봐님이 그 분의 사랑을 베푸시고

  밤엔 그 분의 노래가 내게 있으니

  내 삶의 하나님께 드릴 하나의 기도라

 


반면 정서의 소쩍새 같은 그리움과 갈망은 해갈될 보장이 없다. 벽이다. 현재로선 그냥 그만의 부질없고 속절없는 그리움과 한일 뿐이다. 그래서 넋이라도 님과 함께 하길 바라고, 허공에 지는 달과 새벽 별이 속맘을 알아주었길 바랄 따름이었다. 다만 이제라도 돌이켜 관심을 갖고 말도 좀 들어주고 사랑해 달라는 간청은 잊지 않고 있다. 


훗날, 정서가 수도 개경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거제 오양역에 머물던 1170년 9월 당시 개경에서 갓 폐위돼 거제의 둔덕기성에 애희 무비와 함께 유배돼 온 의종과 약 한 달간 재회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그 때에야 서로 얘기로 의혹과 한을 웬만큼 풀었겠지만 실상 이젠 둘 다 하릴없는 시기였다. 

후배 문인이었던 임춘의 기록에 따르면, 정서의 거제 유배생활은 비참했다. "따스할 날 없는" 역참에서 살면서 "기맥을 다칠 것을 우려할 정도였으니". 이 와중에서 어떻든 벗어나보려 그는 비록 유배온 왕이라지만 의종을 만나 진정해보려고 나막신을 신고 둔덕기 산성에 오르내렸단다. 

그는 이 때 이미 정배 생활 약 20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서 있었다. 묵죽화의 달인이기도 했던 그는 그나마 의종의 아우인 명종이 즉위한 1170년 10월에야 비로소 대사면을 받고 풀려나 일단 개경으로 복귀하지만, 시골에서 여생을 지낸다. 



마치 정서의 원소(寃訴)처럼 시편 기자도 "..어찌 저를 잊으셨나요? 제가 어찌 원수에게 억압 받아 슬피 돌아다녀야 하나요?"라고 하소연하지만, 호소이지 원망이 아니다. 그의 하나님은 모래흙이 아닌 반석이시기 때문이다! 의종이 아닌 전능왕 예호봐님이시기 때문이다. 


정서는 저 시에서 의종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아 억울한 상황을 대화로 풀고 만회해 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42편 기자도 오로지 하나님께 슬픔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호소한다.  


다른 점이라면, 상대적 대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절대자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라는 차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차원의 차이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1. 거제에서 썼다는 유력한 일설도 있음 [본문으로]
  2. 사미인곡, 속미인곡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