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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어먼의 고등비평, 믿을 구석 있나?

 

 

 

 

 

물음과 답

 

물음: 바트 어만(Bart D. Ehrman)의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 와 <예수 왜곡의 역사>를 구입해 보려는데, 신학에 무지한 평신도로서는 신앙이 흔들릴 만한 위험이 있는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간과 돈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사실은 없는지 여쭙니다.

 

 


답:

 

성경 고등비평가인 밡 얼먼(Bart Ehrman, 바트 어먼)은 언뜻 보기에 매우 유능한 학자이고 연사입니다.

하지만 삶의 굴곡이 심합니다. 젊은 때 명목상의 크리스천이었다가 무신론자였고, 한때 거듭났었다고 했으나 현재는 부정적인 고등비평을 일삼는 매우 진보적인 성경학자로서, 실상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지론자(不加知論者, agnostic)란 무신론자와 대동소이한 사람으로서, 사물의 본질이나 궁극적 실재 등을 사람의 경험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영적 모르쇠라고 할 만 하죠.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란 약 3세기 전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돼 발달한 성경비평의 한 방법으로, 관련 도서와 인터넽 여기저기 그 정의와 개념이 설명돼 있습니다. 본문을 주로 다루는 저등비평(lower criticism)과는 달리, 문서와 원천적 자료, 역사성 등 외적 요소를 주로 다루지요.

사실 고등비평은 특히 일반 성도들에게 상당히 어려우면서도 굉장히 위험한(!) 이슈의 하나입니다. 고등비평에 자칫 미혹되면, 성경을 부정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지요. 얼먼 자신이 그렇게 돼 버린 사실을 보면, 그 위험성 수위가 느껴지죠. 

그래서 위 질문을 다룸에 있어서도 퍽 많은 고심과 결단이 필요했는데, 어차피 신자라면 한 번 이상 부닥칠 문제라고 생각하여 다루기로 합니다.  

 

얼먼의 주장들 대부분은 비성경적 차원을 넘어 반성경적인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부 독자들이 그에게 매료된 나머지 성경을 불신하고 멀리하는 현상이 발생해 온 게 사실입니다.

얼먼의 근저, '예수님 잘못 인용하기'(Misquoting Jesus 부제: 성경을 개조한 사람들과 그 까닭, 2005년)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의 하나가 된 책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보기엔 불행한 일입니다. 책 중간에 가면, 그의 학문적 모노그래프라고 할 수 있는 이전 저서, '성경의 정설적 변조'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가 왜 불가지론자가 됐는지를 알 수 있는 개인증언 같은 대목들이 나옵니다.

 


신약사본연구센터(CSNTM)의 대표로 미국 정상의 성경학자 중 한 명인 대니얼 월리스 박사는 얼먼에 관하여 진솔하고 간결한 비평을 가한 바 있습니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밡 얼먼은 현재 북미주의 지도적인 성경문서 고등비평가이다. 그는 논리적이고 위트가 있고 도발적이지만, 때로 충분한 논증 없이 과장된 뉘앙스를 풍긴다. 그의 최근저 '예수 잘못 인용하기'는 신약문서에 대한 하나의 고등비평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서론과 1~7장, 그리고 결론으로 돼 있는데 절반 이상(1~4장)은 그냥 해당 분야에 대한 일반적 입문서이다. 얼먼은 이 책을 지난 약 300년간 지속돼온 관행인 신약문서 비평에 관해 평신도를 위해 쓴 최초의 책이란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면서 독자를 오도한다. 왜냐하면 제목의 인상과는 달리, 그가 이 책에서 다룬 다양한 이문(異文)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제목이 약속한 것을 독자들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겉과 속이 다른 책이다.

하지만 잘 팔린다. 2005년 11월 1일에 발행된 이래, 애머존 리스트의 거의 탑을 장식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먼이 NPR의 2개 프로그램(다이앤 렘 쇼)와 테리 그로스가 진행하는 '프레쉬 에어(맑은 공기)'에 각각 1주씩 출연하는 통에 애머존의 최고 50 위 베스트셀러에 포함돼 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 책의 전반 4개 장은 이렇다 할 주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작 동기를 밝혀주는 정도이다. 마지막 3장은 그의 어젠다를 드러낸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특히 도발적이고도 과장된 진술과 비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다.

 

서론 부분에서, 얼먼은 무디성서원(MBI)이나 휘튼 칼리지 등 그의 복음주의적인 배경을 나열한다. 그후 그는 프린스턴 신대원에서 목회학 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얼먼은 자신의 복음주의적 기존 배경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신약원문의 텍스트적 '문제점'들과 괴로운 씨름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인 5~7장에서, 특히 얼먼은 자신의 주저인 '성경의 정설적 변조'(1993)에서 밝힌 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의 결과를 논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그는 지금까지 앞장에서 몰아가던 포인트를 밝힌다. "사람들이 때때로 말하듯, (성경) 본문의 변조가 본문의 원뜻이나 그로부터 얻는 신학적 결론과는 딱히 무관하다고 함은 잘못일 터. 우리가 봐왔듯, 사실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책에서 얼먼이 다룬 문제성 이문(異文)들 가운데 신학적 이론(異論)의 주된 사례는 (1) 예수님이 '화'를 내셨다는 구절(마르코스복음서=맑 1'41), (2) "종말이 오는 때는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모른다"(마태복음 24'36), (3) 성삼위에 관한 명백한 진술(요한A서=요일 5'7~8) 등이 있다.

(1)의 경우, 대다수의 사본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돼 있는데, 소수의 일부 고대 사본은 화를 내셨다고 되어 있단다. 반면 맑 3'5 같은 경우, 논의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이 노하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대단한 혁명적 발견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마태복음 24'36에 관하여 다수의 논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예언적 불가지성을 드러냈다고 기록하지만, 다수는 "인자(人子)도"라는 말을 빼먹곤 한다. 이 문구가 정통적이든지 어떻든지 마르코스복음서 13'32에도 같은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 직전 감람원에서의 이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님이 종말의 때에 관한 예언적 불가지성을 말씀하셨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과적으로, 어떤 교리적 이슈가 여기서 위태롭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단순히 마태 24'36 속의 한 표현이 신자의 기본적인 신학적 확신을 바꿔 버린다고 주장할 수 없다. 마르코스 복음에도 같은 표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다양한 신약 사본들 속의 이문들이 신약의 신학을 바꿔버린다는 개념은, 잘 봐 준다면 과장된 것이다. 불행히도 얼먼 같이 꼼꼼한 학자로서, 신약 본문의 표현을 신학적 주요 변개로 보려는 논지는 자신의 본문적 판단이 잘못됐든지, 그의 해석이 잘못된 셈이다.   

일반 신자 대중을 겨냥한 책이라면,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논지의 신학적 무게로써 일종의 위기감을 조성하려고 들 것이다. 저자는 마치 기독교 공동체의 '치킨 리틀'[각주:1]들에게 그들이 미처 씨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데이터를 갖고 공포 무드를 조성하려는 인상까지 들게 만든다.

 

이 책은 너무나 자주,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은 독자로서는 미처 여과시켜 소화할 수 없도록 고도로 격한 진술들을 갖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인다. 그의 어프로치는 성숙한 교사로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군걱정을 자아내는 '민심교란' 마인드 쪽을 더 닮은 것 같다.
증거에 따르면, 신약의 핵심 교리를 바꿔 버릴 정도의 중대한 성경 텍스트 이문은 아직까지 형성됐거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끝으로, 요한A서 5'7,8의 경우, 성삼위일체 공식을 포함시킨 현대 번역 성경들이 하나도 없다. 여러 세기에 걸쳐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런 '공식'은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공식을 추가한 구절은 아주 후대의 몇몇 사본들 뿐이다.

일부 독자들은 얼먼의 책이 왜 그런 구절을 다루었냐고 의문을 갖기도 한다. 이유라면, 필시 성경에 대한 의심의 불꽃에다 기름을 붓기 위해서일 것이다.

 

문제의 구절은 1522년 최초로 나타났으나 정치적 압박에 의해 삽입된 것이며, 당대나 현재의 학자들은 그것이 정통 성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초기 교회는 이 구절을 알지 못했어도, 칼케돈 교회 회의(주후 451년)는 성삼위일체 교리를 확신했다! 어떻게 한 천 년이 더 넘도록 신약 원문에 없던 구절의 혜택이 없이도 그 교회회의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칼케돈의 신조 진술은 허공에다 써 놓은 게 아니다. 초기 교회는 신약 속에서 분명히 본 진리를 신학적 공식으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중요한 특정 교리를 직접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없다고 해서 곧 그 교리가 신약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 초기 교회의 건전한 교리 논쟁으로부터 성삼위 신론이 굳혀졌음을 아는 사람은 초기 교회가 신약 속의 데이터를 검토해서 그런 결론을 얻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공식은 그들의 발견한 것의 요약이지, 그것 자체가 그들의 선언에다 정보를 제공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얼먼의 이 책은 그 도발적 성격으로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논점에 관한 순수 본질은 빈약하다. 학자들은 스스로 이해가 부족한 이슈에 관해서는 일반 독자들에게 섣불리 경고나팔을 불지 말아야 할 신성한 임무가 있다.

 

불행히도, (분별력이 부족한) 보통 신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앞서 그 어떤 비평가들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신약의 말씀과 가르침에 관해 의심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밡 어먼은 자신의 비평가적 주가와 인기를 위해선지 저지를 대로 크게 저질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도록. 그 점에서 그는 마귀 좋은 일을 해 온 셈이다. ]

좋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무엇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말해 주기를 주저하지 않고, 그 소재를 어떻게 잘 다루어서, 자칫 이성의 길을 감정으로 막지 않도록 할 줄을 잘 안다. 좋은 교사는 치킨 리틀을 양산하지 않는다.



 

댄 월리스의 이 탁월한 비평에 대해 또 다른 보수적 신학자인 벤 위더링턴 박사도 근본적으로 공감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신약 석학이자 헬라어(고전 그리스어)의 대가였던 프린스턴 신대원의 브루스 메츠거 교수(1914-2007)는 위더링턴과 문제의 얼먼을 둘 다 가르친 은사였습니다. [ 그런가 하면, 월리스는 메츠거가 죽기까지 그의 '절친'이었습니다. ]

 

위더링턴에 따르면, 메츠거 교수는 신약성경의 90%는 원문상으로 탄탄히 구축돼 있으며, 또 남은 10%중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신조나 교리를 충격적으로 변개시킬 만한 데이터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메츠거의 이 말을 듣고도 이제 와서 은사의 말을 정면 부정하는 얼먼 같은 사람은 의도적으로 도발적 발언을 하(여 인기를 끌)고 싶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순하고 부정직한 사람이라고 위더링턴은 넌지시 꼬집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위더링턴의 지적에 따라, 얼먼의 책 제 5장 이후의 주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죠.



요한A서 5장에 삼위일체 공식이 없다고 해서 신약에 삼위일체 개념이 없다는 증거라도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죠! 마태복음 28장 등 성경의 다양한 대목에서 이 개념이 발견됩니다. 더구나 이 '공식'을 여기저기서 직접 찾기보다 성자이신 크리스토님의 신성과 성령님의 신성이, 아버지 하나님의 신성과 함께 신약성경 도처에서 거듭 거듭 발견된다는 사실! 연대상 최초의 신약문서인 파울(바울) 서신서들을 봐도 성삼위 교리가 완전하고 명료합니다.

 

딴 예를 보죠. 얼먼은 종말 날짜에 관한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불가지성에 관한 마태복음의 버전(참고: 맑 13'32과 마 24'36 비교)을 예수님이 미래 지식에 관해 신적이지 못했던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본문적 이론을 다룰 수도 있겠지만, 비록 우리가 '인자라도 모른다'는 구절을 포함시켜도 그것 갖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일 뿐인 예수를 제시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기독론)은 마태복음 맨 앞 부분 및 끝 (1'23, 28'20)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그런 부정적 개념을 죄다 물리칩니다! 그밖에도 마태복음의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내셨습니다.

 

얼먼은 더욱이 선재(先在 참고: 요한복음서 1'1~3)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일부러 옴니스(전능성)를 유보하시고 하나님이신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음을 시사한, 찬송가와도 같은 필리포서 2'5~11에 반영된 하나님의 거룩한 겸손이라는 심오한 신학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보통의 우리와 같은 시공간의 제약, 그리고 온전히 인간이신 지식과 힘을 수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가 말해 주듯, 죄 문제에 있어 그 분은 우리와 달랐죠. 죄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고 만드신 인간의 고유한 기질이 아니었고요.

 

얼먼은 마치, 신약성경에서 가장 초기문서인 파울 서신부터 가장 뒤늦게 기록된 요한 서신서에까지,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자발적) 자기제약과 성육신(=성육/도성인신) 개념을 한 번도 진지하게 다뤄본 바 없는 것처럼 글을 썼습니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와 달리 공관복음서(마태/마르코스/루카 등 3개 복음서)에서는 전반적으로--또는 공관복음서의 가장 초기 원천(Q? M? L?)에서라도--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신 것으로 제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제4복음서(즉 요한복음)는 물론 더욱 명료하게, 강력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복음서에 예수님의 신성이 결핍된 것이 결코 아니지요. 또한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또는 교사, 메시아적 예언자로만 제시한 복음서나 복음서의 원천이 있다고 은근히 시사해주는, 그런 사악한 원문 쪼가리도 없다고 위더링턴은 강조합니다.

 

위더링턴은 또, 예수님이 가장 자주 쓰신 대표적인 문구 둘에 눈길을 돌립니다. 그 하나는 (자신을 가리키신) 인자, 그리고 (그 분이 이끌어들이실)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구약성경의 어디에선가 이 두 개념을 함께 찾을 수 있지요? 바로 다니엘서 7'13,14에서죠. 거기, 인자님은 한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고 약속된 분입니다. 한 왕국을 영원히 다스릴 통치자라면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이 과연 누구에게 그런 특권을 주실지? 그 답은 바로 인자이시기도 한, 영원한 그 분이시죠!

 

평자인 위더링턴 박사는 자신의 책, '예수의 기독론'에서 예수님이 다니엘서 7,13,14에 스스로 자신과 사명에 관해 해석하셨다고 논증한 바 있습니다. 주님은 또 자신을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지혜로 보셨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예수님은 자신을 인간이며 동시에 인간 이상인 하나님으로 보셨다는 뜻이죠.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을 그런 모습으로 본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성 개념이 1세기 후반기에 어디서 적당히 희석됐다는 진부한 발상은 역사적으로 거짓에 불과합니다. 싫든 좋든, 예수님은 그 분의 신성을 스스로 암시하신 장본인이시고, 그에 따라 교회는 이 신성 개념을 더욱 명확히 하고 크게 부각한 것입니다.

 

얼먼은 또, 예수님의 동정녀 회임/탄생,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 예수님의 몸의 부활, 성삼위관의 원초적 자료 등이 모두 후기에 오도된 필사자들에 의해 원문에 부가된 개념이라고 주장했는데, 역사적으로나, 본문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거짓된 주장이라고 위더링턴은 지적합니다.

위더링턴에 따르면, 얼먼은 또한 마르코스복음서는 본래 16'8로 끝났다며, 따라서 이 복음서에선 예수님의 부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우선, 오리지널 마르코스복음은 결코 16'8로 끝나지 않았다고 본다고 위더링턴은 고백합니다[본 역자도 그렇게 믿음]. 이 점에 관해 클레이턴 크로이 박사가 매우 훌륭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16'8)'란 그리스어 문구는 마르코스 복음서 같은 문서의 피날레를 장식할 적절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런 종결은 문법적으로도 어색하고 부적절합니다.

위더링턴은 그의 마르코스복음 주석서에서 이 문제를 소상히 다루었습니다.


자, 우리 한 번, 마르코스복음서가 16'8로 끝났다고 해 봅시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초기 증거가 없음을 의미하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이보다 약 10년 전 사도 파울은 코린토A서(고전) 15장에서 파울 자신을 비롯,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의 긴 리스트를 제공합니다.
그는 초기전통을 인용하고 있지, 조작해내지 않았지요. 즉 주님의 부활 사건은 초기 교회가 파울의 제자이든 페트로나 요한, 야코보의 제자이든, 누구나 굳게 믿었던 신앙의 일부였다는 것입니다. 


코린토A서 16장 끝에 나오는 파울의 아람어 기도-'마라나 타'(오소서 오 주님)의 예를 봅시다. 아람어를 구사하는 유대계 신자들이 음송(吟誦)한 것으로, 파울도 알고 있는 기도를 인용한 것이지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간구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당시 단신론적(monotheistic) 유대인들이었지만,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께 되돌아오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라삐에게 돌아오라고 기도할 사람은 없을 터입니다.



이상으로, 본 블로거는 고등비평가인 얼먼에 관한 님의 질문에 대하여, 얼먼처럼 프린스턴의 대 학자 메츠거 교수에게 배운, 보수적인 석학이요 권위자인 벤 위더링턴의 글을 간추려 옮기면서, 독자들이 효과 있게 이해하도록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경종과 교훈을 얻으면서, 얼먼 같은 불행한 학자들의 책을 혹시 자칫 잘못 읽다가도 고등비평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경을 반대하거나 의혹을 마구 던지는 비성경적인 거짓된 주장들을 단호히 배격하지 않으면, 거기 유혹 받아 성경과 기독교를 부정하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얼먼을 보면, 자기가 배운 지식으로 성경의 '허점'이나 '맹점' 같은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고 자만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다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탄의 (장차 망할)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죠.

얼먼의 회개(=뉘우치고 돌이킴)를 바랍니다!


아울러, 진리의 말씀으로 늘 깨어 있는 독자들의 더 깊은 분별과 통찰, 검증을 희구합니다. 고등비평가들 중 성경과 그 진리를 대적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책이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길.




  1. 병아리가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맞고 놀란 나머지,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전달하며 (동물) 마을을 돌아다니다 나중에야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중국의 기우(杞憂) 같은 우화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