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비평/음악

문제작 찬송가의 문제 시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찬송시로 기존교회를 풍자/비난한 시인 휘티어.
                    침묵기도만을 강조하는 퀘이커 형제회.

[ 필자의 이 글은 공식 이메일 요청(신청자 본명 기재)과 허락 과정 없이 전재/복제할 수 없다. 혹 기사/논문 등에 일부 인용할 경우, 필자의 이름과 글 출처-'진리와 사랑-티엘티 블로그'-를 명기해 주기 바란다. 출처 대신 이메일 주소를 올리지 말기를. ]

글 싣는 순서

   머릿말
   곡의 배후 이슈
   작시자의 원 의도는 전체 교회 비난
   소마에 관하여
   휘티어의 역지사지적 모순
   문제의 찬송시에 대한 분석/비평
   또다른 문제의 찬송시
   휘티어의 간추린 생애  

머릿말

찬송가의 이슈는 곡도 곡이겠지만, 가사는 더욱 중시된다. 성경과 교리에 직결되기 때문. 따라서 가사나 곡, 양쪽 다 성경적/영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한국찬송가에 실린 구미 곡 다수는 해외 찬송가를 거의 무턱대고 채택해서 담았기에 문제가 많다. 특히 가사가 그렇다. 웃지 못할 황당한 배경 스토리도 많다. 지금 다루는 이 찬송가도 단적인 사례의 하나다.  

구 한국(통일)찬송가 407장 '그 영원하신 사랑'의 가사는 미국의 낭만파 시인 잔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1892)의 작품. 휘티어는 언론인 겸 노예제 철폐 운동가로도 유명했지만..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보편구원론적 퀘이커 교도라는 것. 퀘이커는 흔히 '형제회'라고도 불린다.  

[ 무교회주의 운동가 함석헌 씨는 퀘이커 교도로 유명했다. 조지 팍스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특히 침묵명상을 강조해 20세기 관상영성(comtemplative spirituality)에 크게 기여해 왔다. 퀘이커 신학교/대학교 등은 모두 관상영성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토머스 머튼, 헨리 나웬, 토머스 키팅 등 카톨맄 인사들이 확립한 현대 관상영성 길라잡이의 한 명으로 한국도 방문한 리처드 포스터도 퀘이커 교도이다. 그래서 포스터에겐 머튼의 종교다원주의, 나웬이나 테레사 수녀의 보편구원주의가 별 문제시 되지 않는다.]

휘티어의 보편구원론은 그의 대표 찬송시 '친애하는 주님, 인류의 아버지'(Dear Lord, Father of Mankind)로 알려진 작품에서 더 잘 나타난다. 그에게 찬송시 작가 간판을 달아준 작품이다. 한국 찬송가에는 '만민의 성부 되신 주'('개편찬송가' 426, '새찬송가' 348, '합동찬송가' 476)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구 한국(통일)찬송가에는 아마도 원시 배경 실사가 됐는지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그 영원하신 사랑은'(통407/새474)이 실린 것을 보면, 작자 배경 실사는 안 됐거나 무시한(?) 모양.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실시한 찬송가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친애하는 주님..'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다음으로 애창되는 찬송가로 꼽혔다.  대다수 구미 찬송가에 이 곡이 수록돼 있다. 아마도 교단/교파별 찬송가를 따로 조사해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성경 진리보다 교리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심각한 현상이다.  

휘티어에 대해 영국의 현대 찬송가 해설가 류퍼트 크리스천슨은 이렇게 평가한다.

"아이러니인 것은 이 아름다운 애창 찬송시의 작가 자신이 교회음악을 강력 반대했다는 사실. J.G. 휘티어는 하나님께는 침묵의 명상 속에서 가장 잘 예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찬송가가 전통 제도교회나 복음주의권의 '연출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개탄했다."

그러나 더 아이러니인 것은 휘티어가 자신의 비판과는 달리, 이 시가 19세기 영국 전통교회 찬송가에 실려 사용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비판해온 전통교회의 관행을 오히려 더 조장했다는 점. 그 점에서 퀘이커 정신과 어젠다에마저 충실하지 못한 셈이 됐다.

이 찬송시는 휘티어의 길고도 별난 편향의 시 '소마의 양조(釀造)'(The Brewing of Soma) 뒷 부분에서 추려 모은 것이다. 연마다 5줄씩 총 17연으로 된 원시는  '월간 애틀랜틱'(AM) 제29호(1872년 4월) 473~474쪽에 처음 실렸다.
그 가운데 제12, 14~17연을 영국 찬송학자 W. 개맅 호더가 선별, 자신이 편집한 '회중찬송가'(CH, 런던:엘리엍스톸 출판사, 1884년)에 '친애하는 주님과 인류의 아버지'(해당 영문찬송가 제440장)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그후 20세기초 대다수 신교 찬송가에 실리게 됐다. 호더의 선별 부분 또는 제13연까지 포함, 12~17연을 한데 묶어 실린 예도 있다.

곡과 배후 이슈

유명 찬송시들이 으레 그렇듯 이 시에 붙여져 불리는 곡도 여러 개다. 프레드릭 메이커의 가락 '엘튼', '레스트' 또는 '휘티어'(1887년), 윌리엄 헨리 글랟스톤의 '해머 스밑' 등이 그것. 옛 한국 찬송가(합/새/개편)에 실린 가락은 모두 F. 메이커의 '레스트'로 통일돼 있지만 서구에서는 대체로 영국 작곡가 찰스 휴버트 헤이스팅즈 패리 경(준남작)의 '렙튼'(1888년)이 가장 애창된다.

가락 '렙튼'은 페리가 구약 외경 '유딭 서'에 등장하는 여걸 유딭을 다룬 오라토리오 '유딭'에서 썼던 콘트랄토용 아리아 '에집트의 상쾌한 땅을 떠난 지가 오래'에서 땄다. 조지 길버트 스탁스 박사(렙튼 스쿨 음악과장)가 1924년 휘티어의 이 찬송시를 이 가락에다 붙여 채플 시간에 사용한 것.  
그래서 '렙튼'이란 제목도 생겼다. 찬송가의 (가사 아닌) 가락 제목은 알기 쉽게 모두 짤막짤막한 영문 제목으로 불린다.
'레스트'는 반음계가 잦고 순차진행이 많아 정적인 반면, '렙튼'은 대조적으로 도약진행이 많고 가락이 매혹적이다.   

페리 경은 이 '렙튼' 가락 외에도 영국 예술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예루살렘'에다 합창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시인/화가인 블레이크는 프리메이슨리/뉴에이지 사상이 매우 강한 즈베덴보리교 (일명 스위든보리교) 신도였다.
블레이크의 대다수 그림/미술 작품엔 메이슨 정신이 깃들어 있다. 영어권 사람인 페리가 블레이크의 메이슨적 배후를 모르고 주요 작품을 썼을 리는 거의 없다고 본다. 페리는 기사작위도 받았고 죽은 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작곡자로 유명한 프리메이슨/찬송작가 아터 설리밴 곁에 묻혔다.     

블레이크의 작품들이 한국 교계 일각에서 '위대한 기독교 예술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이 점에서 찬송가 가사 뿐 아니라 작곡 배경도 마땅히 검증돼야 한다.

한편 미국 작곡가 찰스 아이브즈는 이 찬송시의 셋째 연과 또 한 연(휘티어 원시의 14, 16째 연)만 따서 별도의 독창곡 '정적'(Serenity)을 만들었다. 매우 느리고 pppp(피아니씨씨씨모)로 시작하는 매우 조용한 6/8 박자의 중간 음역 곡이다.
아이브즈의 이 독창곡은 1922년 그의 '114곡 모음'(1922년/레딩사)의 제42번, 1932년 '일곱 노래 모음'(코즈콥사)에 14번 곡으로 실렸다. 1929년 3월 15일 맨해튼 카네기 뮤직홀에서 메조소프라노 메리 벨(피아노 반주 줄리어스 히즈먼)의 노래로 초연됐다. 두 번째로 1932년 5월 1일 뉴욕주 새러토거에서 불릴 때는 휴버트 린스캍이 불렀고 재즈현악 '로데오'로 유명한 유대계 현대 클래식 작곡가 애런 코플랜드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작시자의 원 의도는 전체 교회 비난


우스꽝스럽게도 이 찬송시를 담은 휘티어의 원시 '소마의 양조'는 철두철미 퀘이커리즘 관점에서 전통 주류교회를 비판하고 비웃다시피 한 내용이다. 원시 앞 부분에서 기성 교회를 풍자 비난한 것.
전통교회의 교회음악 등을 베다 힌두교가 종교적 열광을 북돋우기 위해 환각을 자아내는 혼합음료 '소마' 음용에다 빗대어 비판하고 그 대신 퀘이커 정적주의/명상주의에 기초해 "잔잔하고 세미한 소리"를 기다리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상이 담겼다. 물론 현대 관상 영성과도 일맥상통하는 정신이다!

전통교회가 음악과 촛불, 향연(香煙), 철야기도, 심지어 입신 등을 통해 하늘에 더 가까이 가거나 사람들을 천국으로 올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며 이를 소마 마시기에다 비유했다. 
그런 시가 신교 찬송가에 버젓이 실렸다는 것은 마치 저 유명한 '환난과 핍박 중에도'(구 찬송가 383장)가 본래 신교에 박해 당하던 카톨맄 '순교자'들을 기념해 쓴 시라는 점과도 비슷한 이치다. 이런 시가 신교 찬송가로 쓰이다니 맹랑하고 우습지 않은가!

물론 교파/교단/교회에 따라 전통교회 음악이나 기타 의식들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갈수록 문제가 더 늘고 있다. 특히 중세 전통, 관상영성 등을 무차별 수용하는 젊은 '떠오름교회'(Emergent Church) 등이 그렇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통교회의 음악/춤을 비판하는 퀘이커들의 이상한 춤.  

그런데 말이다..그렇다고 해서 퀘이커교는 문제가 없는가! 시인 휘티어의 보편주의 구원론과 '정적주의'는 문제가 없는가? 이 점에서 그가 일방적으로 퀘이커교를 제외한 모든 기성 교회를 싸잡아 '소마'로 빗댄 것은 하나님 앞(Coram Deo)과 그분 말씀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순수해야 할 명시인으로서도 불온하다. 그의 모순점은 글의 진행에 따라 더 밝혀진다.  

소마에 대하여

[이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어 자료를 상당량 지그재그로 인용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굉장한 신세계'에도 나오는 소마는 본래 베다 힌두교나 조로아스터(배화)교 사제들의 의식 때 사용하는 "성스런" 음료다. 과거 인도-이란계에서 사용했고 나중 인도 페르시아 등에서 쓰였다.
힌두교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를 수록한 '리그 베다'엔 소마의 에너지와 질을 감탄하는 노래들이 많이 들어 있다. '리그 베다'의 제9번 만달라(=한자 '만다라')는 '소마 만달라'. '소마 파바마나'(순화된 소마)를 칭송하는 노래다. 또 조로아스터 경전 '아베스타'의 일부인 '야쉬트'도 통째로 하오마(소마를 가리키는 아베스타 용어)에 할애했다.

이 음료는 깊은 산에서 자란다는 '소마'라는 "노란" 식물의 "긴 줄기"를 돌로 찧어 즙을 짜 만들어진다는데, 과연 어떤 모습인지 실제 존재하는지 조차 밝혀진 적 없는 정체미상의 식물이다. 대마초(헤쉬쉬)/양귀비/환각버섯/하말(harmal 일명 '아프리카 루타')/석류/푸른연꽃/마황(에페드린)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돼 왔다. 소마 음용자들은 이것을 우유 등과 섞어 마셨다고 한다.

베다교나 배화교에서는 소마란 이름의 신/식물/음료가 종교적, 신비적 합일 즉 일종의 '3위1체'를 이루며 개인에게 '신성'을 부여해 준다고 믿었다. 힌두교 예술에서 소마 신은 황소나 새, 태아 등으로 표현된다. 또 달신(찬드라)으로 진화돼 지하세계와도 연계됐다. 최근 첨단 우주 전파 망원경이 '찬드라'로 명명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힌두교에 따르면, 달은 신들이 소마를 마시는 그릇이란다. 그러나 힌두쿠쉬에서 자라 푼잡으로 수입돼 들여오곤 했다는 이 식물의 정체를 현재는 힌두교도들조차 알 수가 없어 신들에게 용서를 빌면서 대체식물인 대황(rhubab)을 쓰고 있단다. 아마도 그래서 힌두교인들이 루밥을 애용하는 모양. 
소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음료 암브로시아나 넥타르 같은 성격을 띤다. 힌두교 신화에 따르면 주신 '인드라'(전쟁의 신, 신들의 왕, 하늘의 주신)와 불의 신 '아그니'는 소마를 다량 마시는 체질이다.

휘티어의 역지사지적 모순

휘티어의 원시 맨 첫 부분은 '리그 베다' 중, 현인 바쉬쉬타가 썼다는 다음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이 제주(祭酒)는 인드라 신에게 바치기 전 우유와 섞는다 
     소마를 소마 음용자들에게 제공하려고

그리고는 베다 사제들이 소마를 통해 '신성'을 체험하려 한다면서 이것을 온 인구가 마시고 취한다고 썼다. 퀘이커교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인구라는 암시이며 여타 기독교 교파/교단/교회의 정황에 비유하고 그런 것은 모두 도취경/중독에 불과하다는 주장. 그러면서 세미한 음성을 듣는 퀘이커 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신과의 진짜 접속 방법이라고 우겨댄다.

그런데 휘티어 자신,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여 모든 인류들에게 폭넓은 '구원'의 길을 오픈해 놓고는 한 편으로는 모든 교회 의식을 '소마의 양조'로 빗대어 단죄, 오로지 퀘이커교에만 참 진리가 있는 양 주장한다는 것은 넓고도 좁은 자기모순이다.

흡사, 카톨맄 교회가 온갖 종교에 대해 손을 벌리는 바깥 제스처를 하면서 안으로는 오직 자기네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어거지 주장과 별 다름 없다. 더욱 큰 모순은 그런 모순된 카톨맄을 정상적 교회로 받아 들이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의 어젠다가 엄연히 있다는 현실, 휘티어의 찬송가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신교 교파/교단/교회가 있다는 사실.

'친애하는 주님, 인류의 아버지' 분석/비평

휘티어의 문제작인 '친애하는 주님, 인류의 아버지'(Dear Lord, Father of Mankind 일명 '만민의 성부 되신 주'(개편 426, 새 348, 합동 476)를 한글로 직역하면서 비평해 본다.  

     친애하는 주님, 인류의 아버지
     우리의 미련한 방식을 용서하소서!
     우리의 올곧은 마음으로 덧입히셔서
     보다 순결한 삶 속에 주님을 섬기게
     보다 깊은 경외 속에 찬양하게.

위 첫 절(원시의 제12연)의 '인류의 아버지'는 퀘이커적 보편구원론을 반영하고 있다. 야웨 하나님이 인류의 창조주라는 점에서는 '아버지'로 비유될 수 있다고 해도 예수 크리스토를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근본교리'를 믿지 않는다.
이 찬송가 사용자들은 이 점을 사전 감안하여 무턱대고 생각 없이 부르는 무지를 당연히 지양해야 옳다. 이런 비성경적 출발은 성령의 영감인가, 싸탄의 영감인가? 그 중간은 없다.

그 다음..'우리의 미련한 방식을 용서하소서!'는 지금 퀘이커인 시인이 퀘이커적 '정적주의', '침묵주의'를 따르지 않는 "미련한" 전통 교회 대신 중재/회개해주는 뉘앙스다. 

'우리의 올곧은(rightful) 마음'으로 덧입혀? 지금 시인은 크리스토의 의의 옷을 입으라는 성경교훈을 뒤틀어 왜곡하고 있다. 마치 인류 자신에게 본래 올곧은 마음이 있는 양. 그것을 회복하기만 하면 되는 양.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시지 않는다. 크리스토의 의가 아니면 모두 거짓 의, 불의일 뿐이다. 죄인 자신에겐 올곧음이 없다.

"보다 순결한 삶 속에 주님을 섬기게 / 보다 깊은 경외 속에 찬양하게"는 기성 교회에는 "없는" 퀘이커교 전통을 암시한다. 부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시인 자신은 그런 뜻으로 읊었다는 얘기.

둘째 절(원시 제13연)은..

     쉬리아 바닷가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들은
     그들 같은 단순한 신뢰 속에서
     우리도 그들처럼 말 없이
     일어나 님을 따르게 하소서

여기서 쉬리아 바다(the Syrian sea)는 대체로 동 지중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쉬리아는 고대의 아람 제국이었다. 지중해 해변 가까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라면 대언자 엘리야나 요나, 사도 페트로, 파울 등이 있을 터이다.
'말 없이'라는 말은 침묵주의/정적주의를 뜻한다. 퀘이커들은 침묵 아니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고 굳게 믿는다. 관상 영성에 하늬바람 내지 하니(honey)바람을 불어 넣어 온  생각은 비성경적 발상이다.

하나님은 한나처럼 조용한 기도(슈무엘A=삼상 1:10~15 참조) 뿐 아니라 시편 기자들처럼 울부짖는 기도(시 86:3. 시편엔 크게 "부르짖는" 기도 사례가 수없이 많다!)에도 응답하신다. 심지어 우리 주님도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히 5:7)!
바로 이 점에서, 정작 '미련한' 부류는 기성교회가 아니라 퀘이커들과 관상가들 자신인 것이다!

     오 갈릴리 곁 안식!
     오 웃 언덕들의 평온이여
     예수님이 님 앞에 꿇어
     사랑으로 풀이되는
     영원의 침묵을 나누던 곳!

위 3절(원시 제14연) 역시 정적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위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통곡과 울부짖음으로 아버지께 간구하셨다(히 5:7).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중 일부 아버지께 올리는 탄원도 단말마적으로 크게 부르짖으셨다(마 27:46, 50 뤀 23:46). 그게 어떻게 '정적'이며 '침묵'인가?

만약 휘티어/포스터/팍스 같은 퀘이커들의 정적/침묵이 100% 옳은 것이라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올린 기도도 침묵과 속삭임으로 일관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주님이 겥세마네와 십자가에서 언제 조용히 아버지께 속삭이며 기도했는가? 소위 '주님의 기도'도 제자들에게 속삭이며 침묵으로 가르치셨던가? 진짜 주님의 기도(요복 17장)를 하실 때도 제자들에게 정적과 침묵 속에 배우라고 하셨던가?

어리석은 퀘이커들이여! 알고 보면 그대들이야 말로 '정적의 소마'에 취한 게 아닌가? 퀘이커, 포스터를 비롯한 관상가들이여, 휘티어의 저 시는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 거짓임을 깨닫는가?!
이 찬송가를 애창하는 서구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일부 교계 사람들이여, 시인의 저 거짓 시를 믿고 그것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가? 하나님과 성자님 예수 크리스토를 기만하고 모독할 셈인지?

     주님 부드러운 목청의 속삭임을 잊게 만드는
     우리의 말들과 일들을
     모두 잠재우는 깊은 침묵과 함께
     고요한 님의 복을 내리되
     님의 만나가 내렸듯 내리소서

위의 4절(원시 15연)에서도 부드럽고 조용한 목청, 속삭임, 잠재우는, 깊은 침묵, 고요한 등 정적주의의 모든 코드와 키워드가 시끄러울 정도로 고루 나타나 있다! 결국 시인은 퀘이커적 정적/침묵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님의 잔잔한 정적의 이슬을 내리소서
     우리의 모든 다툼이 멎기까지
     우리 영혼들로부터 긴장과 압박을 거두시고
     우리의 정돈된 삶 속으로 하여금
     님의 평화의 아름다움을 고백하게 하소서

위 부분(원시 16연)에서도 휘티어는 시종일관 정적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이슬까지도 침묵으로 풀이하며..퀘이커 '형제회' 이외의 모든 교회를 '다툼'과 긴장, 압박으로 묘사하는 반면 자기네 형제회를 정돈된 삶과 평화의 아름다움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주님의 부르짖음과 통곡의 기도는 다툼/긴장/압박이란 뜻인가?!

     우리 갈망의 심령들 한 가운데로
     주님의 차분함과 주님의 향기를 불어 넣으시고
     감각을 둔하게, 육정을 물리게 하소서
     지진, 바람, 불 가운데를 지나
     말씀하소서-오 잔잔하고 세미한 음성을!

셋째 줄은 퀘이커 특유의 금욕주의를 드러낸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둔하게" 하시는가? 세 원숭이들처럼 눈도 막고 귀도 막고 입도 막아야 하는가? 
이 끝 절 뒷 부분(제17 최종 연)은 퀘이커의 정적주의/침묵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엘리야의 경우를 빌린 것이다(왕들A=왕상 19:11,12). 이 성구를 남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늘 침묵 가운데서만 음성을 들려 주시고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크고 시끄러운 소리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고들 있는 것.

그렇다면..성령시대/교회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가 갓 시작된 오순절 당일, 성령님은 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가득 임하신 것이며, 사도들을 포함한 120 성도들은 왜 3000 명이나 되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하나님을 찬양했는가(행전 2:4~6)?

왜 그들은 "소리 높여" 함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은 "진동"으로 응답하셨는가(행 3:24~31)?
퀘이커/관상영성가/수도원영성가들 주장대로 조용한 침묵기도가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는 논리가 여기서 타당화 되는가?!

왜 스테판은 순교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간구했는가(행 7:60)? 왜 코르넬리우스 일가는 조용히 성령을 받고 말 것이지 성령을 받자마자 요란하게 방언으로 기도/찬양했는가(행 10:45,46)?

페트로가 수감됐을 때 온 교회가 간구했는데 그 간구가 조용한 '침묵기도' 였겠는가(행 12:5)?

사도 파울과 실라가 필리포 감옥에 갇혔을 때 왜 조용히 침묵기도를 안 하고 모든 죄수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했고 하나님은 큰 지진을 일으키셨는가(행 16:24~26)?!
왜 파울은 왜 감옥에서 조용조용하지 못하고 교도관에게 크게 소리 질렀는가(28절)?

파울이 에페소교회 교우들에게 주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했을 때 그들이  조용히 침묵기도나 할 것이지 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는가(행 19:6)?
파울이 말타 섬에서 에페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교훈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나서 왜 그들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는가(행 20:37)?

이렇게 볼 때, 퀘이커 교도들은 또 다른 일변도적 획일주의자들이다.
아울러 기존교회를 비웃고 풍자/조롱하며 쓴, 일방적 정적주의/침묵주의로 가득한 휘티어의 이런 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기존 교회도 한심한 것이다. 

또 다른 문제 찬송시

한편 또 다른 휘티어의 찬송시(구 찬송가 407장)를 직역하면 이렇다.

     불멸의 사랑, 영원히 가득하고, 영원히 자유롭게 흘러
     영원히 나누고 영원히 온전하니 결코 썰물 없는 바다!

     따스하고 달고 정답고 더욱이 현존하는 도움은 그 분
     믿음은 아직 그 감람원을, 사랑은 그 갈릴리를 간직하네

     주님의 이음매 없는 옷의 치유, 우리 고통의 침상 곁에 있네
     삶의 혼잡과 눌림 속의 우리, 그 분 만져 다시 온전해지네

     오 주님, 우리 모두의 주인님, 우리 이름이나 표지야 어떻든
     주님 주권 모시고 주님 부르심 듣고 주님 삶으로 우리 삶을 살핍니다

퍽 문학적이긴 하나, 사랑을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나눠 줄 수 있다는 보편론적 관념이 짙다. 특히 4절은 인류 모두가 이름과 조건을 막론하고 주님을 모시고 부르심을 받는다는 무조건적 복지/혜택을 주장하고 있다.
 
휘티어는 날 때부터 죽기까지 평생 열렬한 퀘이커 교도인 탓에 그의 모든 종교작품엔 이같은 침묵/정적 절대만능주의가 속속들이 배여있다.
퀘이커교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 유니버설 유니테리언교, 문제집단인 유니티와 별 다름 없다.

휘티어의 간추린 생애

한 편의 시 작품은 대체로 시인이 살아 온 삶의 배경을 반영한다.
많은 독자들이 휘티어의 작품에서 그의 시제 "흰눈에 갇힌" 같은 외로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휘티어가 어릴 적 뉴잉글랜드인 매서추세츠주 헤이버힐 에임즈버리의 '좁스힐' 아래 메리맼 골짜기 곁, 한적한 시골 퀘이커 농장에서. 지적 환경과는 두절되다시피 한 고독과 가난 속에서 자란 탓이다. 집에도 학교에도 참고할 책이 적었다.

휘티어네는 퀘이커 교당인 에임즈버리 '형제회' 모임에도 열심히 다녔다. 뉴잉글랜드는 청교도들처럼 건국 초기부터 퀘이커들의 중심지였다. 그는 퀘이커 교도들 특유의 신중성과 고통스러울 정도의 수줍음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초등학교 교장이 빌려준 라벝 번즈의 시집으로 어릴 적 시심을 길렀다.

20대초의 그는 몸이 여리고 가늘어 농장 일은 여러 모로 힘들었다. 그래서 저널리즘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21세 되는 해 연말에 보스턴 '어메리컨 매뉴팩처러' 편집인이 됐고 헤이버힐 신문 편집인도 겸했다.
커네티컽 하트포드에서 뉴잉글랜드 위그당(당대 정당) 최강언론인 뉴잉글랜드위클리 리뷰(NEWR)도 맡아 썼다.
불과 3년만에 '시인'소리를 들을 만큼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1833년 노예제 폐지운동에 참여하면서 정계에도 간접 입뭄ㄴ한다. 

그는 색맹이었고 청각은 노래를 간신히 들을 정도로 약했다. 그래선지 안 그래도 감관을 죄악시하는 퀘이커인 그의 시에는 체감에 의한 느낌이 거의 없다. 그는 그리스 고전에 문외한인 데다 예술로서의 문학에도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내적 빛'에 이끌려 종교나 어떤 구현으로서의 문학 등은 그에게 신모독적이었다.

루시 후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긴 시는..종교와 인간의 성스런 관심사에 헌신하지 않는 이상 삶의 범죄적 낭비"라고 그는 단언했다. 시인들이 흔히 거드는 파르테논/판테온 신전 등은 필라델피아 노예제 폐지운동본부였던 펜실베이니어홀보다도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 상대방을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대상으로 여겼다. 20대 중반에 그가 살던 에섹스 카운티는 기민한 정치인사들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누구도 휘티어의 설득력을 당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벌크의 말을 인용, "나쁜 사람들이 한데 묶일 때 좋은 사람들은 협조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래서 자유당 결성 전까지 위그당원이었던 휘티어는 일을 성사시키 위해 비본질적인 것은 쉽게 타협하곤 해, 여러 명사들을 정계로 진출시키는 혁혁한 기여를 했다. 아권의 반대들에겐 "단순 감정에 탐닉하기엔 시간이 없어 보인다"며 "북쪽은 남쪽이 노예제를 위해 똘똘 뭉친 것 만큼 자유를 위해 뭉치지 못했습니다..잊어버리고, 용서하고, 뭉쳐야 합니다"고 강변, 상대를 눌렀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마치 한 편의 평론, 한 수의 서정시를 쓰듯 로비와 트레이딩을 해 나갔다. 한창 명성을 뿌리던 전성기에도 식료품 가게 크래커통 위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정치를 논하기도 했다.

휘티어는 26세 때 (1833년) 삶의 위기를 겪는다. 권력을 사랑하면서도 시와 산문을 계속 쓰고 있었지만 마땅한 저술가 직종은 없었다. 사랑에 대해서도 거듭된 실망을 해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옛 농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길 잃은 나그네처럼 모든 시간이 중지되는 듯 했다. 그러던 1833년 친구 개리슨으로부터 편지가 날아 들었다. 200여만 장병들이 끔찍한 희생을 치르고 있고 그들의 자녀 10여만명이 매년 출생 때부터 납치되고 있다는 것. 남부는 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가브리엘..만군의 하나님이 선두에 서셨다.
그러니 휘티어여, 자원하라! 그대의 재능과 열성, 영향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내용. 

휘티어는 여기 순응하여 나섰고 아울러 시인으로서의 영감과 명성을 함께 누리기 시작했다. 정적주의(quietism)에 길들여졌고 법을 존중하면서도 대중여론의 맥박을 느끼는 감각이 빠른 그는 '정의와 편의'라는 팸플릿을 자비 출판하여 노예들의 즉각 해방을 호소했다.

1833년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미국노예반대협회(AASS)의 매서추세츠 대표단으로 참가, 반노예선언(ASD)에 서명했다. 최연소 회원이었다. 그러나 친구 개리슨은 휘티어의 타협주의와 양보 정신에 지쳐 한동안 관계 단절을 했다가 훗날 다시 손잡는다.

1838년 휘티어는 펜주 AASS 본부 사무실을 불태운 성난 군중들 사이로 가발을 쓰고 길고 흰 코트를 걸친 채 유유히 빠져 나가기도 했다. 옷 속에는 원고뭉치를 감추고. 그가 발행하는 소책자와 세 군데 언론에 쓴 글은 언제나 원시안적이었다.

그러나 허약한 몸과 가족 부양 탓에 1836년 생가를 팔고 에임즈버리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그의 시세계는 낭만주의로부터 급전환해 현실 반영으로 기울었다. 흑인 해방을 비롯한 모든 인류사회의 자유를 위해 온 맘을 쏟았다. "산 영웅들에겐 헌사를, 죽은 영웅들에겐 추모시를, 교회엔 찬송가를, 타운홀에는 캠페인노래를" 써서 보냈다. '로어노크의 랜돌프'는 반대자에게 보내는 기사도 적인 시구였다.

그의 시 다수가 찬송가가 됐다. 그의 작품은 스타일에서는 빅토리아 시대형이지만 감수성과 상상력에 넘쳤고, 종교적으로는 19세기의 찬송가 경향과 달리 보편구원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