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물음과 답(Q.A)

야콥의 씨름은 기도?


물음: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그가 밤새 기도를 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그렇게 해석하는 주석가들, 설교가들이 퍽 많지요. 그러나 여러 모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 부분은 상징적, 풍유적으로 풀 것이 아니라, 기자 모쉐가 쓴 문자 그대로 풀어야 옳습니다. 이유를 몇 가지로 말씀드리죠. 

[ 필자인 김삼의 본 글을 인용할 때는 티스토리 규정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필자와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방송사까지도) 규정을 어기고 필자의 이름과 출처를 모두 빼 버리는(!) 사례를 보곤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야콥은 동일한 문제로 이미 기도를 한 뒤였습니다. 

창세기 32'7~12을 보면, 그는 형인 에사후(에서)가 무려 4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우인 야콥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나 겁나고 황급한 나머지 당장 이미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야콥답지 않습니까? 그는 이 기도에서, 하나님이 선조 때인 이전부터 자신을 약속의 후예로 축복하셨다는 언약을 상기시켜 드리기까지 하며 간곡히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간구를 하고 난 야콥이 이번엔 야뽀크(얍복, Jabbok) 강변에서 같은 문제로 또 다시, 이번엔 밤새 씨름하듯 강렬한 철야기도를 동 트기까지 고스란히 재탕해야 했을까요?! 그렇다면 앞의 기도는 별 의미가 없거나 헛된 기도였을까요? 아니면 씨름을 하듯 보다 더 결사적인 기도를 한 번 해야 하는, 그래야만 풀리는, 뻔한 반복의 필요성이 내다보이는, 힘 없는 기도였을까요? 그만큼 앞의 기도가 결사성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요(^^).

만약 나중에 한 야뽀크 나루터에서의 기도만 진정한 기도였다면, 이전의 기도가 헛되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와 심도 내지 강도(intensity)에 따라 응답을 하시고 안 하시고를 달리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앞 기도를 뒷 기도에서 되풀이하고 강화했다면, 이 역시 심화되고 반복적인 기도가 축복을 자아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터입니다.  


둘째로, 야콥이 고심한 문제가 정말 다시금, 이번엔 날이 꼬박 새도록 "장구히" 기도할 만한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제목이었을까요?  

야콥이 극심히 고민하던 문제란, 알고 보면 복잡하지가 않고 지극히 간단한 겁니다. 형인 에사후와 그의 부하들로부터 야콥 자신과 가족 및 가산을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간단한 제목으로 기도하는데, 밤새'씩'이나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미 뻔한 제목으로 기도를 하고 난 야콥에게 같은 제목으로 다시 철야기도를 은근히 요구하시곤(?), 진도를 봐서 응답하실 분이셨나요?! 

만약 응답받기 위해 그렇게 오래 기도해야 했다면, "형님과 그 군대로부터 저와 가족과 재산을 지켜 주시고 도와주소서"..."오, 제발 지켜 주소서"..."비오니 도와 주소서" 식으로, 똑 같은 제목을 갖고 자꾸만 거듭 되뇌며 하는, 단순반복식 또는 '중언부언'형 기도가 되기 십상이 아닐지요? 

물론 주님께서도 반복성 기도를 하신 적은 있습니다. 바로 겥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지요. 그러나 핵심적인 단일 제목을 가지고 3회까지 반복하셨고, 결코 헛된 반복이 아니었으며, 그 응답은 스스로 얻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껏 하시지 않았지만, 너무나 간절하셨기에 땀방울이 피 흐르듯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콥은 주님보다 더 부족한 인간이었기에 더 오래 오래 기도한 것인지요? 

주님이 밤새 기도하신 케이스도 있습니다(루카복음서=눅 6'12). 시편 기자도 그런 고백을 했지요(시 77'2). 그러나 과연 야콥처럼 단일제목으로 그토록 오래 단순반복식 기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 제목으로 그처럼 기도하시지 않았을까요?


셋째로, 왜 하필 멀쩡히 바로 눈 앞에 대상을 두고 구태여 '기도'란 것을 하느냐는 물음이 생깁니다. 

대상이 야뽀크 강변, 바로 앞에 나타나 계시니, 직접 대화로 풀면 되는데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눈 감고 기도한 게 아니라, 직접 여쭙고 구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야콥 앞에서 야콥이 대면한 이 '사람'(일명 천사설)은 바로 앞의 직접적인 대상이지, 적어도 여기선 먼 데 모셔놓고 기도해야만 하는 막연한 상징적 대상, 곧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바로 앞에 대상을 두고 하늘 보좌에 계신 먼데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도 뭔가 어색하지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감히 기도의 대상이신 보좌 위의 하나님과 맞씨름 하는 형식으로 비유돼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궁정에 들어가 다짜고짜 그 분과 백병전을 하듯, 한 판 붙는다는 것인지요..? 기도는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생에 불과한 사람이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로 간구하는 모습이 올바릅니다. 

그렇다면 야콥과 겨루신 것은 대체 뭐냐고 독자들이 물을 터입니다. 창세기 기자 모쉐는, 야콥에게 씨름을 거신 이 존재는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가 누굴까요? 

그 '사람'은 야콥과 겨루었지만, 자신이 야콥을 이기지를 못했습니다! 이를 기도로 풀이하는 경우, 그 기도가 씨름판이 되어 기나긴 시간 동안 야콥이 매달려 하는 그 강력한 기도 소리에 하나님도 절절 매며 견디지 못해, 마침내 "얘야, 네 기도에 내가 졌다!" 하고 황급히 항복 선언을 하고 마신, 그런 상황으로 이해할 법 합니다. 

마치 루카복음에서 어느 고을의 악한 관리가 한 과부의 끈질긴 청에 못 견뎌 마침내 청을 들어 주고 만다는 비유처럼 말이죠. 

과연 지금 야콥이 그런 상황이었을까요?

그런데 야뽀크 강 곁에 선 그 '사람'을 바로 앞에 멀건히(?) 놓고 밤새도록 씨름하는 자세로 (서서? 밤새 꿇어 앉아서?) 그런 길고 긴 기도를 한다는 상황이 자못 어색합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야뽀크 강이란 환경도 하나님의 보좌 앞 생명강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 야콥의 행동과 그 대상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상징이라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런 것일까요? --끝 없는 풍유적 상상이 펼쳐지겠지요.


다음으로는, 야콥이 하나님께 '씨름 기도'를 하다 하다 막판에 허벅지 관절이 탈골된 상황은 또 뭘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죠.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심심풀이 맛뵈기(?)로 가끔 탈골까지 시키시는 분이신지요? 그 씨름이 기도라면, 그래서 하나님이 지셔서 항복선언(?)을 하실 상황이라면, 그냥 그 기도에 응답하시면 될 것을 왜 야콥의 애꿎은 '환도뼈'를 건드리셨냐는 말입니다. 그렇게도 야콥의 윽박지르는(?) 기도에 하나님이 다급하셨을까요? 기도한 뒤에 오히려 응답에 감사하며 힘차게 걸어가야 할 야콥이 웬 환도뼈를 몹씨 다쳐서 절룩거리며 가야 했느냐는 것이죠. 

도무지 영~ 앞뒤가 맞아 들지 않는 상황이죠.


씨름은 씨름이다..구구한 상상식 풀이가 필요 없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상징이다, 기도다, 뭐다 뒤틀지 말고,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모쉐가 기록한 그대로, 야콥이 그 분과 씨름을 했다고 보면 모든 게 잘 맞아듭니다. 

자, 봅시다. 

야콥은 어느 쪽이 먼저 씨름을 청했든, 정체 모를, 아니 정체가 좀 막연한 이 분과 씨름하게 됐습니다. 아니, 깊디 깊은 한 밤중에 웬 씨름입니까--그것도 동틀 때까지(!) 말입니다--마는, 어쩌다 야콥은 이 분을 이기게 됐습니다. 씨름 기술이 더 좋았건, 야콥의 힘이 더 세었건, 더 끈질겼건, 아무튼 상황은 점점 이기게 돼 갔다는 것이죠. 그 분은 야콥이 가상(嘉尙)해서 그냥 거짓으로 짐짓 져 주시는 것이었을까요? 그럼 좀 미리 져 주시지, 밤새껏 야콥과 힘 겨루기를 꼭 하셔야 했을까요?

그런데 상대방을 하나의 순수 인간으로 생각할 때는, 이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지요. 야콥은 당대의 장수였거든요! 우리는, 형 에사후와는 달리 야콥의 피부가 털이 없고 매끈매끈하고 늘 엄마랑 가까이 지냈다고 해서, 언뜻 '약골'이었다고 자칫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천만엡니다! 야콥은 하란에 계신 외삼촌 라반의 집 부근 들판에 도착했을 당시, 양떼에게 물 먹이러 나온 이종사촌 누이인 라헬을 보고 홀딱 반한 나머지, 그녀의 양떼에게 우선 물을 먹이려고, 우물 위를 덮은 큰 바위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굴려 치워버렸습니다! 이 바위는 웬만한 청년 여럿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치울 수 있는 크기였다네요. 

그 정도로 야콥은 힘이 세고 건장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죠. 그런 야콥을 그 분께서 씨름으로 이기기가 버거웠다고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아니, 뭐라고?! 상대방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전능한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과연 이 분이 누구이셨을까요? 인간을 마주 대하려고 형상을 입으신 성자(聖子) 하나님이셨습니다. 곧 훗날의 예수님이셨지요. 미래의 메시아로 오실 이 분이, 순수 인간으로 맞씨름했을 때, 웬지 힘으로는 장수였던 야콥을 못 당하신 것입니다. 아니면 야콥의 인간적인 씨름 기술이 더 뛰어났든가 말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친구가..? 그냥 두면, 내가 못 당하겠는 걸" 하신 그 분은 그 대신에 큰 권능의 손 힘으로 야콥의 다리 관절을 슬쩍 건드리신 겁니다. 허걱~! 그냥 손질 한 방에 다리 관절을..?! 대단한 파워였지요. 탁월한 격투 선수의 솜씨가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 성경은 분명히 씨름 도중 다리 관절을 건드리셨다고 명시했습니다. 기도 도중 그럴 리는 없거든요! 만약 기도 도중에 난 데 없이 멀쩡한 기도자의 관절을 탈골시켜 버리셨다면, 도대체 그 관절은 뭐며, 관절을 건드리신 건 또 머냐, 뭘 상징하냐는 물음이 또 나옵니다. 이처럼 일단 상징적, 풍유적 해석을 시작하고 나면, "그럼 이건 뭐냐? 저건 또 뭐고?.."라는 식으로, 거의 끝도 없는 물음이 따라 붙어 거기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 

아무튼, 여태껏 맹렬히 대결하던 야콥의 고관절이 난데 없이 뚝 소리가 난(아니면 아예 소리도 없이 '절단난') 순간, "억~" 소리와 함께 통증에 못 견뎌 한꺼번에 폭삭 무너지듯 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꿇은 그는, 거의 절망감 속에 매달립니다. 

"자, 이젠 나를 놓아 주게나." 

"안됩니다! 저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제 다리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곤 어딜..?)"

아까부터 밤새 정신 없이 씨름하면서 야콥은 그 분의 축복을 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선조들이 뵀던 (하나님의 형상이신) 바로 그 분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죠. 야콥은 자신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로 두려워 하면서도, "지금 이 분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다 '꽝'이야!" 하는 정도의 생각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축복을 갈탐(渴探)하던 야콥이 그 분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말았지만, 다리 관절을 다쳤기에 이제 절룩거리며 걸어갑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왜 이런 부상까지 받아야 했는지요?

그리고 기도를 하고 났는데 몸과 맘에 새 힘이 솟구쳐야지, 왜 큰 부상을 입고 절뚝거려야 하나요? 그의 씨름이 기도로 상징된다면, 이 부상은 기도에선 뭘 상징하는 걸까요? 어불성설입니다. 굉장히 억지스럽지요.

그리고..그렇다면, 가장 모범적인 기도의 표준은 이렇게 야콥처럼 동 트기까지 밤을 새워서 하는 것일까요? 그럼, 사람이 꼭 자야 하는 잠은 언제 자는 것입니까(예수님께서도 대낮에 뱃고물에서 팔베개 하고 주무시지 않았나요? 평소 직장인들은 그런 '뱃고물'이 있을 리 만무하고..어떡해야 하나..)? 아, 야콥처럼 특별하고 결정적인 경우에만 적합한 모범기도라고요..(ㅋㅋㅋ), 그럼, 야콥처럼 동틀 때까지 하는 기도는 위기 때 모범 기도이겠네요? 에사후의 군대 같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모범 '위기극복기도'? 

그리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듯 '힘 겨루기'를 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이겨내는 기도인가요? 그래서..하나님을 "극복하는" 기도인가요? (ㅋㅋㅋ)

하나님이 "야, 니가 이겼다. 내가 졌다. 니 기도가 쎄긴 쎄구나" 하기까지 하는 기도가 가장 위대한 기도라는 뜻 같아요(^^). Maybe..maybe not.


선지자 호쉐아의 언급

야콥의 이 <씨름=기도설>은 주로 호쉐아서 12'4b에서 온 것입니다.

   "곧 그(야콥)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자, 울면서 그 분의 은총을 애원했다. 하나님은 벹엘에서 그를 만나시어,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호쉐아서 12'4. 필자 사역)

여기서 야콥이 울면서 그 분의 은총 곧 복을 간청했다는 것이 말하자면 그 씨름이 기도였다는 근거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야콥과 힘 겨루기를 한 것은 무엇이며, 울면서 애원한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이 생깁니다. 야콥이 울면서 복을 애원한 것은 분명히 천사와 힘 겨루기를 한 후(!)의 상황입니다. 시간의 전후차가 있는 따로따로의 사건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기도에 열중하던 나머지, 자연스럽게 통성(通聲) 아닌 통성(慟聲)기도로 연결됐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문맥상 바로 전 절인 12'3을 참고하게 됩니다. 

   "태 속에서는 그(야콥)가 형의 뒷발꿈치를 잡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홋 12'3 필자 역) 

지금 호쉐아는 분명히 야콥의 생애에서 힘을 쓴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엄마 뱃속에서 쌍둥이 형인 에사후를 따라잡느라 발꿈치를 꽉 쥔 사건, 다른 한 가지는 중장년기에 하나님과 씨름한 사건입니다. 이 구절은 야콥(="발꿈치를 잡다")이란 옛 이름과 이스라엘(="하나님을 이기다")이라는 새 이름의 내적 차이를 절묘하게 대조시킨 대목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호쉐아는 야콥이 힘을 쓴 두 사건을 시적 평행법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예언서(=선지서)의 문장들은 언제나 시로 읊어져 있죠.]  지금 호쉐아는 야콥이 실제로 형의 발꿈치를 잡은 물리적 사건과 하나님과 겨룬 정신적, 영적(?) 사건을 상호 대비한 것일까요? 그래서 어릴 때는 물리적 힘을 썼고, 커서는 기도하는 영력을 키웠다는 얘기일까요?

그런 대조법은 여기 해석에 어울리지를 않지요. 분명히 호쉐아는 야콥이 물리력을 사용한 두 가지 역사적 케이스를 나란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과연 기도인가, 씨름인가? 

학자들은 묘하게들 나름대로 해석의 오솔길을 따라가곤 합니다. 야콥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길 리가 없으니, 모쉐의 기록 그대로 (하나님을 대표하는) '천사'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천사가 기도의 대상일 수 없어, 씨름을 기도로 하되 상대를 하나님으로 굳힙니다.

기도설 주창자들은 으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왕자'라고 풀이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이기다' 하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니까요.

유명 주석가인 매튜 헨리나 반즈, 벤슨 등은 대표적인 씨름 기도설 주창자입니다. 아니, 대다수의 주석가들이 기도로 해석했습니다. 

이들의 주석을 보면, 위의 문제점들을 미묘하고 면밀하게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습니다(미안하지만, 저로서는 '가관'이라고 해야..ㅋㅋ). 특히 다리 관절 부상에 관해서요. 아주 영적이고, 상징적, 풍유적인 해석들을 했습니다. 그렇게 나가다간 결국 오리게네스나 해럴드 캠핑처럼 성경 전체를 상징 해석해야 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칼뱅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쉽게 직접 '기도'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통째로 하나의 환상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환상 속에서 야콥이 다리를 절었다는 뜻일까요? 그럼, 환상이 끝난 뒤엔 절지 않았다..?? 


야콥과 씨름한 대상은 천사? 천사장? 성자(聖子)님!

이에 대한 상세한 추론은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 즉각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천사에게 인간 축복권이 있냐는 것입니다. 특수 천사들을 제외한 수호천사들은 대체로 인간을 섬기라고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많은 존재이지만, 섬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은 인간과 다른 영적 생물입니다. 그들은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이상,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돼 있습니다. 

야콥과 씨름한 천사가 정말 천사라면, 그 누구보다 천사장이어야 적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늘 군대를 이끄는 미카엘? 아니면 심부름 천사장인 가브리엘? 아니면 누굴까요? 

야콥과 씨름한 '천사'는 바로 씨름한 야뽀크 강변 그 자리에서 그를 축복합니다. 이름을 묻고는, 옛 이름의 문제점을 내비치면서(?) 새 이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자)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祝福=위의 더 높은 힘을 빌어, 동료인간이나 아랫사람을 복을 빌어 줌)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 자신이 복의 시여자(施與者)이시며 복을 내려주시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누구에게 복을 "빌" 필요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축복이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께 맞지 않는 말입니다. 

동시에 천사장이든 천사 누구이든 그런 축복권이 없습니다! 

더구나 성부 하나님은 그 높은 하늘 보좌에서 몸소 야뽀크 강까지 내려오셔서, 손수 야콥과 씨름 한 판을 붙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죠. 그러나 그 분을 대리하는 성자 하나님이라면 이런 씨름과 축복이 가능합니다! 아드님이시므로 아버님의 복을 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콥과 강변에서 씨름 한 판을 벌이시곤, (먼 훗날 목수로 다시 오실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야콥을 이기지 못하자, 신적 권능으로 야콥의 다리를 건드려 관절을 탈골시키신 분은 성자 하나님, 곧 훗날 신약시대 직전에 찬란한 여명으로 나타나신 참 메시아와 의의 태양, 곧 예수 크리스토님이십니다!

성자님은 (실제 인간이 되신) 신약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수시로 나타나십니다. 물론 창세 때도 말씀(신약의 로고스)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셨고, 에덴 동산을 거닐며 아담, 하와와 대화하셨으며, 미쯔라임 출국(출애굽) 행렬을 앞장서 몸소 이끄신 분도 그 분이셨고..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풀무 불 속을 거니신 분도 그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만나셨다고 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신 것입니다(요한복음서 8'56~59). 

바로 이 분이 그날 야뽀크 강나루에서 야콥과 씨름을 하시고, 인력적 힘으로는 장사 야콥을 당하지 못하시자, 그의 다리 관절을 탈골시키셨고.. 그에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극복해야만 합니다. 

의문에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외려 더 많은 의문을 안겨/남겨 드렸나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