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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크리스천과 건강

신자와 흡연

  위 그림은 바흐와 비슷한 시대의 흡연가를 상상으로 그린 것이지, 바흐 자신은 아니다. 



신자와 흡연



김삼




나의 담배 파이프를 

쾌락과 기분전환 삼아

그득 채울 때마다  

서글픈 그림이 떠오르면서

이런 가르침이 더해지네

--나나 그나 비슷하다는


파이프가 진흙과 흙으로 만들어졌듯

나 역시 그렇게 지어졌다네

이 몸 또한 언젠가 흙이 되리

그것이 내 손에서 떨어져 

동강나고 부서지기도 하듯 

내 운명 또한 그렇지


파이프는 쉽게 착색되지 않아

지금 하얀 그대로 있어도 결론은

--나도 언젠가 죽어가며

창백하게 퇴색되리

무덤 속에서 몸은 또

파이프 속처럼 검게 변하리


파이프에 불 당길 때는

바로 지금 당신 모습과도 같다오

연기가 공중으로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이 재만 남듯

인간의 영광도 불타 없어지고

몸은 티끌로 돌아간다네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렇지 않은가?

평정을 잃기도 하고

손가락을 무심코 갖다대다

뜨끈 달궈진 파이프에 데기도 하며 생각한다네:

아 그 열기, 얼마나 대단한가

지옥은 또 당장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언제고 담배 피울 때면 으레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다

교훈적인 생각을 말이다

그래서 육지에서건 바다에서건 집에서건

아주 만족스럽게 

늘 경건한 맘으로 파이프를 문다


-J.S.B. (김삼 역)



평생 독실한 루터교인이었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어느 애연가의 교훈적 생각(Erbauliche Gedanken eines Tabackrauchers)'이라는 시를 한글로 옮겨 본 것이다. 이 시에 붙인 노래(작품번호 BWV 155a)도 있다(연주사례: >).  바흐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피아노곡집인 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 중의 한 곡이 반주곡으로 사용된 아리아다. 


시의 주인공은 바흐 자신인 것 같다. 위대한 오르가니스트였던 그는 파이프 오르간도 애용하고 파이프도 애용한 모양이다. 그런데 자신의 끽연벽(喫煙癖)에서 기발한 은유를 유추했지만, 끝 문장이 웃겨 준다. 미완작 같은 교훈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파이프를 물다니..? 애연가 본인 마음이겠지만, 담배와 경건은 나란히 설 자리가 없다! 지은이 자신이 뭐라고 하든. 



크리스천 애연가? 뭔가 옥시모론처럼 들린다. 물론 필자는 음주벽처럼 흡연벽도 단죄하진 않는다. 애연, 애주가들을 모두 단죄한다면, 어느 죄인인들 교회에 나오려 하겠는가? 교회는 그들을 단죄하여 물리칠 게 아니라 누구라도 받아들여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을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게 교회의 책임이다. 


그리고 거듭난 참 크리스천이라면, 응당 만취나 애연은 삼가는 게 도리일 터이다. 왜냐고? 우리의 몸은 성령님의 집이고 그릇이며, 따라서 그 몸에 아무 것이나 마구 "퍼 담을" 순 없는 노릇이다. 속에 계신 성령님을 연기로 질식시켜 드리거나, 술 도가니 속에 모실 일이라도 있는가?


하지만 상당수 크리스천들은 담배와 끝내 사이좋게 지내다 숨 넘어가기 전에야 놓고 가기도 한다. 반려습관이라고나 할까. 대표적인 예로, 위의 바흐 말고도 나치에 저항하다 숨져 간 본회퍼 목사나 신정통 신학자 칼 바르트, 변증가 C.S. 루이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열강을 펼친 보수신학자-좐 머레이 교수 등이 있다. 모두들 줄담배를 태운 골초였다. 


필자의 은사였던 H. C. 교수, 역시 그랬다. 한국에서 오래 선교 겸 교육을 하다 귀국해 모교인 웨스트민스터에서 선교학 교수로 지내다 세상을 떴지만, 한 평생 끽연했단다. 초기 선교사들도 다수가 그랬다고 한다. 한국 교인들에게 금주금연을 가르친 것까진 좋았으나 자신들은 끊지 못하고 집안이나 골방에서 몰래 '나홀로' 즐기곤 했다. 



근래 한국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바람은 미국에서 온 것이다. 미국이 먼저 그랬고, 한국은 으레 미국을 따라가는 면이 있다. 흥미롭게도 조선 기독교 초기에 금연 열풍을 몰고 온 것도 미국 선교사들이었으니, 확실히 역사는 반복되나 보다. 


미국은 1990년대만 해도 담배에 대해 그다지 강한 거부가 없었다. 심지어 1994년 7개 담배회사 대표가 연방의회에서 선서 아래 "담배엔 중독성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미국 공공장소에서 금연 분위기가 이뤄지자, 해외로 눈길을 돌려 중국인들에게 양담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이 수십 억 개피의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얇은 특수용지의 수급선이 가팔라져, 심지어 국제사회에서 성경 인쇄비가 오르기도 했단다! 2007년경 교계언론 어시스트 통신(ANS)은 당시 '절연'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이유로 건강에 대한 유해함과 성경제작비 앙등(昻登)을 꼽았다. 그즈음 연간 40만권 이상의 성경을 팔아온 독일성서공회의 펠릭스 브라이덴슈타인 총무는 중국인들의 애연벽으로 얇은 성경책 종이의 부족현상이 왔다며 애로를 호소했단다. 참 놀라운 일이다. 


미국 텍서스의 한 교도소에 앨릭스라는 죄수가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담배가 그리워지면, 기드온성서책자협회가 수감자들에게 제공한 성경 책장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워댔다. 성경책이 점점 얇아져 거의 동나게 되자, 앨릭스는 교도소 채플린(담당목사)에게 새 성경책 한 권을 부탁했다. 그 채플린은 성경책이 어디 사용되는지를 곧 바로 알아내어, 그에게 충고했다. "요한복음은 태우지 마시오!"라고.

이 말에 놀란 앨릭스는 그날부터 관심을 갖고 요한복음부터 읽기를 시작해 결국 요한 3서까지 읽게 되자, 심경이 변화됐다.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현재는 그도 교도소 채플린이 되어 3 군데 교도소를 뛰고 있다고. 


'반지의 제왕' 작가인 J.R.R. 톨킨과 절친이면서, 자신도 유사한 신화적 작품인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작가 C. S. 루이스는 성공회인이었는데도 복음주의자들과 세속인들에게 사랑받았지만, 끊임없이 흡연한 골초왕이기도 했다. 

그에겐 "한 동이의 맥주와 파이프를 곁에 놓아 두고 하나님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었단다. 그는 특히 '세 수녀(Three Nurses)'라는 연초를 즐겨 피워댔다*). '세 수녀'란 이름의 유래는 모호하고도 아니러닠하지만, (지금부터 120여년전 이래) 스코틀런드의 '벨'사에서 제조하던 당대 명품 담배의 하나였다.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톨킨도 물론 '세 수녀'를 즐긴 왕 골초였다. 

문제는 어린이들을 위한 둘의 작품 속에도 흡연 장면이 나온다는 것. 하기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도 흡연 장면은 나온다. 


윌리엄 '빌리' 선데이는 1880년대에 명 야구선수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 명 전도자가 됐다. 근본주의자였던 그는 파워풀한 설교자인 데다 기금모금의 명수였으며, 과거 그 누구보다 더 많은 개인에게 전도를 했다는 설이 있다. 1910~1920년대에 그는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목청을 높였고 특히 금주금연 운동에 열을 올렸다. 

빌리 그래엄은 같은 퍼스트네임 때문에도 더 선배 전도자인 선데이를 존중했지만, 근본주의 만큼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엄은 처음엔 근본주의 학교인 밥 조운즈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숨 막혀서(?) 곧 떠난다. 이후 그는 계속 신복음주의와 에큐메니즘의 길을 걸어갔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선데이는 명설교가로 유명했던 촬즈 스퍼전의 런던 교회를 방문하게 됐다. 설교 도중 그는 음주와 흡연의 '악'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고, 크리스천은 왜 그런 '짓'을 하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비록 빌리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애연가였던 스퍼전은 열이 복받치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는 빌리의 설교 뒤끝에 강단에 오르자마자 빌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귀하의 말씀 그대로이길 바랍니다만요, 저는 오늘 귀가하는 대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한 대 더 피울게요."라고 응수했다. 


복음주의권에서도 담배는 사랑받곤 했다. 명설교가 촬스 스퍼전은 담배가 설교를 위한 목청을 준비시켜 주는 것으로 믿었다. 흡연벽에 대하여 성도로부터 질문과 도전을 받곤 하면 그는 떳떳하게, 하등 부끄럼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운다"고 대답하곤 했다. 

과연 그의 생각이 옳았을까? 복음주의 명사 치곤 더 깊은 영적 의식이 모자랐던 것 같다.  

스퍼전은 이 방면에서 복음주의 그뤂의 '배신자'의 한 명이었지만, 신교 주류계까지 포함하면 막강한(?) 애연팀이 있었다. 


한 칼럼니스트는 신정통파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약 100권에 달하는 저서를 쓸 동안 '레이디 토배코(담배여사)'의 도움 없이 가능했겠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로 바르트의 파이프 애연은 유명했다. 

천주교도로 알려진 명문장 G.K. 체스터톤은 파이프와 시가(궐련)를 모두 즐겼는데, 그는 자기 책상에서 한 작품을 쓰면서, 곁으로는 비서에게 동시에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을 비서에게 카피해 써 줄 정도로 '글 도사'였단다.  

닠슨 행정부 관리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훗날 크리스천이 되어 감옥선교회(PM)를 창설하여 오래 대표를 역임한 (고) 첰(촬즈) 콜슨은 C.S. 루이스의 파이프를 기념으로 갖고 있었다. 콜슨 역시 세상에서 즐기던 흡연벽을 크리스천이 되고도 못 바꾼 것이다. 

흔히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 역시 끽연가였다. 


슈벑 옥덴.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크리스천이 흡연할 수 있나?"라고 물었는데, 물론 예스나 노 중 "예스"라고 답했을 것이다. 진 스캍. 오순절계 목사이자 텔리밴젤리스트였던 그는 교인의 교회당 입장료를 받기도 했단다. 그는 텔레비전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이 궐련과 와인을 즐긴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가 애호하는 성경 대목은 물론 카나의 혼인잔치였다. 

그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여친을 끼고 있다가 포르노 배우 출신인 여성과 결혼했다. 이 마지막 아내가 그의 뒤를 이어 현재도 사역을 하고 있다. 


첰 노리스. 20세기의 쿵푸 스타 브루스 리(리샤올룽=이소룡)와 절친이었고, 영화 '용쟁호투'(Way of the Dragon) 등 5개 영화에서 상대 악역이기도 했던 유명한 무술가, 배우이자 열혈 크리스천 보수주의자. 그는 애연가들의 잡지인 '시가 아피시오나도'(애연가)의 커버를 장식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시피 한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궐련을 꼬나든 그의 모습 곁에는 '좋은 사내들은 궐련을 피운다'는 문구가 곁들여졌다. 



순교자 본회퍼와 흡연


기독교 매거진인 크리스천 센추리(CC)가 '니코틴 저널'이라는 특집을 낸 적이 있다. 이하는 그 글의 도움을 좀 받았다. 


글은 독일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루터교 고백교회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편지와 글들 가운데 흡연 항목만 다뤘는데, 20 군데가 넘었다. 그만큼 옥중에서 담배연기 모금모금이 간절했던 것이리라. 

"어떤 담배든 공급해주는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그는 한 편지에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담배 공급과 온갖 종류의 시거렡을 친절하게 기부해 주심에 대해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쿠키와 복숭아, 그리고 궐련, 고맙습니다."라고 잊지 않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본회퍼는 담배에 대해 최상급 찬사를 올리곤 했다. "마리아와 어머니의 궐련은 굉장했어요." "안나의 궐련, 정말 고마워." "모든 게 너무나 고맙고, 특히 여행 때 사 보내준 궐련과 엽궐련 고마워요." 볼프 시가에 대해 "마법적인 향기"라 부르는가 하면, "나, 방금 커다란 엽궐련에 불 당겼고, 무한히 즐기고 있어. 정말 고마워!"라고 표현했다. 이 정도면 흡연중독(?)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의 절친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칼 바르트에게서 받은 엽궐련 하나를 건네자, 너무나 맛이 좋아 "진실로 그 불가능한 실재에 휘청거릴" 정도였단다. 


그밖에 애연 신학자로는 칼 바르트, 파울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제임스 거스탶슨, 리처드 존 뉴하우스 등이 있다. 


애연가는 보수주의권에도 물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위대한 보수신학자, J. 그레셤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도 시절, 친구들의 궐련 흡연을 흠모하면서, "나의 갈망의 개념"이라고 불렀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담배가 우정과 기독교적 인내에 얼마나 놀라운 도움인가를 생각하면, 나도 진작 흡연을 시작하지 않은 게 후회됩니다"라고 썼다. 뜻밖의 고백이다. 


아마도 애연가들은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고, 결국 그는 흡연가가 되었다. 성숙한 메이천은 어느날 뉴욕시에서 한 동안 불가사이하게 사라졌는데, 아마도 몰래 맨해튼 시가 바로 몰래 잠입했을 지도.


신학자 폴 램지가 감리교 매거진 '기독교 옹호자(CA)'의 커버에 실렸을 때, 그의 말이 아닌 커버 사진 때문에 교계에 '전쟁'이 일었다. 사진 속에서 램지는 한 손에 파이프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틴 신학저널'이라는 교계 매거진도 있는데 거기선 단지 흡연의 즐거움만 노래하는 게 아니라 흡연에 거부감을 갖는 진보주의 및 복음주의 세계를 "휘젓는" 재미도 있단다. 크리스천 애연가들의 눈에는 교계가 온통 부옇게 몽롱한 담배연기 속처럼 보이나 보다. 마치 프랑스 인상파 시대의 몽마르트와 세느강 곁의 카페처럼.


흔히 끽연가들은 담배가 인내에 좋다고 말한다. 화를 돋우려다가도 담배 한 대 태우다 보면, 느긋해진다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괜찮은 담배 한 개비 태우는 데 4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성도가 그토록 긴 시간만에 인내를 발휘할 수 있다면, 당장, 꼭 인내가 필요할 때, 시간이 낭비 또는 허송되는 것은 아닌지?  


둘째로, 애연가들은 담배가 모임 같은 데서 '기분'을 좋게 해 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연기는 해롭고도 담뱃내를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들 특히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쩔 것인가?


훌륭한 기독교 명사들이 애연가였던 사실을 갖고 합리화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만큼 영적 의식이 투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흡연처럼 이기적인 것도 드물다. 자신이 한 덩이 연초를 태우고 한 개비 피울 동안은 기본적으로 아무도 방해도 개재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연기가 유해하고 남의 기분을 망칠 수 있음도 외면한 채 말이다. 자신이 즐겁다고 해서 남도 다 즐거운 것은 아니다. 자신이 기분 좋은 담배 내음과 몽롱한 연기 속에 빠지고 나면 모든 게 좋아보여도 실상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담배연기에 취하는 시간이 하나의 함정과도 같다. 


그 다음은, 유해성 문제이다. 담배연기가 해롭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간접흡연까지 사회에서 단죄시되고 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스퍼전처럼 '믿음으로'(?) 피운다고 해서 남을 유해하게 하지 않을까? 담배 연기는 누구에게나 해로운 것이 과학적 사실이다. 하물며 크리스천에게겠는가? 


유해성은 가까운 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담배연기나 담뱃내가 상대방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 식구 안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피운다면, 가족에게 눈치가 보이고 그만큼 경원감이 생긴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그 중독성이다. 담배는 한 번 중독되고 나면 좀체 끊기 어렵다는 게 정론(定論)이다. 끊는 데 무려 수 년 내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평생 못 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또 유해한 담배를 끊게 하려는 다양한 금연절제 프로그램에 엄청 많은 노력과 돈도 든다. 별 생각 없이 호기심에서 또는 취미 삼아 시작한 게 평생 애물단지가 된다는 말이다. 


스퍼전처럼 자신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흡연해도 이젠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끝으로, 애연벽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점이다. 

스퍼전의 주장과는 달리, 흡연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길은 없다. 흡연 때 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인가... 담배연기로? 담배연기를 하늘 높이 올려 하나님께 그 매콤~한 향취를 바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 연기에 취하면 하나님도 취하게 해 드린다는 것인가? 성도의 담배연기가 기도의 향이라도 된다는 건지..


필자는 오래 전, 성도의 애연벽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 

[ 참고로, 필자는 평생 담배 한 대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다. 잘 났다는 게 아니라, 집안이 전통적인 기독교 집안이어서 더 그랬다. 지금도 흡연욕은 전혀 없다^^.] 


뉴욕서 다니던 미국인 교회에 필자가 반평생 존중해온 훌륭한 목회자가 계셨다. 그는 학식도 높은 데다 본디 스퍼전 같은 훌륭한 설교가를 지향하셨던 분이다. 생김새와 풍채도 스퍼전 비슷했지만, 이름도 스퍼전과 같은 퍼스트 네임(촬즈)과 미들 네임(해던)까지 갖고 계셨고, 라스트 네임 첫 글자(S)도 같았고, 그러니까 이니셜까지도 C.H.S.로 스퍼전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분은 스퍼전을 흠모할 만치 훌륭한 웅변가, 명연설가, 명설교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흡연을 하진 않았다. 흡연하는 성도들을 깨우쳐 담배를 끊게는 할지언정. 

그 교회에선 담배를 피우던 성도가 성령님께 "들킨"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주일 예배 때도 목사님은 강단에서 조용히 하는 말씀이 "성령께서 제게 알려 주시는데, 지금 이 가운데는 호주머니에 담배 한 갑씩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모두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하셨는데 정말 여러 명의 남자 교우들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날 안수기도 끝에 담배에서 해방됐다. 


'감옥에서 찬송으로'의 저자인 멀린 캐로더즈 목사의 일화를 끝으로 이 글을 맺는다. 

캐로더즈가 군목일 당시, 한 사병이 군목실로 찾아와 담배를 끊고 싶다고 했다. 캐로더즈는 조용하고 간단한 믿음의 기도와 함께 그를 안수하고 "이젠 됐네."하고 축복하며 내보냈다. 

사병은 속으로 비웃으며 '겨우 이런 게 그거냐' 싶었던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가서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러나 즉시 기침이 나와 도저히 연기를 들이킬 수가 없었다. 긴가민가 하고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로 그의 흡연벽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