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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문학

'어린 왕자'는 순수하다?




'어린 왕자'는 순수하다?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 Le Petit Prince)'를 읽어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다.

프랑스 귀족, 작가/시인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본명: 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comte de Saint Exupéry, 1900~1944)가 써서 1943년 미국에서 펴낸[각주:1] 그의 내적-자전적 고백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흔히들 쉽게 오해하듯 동화가 아니라, 정확하게 '노벨라'(novella: 짧은 중편 소설)라고 불린다. '시적 우화'로도 통칭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지은이가 손수 그린 "동화스러운" 삽화와는 달리, 어린이들에겐 좀체 맞지 않는 철학적 우화라고 보는 것이 더 걸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무차별로 읽히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순수해 뵈는 어린 왕자의 겉모습이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위험성이 '어린 왕자'에 내재돼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 글을 계속 읽어 보면 더 알게 되지만, 실제가 그렇다! 그러므로 단연코 부모와 교육자들의 분별이 요청된다. 특히 크리스천들 지도자들에게 각별한 분별을 부탁한다. 


'어린 왕자'는 프랑스어 도서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인 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가장 많이 번역돼 팔리는 책으로도 꼽힌다. 현재도 약 300개 언어로 연평균 200만권씩 팔리고 있고, 누적 판매량은 약 1억 4000만권이나 된단다. '20세기 최상의 프랑스 도서'로 투표/선정된 적도 있다. 국제적인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더욱이 오디오, 라디오 극,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발레, 오페라 등 다양한 미디어로도 널리 응용됐다. 

 

'어린 왕자'의 초판 표지


무구(無垢)하고 기품 어린 생애?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각주:2], 자신도 백작(comte)이었던 작가 생텍쥐페리의 주된 직업은 소설가보다는 비행사였다. 그는 공군 조종사를 거쳐 우편비행기를 몰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져 프랑스가 함락되고 나치의 제2인자, 헤르만 괴링의 회유를 받자, 역겨워 미국으로 탈출했다. 훗날 프랑스 공군으로 대전 후기에 참전해 정탐비행 중 행방불명됐다. 

 

그후 60년간 수수께끼였던 그의 행방은 2000년대 초입에야 지중해 마르세이유 근해 해저에서 비행기 잔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그래서 흔히 그는 '전쟁영웅'으로도 쳐지지만, 그보다도 '어린 왕자'의 작자로서 더 널리 사랑받아왔다. 


생텍쥐베리의 생애는 마치 순수해 뵈는 어린 왕자 자신처럼 그동안 많이 미화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 글이 그 통념을 깨는 데 도움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름다운 면과 추한 면을 모두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사람의 잘잘못을 무조건 덮고 가린다고 해서 성경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으로 성도의 죄를 덮으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분별과 검증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에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미화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는 철저히 죄 되게 해야 한다. 다만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죄에 대한 분별과 검증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살?  


생텍쥐페리는 항공기를 탄 채 자살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나의 애당초 추론이었다. '어린 왕자'는 어느 모로나 생텍쥐페리의 인생 약전(人生略傳)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가 기다리는 소혹성으로 되돌아갈 목적으로) 분명히 독뱀에게 자신을 물도록 내어주어 자살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부모들은 더욱 더 '어린 왕자'를 읽으려는 자녀에게 분별교육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2차 대전이 점차 절정과 말기를 향해 가던 1944년 7월 31일 새벽. 생텍쥐페리가 당시로서는 최신형인 미국산 전투기, P38 라이트닝(번개)을 타고 어둠을 뚫고 지중해 쪽으로 향했다가 사라졌다. 비행 이유는 표면상 정찰 임무였다. 행방불명 이후 그는 독일군에 의해 알프스 상공에서 격추된 것으로 추측됐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60년이 지난 2000년, 생텍쥐페리의 것으로 최종 확인된 비행기 잔해가 해저에서 발견되어 인양됐다. 이에 앞서 한 어부가 그와 아내의 이름, 뉴욝 출판사 주소가 새겨진 아이디(ID) 은팔찌도 발견했다. '2734L' 번 스탬프가 찍힌 그의 조종석 띠 조르개(거더)도 주변에서 발견됐다. 




항공역사가인 버나드 마크 씨는 그의 자살로 추정했다. 전문가들은 해당 비행기가 시속 500마일 속도로 수직 추락한 것으로 봤다. 기체 전체에서 전혀 총탄 흔적이 없어, 격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 자살 가능성은 거의 맥시멈이다. 전문가 다수의 견해처럼 필자의 생각도 자살 쪽으로 더 기운다. 그럴 만한 이유가 많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의 이 '유물'들이 발견된 곳은 프랑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청록색 지중해 연안이다. 생텍쥐페리는 그런 상공에서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이곳에다 비싸고 아까운 신형 비행기를 꼬라박은 것이다. 귀족, 천재 작가, 애국자, 능숙한 비행사 등 일종의 수퍼맨으로 알려졌던 사람의 결말이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 셈이다.  



생텍쥐페리의 고뇌의 삶


생텍쥐페리는 초기에 부유한 집안 출신이어선지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한때 나라를 뺏기기도 했지만 큰 나라인 미국에서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고, 거기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쓰고 싶은 작품을 써서 인기를 누렸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그의 불행은 주로 애정생활에서 왔다. 사실 생텍쥐베리는 고교시절에 만난 아름답고 총명한 (훗날의) 여류작가, 마리 루이즈 드 빌모렝을 사랑해 약혼까지 하지만, 조종사 생활을 싫어하는 그녀 가족의 반대로 파혼 당한 아픈 추억이 있다. 그녀를 위해 공군에서 제대하기까지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다시 비행기로 돌아갔고, 8년 후 남미에서 엘살바도르 아르메니아 출신의 작가/화가, '콘수엘로(콩쉴로) 고메즈 순신 데 산도바'라는 작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미친 듯" 매혹되어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콩쉴로는 한 마디로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다. 생텍쥐페리에겐 사랑과 동시에 비관의 대상이었다. 


아내 콩쉴로로서는 이 결혼이 세 번째였고, 물론 그와 결혼함으로써 백작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결혼 후에도 옛 버릇을 못 버려 계속 부정을 저질렀다. 게다가 '얼굴 값'을 하는 건지 입이 걸어 공개석상에서도 자신의 부정에 관해 마구 떠벌리는 통에, 생텍쥐페리의 위신과 자존감이 많이 깎였다. 아울러 콩쉴로는 만성 천식환자여서 기침을 자주 했다[각주:3].   


생텍쥐페리 자신 이를 견딜 수 없어, 비행사답게 여행을 자주 하면서 곳곳에서 맞바람을 피워댔다. 특히 엘렌 드 보그 여인은 그의 대표적인 애인이었다. '넬리' 또는 '마담 드 베(B)'로 불리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부정한 아내를 잠시 떠났다가도 그리워져 되돌아오기를 숱하게 반복했다. 그러면서 서로 점점 무심해져갔다. 


아내 콩쉴로와 함께 한 생텍쥐페리

이런 것 말고도 그가 자살했을 만한 원인은 더 있다. 그즈음 그는 빚더미 위에 있었다[각주:4].   

또 전시 때, 샤를 드골 장군[각주:5]은 생텍쥐페리를 많이 의심했다. 우선 그가 미국에서 쓴 작품이 프랑스와 미국의 사이를 뜨게 했다고 판단했다. 드골은 상관들에게 시켜 그가 되도록 항공기를 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가 생텍쥐페리를 점점 못 살게 구는 듯 했다. 

그리워서 돌아와 헌신하려던 조국이 거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무수히 "조국을 위해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한 미국 장교는 그에게 "그야 자네 마음이니 어쩌겠나만, 우리 비행기로는 안 되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죽기 얼마 전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출정이 금지된 상태였다. 

마지막 정찰비행을 떠나던 그날 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것도 아닌 비행기를 훔쳐 타다시피 서둘러 코르시카 기지를 떠났다. 공군 장교는 나중 지상관에게 "왜 떠나보냈냐?"고 꾸짖었다. 

"그는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회항하는 길에 향수에 젖어 유년의 고향으로 우회하기도 했다가 지정 항로를 벗어나 예정 고도보다 저공비행을 했다. 몸도 성치 않은 데다 육중한 몸으로 조종석에 불편하게 끼어 앉아있어 시야도 제한적이었다."[각주:6] 


이러구러 1944년 7월말 이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콩쉴로는 둘의 회고담인 '장미 이야기'를 썼다. 장미? '어린 왕자'의 의문 하나가 풀리는 대목이다. '장미 이야기'는 그녀의 사후이자 남편의 탄생 100주년 되는 2000년 6월, 프랑스에서 출판돼 현재까지 약 20개 언어로 보급돼 왔다. 콩쉴로는 앞서 1979년 사망해,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원에 있는 둘째 남편 앙리크(엔리케) 카리요의 곁에 묻혔다. 

둘 다 기구한 결말이다. 



'어린 왕자'의 줄거리와 배경


'어린 왕자'는 "혹성 탈출"을 한 어린 왕자가 지구에 도착하여 벌어지는 일들이다. 자신의 왕국인 소행성엔 사랑하는 장미꽃을 홀로 두고 왔다. 지구에 다다른 곳은 사하라 사막이며, 거기서 불시착한 한 조종사를 만난다. 물론 작가 자신을 암시한다. 

어린 왕자에 나타나는 여러 캐맄터들은 해설자, 어린 양, 여우, (독)뱀,..등이 있다. '어린 왕자'는 특히 어른의 세계 내지 기성세대에 대한 직간접적 비평으로 점철돼 있다. 


생텍쥐페리의 초기작들은 사하라 사막 비행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린 왕자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작가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아이 예수상'(Pražské Jezulátko)에서 '어린 왕자'의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 또한 그가 피신해 간 미국 뉴욝 주의 롱아일랜드와 뉴욝 시 맨해튼에서 이 노벨라를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러시아 정교회 대사제는 생텍쥐페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단정하면서 거의 성자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 혹 귀족이어선지, '생'(Saint, 聖)이라는 이름이 받는 힘 탓인지? 


그러나 단언컨대, 전혀 거듭난 적도 없는 생텍쥐페리가 성경적인 참 크리스천일 리가 없다. '인간의 대지' 등에서 나타난 그의 진리관을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믿는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었다. 필자의 일방적인 속단이 아니라 성경적인 확신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특정 신앙을 지니지 않았던 '무신론자'였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교적 온화한 성품과 평화로운 정서, 내적 신비주의, 인간 용기와 형제애에 대한 믿음 등이 그를 기독교인으로 착각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어린 왕자'에는 생텍쥐페리의 다양한 체험과 어린 시절의 추억, 위에 비친 요소들과 함께 아내 콩쉴로에 대한 서글픈 사랑 등이 상징적/암시적으로 표출돼 있다는 점에서 상징문학이기도 하고, 간접적인 실존문학이기도 하다. 


작가의 수채화 삽화가 곁들여진 작품, '어린 왕자'는 한 조종사가 사막에 불시착한 얼마 후, 어느 소행성 출신의 외계인인 어린 왕자와 조우한 뒤 둘의 대화로 시작되어 다양한 장면으로 전개된다. 특히 성인 세계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비평이 자주 돌출한다. 


어린 왕자의 지구 여행 중 사막여우와의 만남에서, 여우는 그에게 "마음으로만 명징(明澄)하게 보여요.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해 얼핏 영적 실재를 아는 듯이 뵌다. 


이런 부분을 갖고, 사실은 깊지도 않은 지은이의 '기독교성'을 강조하는 비평가들이 더러 있다. 심지어 어떤 몰몬들(Mormons)은 '어린 왕자'를 "예수의 알레고리/은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편 19편을 갖고 '어린 왕자'의 "기독교 세계관"과 대조하기도 한다. 

여우는 그밖에도 "님은 여태 길들여 놓은 것에 대하여 영원한 책임을 지게 되죠." 또, "님의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장미를 위해 님이 잃은 시간들이에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장미란, 어린 왕자가 고국인 소행성에 두고 온,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장미가 누굴까? 대체로 그의 아내 콩쉴로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장미가 기침을 자주 하듯, 콩쉴로도 천식환자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왕자' 속에 그려진 천진난만한(?) 모습 탓에 작가인 생텍쥐페리조차 그렇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아니었다. 

위 글을 읽어보면, 장미는 영락없는 콩쉴로의 상징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말하고 있으나, 생텍쥐페리는 아내처럼 자주 바람을 피워 아내를 배신했다. 소혹성 이탈 자체를 콩쉴로에 대한 배신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어린 왕자는 조종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장미 얘기를 꺼냈다. 어린 양이 장미를 뜯어 먹는다? 뭔가 아내를 우려하는 마음에설까? 실제로 그의 아내는 자주 바람을 피워 늘 그를 불안케 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또 지구촌에서 다른 많은 장미를 보고 놀란다. 생텍쥐페리의 바람기처럼.  



작가의 주된 문제점


생텍쥐페리는 왜 이런 의미심장하면서 불가사의한 철학적인 말들을 남겼을까?


첫째로, 그는 예수회 회원(Jesuit)이었다. 

세계 예수회 자체가 증거해 주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어릴 적 동생과 함께 예수회 학교를 두 군데 다녔다. 하나는 노르트담 드 생크루와, 하나는 리용 근처 비야프랑스의 노트르담 드 몽그레. 그리고는 전쟁 중에 스위스 프리부르의 비야 생장 학교로 옮겨갔다. 또한 1919년 생루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예수회 계열 보쉬에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예수회 회원이 어때서 그러냐고? 역시나 불가사의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프리메이슨이었다. 

마치 어린이를 위한 것으로 포장된 이 노벨라에서 작가는 이런 철학적인 말을 왜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텍쥐페리가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쓰면, 독자 다수는 "헛~! 또 시작이군."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이 아니라, 인터넽 상의 수많은 문서들이 그가 메이슨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예컨대 현재의 영문 매거진 '벽돌(B)'의 효시였던 영문 문학지 '벽돌'(제 51~57호 합본, 1995) 24쪽을 보면,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1942년에 생텍쥐페리를 진료했던 프랑스 내과의사인 (장-루이) 라페이르 박사가 있었다...나의 조부는 의사였는데, 나는 언제나 생텍쥐페리의 팬이었다...약 1년 전 프랑스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이 들은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전해주었다. '생텍쥐페리는 프리메이슨이었다'고. 사실 이것은..불가능한 게 아니다.."

 

그 정도로는 안 믿긴다고? 글쎄다. 수많은 메이슨들과 라지가 생텍쥐페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형제/Brother'라고 칭한다. 무엇을 뜻하겠는가? 구글 그뤂에 가입한 메이슨 단체의 피터 렌즈랜드 네티즌은 '앙투안 생텍쥐페리는 메이슨이었다'란 제목 아래 이렇게 쓰고 있다. 

"그(생텍쥐페리)는 프랑스 대(大) 오리엔트 그랜드라지(그랑도리옹드프랑스)의 단원이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해 뵌다. 왜냐하면 그가 줄 페리, 몽테스키외, 쉘셔, 볼테르 등과 나란히 함께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완전은 그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가져갈 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성취된다."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


메이슨들은 이런 철학적이고 역설적인 문구를 만나면 몸이 떨려오기도 하나 보다. 

또, 몰몬교는 본디 프리메이슨과 깊은 내적 연계가 있어왔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까지 생텍쥐페리에게 깊은 정을 느끼는 것을 보면, 뭔가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메이슨들이 놀라울 정도로 생텍쥐페리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뉴질랜드 프리메이슨리의 고위급 인사인 봅 랭캐스터도 그 한 명이다. 영국의 메이슨 저술가/저널리스트인 줄리언 리즈 씨도 마찬가지다. 


◀ 생텍쥐페리의 말년의 모습. 그는 숱한 비행사고를 당해 온몸이 거의 상처 투성이었다.



메이슨들이 애호하는 생텍쥐페리의 인용문 가운데 이런 것들도 있다. 


"한 더미의 바위는 누군가 그것을 명상하면서 마음 속으로 대 성당을 그린다면, 그 이상 더 바위가 아니다." 


"배를 짓고 싶다면, 북을 쳐서 나뭇짐 져 올 사람들을 모으거나 업무와 과제를 맡기지 말고, 차라리 저 바다의 끝 없는 무한대함을 그리워하도록 가르쳐라."


이런 말들을 메이슨들이 사랑하고 애호한다. 유명 메이슨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아래 링크 속에 생텍쥐페리의 이름도 있다. ( https://www.pinterest.ch/pin/436286282638976301/)



'어린 왕자'에 영감을 준 여러 요소가 있다고 전술했는데, 한 가지 추가할 수 있는 중요한 영향은 어느 메이슨 학자로부터의 영향이다. 그의 자유관은 이렇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자유만을 아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의 자유이다." 


그러나 몸의 자유도 자유이며, 마음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와 마귀로부터의 자유, 곧 영적 자유이다. 영적 자유는 마음과 몸의 자유도 가져온다!

 

사실 생텍쥐페리는 영웅적인 많은 기여와 인류애적인 많은 활동으로 수많은 상도 받는 등 모험과 박애정신으로도 충일했다. 그에겐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넘쳤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끝으로, 다음 링크를 보면, 맨 아래 작은 글씨체 부분에 그가 프랑스 대 오리엔트(그랑도리옹드프랑스=GOF) 소속 프리메이슨이었음이 명시돼 있다. 

https://goo.gl/fJd34x

혹 메이슨이 아니더라도 그의 사상들은 충분히 메이슨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1. 영문과 프랑스어로 동시에 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나치 통치가 끝난 1945년, 저자가 죽은 뒤에야 출판됨. [본문으로]
  2. 아버지 장(Jean de Saint-Exupery)은 자작(viscomte)이었다. [본문으로]
  3. 생텍쥐페리 자신의 고민 한 가지는 발기부전증이었다. [본문으로]
  4.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자신의 책, '어린 왕자'의 히트로 거부가 됐을 터이다. [본문으로]
  5. 훗날의 대통령 [본문으로]
  6. 따옴표 부분은 기존 번역도서의 후기에서 인용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