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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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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왔다.

경비실에 맡겨진 포장 상자를 찾아 들고 아파트 나 사는 동 입구까지 걷는데, 기분이 묘하다. 쑥스럽기도 하고 어쩌면 조금 창피한 듯도 하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짧은 길이건만 걸음마저 빨라진다. 눈도 아래로 내리깐다. 저 쪽에서 먼저 아는 척 하기 전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요량이다. 행여 누가 볼세라 책 포장 상자를 가슴에 끌어안고 걷는다. 갓 뭐라고 하는 글씨는 왜 이렇게 크게 쓰여져 있냐.

처음이다.
기독교 서점에서 책을 사다니, 이런 인터넷 서점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인터넷이든 아니든, 기독교 서점이라는 분야 자체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기독교라는 수식어를 붙여 구분해야 할만큼, 그렇게 기독교 관련 책이 많을 줄은 짐작 밖이었다.

공부를 정리하면서, 그는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었다. 추천만 해 준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살 수 있는 곳을 링크해 주었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니 화면에는 책이 한 권 떠 있었다. 나는 클릭해서 장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책을 사야 하나? 읽어야 하나?
공부 끝에 권해 준 책이니 당연히 읽게야 되겠지만 그래도 한순간 나는 망설였었다.   

존 스토트, 신앙생활 가이드.

존 스토트?
모르는 사람이다. 당연하지 기독교측 인사를 내 어찌 알랴.
저자야 낯설 수 밖에 없겠지만, 으으.. 이런 제목의 책이라니, 이 얼마나 '거시기'한가.
나는 정말로 거시기했다. 신앙생활 가이드라니, 신앙생활 잘 하게끔 안내해 주는 책인 모양인데, 아니 지금 누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내가?
그는 내가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나? 아니면 조만간에 교회엘 나가리라고?

그의 안내로 성경을 조금 읽었다. 그게 다다.
그 엄청난 두께의 성경책 중 내가 읽은 것이 글쎄, 짚어보지 않았지만 십분지 일이라도 된다면 다행이겠다. 양이 중요한 건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무시하랴.
물론 질문하고 답 듣고 생각하면서 읽었으니 막무가내로 소설책 읽듯 넘어간 건 아니었다. 기독교 전반에 관한 이해가 생긴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앙? 내가 기독교인인가? 기독교에 대해 좀 알았다고 기독교인이 되는 건 아닐 거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교회라도 좀 다녀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무슨 신앙생활을 한다고 '신앙생활 가이드'라니, 이런 적나라한 제목이 붙은 책을 구입해야 하나, 어쩐지 뒤꼭지가 붉어졌지만 결국 그 책을 구입하리란 걸 알고는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성경을 공부했으니, 교사가 추천한 책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옳은 대접이 아니다.

신앙생활 가이드를 클릭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달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제목 이런 내용의 책은 내 몫이 아니었다. 관심도 없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가? 달라진 부분이 있나?
관심은 달라졌다. 그건 그렇다. 그 때는 기독교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최소한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말한다면.. 있다.
그래, 지금은, 관심은 있다. 교회로 당장 달려갈 정도의 관심은 아니지만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알아 보아야 하는 거 아닐까 정도는 된다.

신앙생활 가이드는 어쩌면 그가 나를 위해 해 준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나의 이런 변화를 충분히 감지했을 거다. 내가 당장 교회로 달려가지는 않으리란 걸, 그렇지만 기독교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상당히 변했다는 걸 눈치챘을 거다. 나는 그에게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런 여러가지를 참작해 권해 주었으리라.
혼자서도 '신앙'이라는 화두를 잃지 않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서둘러 교회에 나가지는 못 하더라도 나름껏 할 수 있는 일들은 나름대로 해 보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함께 했던 성경공부가 의미없는 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기를 바랐을 거다.

스토트의 책을 링크해 주면서 그는 루이스의 얘기도 했다. 자기와 관점이 비슷한 기독교 저술가라고 그들을 소개했다.
존 스토트, C S 루이스, 나는 둘 다 알고 있지 못 했다. 기독교 관련 저자들에게 내가 관심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루이스.. 루이스..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했다. 루이스를 어디서 봤나.. 낯이 익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가물가물했다.
 
아, 그럴 때는 정말 머리 아프다. 알 듯 말 듯 머리 속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탁 잡히지는 않을 때.
갖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를 쓰며 생각해 봤지만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었다. 눈에 띄는 대로 책꽂이에 꽂힌 책을 살펴 봤지만 루이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봐서 금방 찾을 이름이었다면 그렇게 가물가물했을 리가 없지, 내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루이스를 본 적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스토트의 책은 하나를 골라 주었지만 루이스에 대해서는 이름만 언급했으므로, 루이스의 저서 중 주문할 것을 고르느라 나는 애를 써야만 했다. 루이스로 검색을 하니 상당한 양의 책이 화면에 펼쳐졌었다. 달리 고를 방법이 없어서 책 소개와 독자평을 읽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독자평이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그 전에는 독자평을 참고로 해 선택해야 할만큼 모르는 분야의 서적은 구입할 일이 없었다.
한두 권이 아닌 저서들을 클릭해 가며 소개, 목차, 평들을 읽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저서를 다 살 수도 없고 아무렇게나 동전 던져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쨌든 어떤 정보라도 읽어 보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책에 대한 정보를 읽는 일은 나에게 때로는 유희였다.

그렇게 내 딴에는 궁리를 하느라고 해서 두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순전한 기독교'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었다.
전자는 루이스의 대표작이라는 데다가 독자들의 평이 하나같이 좋아서였고 후자는 악마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늘 적대적 존재로 등장하는 악마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다.

장고 끝에(!) 선택한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나니, 얼핏 마음 구석으로 흐린 구름이 한 조각 지나갔었다.
이런 거였을까, 제자들의 심정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거라." (누가복음 22:36 표준새번역)


마지막 저녁, 그 유명한 만찬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어, 뭐야, 왜?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그 전까진 분명 아무 것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돈이니 자루니 칼을 챙기라니, 어찌 이리 얼마 사이인지 모르지만 말씀이 달라지신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앞뒤 구절을 왔다 갔다 연신 갸웃거리는데, 혹시? 번개같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 속에 끼어서 같은 무리로 몰렸다고 기록된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같은 책 22:37)


흐음.. 그러니까,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연출을 한다?
예수는 예언을 실현시키는 걸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걸로 보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성경 말씀 운운하며 새끼 나귀를 타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이것도 예언의 실현일 수 있다. 무법자들 속에서 같은 무리로 몰리기 위해 칼을 사서 든다? 말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37절을 사실로 드러내기 위해 36절의 말씀을 하신 건가요, 혹시?]

그는, 웃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답 메일을 읽는데 웃음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베드로가 그렇게 받아들였단다. 그래서 칼을 들고 있다가 예수를 잡으러 온 패거리들 중 하나의 귀를 베어버린 것이라 했다. 아이구 이런, 갈릴리 시골 마을 어느 어부처럼 생각했다는 거네. 베드로가 왜 그렇게 겁도 없이 무뢰배 같은 짓을 했나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나처럼 생각해서 예언을 실현시키려고, 에효.

그래놓고는 치료해 줬다는 말도 없었다. 아니 사람이 다쳤으면 약이라도 발라 치료를 해 주든지 예수님이 고쳐라도 주든지 해야 맞을 텐데, 마태복음의 귀 얘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정의감에 사로잡혀 나는 다른 복음서의 그 장면을 막 찾았었다. 마가복음에도 없고 요한복음에도 없고 누가복음에만 있었다. 역시 누가는 의사라더니 직업정신이 발동해 관심이 갔나. 누가복음을 읽고서야 그러면 그렇지 설마, 마음이 놓였었다.
그런데 그 해프닝의 발단이 베드로의 오해였구나.

실상은 저 말씀은, 이제 준비를 하라는 의미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십자가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을 돌봐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든든한 비빌 어덕이 사라지는 거였다. 이후로는 자기들끼리 알아서들 움직여야 하는 거다.

나도 이제 혼자서 어디든 가야만 하는 걸까.
온갖 안내를 해 주던 그 대신, 전대와 자루와 칼에 의지해야 하나.
그런데 어디로 가지? 아니 어디로든, 가긴 가나?  

후훗, 영락없는 일종의 알레고리다.
그는 알레고리를 경계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되지 않는 게 없다고 했다. 확실하게 아는 것만 실천하며 살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댔다.
어설픈 알레고리는 자기 덫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좋은 교사에게 배우고 알레고리에 빠질 수는 없지.
후르르, 고개 한 번 흔들고 버튼을 눌렀었다, 모드 급전환.


신앙생활 가이드,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이제 이걸 읽어야 하는구나. 읽게 되겠구나.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책들을 읽고 싶은 걸까?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신앙생활 가이드를 제외하고는 그조차도 권하지 않았다.  

성경에 기독교 서적에, 내가 나에게 낯설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낯설다.
씨티 촬영을 해 보면 뇌 구조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래 봐야, 예전에 찍어본 적이 없으니 비교도 못 하겠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나는 또 다른 책을 사게 될까? 책이 책을 권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될까?

루이스의 책들은 스토트의 책에 비해 좀 고급스럽다. 스토트의 책이 저렴한 보급형으로 보이는데 비해 루이스는 편집이며 제본이며 지질등이 비교적 좋다. 당연히 책값은 더 비싸다. 표지가 하드 커버로 되어 있다. 표지가 단단하면, 멋은 있어 뵈는지 몰라도 읽기에는 불편하다. 마음대로 휘어지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휘어져 잡기 편한 스토트의 글을 먼저 읽을까.

그러나 스토트의 책은 아직도 나에게 슬몃 거부감을 준다.
제목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 하다. 제목에 아무래도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루이스의 책은 무난한 제목이다.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단순한? 그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고 했다. 뭔가 순수한 알맹이가 그 안에 들어 있을 것도 같다.

좋아, 갓 뭐라고 커다랗게 인쇄된 포장 상자를 대충 정리한 뒤, 나는 '순전한 기독교'를 손에 잡는다.
자.. 기독교라는 게 뭔지,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알 수 있는 걸까.

저자 사진과 사인이 표지에 있다.
뭐 대개의 글쓰는 이들이 그렇듯 루이스의 사인도 폼이 난다.
루이스와 인사라도 나눌 것처럼 한참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나는 천천히 첫 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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