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선지서

[사 58:6-9] 참된 금식 (경배 도우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러분의 출석교회의 대안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이 다가 올수록 모이기에 힘써야 하며 성도의 친교가 삶 속에 매우 중요합니다. ]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야웨님
나의 바위
나의 구속자

내 입의 말들
마음의 묵상이
야웨/주님 앞에 기쁘게 받아 들여지기를!

죄로 사악한 세상 속에 살기에
늘 모자라고 부족하기 쉬운 우리이지만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우리이기에
주 예수 크리스토와 함께 드높이
하늘에 앉혀진 우리들이기에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눈물과 고백이
마음과 예물이
거룩한 하늘 보좌에 이르기를!

죄인들에게서 떨어져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죄도 악도 없는
우리의 하늘 대사제(대제사장)
주 예수 크리스토는 우리에게 합당하니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를 살피소서
내 속과 뜻을 아시며
나를 깊이 헤아리시어
내 마음을 알아 주소서
제게 무슨 악행이 있는지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이끄소서

주 야웨님의 눈길은 온 땅을 두루 살펴 보시어
온 맘으로 주님을 향하는 사람들에게 권능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온 맘으로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

바라봅니다 아버지!
바라봅니다 예수님!
바라봅니다 성령님!

우리를 주님께 가까이 이끄소서
늘 아버지 품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
 
[구 한국찬송가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을 부릅니다]

(후렴부터..천천히)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다시 한 번)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 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1절)
    주는 영원한 내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나그네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 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2절)

      세상 안락 쾌락 명성 기도 제목 아니오
     주와 함께 고난 받게 나와 동행하소서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 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3절)

    어둔 골짝 지나가고 거친 바다 건너서
       천국 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 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다시 한 번 더)

     주님께 가까이 더욱 더 가까이
  나의 나그네 길 따라 주님 동행하소서

아버지 품은 따스합니다
포근합니다
죄인들이 뉘우치고 돌아 올 때
반갑게 맞아 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 갈 때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고 나아 올 때
받아 주시고
품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채워 주십니다.

복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아..좋으신 하나님
늘 찬양 받기 합당하신 아버지
주 야웨님을 모신 것
우리의 최대의 행복입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믿게 된 것
아버지 은총으로 영생을 얻게 된 것
성령님을 모셔 삶이 바뀐 것
은사와 선물을 누리게 된 것

모두모두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주 야웨님의 모든 은총과 진리를
감히 받을 자격 없으나
우리는 감당할 길이 없지만
오직 우리의 하늘 대사제
예수 크리스토 통하여 받습니다
겸손히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격합니다
은총과 진리
고맙습니다 

오 할렐루야!

(418장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은 참 자유 넘치네
내 맘에 가득 채우사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 사랑은 해처럼 따뜻해
포근히 나를 감싸고 주님-께 이끄네

주 사랑 크시니 폭풍도 겁 없네
가까이 있는 그 사랑 어둠-도 물리쳐

하나님 사랑은 참 자유 넘치네
내 영과 혼을 붙드사 강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을 바라 봅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오 성령님 나를 다스리소서
내 맘 속 왕좌를 드리오니
드셔서 좌정하시고
나를 통치하여 주소서

나의 고집을 깨시고
새롭게 빚으시고
슬기와 권능을 채우시어
우리를 주님의 도구로 쓰소서
주님의 군대로 사용하소서
이 마지막 때
주님 오시기까지 복음의 나팔을 불고
입을 열어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주 예수 이름 부끄러워 하지 않게
성령님, 우리를 강하게
담대하게 하소서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곧 내가 고른 금식이 아니더냐:
곧 악의 속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들을 끌러 주며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멍에 마다 꺾는 게 아니더냐?

너희들의 빵으로 주린 자를 먹이고
헤매고 다니는 가여운 사람들을
너희 집으로 데려 오고
헐벗은 사람들을 보면 옷을 입혀 주고
너희 골육으로부터 숨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의 빛이 아침을 열듯 하며
너의 치료가 빨라지리!
너의 의로움이 너를 앞서 가고
주/야웨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키리!

그러면 너희가 부를 때
주/야웨가 대답하리
너희가 울부짖으면
그가 말하리:
"내가 여기 있다"고..
(이사야 58: 6~9)


카톨맄 성당과 신교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매년 이맘 때를 '사순절'(Lent)로 지킵니다. 사순절이란..부활절을 앞둔 약40일간(주일 제외)을 뜻합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는 날부터 시작되지요.

마침 올해 그 수요일 날, 배심 임무 탓에 법원에 갔다가 이마에 잿가루가 찍힌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고위급 법관도 이마에 큼직한 잿빛 점을 묻히고 다니더군요. 처음엔 무엇인가 궁금했다가 가까이서 그 점을 보고서야 "아하, 오늘이 그날이구나" 하게 됩니다. 
재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재를 머리 위로 몸에다 뿌리며 회개하던 것을 기념해 사순절에 들어 가면서 통회하고 근신하는 것을 상징하지요.

하나님께 참회할 죄가 있을 경우, 회개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것이지만, 의식적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은 꼭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크리스토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다시 살아났기에 새 생명을 얻어, 새 삶을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율법으로 지키던 절기 전통들은 이젠 더 우리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절기나 교회 명절을 지키는 것 - 제도적 교회로부터 온 전통이지요. 전통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겠으나 우리는 전통보다는 성경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둘러 보면 대강절/성탄절로 시작하는 교회력은 카톨맄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신교 일각에서 그것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탄절부터가 12월 25일이라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성탄절이 그날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전통보다 성경말씀을 더 중시하냐에 크리스천 가치관이 좌우됩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저는 언젠가부터 성탄절/부활절 등 절기 전통을 별로 중시하지 않게 됩니다. 포인세티어나 백합화 장식도 그냥 그렇구나 하게 됩니다. 그런 장식을 전혀 교인들의 '의무'로 삼게 되지도 않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이스터 버니'(부활절 토끼)나 계란 전통을 강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 초기교회가 부활절이나 토끼/계란 타령을 했던가요.
오히려 교회의 그런 전통을 이용한 상혼이 이 시즌에 판을 칩니다.
그런 아까운 돈을 더 좋은 일에 쓸 수 있겠지요. 어린이들에게는 토끼나 계란 아니고도 말씀으로 얼마든지 부활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예수님의 강탄이나 부활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사도들, 초기 성도들이 특정일을 성탄절/부활절로 지킨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어느 날짜인지조차 우리는 도무지 모릅니다. 절기나 명절, 특정 날짜를 꼬박꼬박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 주님의 뜻을 찾아 그 뜻대로 살려는 마음입니다.

그냥, 임마누엘 주님이신 예수 크리스토의 성육신을 날마다 감사하고 무덤서 되살아나신 주님을 날마다 찬양할 뿐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하지요.

이마에 재를 찍어도 죄 가운데 살면 그 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카톨맄 사제 앞에 비밀리에 죄를 고백하고도 그 죄를 지으러 나간다면 그 회개는 별 의미 없는 회개지요. 물론 우리는 연약하여 수시로 죄를 짓는 인간이지만 사제 앞에서의 죄 고백이 고백하는 이상 그 죄를 또 지어도 좋다는 '면죄부'나 '범죄인허증' 같은 것이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남다른 절제/금욕/금식 등을 하려고 그 직전에 뻑적지근한 '카니발'이나 소위 '사육제' 따위를 하기도 합니다. 절제나 금식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즐기는 습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표시로 절제하면서 주님을 묵상하고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또 주님과 사도들처럼, 남의 억눌린 것을 풀어 주고 도고(중보기도)를 해 주는 도우미가 되는데 참 되고 깊은 금식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기와 명절 때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께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 보고 날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날마다 주님과 사귀고 속삭이며 날마다 죄를 더 멀리하고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님께 쓰임 받기를 힘써야 마땅하지요.

날짜와 절기, 전통을 지킨다는 데 더 깊은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갈라티아 4:10). 어떤 사람은 사순절을 '기독교의 라마단'이라고 빗대어 풍자도 했더군요.
전통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 오늘 하루 아니 매 순간 주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뜻을 따르고 하나님 왕국에 기여하는 데 삶의 뜻이 있지, 전통을 따라 특정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데 중요성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주님과 가까이 하며 성령님께 귀 기울이며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일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 보살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우는 데도 힘써야 합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도 시대감각적이 돼 갑니다. 남에게 신경 쓸 줄 모릅니다. 지난 90년대 이후 미국의 정황을 보면, 과거 어느 때보다 상황윤리가 기승을 부립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주의가 늘어 갑니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요즘 뉴욕에서는 교통도덕이란 게 거의 사라져 갑니다. 딴 대도시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그때 자기가 알아서 갑니다. 모쪼록 제 차를 받지만 말아 줍소사 하고. 과거 제가 차 운전법을 갓 배울 때는 반드시 직진 차량에 우선권을 양보하게 돼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양보 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직전차량이 다가 와도 적당히 눈치를 봐서 그냥 순식간에 홱(!) 회전해 버립니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하는 아슬아슬한 위기상황도 무척 잦아졌지요. "알아서 기어라"가 요즘 운전법입니다.

상대를 돕긴커녕 의식조차 하지 않겠다는 게 요즘 사회 생리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양심대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고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적당히 눈치로 때우며 살아 가게 되기가 쉽습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과 별 다름 없는 생활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남을 돌아 보는 것이 참 금식이라고 교훈해 주십니다. 남의 속박을 풀어 주고 멍에를 끌러 주고 억압에서 놓아 주고..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들의 도우미가 되는 것이 곧 금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윤리적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 "그대의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오" 하신 것처럼 남의 영/혼/육의 처지를 내 처지로 여기고 도와 주고 돌보는 데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전통과 날짜나 지키고 "나 몰라라"는 삶이 참된 금식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옛것이라고 소홀히 여기고 율법적이라고 고사하기 쉬운 구약 말씀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구약인데도 오히려 이웃 사랑 실천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웃 사랑은 영혼 사랑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죄악과 멍에, 억눌림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참 금식의 시작입니다.
이번 사순절엔 고기를 안 먹겠다, 덜 먹겠다, 날짜를 얼마큼 늘려 더 견뎌 보겠다가 아니라 남의 영혼을 돌아 보아 그들을 마귀 싸탄의 왕국에서 구출하는 것이 참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주 예수님의 권능의 이름으로
싸탄의 결박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고
성령의 자유로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참 절제와 금식와 근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 세계나 종교계의 주변을 둘러 보면, 전통을 지켜 나의 몸가짐이나 습속, 자세를 더 중시하는 것을 봅니다. 크리스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조용히 명상이나 관상에 잠겨 있는 것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또 인류애 정신을 발휘하여 돈이나 퍼 부어 주고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뭐 좀 돌봐 주면 그것이 최고 사랑의 표현인 양 치부돼 갑니다.  

우리는 남의 영과 혼 살리는 데 최대 목표를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그런 연후에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의 몸도 돌봐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주 아래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낙태를 한 뒤 고심하던 끝에 자살한 젊은 여인도 있습니다. 낙태를 한 뒤 온갖 병과 저주가 닥쳐 와도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낙태는 당연히 살인이죠. 생명은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으로 바로 잡아 주고 저주에서 풀어 줘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를 다 해결했으니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은 왜 주신 겁니까?!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실 일을 주신 겁니까?
왜 풀고 묶는 열쇠를 주셨습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병이 자동 치료되고 율법의 저주의 결과로 온 증상들이 다 떠나나요?

예수 이름으로 풀고 묶어야지요!
복음을 전해서 마귀의 영토로부터 구출해 주고
악령들에게 꽁꽁 묶였던 사악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를 끌러주고
마귀와 졸개들에게 억압된 사람들을
나자렡 예수님의 이름으로 놓아 줘야지요!

그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참 금식에 동참하려면 신자는 지금처럼 느슨해선 안되겠지요. 더 바빠지겠지요.
남을 위한 기도를 강화해야겠지요. 남을 위해 울어 주기도 해야겠지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 주변의 악령들을 내 쫓고 자유를 얻게 도와야겠지요.

믿음에 섰는데도 악령과 두려움, 겁과 공포에 질리고 짓눌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마땅히 도와줘야겠지요.
가난과 질병, 고통과 회의에 묶이고 빠진 사람들을 구출해 줘야겠지요.

복음이 뭡니까?
나만 즐길 게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나눠 주고 알려 주는 게 복음 아닙니까? 상대방의 영혼이야 어떻든 약이나 주고 밥이나 먹이기나 하자는 '인류애'가 복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영혼부터 사랑하여 구출해 주는 것이 복음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거듭난 신자들은 참 금식의 도우미들입니다.
영과 혼을 살린 뒤에는 이웃의 몸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자동으로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의지 발동을 안 하고 가만 눌러 앉아 지내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처리하신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럴 양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뭣 때문에 의지를 주시고 지정의를 주신 것입니까? 우리가 로봍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구속하거나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꺼이 할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의지를 발동하여 그분의 도움을 요청할 때 성령의 슬기와 권능으로 기름부음으로 우리를 도우시어 그분의 일을 하시게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악의 속박, 싸탄의 멍에와 그의 억압 아래 고통 받는 영혼들에게 해방과 자유, 기쁨을 선사해 줄 도우미의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몸을 위해 도울 길도 열립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도울 자원과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모두를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도우미 역을 감당할 때
어떻게 된다고요?

범사가 형통하게 되며
건강이 찾아 들며
의로움으로 당당히 행하게 되며
하나님이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이런 참 금식의 도우미이기를
희망합니다.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은총과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
성령님의 친교와 이끄심, 복 주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아멘

To approve a single suggestion, mouse over it and click "✔"
Click the bubble to approve all of its suggestions.

관련 글

https://truthnlove.tistory.com/entry/참된-금식-1


To approve a single suggestion, mouse over it and click "✔"
Click the bubble to approve all of its sugges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