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첫번째 성전 정화 (요한복음묵상10)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2:13~22


예수님이 예루샬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은 사건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습니다. 3년 공사역 중 첫 해와 끝 해 유월절에 각 한 번씩 2회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봐야 하는 까닭은..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이 성전 정결/정화 사역은 분명히 예수님의 사역 초기였던 반면, 마태/마르쿠스/루카 등 3권의 공관(Synoptic, 共觀) 복음서들에 기록된 다른 성전 정결사건은 수난을 바로 앞둔 시점인 훨씬 후기였기 때문이지요(참고: 마 21:12~17, 맑 11:15~18, 뤀 19:45~48). 흥미롭게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후기 성전정화 사역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엔 서로 비슷하지만 혼동하지 말아야 할 상이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각각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5병이어 사건), 빵 일곱 덩이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로 먹이신 사건입니다(마 14:13~21, 비교: 15:32~38).  

그런데도 이런 비슷한 사건들에 관하여, 일부 진보주의 학자나 식자들은 성경 기자들이 혼동을 일으켰거나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기를 적당히 짜깁기 했다고들 주장하지요.

딴 예로, 카톨맄 교회이나 친카톨맄 신학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베타니의 마리아(라자루스의 누이, 마르타의 동생)나 같은 베타니 마을의 한 (죄 많던,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성과 혼동하거나 몰고 가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 라자루스의 누이 마리아, 베타니의 죄 많은 여성은 모두 서로 다른 여성들입니다! 이 점에 관해 필자의 글-'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을 참조하시길. 즉 예수님께 여성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적어도 두 번 이상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사건도 한 번이 아닙니다. 주님의 '단회승천설'은 성경에 대한 카톨맄 신학자들의 오해 탓이지요. (필자의 글: '예수 승천은 딱 한 번?' 참조)
카톨맄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바티칸에서 "이 해석이 옳아!"하고 선언해 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교권자들에게 성경해석의 궁극적 권위가 있는 탓이지요. 온 신도들이 딴 소리 말고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신자에게 성경해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코린토A 2:14~16, 페트로B 1:19~21, 팀B 3:14~17). 물론 책임과 분별이 따르는 자유이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거의 똑 같아 보이는 비슷한 사건이긴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의 사역 초기와 사역 후기에 각각 따로 벌어진, 서로 다른 두 사건입니다. 주변 정황들이 뒷받침해 주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2회 성전을 정화하신 셈입니다.


본문을 공관복음서 기록과 비교할 때, 또렷한 차이점들을 발견합니다.

1. 본문의 성전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공중사역 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반면, 공관복음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후기 성전정화 사역은 고난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인 예루샬렘 진입 행렬 후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주님은 성전 전체를 골고루 둘러 보셨습니다(맑 11:11). 그래서 헌금궤 앞에 마주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광경을 지켜 보시기도 하셨습니다(맑 12:41~44, 뤀 21:1~4). 


2. 초기 성전정결 사역에서 주님은 노끈 채찍을 만들어 희생용 동물들에게 휘둘러 내쫓으셨습니다(2:13). [주님은 채찍을 사람들에게 쓰지 않으셨습니다! 동물들에게만 휘둘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많은 성경그림들이 동물들이 아닌 상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신 (잔인한) 주님으로 잘못 묘사해 놓았습니다. 사실 대다수 '성화'들이 그렇게 표현해 놨죠.]     
한편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후기 정화사건에서는 주님이 채찍을 만들어 쓰셨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3. 초기 사건에서는 주님이 (비둘기 판매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요! 내 아버지의 집을 상점으로 만들지 마오." (요복 2:16)
그러나 후기 사건에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불릴 것이라고 기록됐는데 그대들은 그(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려!" 하십니다. (마 21:13)


4. 요한복음서의 성전정화사건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여러 모로 예수님을 주시하며 교훈을 배우는 제자들의 내적 반응을 민감하게 기록합니다. 즉 제자들이 주님의 이 모습을 보고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이 나를 삼켜 버렸습니다"(시 69:9a)란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이 이때를 상기하고 소급하여 믿은 내용도 덧붙여졌지요(요복 2:22).  

그런데 공관복음서의 후기 성전정화 당시엔 적어도 당시 성전 안에서 두 가지 일이 벌어졌음을 알려 줍니다. 첫째로, 주님은 성전에서 주님께 나아온 장애인들(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마 21:14).
둘째로는 어린이들이 "호샤나, 다윋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마 21:15,16). 그날 있은 예루샬렘 진입 행렬 때 찬양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마 21:9).


5. 요한 기자는 초기 성전정화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간 인터랙션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당신이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데 무슨 표징이라도 우리한테 보여 줄 거요?"
"그대들이 이 성전을 허물어 보오. 내가 사흘만에 일으킬 테니."
"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 지은 건데 그래 당신이 겨우 사흘만에 복원할 수 있겠소?"
(그러나 주님은 건물이 아니라 성전인 당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 기자는 후기 정화사건 당시 성전 대사제들/서기관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어린이)이 하는 말(호샤나..)을 당신, 듣고나 있는 거요?"
"그렇소! 그대들은 읽어 보지 못했소: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정립하셨다는 말씀?'(참고: 시 8:2)"


6. 초기 성전정화 후 주님은 유월절 기간 내내 예루샬렘에 머물러 계셨습니다(요복 2:23).

그런데 후기 정화 사건 당시, 주님은 예루샬렘 성을 떠나 엿새 전부터 묵고 계시던 베타니(주로 라자루스의 집)에 가서 거기 일시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아침부터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뤀 21:37). 


7. 초기 정화 당시엔 후기에서와 같은 긴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후기 정화 사건에서는 유대인과 성전 고위 인사들이 거의 매 번 틈을 엿보며 주님을 체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마 21:45,46, 22:15, 맑 11:18, 14:1, 뤀 19:47,48, 20:19, 22:1. 참고: 요복 11:47~57). 즉 수난의 때가 찼을 무렵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충분히 참작하여 엄연히 서로 다른 두 사건을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매년 유월절 때면, 예루샬렘 성전산과 예루살렘 시내, 주변 위성 소도시들은 율법에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올라 오는 수천 수만 명의 경배자들로 북적댔습니다. 여관들, 상점들마다 들끓었지요. 특히 율법에 지정된 마짜(무교병: 누룩 없는 떡)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는 시기였지요. 물론 각자 준비해 올라가기도 했지만. 지금도 유대인들은 무교절-유월절 기간동안 마짜 법을 지킵니다. 최근엔 약간 술렁이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자..이 무렵이면 성전 바깥 뜰에서 소와 양, 비둘기 등 동물판매상, 환전상 등 장사치들이 우굴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 성전에서 이같은 관행이 허용됐었습니다. 까닭은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사항을 이용하는 고위 종교계 인사들이 상인들에게 성전 바깥틀 점거 특혜를 베풀면서 고액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채찍을 만드시는 동안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생각하셨겠지요. 하나님은 행위를 달아 보시는 분이시니까. 이 채찍은 처음부터 동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아마도 주님은 언젠가 로마 총독 필라투스의 관정-프레토리움에서 몸소 맞으실 채찍 형벌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상인들이 가득 자리를 메운 이 바깥 뜰은 또 이방인들의 뜰이기도 합니다. 즉 이방인들이 성전에 최대한 근접하여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요복 12:20,21). 그런데 그런 곳에서 장사치들이 돈을 갖고 낄낄대고 동물들이 움머움머, 매헤헤, 구구구 울어 젖히니 이방인들은 도무지 기도다운 기도를 못하는 겁니다. 더구나 상인들이 이익을 탐하고 정직하지 못하니 더 부정한 곳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러 온 이방인들을 위해서라도 어떤 강한 조치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 고위 인사들은 예수님의 이같은 정화 행동의 바탕 내지 배후에 어떤 권위가 있음을 느꼈지만, 돼 먹지 못하게 자기네 권위에 도전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런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뱈엎 즉 어떤 표징을 내 놔라 주문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종의 권위의 징표라면 주로 이적과 표적을 뜻했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데이빋 구짘의 말처럼 이때 주님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은 실로 종교인들의 정곡과 심중을 꿰뚫은 말씀이었을 터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늘 율법으로 단죄하여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주님의 몸은 성전입니다(에페소 2:19~22, 페트로A 2:5, 계 21:22)

주님이 드나드신 이 성전은 헤롣 왕이 유대인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기존 제룹바벨 성전을 헐고 자리를 확장하여 세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사악한 헤롣 성전도 하나님의 전으로 보셨습니다. 그 까닭은 이곳이 하나님이 고대로부터 아브라함과의 옛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과 이름을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강림을 앞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전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김삼 읽기 힌트 : 김삼의 글은..성경 인명/지명/권명을 비롯한 모든 외래어를 그 나라 언어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추구합니다. 혹 생경스럽더라도 양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