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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General Topic

신자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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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과연 누굴 가리킬까요?

알고 보면, 신자의 정의와 개념은 너무도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경우 신자는 일종의 '종교인'으로 치부됩니다. 그냥 관행에 따라 삼각형 지붕의 모임 장소로 드나들거나 고틱 식의 뾰족탑, 종탑 아래로 통과해 들어가는 종교인들을 신자 또는 신도로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날이면 점잖게 정장을 하거나 최고의 화려한 성장을 하고 교회당엘 들어가서 평소 늘 앉는 회중석 우리 가족 자리에 나란히 꼿꼿이 앉아 의식에 참여하고, 전문 음악인들의 준비된 음악을 듣고, 역시 전문 설교가의 잘 갈고 닦고 다듬은 준비된 명설교를 듣고 거기 동의를 해 주고 축도를 듣고 끝나면 친교를 하거나 바삐 헤어진 뒤 남은 하루의 여가를 보내는..

이런 사람들이 신자일까요?
과연 그들 속에 생명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생명입니까? 예수 크리스토의 생명?

크리스천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종교라면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세상의 온갖 잡된 이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도리요,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종교엔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 사람들은 '종교인'의 하나로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들이 의식 참여자로서 교회를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 세상 종교인들과 크게 달라 보이질 않습니다.

많은 경우 신자는 처치맨(churchman)/처치우먼(churchwoman)으로서 행동합니다.
그냥 어느 교회에 소속되면, 대강 신자로 여겨집니다. 등록하면 좀 나은 신자, 세례(침례)를 받으면 좀 더 나은 신자, 입교례/견진례를 받으면 훨씬 더 나은 신자로 처 줍니다. 즉 처치 맨/우먼으로서의 경력, 소위 '신력'(信歷)을 쌓아 가노라면 수준급 '신자', 상급 신자로 단계를 밟아 나아가는 셈이지요.
게다가 직분을 받아 교사나 서리집사, 권찰 더 나아가 권사나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더 할 나위 없이 괜찮은 신자가 됩니다. 제직회나 평신도의 임원, 회장 등 지도급 인사가 되면 그야말로 '짱신자'입니다.

과연 신자란, 그런 사람을 가리킬까요?  
개념적으로 좀 더 나아 보이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섬기는 섬기미 또는 봉사맨, 남을 돕고 이끌어 주는 도우미/이끄미/가이드, 남을 깊이 돌아보는 돌보미가 되기도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나아와 안팎을 돌아 보고 부족한 것을 채우고 뭔가 남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악사역자와 교사, 친교실 식당 조리사 등 가진 재능과 은사로 땀 흘려 열심히 사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가리켜 우리가 신자라 하지 않습니다. 겉 모습으로는 물론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신자가 아닐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강단에 선 사람일지라도 혹 참 신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신자란 말인가..?

신자의 정의

신자는 한 마디로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선물로 믿음을 받아 간직하며 그것을 더욱 길러 나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믿고 성경 말씀을 믿어 거듭나고 구원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속 받아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그 영이 생동하는 사람입니다.
말씀과 물, 불과 은혜로 새로 태어났고 새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과거 즐기고 좋아하던 세상을 이젠 더 따르지도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영으로는 이젠 더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만 연약하여 혼과 몸으로 죄를 지으면 양심에 찔림 받아 늘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자는 자신이 신자임을 압니다. 속에 계신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확증을 가졌고 장차 하나님의 왕국-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스스로 모른다면 그는 버림 받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신자의 정체성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그분의 아들딸들입니다(요복 1:12).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영원하고 유일한 신이시며 온 천상계와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십니다. 우리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으로 하나이신 주 야웨님 밖에는 다른 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들딸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6a, 참고: 요복 롬8:29) 에 따르면, 그분의 아들 예수 크리스토는 하나님 즉 성자님이시면서 우리의 맏형, 빅 브라더(Big Brother)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요복 20:17).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살긴 해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복 15:19, 17:14,16). 뿌리를 세상 아닌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신자는 땅에서 나그네들입니다(히11:13 끝). 족장 아브라함과 그 후예들처럼 우리는 광야인 이 세상에서 늘 하늘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살아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장망성 즉 장차 망할 도시인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소망을 둘 수가 없습니다(사 19:18).  

신자는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요한서신A 2:15-17). 물질과 쾌락, 영예과 탐욕을 즐기고 좋아해서 세상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교인들은 위험합니다. 그런 교인들은 과연 자신이 올바른 신자인지 돌아 봐야만 합니다. 

신자의 신분

신자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하늘 보좌에 앉힌 사람들입니다(에페소 2:6)!
우리가 하늘 보좌에 앉혔다니요?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어떻게 있을 수나 있는 일입니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예..사실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순간 주님이 우리를 드높이 보좌에 함께 앉혀 주십니다.

어떻게요?
이것이 가능한 것은..
첫째로, 주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기 때문이고(엪 1:22)..
둘째로는, 우리가 주님의 몸된 지체들이며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에페소 1:22, 콜로세 1:18)! 즉 우리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로서 머리이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됐다는 말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져 놀 수 있습니까? 머리이신 분이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면 몸도 함께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로 이를 극명히 입증하십니다. 우리는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기르시고 돌보시는 나무이신 주님께 매달린 포도 가지라는 사실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크리스토를 부인하면 이 위치에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네. 사람이 내 속에 머물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네. 그럼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우지."(요복 15:5b,6)

마치 포도나무가 뿌리로부터 받아들인 영양을 가지들이 빨아 들여야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듯, 우리는 생명의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늘 붙어 있으면서 그 분 안에 거하고 그분 말씀 속에 거하고 그분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할 때에만 살아 있고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사람 즉 크리스토의 장성한 분량, 성숙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게 됩니다(에페소 4:13).

우리는 크리스토를 붙들고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신자의 특권

신자는 또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활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거듭 "예수 크리스토"라는 당신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 이름은 승리의 원천과 도구가 됩니다. 

성경 도처에 신자가 예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특히 요한복음 14-16장에서 거듭거듭 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이뤄지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면 그렇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라고 하시면 무엇이든지입니다. 거기 주를 달고 조건을 달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이런 식입니다: 예수 이름이 뭔 도깨비 방망이냐.. 뭐든 다 이뤄진다니..? 어림 없는 소리. 다 조건이 달려 있어. 누구나 맘대로 뭣이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냐."

이건 스스로 자기비하/자기차별을 하는 셈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면 그분 이름으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보장하시는데 자기가 뭐라고 거기 주를 달고 조건을 갖다 붙입니까..?
관건은 주님 말씀 그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신자의 특징과 권세

신자라면 늘 담대합니다(요복 16:33).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당당합니다. 이것은 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로서의 긍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크리스토 안에서 이미 마귀와 그 세력에 승리한 사람들이 곧 신자들입니다.

이 기정 사실을 믿기 어려운가요? Well.. 사도 요한이 뭐라고 일러 줍니까?

   "여러분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요한서신A 2:13 끝)

 "..여러분은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요서 A 2:14 끝)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사실이지요!
우린 이미 이긴 자들입니다. 시제가 과거형이되 그냥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사실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즉 이겼고 늘 이기고 있는 무리가 우리들입니다. 싸탄과 그 졸개들은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셈입니다.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위에서 끝내시고 이겨 놓으신 전쟁이므로 다만 원수들을 적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야코보 4:7, 페트로A 5:9). 이미 져 버린 적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고, 물리치고, 내쫓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또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결코 종교인이나 종교지도자 같은 겉모양새가 아닙니다. 붉거나 검은 제의에 '로만 칼러'를 들거나 그럴 듯 하고 멋진 '성의'를 입는다든지 높은 관을 쓰거나 사람이 만든 목자지팡이를 들고 있거나 높은 강단에 오른다고 거룩한 게 아니지요.   

거룩한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벗되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를 짓게 됩니다(야코보 4:4b).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되 항상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섞일 수가 없고 세상과 조화될 수 없고 세상과 하나 될 수 없고 그래선 안 될 존재들입니다(코린토B 6:14-18). 그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신자의 표징들

신자에겐 신자 다운 표징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늘 언급해 왔고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신자에겐 표징들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른다는 것은 응당 나타나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바로 마르쿠스 복음서 16:17-17에 있는 내용이지요. 이 말씀은 다른 모든 복음서의 뒷 부분과 함께 예수 크리스토님의 대명(the Great Commisssion) 즉 지상명령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전 1:8만 유일한 대명으로 여깁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개념과 사역만의 선교를 나서는 사람들은 행 1:8 전반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권능을 받고'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권능은 성령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권능을 가리키지요.
바로 그 내용이 맑 16:17-18에 해당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 성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시험에 듭니다. 심지어 이 성구들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인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맑 16장 또는 대부분이 본래 원본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설령 맑16장이 원본에 없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는 내용들입니다.

많은 교인들은,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악령축출을 꺼리거나 두려워 합니다.
주님은 간단히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악령을 내쫓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좀 심한 경우는 금식기도로 가능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손수 시범을 보이셨고 제자들도 본받아 행했습니다.
신자이면 누구나 싸탄을 적대하고 그 졸개들을 꾸짖어 물리쳐야 합니다. 그럼 싸탄과 악령들이 내쫓기거나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자들은 자신에게 이런 표징이 따르는지 긴가민가 하고 무시하거나 의심하거나 망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밀 까부르듯 키 질 하듯 마귀와 부하들에게 당하면서도 당연한 듯 살아 갑니다.

신자들은 또 기본적으로 따르는 방언을 의심합니다.
바로 맑 16:17에 나타난 주님의 이 대명대로 신약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교회시대/사도시대가 시작되던 오순절 그날, 성도들은 일제히 방언과 영의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페트로는 그날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몰려든 3천명의 해외 유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이 광경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전 도처에 초기교인들이 방언을 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맑16:17대로 누구나 방언을 할 수 있음이 입증됐기에 지금 이 시간 믿음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과 신학에 물든 수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기 거부합니다. 믿음과 예수님 이름으로 입만 떼면 혀만 맡기면 방언을 할 수 있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신자에게 따르는 표징이라고 주님을 말씀하시는데 "방언은 아무나 하나? 누구나를 위한 게 아니다. 나는 더 좋은 것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따르는 표징들을 거부하는 사람이 과연 단순교인이 아닌 신자이겠으며, 과연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만사에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어린이가 성장과정을 넘고 단기간에 어른이 돼 버린다면 '애어른'일지 몰라도 참된 성인일 수가 없지요.
믿는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따르는 표징부터 제대로 나타나도록 우리는 단계를 밟아나가야 합니다.

그밖에도 신자의 표징들 가운데는 독사를 만나거나 독극물 중독 위기 등 위급한 때에,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과 말씀으로 대처하는 능력의 활용, 환자를 위한 신유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것을 대단히 어렵고도 '환상적'인 희망사항으로, '맹목적' 신앙으로 생각하고 의혹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따르는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신자는 문자 그대로, 명실공히 믿.는.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약속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을 신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닥친 상황을 두려워 하기만 하는 사람들을 신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극복하고 말씀을 선언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자라고 합니다.

신자의 표지(標識)와 본분

주님 말씀대로 신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고 뭇 영혼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지/정/의로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휴머니즘 인류애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을 부음 받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인간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없는 투신과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코A 13:3)

끝으로, 신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맑 8:34).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고, 주님께 합당치 못합니다(마 10:38).
이것은 주님을 위해선 나의 목숨도 모든 것도 아끼지 않는 태도를 뜻합니다.
그것이 어렵고 아까울 것 같아도 주님께 바치면 넘치게 보상 받을 수 있는 헌신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자 다운 신자가 됩시다.


주님 예수 크리스토시여!

티엘티 독자들과 함께 우리 모두 참 신자들이기 원합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게 하소서.
늘 주님을 바라 보게 하소서.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권위와 긍지를 갖고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보좌에 앉혀진 사람으로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로
늘 승리하며 사는 우리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소서

주 예수님의 전능한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