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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비밀집단

핸델은 프리메이슨이었나?

핸델

매년 이맘 때-대강절/대림절/강림절, 성탄절 시즌-나 사순절/수난주간/부활절 때면 다수 교회와 미디어를 통해 '메시아'의 음악이 울려 퍼지곤 한다. 합창곡 '할렐루야'로도 유명한 이 오라토리오의 작곡가, 조지 프리드맄 핸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 ,독일식 표기: 게오르그 프리데리히 핸델, 이탈리아식 발음: '헨델', 영국식: '핸덜').
그는..프리메이슨이었을까?
 
여러 해 이 주제를 생각해 왔고 자료도 상당량 수집해 봤다. 결정적인 동기랄까, 까닭은..여기저기 메이슨 관련 사이트-pro이든 con이든-에 핸델의 이름이 나열돼 있기 때문. 또 내년은 핸델의 서거 250주기를 맞는 해이기도 하다.

핸델이 프리메이슨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시시비비는 오랫동안 '그늘 학계' 일각에서 꾸준히 회자돼 왔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성경적으로 보면 매우 중요하다고 필자는 본다. 메이슨이면서 동시에 참 기독교 음악인 내지 참 교회음악인일 수가 없는 탓이다!
메이슨은 근본적으로 진리와는 먼 비밀집단이다. 기독교음악인이라면 다른 신자와 마찬가지로 성경 진리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는 일이다.  

신구교 음악인들 중 널리 또는 상당히 알려진 메이슨 명사로는 레오폴트/볼프강 모차르트 부자, 프란츠 요젶 하이든(일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SB의 아들, 그렇다고 아버지 바흐도 메이슨이었던 것은 아니다), 새뮤얼 웨즐리(찰스 웨즐리의 아들. 존/찰스 웨즐리까지 메이슨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등이 있으며..저 유명한 찬송가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의 작곡자 아터 S. 설리밴 경, 러시아정교회의 다양한 찬송가와 성가의 곡을 쓴 디미트리 S. 보르티니안스키 등이 있다.

그밖에 고전 오페라의 명장인 크리스토프 글뤀, 낭만파 후기 대가 프란츠 리스트, 얀 시벨리우스도 메이슨이었고, 가장 최근,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의 작품 '아이다'가 숫자 '3' 등에 의한 메이슨적 이상을 추구했다고 추정해온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일리가 드디어 베르디를 '프리메이슨'으로 규정하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수많은 유/무/익명 음악인들이 프리메이슨이었다. 

18세기 프리메이슨(석공 단원)의 모습. 목에 건 직각자+컴파스 로고가 또렷하다


성경에 따르면, 이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크리스토와 벨리알이 결코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핸델도 이들의 '형제'(메이슨들은 동지들을 brother, 복수 brethren, 호칭 약자 Bro. 등으로 부른다)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메시아'나 기타 그의 화려한 교회음악 작품들도 적어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 무의미하다고 봐야 한다. 세속문화적으로는 굉장한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프리메이슨들은 정치와 경제 기타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 예술방면에 크게 기여한 역사상의 위대한 '형제'들을 각별히 명사로 떠 받들어 준다.
음악계에서 그들이 늘 엄지를 들어 주는 대상이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음악사상 프리메이슨리에 가장 열렬히, 헌신적으로 기여한 음악인이기 때문이다. 비엔나 '자선'지부(lodge)에 입단한 그는 스스로 팔려 '마법피리', 메이슨 행진곡 등 수많은 프리메이슨 음악을 작곡해 바쳤다.

바흐의 또 다른 아들 C.P.E. 바흐와 모차르트, 하이든 등의 후원자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오스트리아 외교관 곹프리드 반 즈비텐도 잘 알려진 메이슨 명사였다. 그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핸델과 하이든의 음악을 소개했고, 그에게 비엔나 상류사회를 위한 핸델 음악 초연을 주선한 장본인이다. 

핸델이 활약한 18세기는 유렆에 메이슨리 운동이 한창 팽배해 가던 때였다.
영국 메이슨들은 18세기의 최대 권력 집단이었다. 물론 왕가에도 메이슨들이 있었고, 따라서 왕실의 막강한 입김 지원도 받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핸델이 영국에 입국/귀화한지 불과 몇 년 안 된 1717년 6월24일, 런던의 4개 지역 라지가 한데 어울려 세계 최초의 그랜드라지(대체로 국가별 총본부를 뜻한다) 겸 대영제국 메이슨들의 총본부 격인 영국연합그랜드라지(UGLE)가 결성됐다.

영국 메이슨들의 총본부-런던 영국연합그랜드라지-건물인 프리메이슨 홀과 문장. 1717년 결성된 비밀집단이다.

바로 그 다음달인 7월, 핸델은 자신이 영국에 입국하기 직전인 1710년초 한때나마 궁정악장으로 선임돼 모셨던, 독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그가 영국왕 조지1세로 등극하는 통에, 사죄 조로 왕이 평소 즐기는 타잎의 가락을 총동원한 '물의 음악'(Water Music)을 급거 작곡해 테임즈 강변에서 연주했다(이 음악은 메이슨들의 애청곡이다).

핸델은 왕족과 귀족들, 심지어 동료 음악인들까지 수많은 메이슨들과 친분과 교류를 나눈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음악계는 메이슨들이 깊숙이 침투한 분야였다. 메이슨 음악비평가 사이먼 플레밍의 글을 보면, 흔히 음악비평가들은 서구의 역사적 음악을 세속음악과 종교음악 두 부류로만 나눠 비평하지만, '제3'의 비평 분야가 곧 메이슨 음악이라고 나름으로 주창한다.
그러나 플레밍은, 핸델은 결코 프리메이슨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한다.

핸델 당대의 메이슨 음악가들은 그밖에도 런던 헤드 지부에 결속됐던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제미니아니, 찰스 애비슨, 모리스 그린, 새뮤얼 아놀드, 윌리엄 보이스(추정), 펠리체 지아르디니(추정), 더햄 지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존 갍, 윌리엄 체트우드 등이 있었다. 메이슨의 각종 의식전통에 있어 음악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들 다수는 (성공회)성당/교회음악 사역을 겸했다.

핸델을 본 따 작곡한 또다른 명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로 유명한 하이든도 한때나마 사랑스런(?) 어린 후배 모차르트의 간청에 못 이겨 약3년간 메이슨리에 가입했으나 자신의 카톨맄 신앙에 위배된다며 떠나갔다. 모차르트도 천주교도였으나 무덤 속까지 '충성' 구호를 외치며 메이슨리의 끈을 놓치 않았다.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프리메이슨이었던 셈. 그래서 온 세계 메이슨들에게 존중과 애호를 받는다.   

핸델의 경우 그랬던 흔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메이슨 사회에서는 다른 유명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핸델의 음악을 적극 활용한다. 예컨대 '수상음악', '불꽃놀이' 등은 메이슨들이 애청 곡목들이며 '메시아'의 일부를 포함한 다양한 성가들도 메이슨홀에서 연주된다. 모차르트도 비엔나의 귀족들을 위해 핸델의 '메시아'를 편곡 연주하기도 했다.

미국 자생 프리메이슨 계열인 요크라이트(YR)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19세기 전반기의 명사/작곡가 토머스 스밑 웹은 핸델-하이든 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으로서 1815년 성탄절에 첫 음악회를 지휘하고 독창도 했다. 1820년대 메이슨 명사, 조너스 치커링도 같은 단체의 회장을 지냈다. '뉴잉글랜드프리메이슨'(1874년 발행) 연감에 따르면, 1824년 5월24일 해노버 메이슨 홀에서 열린 '트리니티 성전기사단 캠프' 봉헌식에서 핸델 소사이어티가 찬미가 두 곡을 불렀다. 조지 마틴의 책, '영국 메이슨 잡록집'을 보면 핸델 당대 사회를 풍자해 놓기도 했다. 
말하자면, 메이슨들도 핸델의 음악을 즐기고, 늘 끼고 돈다는 얘기. 물론 그랬다고 해서 핸델이 메이슨이었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핸델은 J.S. 바흐처럼 경건한 독일 루터교 가정 출신으로 평생 루터교인이었다. 그의 삶의 여정과 편력을 보면, 루터교회는 물론, 한때는 칼뱅교회, (이탈리아에선) 천주교, 영국에선 성공회 등을 위해 재능을 발휘했으나 기본적으로 루터교 정신을 늘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시 일시적으로 오페라 작곡을 금지한 이탈리아 구교권 아래서 잠시 교회음악인으로 뛰었을 뿐, 그가 귀화한 영국의 세속 오페라계에서 계속 활동했다.

그 뒤 신경향의 인기품종인 '거지오페라'(opera buffa)와 싸우다 파산 지경에 이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페라를 포기, 작품 '에스더'에서부터 성경의 스토리를 빌린 오라토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신앙의 변화 때문이기보다는 주로 그럴 만한 대본(libretto)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시아' 대본 편집자, 찰즈 제넨즈

이런저런 전기를 읽어 보면, 핸델의 후원자이자 아마추어 대본작가/편집인인 찰즈 제넨즈가 그의 사저 채플린 사제의 도움으로 성경과 기도서 등을 빌려 엮은 '메시아' 대본에다 곡을 붙일 동안 핸델은 모종의 영적 체험을 한 듯한 기록들이 있다. 그는 정말 거듭났을까. 거듭남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진정 시인하는 데 있다.

필자가 핸델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메시아' 작곡 당시 그가 진정 거듭났다면 그런 열매가 보일 만도 한데..그의 나머지 여정을 보면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그는 '메시아' 이후 거룩한 음악만 작곡한 것이 아니라 곧 이어, 과거와 별 다름 없이 그가 오페라 전성기에 천착했던 이교 신화에 기초한 '헤르쿨레스', (성적인 묘사 등이 두드러진) '세멜레' 등을 써 나아간 데서 일종의 모순 같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세상에서 아예 떠나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거듭난 뒤에도 세상에 여전히 살긴 하지만 세상과 구별돼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 

참고로, 핸델의 (오페라가 아닌) 연대순 오라토리오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메시아' 전후의 소재에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부활 (La resurrezione 1708년 성경)
브로케 수난곡 (Brockes Passion 1715 성경)
에스테르 (Esther, 1718 성경)
아키스와 갈라테아 (Acis and Galatea, 1718, 그리스 신화)
에스테르 (Esther 1732, 위 1718년 곡의 개작. 성경)
데보라 (Deborah 1733, 성경)
아탈리아 (Athalia 1733, 성경)
알렉산데르 대왕의 축연 (Alexander's Feast, 1736, 존 드라이든 서사시, 뉴버러 해밀턴 번안)
시간과 진리의 승리 (Il trionfo del tempo e della verità, 1737, 존 밀턴 서사시)
샤울왕 (Saul, 1738, 성경)
에집트에서의 이스라엘 (Israel in Egypt, 1738, 성경)
즐거운 사람, 생각 깊은 사람과 단정한 사람 (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 1740, 밀턴/제넨즈, 풍자시)
메시아 (Messiah 1741, 성경)
삼손(Samson 1741, 성경)
세멜레 (Semele 1743 그리스 신화/비극)
요셒과 형제들 (Joseph and his Brethren 1743 성경)
헤르쿨레스 (Hercules 1744 그리스 신화)
벨샤자르왕 (Belshazzar 1744 성경)
특별 오라토리오 (Occasional Oratorio 1746, 주로 성경 기초)
유다 마카비 (Judas Maccabaeus 1746, 외경)
여호슈아 (Joshua 1747, 성경)
알렉산데르 발루스 (Alexander Balus 1747, 마카비서 기초).
수산나 (Susanna 1748, 가경 기초)
슐로모 (Solomon 1748, 성경)
테오도라 (Theodora 1749, 전설 속 순교여성)
헤르쿨레스의 선택 (The Choice of Hercules 1750, 신화 배경 풍자시)
예프타 (Jephtha 1751, 성경)
시간과 진리의 승리 (The Triumph of Time and Truth 1757, 위 1737년 작품의 개작)


한편 제넨즈와 핸델이 서로 진정한 영적 감화를 끼칠 만한 인물들이었나 하면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양쪽의 서신 교류에 따르면, 핸델은 제넨즈를 상류층의 한 명으로서 늘 '귀하'(Sir)로 호칭하는 등 깍듯이 경대했다. 상당한 부호였던 제넨즈는 곺설(Gopsall)의 드넓은 대지에 자신의 저택과 정원 등을 꾸며 놓고 살았다. (곺설 저택의 건물 대부분은 1952년 헐리고 훗날, 정원 농장으로 개조됐다.)

경내엔 작은 '가든 템플'('곺설 템플'로 불리는 기둥 폐허가 남아 현재 복원 중)도 지었다. 바로 이 템플에서 핸델이 메시아의 대부분을 작곡했다는 설을 주로 제넨즈 후손들이 주창해 왔다. 그러나 현재 '핸델 하우스' 박물관이 된, 런던의 핸델 자택에서 작곡됐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다만 핸델이 1741년쯤 곺설을 자주 드나들며 제넨즈와 교분이 두터워진 것은 사실이다.

 제넨스의 곺설 저택과 정원. 왼쪽 끝 '가든 템플'의 지붕에 마리아상 같은 '종교의 상' 일부가 보인다. 이 템플에서 '메시아'가 작곡됐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이 템플엔 프리메이슨리 건축공법 특징의 하나인 '쐐기돌'이 눈에 띄지만, 물론 그냥 메이슨 석공들이 흔했던 당시 유행의 하나였을 수도 있다. 쐐기돌 양식은 지금도 자주 쓰인다. 지붕 위엔 제넨즈의 친구인 시인 에드웓 홀즈웙을 기념하려고 프랑스 출신 조각가 루이 프랑소아 루빌리앜이 제작한 '종교의 상'이라는 여인상이 서 있었다. 현재 리스터 시의 벨그레이브 홀 뮤지엄에 보존돼 있는데 대형 십자가를 껴안은 품이 흡사 마리아상 같은 느낌이다. 이 템플은 기독교적 의도로 건립됐을까?

제넨즈는 참 신자였을까? 제넨즈는 핸델에게 성경 이야기를 엮은 오라토리오 대본들 뿐 아니라 세속 대본들도 제공했다. 제넨즈가 프리메이슨이었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그는 당대의 이신교도(deist)들을 혐오했다는 데서 그럴 가능성이 적음을 발견한다. 메이슨들은 기본적으로 이신교도들이기 때문이다.   

곺설 (가든) 템플의 얼마 전 모습. 현재는 복원 중임. 왼쪽 앞에 따로 떨어져 나간 아치 한 가운데 쐐기돌이 보인다. 쐐기돌은 메이슨 건축양식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예언과 탄생, 고난과 부활, 영생 등 3부로 구성된 '메시아' 가사를 훑어 보면 구약 예언들을 대거 인용했고, 신약 인용은 희소가치가 있다. 더구나 정작 주인공인 참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란 이름은 단 한 곡에서 이런저런 성부(파트)를 통해 수 회 나타난다. 물론 '어린양'이란 계시록의 명칭을 인용하기도 했다.

제넨즈는 평소 가까운 거리도 거창하고 화려한 차림으로 4두마차를 타고 다니곤 했지만 문화예술인들을 적극 돕는 등 퍽 "관대"했다는 후문이다. 핸델 역시 가난한 음악인들, 빈민과 고아, 병원 등에 박애정신을 발휘했다. 아일랜드와 영국에서의 '메시아'의 공연수입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에게 넉넉히 기부됐다.

그러나 핸델의 속마음은 실제로 당대의 현실교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당대 제도교회를 조소했다고 보는 게 더 옳은 관점일 터이다. '메시아'는 처음부터 교회당 용이 아닌 음악회, 연주홀과 극장 등 다른 장소를 위한 것이었다. 핸델은 당대 영국 국교회의 율법주의적 거만성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당/교회당이 아닌 극장에서 "거룩한" 오라토리오를 연주한다고 비난하는 교권자들에게 속으로 코웃음을 날리곤 했다. 당대 종교인들은 세속 연주홀과 오페라 극장에서 종교성 오라토리오를 공연하는 핸델을 안쓰럽게 또는 지독히 경멸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당대의 호사가 호레이스 월폴은 다음과 같이 조소하듯 일각의 반감을 내비친다(1743년 기록).

"..핸델은 오페라 대신 오라토리오를 셑엎해 놓고 성공하고 있다. 그는 광대극의 모든 여신들을 고용하고 두 극장의 막간용 '로스트비프' 가수들을 동원해놓고 그들은 용감무쌍하게 할렐루야를 외치고, 청중은 서창에다 '앙코르'를 질러댄다.."   


제넨즈가 자신의 저택 채플에다 설치했던 오르간(현재이름: '패킹턴 그레잍 오르간'. 건반은 합성사진). 1749년 핸델의 서신 자문(왼쪽)을 받아 주문 제작됐다. 핸델은 물론 이 오르간을 수시로 연주했을 것이다. 
 
핸델은, 오히려 영국교회 정서를 교묘히 이용한 흔적도 있다. 즉 '메시아' 작곡과 초기연주를 거친 1744년, 사순절 기간에 선두 연주 승인을 따내려고 이교적이고 일부는 다소 센슈얼한 '세멜레'를 성격상 영국 오페라인데도 종교성 오라토리오로 포장해서 내놓은 것. 
핸델의 명성과 재능을 한껏 존중해 코벤트 가든 연주회에 기껏 참석한 왕족과 귀족들, 상류층 신도들은 모종의 종교성을 기대했다가 뜻밖의 이교적인 내용에 모두들 경악해 마지 않았다. 더욱이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영어로 된 점에 무척 실망했다.

'세멜레'는 현대에도 가끔 연주되는, 작품성이 뛰어난 세속 명작이긴 하나 당대의 한 시절엔 이처럼 용어학(terminology)상 졸작(?)에 가깝게 평가됐다. 연주회는 4번에 그쳤다. 핸델은 부랴부랴 노골적인 장면들은 완화하고 일부를 이탈리어로 바꿨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핸델은 세멜레 공연에서 졸속 내지 졸렬함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핸델의 공연 드림팀은 "거룩한 무리"가 아니었다. 성악가들이건 연주자들이건 대부분 국내외 세속음악인들이었고 일부는 재능과 외모 탓에 스캔들을 뿌리기도 했다. 내용이 성경적인 오라토리오 연주 때도 그랬다. 메시아 초연 때 합창단은 인근 성당의 성가대를 빌리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핸델은 자신의 종교작품에 대한 모종의 긍지가 대단했다. 메시아 초기 연주 때 한 귀족이 다가와 "훌륭한 엔터테인먼트였다"고 평하자 "연예용이었다면 저는 유감이었을 겁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더 잘 만들었을 텐데요"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핸델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는 비록 루터교인이었으나 부지런한 성공회 성당 출석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핸델이나 제넨즈나 둘 다 평생 한 번도 결혼한 적 없이 총각으로 지냈다는 사실. 하지만 끈질긴 추적과 일설과는 달리, 그들이 동성애자였던 흔적은 전혀 없다!)

자선과 박애는 교계 뿐 아니라 프리메이슨들도 자주 베푼다. 메이슨들은 박애정신으로 자신들을 '자선단체'로 자임하거나 포장하길 즐긴다. 예를 들면 한국전 당시 부산엔 피난민 진료를 위한 프리메이슨 병원이 존재했다. 프리메이슨들은 물론, 현대의 '기사단' 등 일부 비밀집단들이 적극 자선박애단체로 자처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명사 자선가들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러나, 이상을 통털어 볼 때 제넨즈가 경건으로써 핸델에게 어떤 영적인 감화를 끼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핸델은 모차르트처럼, 자신의 작품과 연주생활 속에서 프리메이슨리 특유의 형이상학적인 '빛' 또는 '계몽'(enlightenment)의 이상(理想)을 구현하려 했을까? (역시 메이슨 가담 여부가 불투명한) 베토벤에게선 그런 점이 나타난다. 그의 최후 교향곡 '합창'의 성악곡 가사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는 자연철학, 이신교와 비슷한 유의 계몽철학적 이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쉴러 자신이 메이슨이었을 가능성은 적다. 베토벤을 아류로 끌어 들이려 애쓰는(?) 일부 메이슨들은 그의 교향곡 수가 '9'인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핸델 당시의 젊은 오페라 작곡가이자 프리메이슨이던 글뤀은 인간 이성과 자연을 높이는 작품들을 썼다. '계몽'의 저자, 피터 갭은, 핸델이 여느 철학자들처럼 종교에 거리를 두고 철저히 세속적 장인 정신으로 기독교보다는 이교의 테마를, 종교보다는 세상적 주제를 선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핸델이 메이슨 이상에 근접했다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다.

셀리나 헤이스팅즈 (헌팅던 백작부인)

그렇다면 핸델이 거의 임종 시까지 말년에 했다고 알려지는 일련의 신앙고백들은 성령의 감화이든지 아니면 전달과정에서 과장된 것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핸델은 죽음이 가깝자 의미 깊은 신앙 고백 같은 말들을 남겼고 특히 죽기 얼마 전, 감리교의 웨즐리 형제, 조지 휱필드 목사 등을 도운 헌팅던 백작부인, 셀리나 헤이스팅즈 여사를 불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핸델은 혹, 비밀리 또는 공개리에 크리스천-메이슨을 자처하는 교계 명사들과 같은 부류였을까. 이 점을 필자는 보다 깊이 탐사해 봤으나 다행히도, 결론은 부정에 가깝다.  

그럴 만한 까닭이..몇 가지 있다.

첫째로, 핸델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메시아' 초연을 할 초기에 일시나마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공상물작가 조너턴 스위프트의 강력한 방해 공작에 부딪치기도 했다. 스위프트는 성공회 사제 겸 유명한 프리메이슨이었다. 스위프트나 핸델 둘 다 메이슨이었다고 가정한다면, 특별한 이유 없이 '형제'가 '형제'를 강력 견제/반대한다는 것은 다소 비논리적이다.

둘째로, 핸델을 '동료'로 여기는 메이슨계 일각의 주장에도 불구, 핸델이 프리메이슨리를 거부한 흔적이 있다. 필자도 이것은 학계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폴 클레버 모노드의 분석에 따르면, 대영제국 프리메이슨 총본부가 결성된 1710년대 초기에 영국 오페라계에 대두한 핸델이 메이슨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냄새를 맡게 된다.   

또 폴 헨리 랭의, 부피(전768쪽)와 권위가 있는 핸델 전기 '조지 프리드맄 핸델'의 제247쪽에 따르면, 핸델이 프리메이슨 집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고 썼다. (참고로, 헝가리계 미국인 음악학자로 훗날 콜럼비아대 음악학 교수를 지낸 랭은 과거 한때 라커펠러 재단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랭 정도의 권위자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믿을 만 하지 않을까.   

또한 프리메이슨들의 자체 매거진/웹진 '프리메이슨투데이'에서도 핸델이 메이슨이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http://www.freemasonrytoday.com/04/p06.php

위에서 전술한 대로, '뮤지컬타임즈' 2008년 가을호에 실린 사이먼 플레밍의 논단, '화음과 형제우애: 18세기 더햄 시의 음악가들과 프리메이슨'에서도 핸델이 그랬던 증거가 없노라고 단언한다.

또한 앞에서도 비쳤듯, 핸델을 지속적으로 도운 제넨즈가 흔히 메이슨들의 공통된 믿음인 이신교(deism)를 반대했기에 둘이 메이슨일 가능성이 적다.

결론적으로..핸델은 다행스럽게도 프리메이슨이 아니었다는 잠정적 추론으로 글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추후에라도 핸델이 틀림없는 메이슨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나면 꼭 반론을 펴 주길 바란다.  

핸델에 관한 필자의 다음 글도 참조하길. (상당히 오래 전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