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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방언은 왜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

김삼

성경은 100% 믿어야 옳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층은 스승과 책에서 배우고 감화 받은 이런저런 이유와 이론들 때문에 성경을 체로 걸러가며 5%, 10, 20, 30, 40, 50%..식으로 감하여 믿는다. 솔직히, 불행한 일이다.

영언(靈言/방언)[각주:1]의 예를 들면..
 
    영언은 현대에 있을 수 없다
    불필요하다
    따라서 현대의 영언은 가짜일 수 있거나 다 가짜다
    아니면 마귀 영언이다
    결론적으로 현대에 영언한다는 사람들은 다 가짜 신자가 아니겠나.
    그러니 결국 이단이 아닐까.

뭐, 이런 식이다!
정말 오래오래, 지겹게, 귀 따갑게, 상투적으로 들어 온 말들이다.
[솔직한 느낌을 영어로 풀어 보면..I'm fed up with this stuff! Enough is enough!]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걸려 갈팡질팡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은 성경에 분명히 있는 이 진리를 부정하고 만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런 학설이 사실이라면, 지난 1980년대에 뉴욕 한인교계를 휩쓴 성령운동으로 영언을 하기 시작한 수많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은 다 가짜 신자들일 것이다. 논리상으로 그렇지 않나.
모 대형 장로교회의 목회자는 미국인 강사 D.G. 목사를 방문하러 호텔에 들렀다가 객실에서 영언이 터졌다. 80년대 당시 교파/교단을 초월한 수많은 신자들이 영언을 하고, 은사와 병 고침을 받고, 그 결과 교회가 부흥 성장하는 꿈(?) 같은 역사들이 일어났다. 은혜의 '대박' 또는 허리케인이었다. 그런데 워낙 사탄의 입김이 세다 보니, 배 부르고 난 추후에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가짜'였다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안하지만, 성경엔 "영언이 현대에 있을 수 없다"는 유의 언급이 눈 씻고 봐야 없다. 다 학계의 헛소리다! 마르쿠스복음서(맑) 16:17을 보라. 믿는 이들 곧 신자들에겐 다 따르는 5대 표징 중 엄연히 영언이 포함돼있다. 그런데 5대 표징은 "믿는 이들에겐" 이라는 조건부 단서가 붙어 있다. 안 믿는 이들에겐 안 따른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현대적 적용을 거부/부정하는 견해는 다 자신의 불신과 체험 부족을 땜질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한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반대측은 거의 예외없이 "너는 체험주의, 경험지상주의, 신비주의.. 고로 '이단'!" 요런 식의 공방을 일사천리로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체험 없이 거듭나는 걸 봤는가? 구원은 체험이 아닌가? 회개와 사죄의 은총은 체험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감격하는 건 체험이 아니던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초자연적 체험 없이 그분의 자녀로서 입양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영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시해 보자.

    "또 그분(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온 세상으로 들어가 모든 피조물(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오! 믿고 침례/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죄를 받을 것이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악령들을 내쫓고, 새로운 말(=영언)을 하고,
    뱀들을 집어 올리며, 혹시 무슨 독극물을 마셔도 그것이
    그들을 해칠 수 없고,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
    (맑 16:16~18. 사역).

위 말씀은 주님의 대 위임(the Great Commission. 또는 대명/지상명령)에 포함돼 있다. 행전 1:8만 단 하나의 대 위임은 아니라는 얘기다. 대 위임엔 위 말씀과 마태복음서 28:18~20도 모두 포함된다. 마태 28장, 마르쿠스 16장, 루카 24:49, 행 1:8 등은 몇몇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몇 차례의 승천사건 때 주어진 것들이다. [필자의 글 '예수 승천은 딱 한 번?' 참조].

위 말씀을 부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 왔다. 예컨대 극단적 칼뱅주의자인 데다 시한부 종말론자인 해럴드 캠핑(패밀리 레이디오 대표)은 위 본문 전체를 그냥 '상징'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런가 하면, 일부 사본에 맑 16:9~20 부분이 생략됐다는 이유로 이 부분의 권위성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별 이유 없는 의심일 뿐이다. 5대 표징들이 실제로 사도들과 성도들의 행적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위 말씀을 부정하려는 또 다른 시도 하나는 바로 일부 학자들의 자의적 해석. 그들은 위의 대 위임에서 유독 16:17~18의 표징들만, 또는 새 말(영언: 원어는 '글로싸'. '영언'이라는 한글 번역은 초기의 오역이다) 부분만 따로 떼어, 현대에 없거나 불필요한 요소라고 주장들을 한다.

이런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자신들도 모르고 저지르는 자가당착 발언이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의 문맥이 웅변하듯, 주님의 대 위임은 온 세상 땅끝에 복음이 선포되기까지는 계속 유효한 것인데, 유독 표징 부분만, 또는 영언만 무효하다는 말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문맥과 문장의 논리상으로도 가당찮은 주장인 것이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지 않는('못하는' 이 아니다.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대 위임에서 위 말씀을 되도록 회피하거나 삭제하려고 해온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로부터 소아시아, 유럽 일부까지만 기독교가 퍼진 초기교회 당시에도 이런 권능이 필요했다면, 온 세계에 신자들이 퍼져있고 죄악은 과거보다 더 극에 달해있고 마귀는 과거보다 더 극악하게 설쳐대는 지금, 그때 필요했던 권능이 왜 이젠 더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령의 권능 없이, 성경책 하나만 갖고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얘긴가? 말이 안되는 논리다!

그리고 성령은 2000여년전 예루살렘에 임하셔서 떠나지 않고 지상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다. 2000년전 다락방의 120 성도에게 성령침례/세례와 함께 영언/은사 등을 선물로 주신 성령께서 지금은 안 주시고 잠자코 앉아계시단 말인가? 과거 신자들과 현대 신자들을 차별하시는 성령님이시란 얘긴가? 아니면 과거에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은 주실 수 없는 비전능하신 하나님이시란 얘긴가?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하시는 하나님은 믿기가 어렵다. 예수 크리스토는 어제와 오늘, 영원히 불변하시고 한결 같은 분이시다! 어제의 신자들에게 영언을 말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신다.

주님은 분명히 믿는 이들에겐 누구나(!) 따르는 표징/징표의 하나로 영언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악령을 내쫓는 사람들, 부지중 뱀을 집어들었거나 독극물을 마셨어도 예수 이름으로 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예수 이름으로 손을 얹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자는 모두 예수 이름으로 영언을 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말고. 반쯤 믿는 사람들도 말고.

"모든 신자라면..왜 나는 믿는데도 영언이 안 되냐? 개인마다 다른 은사가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필자도 과거 같은 물음을 가졌었으니까. 예수 이름으로, 믿음으로 혀를 맡기고 나 자신이 직접 안해서 그렇다. 구원받았을 때의 믿음과 마찬가지 믿음으로 나 자신이 입을 열고 혀를 움직여 모국어가 아닌 영언을 해야 한다. 행전 2:4을 보면, 초기 성도들은 분명히 성령이 말하게 하심(utterance)을 따라 자신들이 말하기를 시작했다(They began to speak in tongues). 말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란 얘기다.

비신자는 성령을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나야 한다. 독자는 구원받고 거듭난 신자인가? 그렇다면 주님의 약속 그대로 반드시 영언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주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보장하신 약속이다.
지금 당장 무릎 꿇고 불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예수 이름으로 입술을 열고 말을 하되, 결코 모국어를 해선 안 되고 [성령님이 이미 모든 신자들에게 내리신 언변 즉 utterance를 따라] 직접 곧장 영언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자신이 믿음으로 입을 열어 혀를 굴려야 한다는 얘기다.

영언은 신자 누구나 하게 돼 있다. 강요가 아니라 위 말씀처럼 주님의 대 위임이다. 그 위임을 따르고 안 따르고는 각 자의 의지에 달렸겠지만.
그리고 개인끼리 서로 다른 은사로서의 '각종 영언'(코린토A 12:10)은 기능과 직능에 있어 위 말씀의 영언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신약 코린토A 14장을 잘 분석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의 대 위임의 일부이자 성령침례의 표징으로서 모든 신자가 하게 된 영언과, 공적인 교회 모임에서의 은사자들의 영언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모두에게, 후자는 일부에게만 가능하다.

영언이 지금 왜 필요한가? 지금 내 영 속의 비밀을 하나님께 아뢰야 하기 때문이다(코a 14:2). 우리는 사도 파울 당시에만 영의 비밀을 아뢰야 했고, 지금은 영의 비밀을 아뢸 필요가 없다고 상상할 수 없다!

모국어 기도는 아뢸 수 있는 범위와 제목들이 한정돼 있고 주변환경에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영언기도는 언제나 [심지어 속으로도] 할 수 있다. 걸어가면서도, 화장실에 가서도 하며, 심지어 누워서 잠을 자면서도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올 때가 있다. 24시간 전천후적으로 가능한 것이 영언기도다. 파울이 그랬다(코A 14:18).

영언 기도는 내 영이 직접 하나님께 비밀을 고하므로 마귀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완전한 비밀 기도요, 절대 극비가 보장되는 완벽한 '모르스' 부호다. 그리고 지구 저편의 모르는 성도를 위해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되는 완전한 중재기도다. 음식의 해독을 제하거나 위험을 미리 경고받아 예방하는 완전한 식사기도, 축사/감사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물론, 완전한 찬양의 기도다! 위급할 때 의식적/무의식적인 영언기도를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나를 도와 악령을 대적한다! 너무나 편리한 무기인 것이다.

그리고.."영언을 하는 사람들은 왜 행실이 다 그 모양이냐?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독자 자신이나 필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보시기엔 다 오십 보 백 보다. 자신의 삶이 남보다 의롭다면 얼마나 더 의롭겠는가? 거룩하면 얼마나 더 거룩하겠는가? 우리의 의와 거룩함은 예수님께 거저 받은 것이지, 내가 자랑할 아무 건덕지가 없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나부터 잘하려고 힘쓰면 된다. "너나 잘하세요"란 유행어가 여기서도 타당하다.

그리고 2000년전 오순절 당대의 영언은 지상언어였는데 오늘날의 영언은 그렇지 않으니 '가짜'다 라는 주장도 한낱 인간의 이성으로 짜낸 상상이다.

왜냐고?
    첫째로, 영언은 하늘에서 내린 초자연적 언어인데,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 바벨탑에서 깨져버린 지상언어를 하늘에서 다시 내려주시겠는가?

    둘째로, 오순절 당대에 '지상언어'처럼 들렸던 이유는 단지 영언으로 한 말이 상대방에겐 각자의 나라 말로 들린 것이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예를 들어 한 선교사는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기 전 마지막으로 영언기도를 했는데, 식인종들이 갑자기 무릎 꿇고 통회 자복을 하기에 영문을 몰랐다가 나중에 추장의 말을 통역을 통해 듣고서야 자신의 영언이 완벽한 그들의 토속어로 들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마 콴' 목사의 뉴욕집회 때, 한 한인성도가 영언을 했는데, 콴이 완전한 중국어로 알아듣고 "님은 한인 같은데 어떻게 중국말을 그렇게 잘하세요?" 라고 물었던 케이스도 그것이다. 이같은 역사는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영언은 오순절계/은사계/순복음계의 전용,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표징과 함께 교파/교단을 초월한 모든 신자에게 주신 주님의 대 위임이다. 독자가 영언을 하고 말고는 본인의 자유다. 그런데 남이 영언하는 것을 '가짜'라고 부정하거나 '마귀의 것'이라고 함부로 비판하지 마라.

학자들과 독자의 생각만 옳고, 주님의 대 위임은 그르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자신도 모르게 성령을 폄훼하고 훼방하는 일은 없어야 더 슬기롭다. 슬기롭기를 바라는가? 말을 삼가라. 영언을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 "가짜다" 고 의심만 하는, 부끄럽고 치명적인 실수를 스스로 사서 하지 마라. 그건 믿는 신자다운 태도도, 탐구하는 학자다운 태도도 아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힘써야지, 모르는 것도 다 아는 척 하는 게 참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영언은 믿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따르는 표징이라는 게 주님 말씀이다. 왜 주님 말씀을 의심하고 대적하는가? "현대엔 영언과 은사가 없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가 이 다음에 얼굴 뜨뜻해지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엎질러진 물(말)은 주워 담기가 극난하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

필자도 과거 한때 의심했었다가 중년기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1. '영언'이란 말은 티엘티에서 쓰고 있는 나름의 번역어다. 한글 성경의 '방언'(方言)이란 용어는 원어 '글로싸' 또는 글로쏠랄리아를 행전 2'5-11에 의거, 지상언어, 지방언어, 심지어 사투리 등으로 혼동한 것이다. 그러나 영언은 결코 외국어나 토속어가 아니다. 행전 2'8 특히 원문을 보면, 자기네 모국어 또는 지방어로 그렇게 "들렸을" 뿐이며.. 만약 멀쩡한 지상언어를 말했다면 낮술에 취한 것으로 볼 리가 없다(행 2'22.2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