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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요 6] 주님을 따른다는 것

"이때로부터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수가 떠나가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복음 6:66)

참고본문: 요한복음 6장


김삼

1.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쉽지 않음을 우리 누구나 느낍니다.
더구나 우리는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능히 그분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칫, 우리는 두 반대 부류의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1. 내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
2. 하나님은 내가 힘쓰지 않아도 주님을 따르게 해 주신다

위 두 가지 생각이 모두 잘못입니다.

내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면, 아버지의 부르심과 성령님의 권능이 필요 없을 터입니다.
이와는 거의 반대로..내가 애쓰고 힘쓰지 않고도 절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다면 아무런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만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위의 어느 한 가지에 속해 있을 때가 잦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해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습니다. 주관적이라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스스로 참 자유를 누리며 범사에 자유롭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객관적이라면, 만약 예수가 과연 하늘에서 내려 온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간섭이나 추종 없이도 만사가 잘 돌아가고 저 혼자서 잘 해 나가리라는 방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모두 악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몇 가지 치명적인, 부정적/긍정적 진실을 알려 주십니다.

- 아버지께서 주님께로 이끌지 않으시면 주님께로 올 수 없다
-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은 다 주님께 올 것이다.
- 주님께 온 사람은 결코 내어쫓김/버림을 받지 않는다.

이런 주님의 시사는 '절대주권'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지만 구원을 비롯한 범사가 그분의 독자적/주권적 행동만으로 이뤄지진 않습니다. 그분의 선택에 대한 인간 쪽의 반응이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반응이 곧 하나님의 제한성이나 불능성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 반응을 기다리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일방통행적 존재가 아니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태도를 보며 기다리십니다. 

2.
예수님이 갈릴리 호반 언덕의 드넓은 잔디밭에서 보리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5천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유대인 최대 명절의 하나인 유월절이 가까울 무렵이었습니다.
바로 이 유월절 시즌에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 그리고 참 음료수로 계시하십니다.

유월절이면, 유대인들 누구나 고대에 이스라엘 선조가 모쉐의 인도를 받아 미쯔라임(에집트)을 출국해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던 것을 추억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출국 전날 밤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양고기, 쓴 나물 등을 먹었고, 광야에선 만나와 메추리 고기로 배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생산노동 없이 하늘에서 거저 뿌려지던 이적의 만나를 마치 향수에 젖듯 늘 그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적과 표징이 아니곤 좀처럼 믿지 않으려는 게 유대인들의 특성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또 모쉐가 받아 전수한 율법과 만나를 자기 존재와 삶의 상징으로 삼다시피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우상숭배일 법 합니다.

주님은 전날, 갈릴리 호변 잔디밭에서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온 백성을 먹여 주셨고..이튿날 카페르나움 회당에서, 자신이 곧 하늘에서 내려 온 참 양식, 참 음료수라고 설파하십니다. 전날 주님은 빵을 한 쪽씩 떼어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리 하신 뒤, 이튿날은 그처럼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오벌래핑 내지 적스타포지션을 통해 시청각교육을 하신 셈이지요. 

아무튼 주님은 그들을 향해 하늘의 참 빵은 모쉐가 주는 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며, 이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반갑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오, 주님! 이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열정적으로 외칩니다.
이때 주님은 그 빵은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틀레헴(='빵집')의 구유에 생명의 빵으로 오신 주님은 이제 "나를 먹고 마셔라!"고 그들을 향해 초청하십니다. "나를 먹고 마셔야 그대들에게 생명이 있소"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고 마지막날에도 살리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순간, 주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겐 황당하기 짝이 없이 들렸습니다. 
.................?????
"엉? 뭐라고..아니, 저 사람은 요셒의 아들 예수 아냐? 그 부모가 누군지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데, 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나 원 참!"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내심 얼마나 예수님을 업신여기는지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하늘 빵에 대한 요청이 존경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들은 탐욕이 빗나가 실망스럴 때는 으레 주님을 우습게 여기며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서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고 찾는 이적과 표징이 아무 쓸모 없던 순간입니다. 딴 메시아를 찾는 지금의 유대인들도 대동소이하지요.

안 그래도 주님은 진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참으로 그대들에게 말하오. 그대들이 날 찾는 까닭은 표적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오."

돌아 보면, 이들은 바로 전날 호숫가 광야에서 예수님이 나눠주신 다섯 빵덩이를 뜯어 나눈 조각과 단 두 마리 물고기만으로도 5천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광경을 눈이 휘둥그레져 지켜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분이야 말로 우리가 목마르게 기다리던 그분-모쉐 같은 대언자, 메시아다! 이분을 왕으로 모시기만 한다면 광야 선조들처럼 우리는 이제 날마다 일을 안 하고도 공짜로 만나를 먹게 된다!"며 주님을 왕좌에 추대하려고 와락 달려들어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급히 자리를 떠나자 잠시 실망했던 그들은 이튿날도 포기하지 않고 갈릴리 호숫가,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던 그리운(?) 티베리아 언덕 등을 거쳐, 여러 배를 타고 카페르나움까지 건너 와서야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먹던 그 빵 대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제시하는 주님의 말씀에 그들은 여지없이 실망하고 맙니다. 속으로 분통을 터뜨립니다.
"아니, (매일 일을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빵만 하늘서 내려 주면 되지, 무슨 또 자신을 나눠 준대?"
우리는 여기서 "민심이 천심"이란 말의 허구성을 느낍니다.

그러자 주님은 다시, 유대인들의 선조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이젠 먹고 영원히 살게 되는 빵을 주노라고, 자신의 살이 곧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빵이라고 부언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허허~!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자기 살점을 우리한테 뜯어 먹이겠나?"라고 묻습니다. 주님을 비정상적인 광인 정도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유월절 정신의 본 뜻을 계시하십니다.
유월절이라는 고대의 전통은 결국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해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예시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에덴 동산의 '선악지식의 열매'가 선과 악을 극명하게 나눈 율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먹으면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 열매는 곧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얻는 영생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 후 놓쳐버린 그 생명나무 열매는 바로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린 떡은 참 메시아인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교훈을 단순한 역사상식 차원에서라도 전혀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유대인들이 지금껏 그토록 존중해온 과거의 대언자 엘리야는 온갖 이적을 행했고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일개 대언자도 하늘로 올라갔거든 요셒의 아들이라고 해서 메시아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못할 까닭이 뭡니까?
그들에게 이성은 있었는지 모르나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에게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상기시키시고 그러나 주님께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 다시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약속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이 약속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주님의 이 고차원적 계시를 있는 그대로 "삼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거침돌' 격이 된 이 말씀은 심지어 그동안 주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도 상당한 논란을 낳았습니다. 상당수의 제자들이 불행히도 그날 주님을 영 떠나 버립니다!

주님 따르기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지요. 

주님은 떠나는 몇몇 제자들을 보고 속으로 통탄하시며 12제자들에게 "너희마저 날 떠날 테냐?"고 물으시자 페트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한테로 가겠습니까? 주님이 영생의 말씀을 갖고 계십니다"라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페트로는 이 말뿐 아니라 멋진 신앙고백도 했고 훗날 유월절 당일엔 "다 주님을 버리더라도 저만은..!" 하고 차별화 선언을 했지만 주님이 체포되자 한낱 여종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물론 나머지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집니다. 오직 요한만 주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진입했고요.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 한밤중에 주님을 찾았던 니코데모. 그는 여전히 이목을 두려워 하며 아리마테의 요셒과 함께 몰래 무덤에서 주님의 수의 속에 향품을 넣었습니다. 

주님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를 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르심과 인도, 우리의 믿음의 행동과 성령의 권능으로 가능합니다!

사도 파울의 교훈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이제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세상과의 화목을 선언하시고 활짝 열린 팔로 사람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크리스토만을 유일한 메시아, 유일한 구세주, 부활의 첫 열매로 시인하고 믿지 않으면, 아버지의 부르심을 저버리는 셈이 됩니다.

빵과 물고기-눈에 보이는 시각효과를 보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거창한 건물과 그럴 듯한 제도를 보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아니면 생명의 빵을 얻을 길이 없다며 끝까지 버티고 따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왜 그들이 적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과 생명잔치의 초청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믿으며
성령의 권능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조차도 오순절 이후 성령의 권능을 의존하고서야 비로소 올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건만,
아직도 성령의 힘 없이도 자기 힘으로 주님을 능히 따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왜 성령님을 땅에 내려 보내셨는지 그 의도와 목적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한결 같이
성령의 도우심과 권능으로
되살아날 마지막날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