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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다윈은 말년에 신자가 됐는가?

                호프 여사(1886년)와 말년의 다윈

진화론의 시조 찰스 로버트 다윈이 "크리스천"이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물론 하등 일고해 볼 가치도 없는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슈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다윈이 과연 크리스천이었다, 아니었다를 딱히 판가름하기가 애매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객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증거들부터 점검해 본다면..다윈의 개종설은 힘을 잃는다.

다윈을 가장 잘 아는 측근들이나 다윈 자신의 글들을 보더라도..그는 초기에 전통 기독교 '물'을 좀 먹었을 뿐 신자로 거듭난 흔적이 뵈질 않는다.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 영세도 받고 시골 성당 사목자(성공회 사제)가 되려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트칼리지에서 3년간 신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마치기까지 했지만, 22살 때 훌쩍 '비글'호를 타고 떠난 탐사활동을 계기로 결국 교회와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다윈의 아내 에머도 본래는 경건한 교인이었고 둘이 성당에서 결혼했다. 결혼 직 전/후 다소 변질된 다윈의 자연주의적 '신앙'에 에머는 상당한 당혹감을 느끼지만 결국은 남편 따라 신앙도 '묻어' 간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정작 다윈 자신은 생애 후반까지도 과연 성경적 유신론과 창조론을 버리냐 마냐로 고심했다는 주장들을 한다. 하지만 다윈의 자서전과 서신들을 읽어 보면 그럴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다윈은 철저히 의도적인 무신론자로 명백히 자임했다.

중대한 의문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중요한 의문거리가 남는다.

다윈이 바로 죽기 얼마 전에 비로소 "거듭났다"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일소에 붙여 버릴 수도 있겠지만..이 역시 간단히 고사하기엔 매우 진지한 유력설이다. 그렇다고 흥미 본위의 센세이셔널 물은 아니다. 한 번쯤 짚고 넘어 갈 만한 가치와 타당성이 충분히 있다. 

바로 유명한 '호프 여사'(Lady Hope) 스토리이다. 해외엔 널리 유포된 얘기가 한인계나 한국엔 거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소개한다.

이하의 글들은 위키피디어 등에 실린 호프의 전기와 증언, 제임스 무어 교수의 현지 조사 결과에 관한 글들, 무어의 글을 인용하거나 반박한 맬컴 보우든 등의 글을 참조했다.

다윈의 죽음을 몇 달 앞둔 시기에 켄트의 다운(Downe)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했던 '호프 여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영광스러운 가을 오후였다. 우리가 가끔 영국에서 즐기곤 하는 그런 한 날.
잘 알려진 찰스 다윈 교수님 댁에 들어 와 같이 앉아 있겠냐는 부탁을 받았다. 그 분은 죽음에 앞서 몇 달간 거의 침대 생활만 하셨다. 내가 뵈었을 때 그의 품위 있는 용모는 우리나라 왕립학회의 훌륭한 사진감이라고 느끼곤 했지만, 특별히 이때처럼 더 강하게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침대에 일어나 앉은 그는 짙은 보랏빛 바탕에 가볍게 수가 놓인 가운 차림이었다. 등 뒤로 베개들 위에 기댄 채 멀리 바깥의 숲과 곡식밭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켄트와 서리(Surrey)의 아름다움은 노을 빛 아래 찬연히 빛나고 있었고.
내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 고상한 이마와 품위도 즐거움으로 빛나는 듯 했다. 그는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고 바깥 광경을 가리키면서 한 손엔 그가 평소 늘 공부하는 성경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지금 어딜 읽고 계셔요?"
침대 곁에 앉은 내가 묻자, "히브리서요!"라고 답했다. "아직 히브리서예요. '왕의 책'(Royal Book)이라고 저는 부르죠. 웅대하지 않습니까?"
그는 손가락을 몇 구절 위에다 올려다 놓으며 설명을 달았다.

나는 창조 역사와 그 장엄성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묘사한 강력한 견해들과 함께 창세기 앞 부분들을 그들이 어떻게 다뤘는지도 넌지시 전했다. 그는 매우 괴로운 듯 다소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꼬면서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미숙한 신념의 젊은이였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늘 의혹하면서 물음과 착상을 던지곤 했는데 나 자신도 놀랍게 그 신념들은 산불처럼 번져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종교로 삼았더군요."

그는 잠시 멈추고, 늘 정답게 들고 있는 성경책을 들여다 보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이 책의 웅대함"에 관해 몇 문장을 읽더니 갑자기 말했다.

    "제 집 정원에 약 30명 수용이 가능한 서머하우스가 있습니다. 저기 있지요."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거기서 말씀을 해 주시길 꼭 부탁 드립니다. 마을에서 성경 읽기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 제 하인들과 입주자들, 몇몇 이웃을 거기 부르겠습니다. 다들 모이게요. 그분들에게 말씀 전해 주시렵니까?"

    "무슨 말을 할까요?"
    "크리스토 예수에 관해서요!"
그는 또렷하고 힘찬 목소리로 답하고는 다시 목청을 낮춰 말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에 관해서요. 최고의 주제 아닌가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찬송가도 좀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작은 악기(하모니엄: 당대의 휴대형 페달/건반악기: 본 필자 주)로 노래도 이끄시지요?"
그가 이 말을 할 때 얼굴에 어린 그 놀라운 밝음과 생기를 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내일 세 시에 모임을 이끄시면 이 창문이 열려 있을 것입니다. 저도 노래에 같이 참여하는 줄 아시면 됩니다."

길이 기념할 만한 그날, 그 고아한 어르신과 주위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림 한 폭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상 필자 역)


자..이 간증을 읽고 나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과연 이 엄청난 내용들이 사실일까, 이 진술이 진실일까 하고.
"아고, 그럴 리가 없어!" 하기엔 아직 이르다.
 
위 간증은 1915년 8월 19일 워싱턴 DC의 (침례교) '워치먼 익재미너'에 실렸던 것이다. 1922년엔 호프 여사를 아는 로스앤젤레스의 다섯 친구들이 이 간증 내용의 진실성을 뒷받침 하는 공술서를 썼다. 1940년엔 S.J. 보울 교수가 1920년대 초기에 여사로부터 받았다는 서신을 공개했다. 거의 다 위 간증을 되풀이한 내용이다.

다윈의 측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이 간증을 물론 강력 부인한다. 도대체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호프를 완전 거짓말쟁이나 살짝 돈(?) 사람 정도로 일거에 '기각'시켜 버리고 만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호프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호프는 다윈의 집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생존해 있던 엄연한 실존 여성이었다.
그런 여전도자가 다윈과 이런 유의 커넼션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현지를 철저히 조사/탐색한 뒤 '다윈 레전드'를 썼고 하버드 대 방문교수이기도 한 다윈 전기작가 제임스 무어 교수(오픈대학교/케임브지리대/역사학)와 그의 공저자 에이드리언 데즈먼드의 결론은 호프가 다윈을 분명히 방문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무어는 호프 여사가 1881년 9월28일(목요일)께 다윈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둘다 무신론자인 루드비히 뷔크너 박사(국제자유사상연합회장)와 식물학자 에드워드 B. 에이블링(유물론자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 방문한 날과 같다는 얘기다. 당일 다윈 부부와 아들 프랜시스 등이 모두 배석했으나, 다윈 부부는 뷔크너와 에이블링을 매우 싫어했다. 다윈의 아내 에머는 두 방문객은 물론 남편이 초청해 들인 호프 여사에 관해서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쯤 되자, 여사가 다윈의 얘기를 불려서 '각색'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보다 앞서 몇몇 창조론자들은 다윈 일가가 여사의 간증을 깡그리 강력 부정한 것과 다윈 자신의 저술에 기독교 신앙으로 회귀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음을 근거로 이 간증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점차로 호프 여상의 생애와 함께 당시 다운 지역을 출입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복음주의 성공회 전도자인 그녀가 '형제회' 서클과 깊이 연계된 사실, 1881년경 다윈의 거주지인 이곳에서 가정전도모임을 이끈 사실 등이 확인됐다. 당시는 남성 사역자 J.W.C. 피건도 여름철 다운에서 고아들을 위한 천막집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호프가 분명히 다윈을 방문한 듯 보이면서도 상당수의 포인트는 "미심쩍다"고 결론 짓는다. 이에 대해 창조과학운동(CSM) 의장을 지낸 데이빋 로즈비어 박사는 무어의 책을 꼼꼼히 검토하여 반증을 한 바 있다.  

무어의 책 말고 또 다른 관련 흥미 도서는 L.R. 크로프트의 '찰스 다윈의 삶과 죽음'. 크로프트의 결론은 호프 여사의 간증이 "정확하다"는 것. 이쯤이면 우리는 '미심쩍다'와 '정확하다' 양단 간에 선택을 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크로프트에 따르면, 열성적인 복음전도자였던 호프는 특히 금주/절제운동에 관여돼 있었다. 1842년에 태어난 여사의 본명은 일리저벹 리드 스태플턴-커튼. 1877년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제임즈 호프 경과 결혼했으나 불과 4년 후(1881년) 제독이 죽는다. 
호프가 다윈을 만난 1881년 가을은 그녀가 남편을 여읜 지 몇 달 안 되는 시점이었다. 이어서 1913년엔 미국으로 이민을 와, 1922년 영국으로 오던 도중 호주에서 세상을 떠난다.

무어 교수가 현장 탐사 곁에 얻은 역사적 사실들에 따르면..

우선, 호프는 분명히 다윈 저택을 방문해 위층 침실에서 다윈을 만났다. 다윈의 침실 가운 모습, 특유의 신경성 손가락 꼬기, 말 할 때의 생기 띤 표정, 창문 밖 정경, '서머하우스' 등을 사실적으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물론 약간 모순돼 보이는 부분도 없진 않다. 예를 들면 1915년 신문 기사에서는 다윈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고 했는데 1920년 S.J. 보울 교수에게 쓴 편지에선 소파에 누워 있었다고 술회한 '모순'이다. 이에 대해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 다윈 경은 "침대 아닌 소파"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우리는 위 간증에 담긴 다윈과의 대화를 볼 때, 단 1회 방문이 아니었음을 금방 알게 될진대 어느 때는 침대, 어느 때는 소파였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공술서를 쓴 호프의 친구들에 따르면, 호프는 다윈의 집을 최다 4회 방문했고 히브리서, 서머하우스 얘기 등은 4번째 방문 때와 관련된 내용이다. 
[ 호프는 추후 보울 서신에서는 (간증 내용의) 그 실내가 천장이 높은 큰 방이었다고 회고한다.]

일각에서는 다윈이 성경에 대해 '웅대함'(grand, grandeur) 같은 미사여구를 썼을 리가 없다고 부정하나 다윈은 1859 년 서신 등에서 비슷한 표현을 한 바 있다.
[ 특히 1873년, 그의 종교적 견해를 묻는 네덜란드의 젊은 팬 니콜라스 도에데스에게 두 번째 보낸 답신에서 다윈은 "이 웅대하고 경이로운 우주"가 단지 우연에 의해 생성됐다고 믿을 수 없다는 말과 동시에 신 존재에 대한 회의를 표명했다. 도에데스는 다윈의 사후인 1882년 네덜란드의 한 자유사상 잡지에 관련 기사를 실렸다가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의 심한 분노를 샀다. 그만큼 내용이 민감했다는 얘기가 아닐까.] 
아울러 다윈의 사환/간호사 파슬로는 피건 집회에서 개종했기에 주인과 '구원'을 주제로 토론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호프는 다윈과의 만남 얼마 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간증을 했다.

한 가지 유포되는 흔한 질문은 왜 이 중요한 대화를 무려 34년 동안이나 묵혀 뒀다가 1915년에야, 그것도 미국에서 비로소 뒷북을 쳤냐는 것. 이에 대해 무어는 여사가 신문 보도 전 이미 주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안 했을 리가 없다고 반론한다. 예컨대 로벝 앤더슨 경에게 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켄트 다운에 있는 다윈 저택의 최근 모습. 바로 이 건물 윗층 다윈 침실에서 호프와의 대화가 이뤄졌다.  

또 다른 전도자의 접근?

 
흥미로운 관련 증언은 더 있다.

 

당대의 마을 우체부 '니콜스' 씨는 호프가 다윈을 방문한 같은 해인 1881년 피건을 통해 개종했다. 니콜스의 친구 '포웈스' 씨는, 니콜스가 97세로 죽은 이듬해 (브롬리 & 켄트 지역 타임스에서 보도된 기사에서), 니콜스가 생시에 이런 얘기를 들려 줬다고 진술했다:

    다윈의 죽음 전 방문한 이 부인의 말에 따르면, 다윈은 자신에게 신약성경을 읽어 줄 것과 또 주일학교생들이 (찬송가) '저 멀리 푸른 언덕에'를 불러 주길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것이 이뤄지자, 다윈은 크게 감동된 나머지, "내가 여태 해 온 대로의 진화론을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말했다.  


무어는 이 '부인'을 호프 여사로 보지만, 크로프트는 다년간 다윈의 재택 간호사(요리사 또는 가정부 설도 있음)였던 '에번스 부인'으로 추정한다. 호프 부인은 다윈이 성경읽기나 특정 찬송가를 요청한 적이 있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 에번스 부인 '가스펠룸' 회중 교인이었고 어린이 합창을 쉽게 주선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런 실제 기록은 없다.

관건은 니콜스가 다윈의 변화 내지 회심 사실을 들었다는 것. 

로버트 앤더슨 경

무어에 따르면, '연쇄살인자 쟄'(Jack the Ripper. 1888년 8월 7일-11월 10일 런던 이스트엔드 화이트채플 행정구와 근처에서 매춘부 7명을 죽인 살인범. 미해결 범죄의 하나) 사건 수사 당시 스코틀란드야드 소재 런던 경시청 범죄수사과(CID) 과장이었던 앤더슨경은 호프 부인과 친근한 복음주의 신자로, 1907년에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다윈의 죽음을 앞둔 병환 때 자주 함께 ("much with Darwin") 했던 내 친구 한 사람(= 호프. 필자 주)은 다윈이 성경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고 그 가치에 관한 증언을 하곤 했다고 내게 확인시켜줬다.


기타 증언

1882년 5월, 호프 부인이 다윈을 방문한 지 8개월 뒤, 즉 다윈이 죽은 지 한 달 후. 복음전도자 헌팅던 씨는 텐비에서, 다윈이 "임종 시 그의 참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했다. '텐비'란, 다윈의 아내 에머의 '앨런 이모들'이 사는 집이 있는 곳이며 다윈의 첫 사촌 존 앨런 웨지우드 목사가 아직 거기 살고 있었다. 

헌팅던의 이 이야기는 호프 부인이 직접 개재되지 않고 다윈 가문과 직결된 흥미로운 일화다. 만약 헌팅던의 이야기가 조작/과장됐다면, 다윈 가문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분명히 수정해 줬을 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윈이 비공식적이나마 모종의 '(진화론) 철회'를 했다는 독립된 증언이다.  

1882년 9월, 왕립지리학회(F.R.G.S.) 회원학자, 로버트 이디(왕립지리학회 회원) 씨는 당시 출판을 위한 다윈의 편지를 모으고 있던 다윈 가족에게 쪽지를 하나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이디가 다윈에게 건네 받았다는 이 쪽지에서 (다윈은) "칼바리(= 골고타,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 언덕)를 바라볼 수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고백했다. [ 참고로, 다윈은 지리학자이기도 했다. ]

그러나 다윈 집안 사람들이 사후 편집한 다윈의 서신록에는 이디의 이 쪽지나 편지가 실리지 않았다. 폭발적인 내용 탓일 것이다.

1928년 이보르 파르틴은, 다윈의 친한 벗으로 자임한 어느 옥스퍼드 대 교수가 다윈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간접 경로로 전달받았는데, (다윈) 자신이 확실한 신자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 교수는 "다윈의 아들과 손자가 둘 다 다윈의 기독교(개종)를 부정하기에 입장이 묘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다윈 직계 후손들은 현재까지 다윈의 개종을 강력 부인해 왔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영국 학계 등의 입장은 둘째 치고라도) 다윈 가와 측근의 현 입장이 다윈 자신과 매우 다를 수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호프 부인의 증언 중 문제시 되던 것 한 가지가 '서머하우스'다. 다윈 일가 사람들을 비롯한 몇몇 관련자들은 "정원 안 서머하우스"란 게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반박한다. 호프 부인의 증언이 "순전한 공상의 소산"으로 치부되는 이유의 하나다.
무어의 현지 확인에 따르면, 다윈 저택에서 약 400야드 떨어진 인근 샌드워크에 과거 서머하우스가 있었고, 조용할 때 거기서 노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다윈의 글에 따르면 그는 이 서머하우스 속에 앉아 우레 광경을 지켜 본 적도 있다. 또 과거 정원 안의 또 다른 서머하우스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호프 부인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으려면 최소한 다윈이 과연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즐겨 읽었냐, 그 증거라도 있나가 확인돼야 한다.
무어의 확인에 따르면, 다윈 박물관에 보존된 다윈 가족성경의 히브리서 6장 앞 부분 몇 구절 맞은 편엔 조그만 연필 자국들이 있다. 이 성경책에 그밖엔 아무 흔적도 없다. 물론 이 연필 자국이 다윈의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호프 부인의 말과 일치하는 사실임에는 틀림 없다.
 


                           다윈이 '비글'호 승선 탐험 때 사용했던 성경

 

이 히브리 6장 앞 부분은 무엇일까? 우리가 읽어 보면 그것은 바로 복음의 맛을 보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이 구절들은 다윈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 없다.
 
다윈은 아버지가 바라던 의사가 못 되고 신학교에 들어와 시골 사목자가 되려 했으나 페일리의 자연신학론에 감화를 받은 데 이어 '비글'호 승선탐험을 하게 됐고 점차 기독교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다윈은 자신의 학설이 기독교에 큰 공격이 된 줄 근본적으로 느꼈고 자신이 "떨어져 나가" 삶이 "가시채와 엉겅퀴"만 낳은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성구가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러나, 다윈이 신학교에 갔다고 해서 정말 하늘의 은사를 맛봤고 자신이 "떨어져 나간" 죄인임을 절감했다고 보긴 어렵다.

호프 여사의 기억은 말년까지 충실했고 그녀의 편지 말미의 5개 서명은 그녀의 '진실과 신뢰성'을 장담하고 있다. 서명자들이, 호프가 한 번도 아니고 4번 다윈 저택을 방문했음을 확인했다는 사실은 호프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 더욱이 앤더슨 경이 호프 부인이 다윈과 "자주 함께" 했다고 한 말도 그렇다. 그렇다면 호프 여사는 다윈의 "신자 친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점

당시 다운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뎊트포드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전도자 피건은 여름 휴가철 때 천막으로 고아들을 데려와 복음전도 모임을 갖고 '다운독서실'에서 예배를 이끌곤 했다. 인근에 호프 부인이 살 당시였다. 

그런데 피건이 켄시트(신교진리협회 창설자)와 프랱에게 보낸 편지(1925년)에서 호프 부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즉 호프의 다윈 저택 방문은 모두 조작이요, 집안 안팎에서 온갖 패괴한 일을 저질러 재혼한 남편 데니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 피건은 더구나 호프가 미국으로 떠나기 앞서 부탁한 추천서 작성을 거부했다. ]   

그러나 피건의 편지는 그 자체가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입증을 못 받고 있다. 게다가 피건의 비서 티핀은 이 편지를 카피해 1957년 호주 이민 당시 가져갔다가 20년이 지난 1977년에야 발표했다. 피건의 편지 외에 다른 모든 증언들은 한결같이 오히려 호프의 신뢰성과 정직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호프의 둘째 남편 데니 자신에게 문제가 많았다. [ 참고로..티핀은 훗날 피건의 런던 고아원 사역에 관한 '사랑과 섬김'이란 책을 썼다. ] 

피건의 편지 내용 자체가 허위 사실이 많음을 슬맄은 논리 정연하게 입증하고 있다. 슬맄에 따르면, 피건은 당시 호프와 거의 전혀 무관했다. 호프는 피건의 천막집회에조차 참석한 적이 없다. 피건이 호프의 증언을 '조작'이라고 한 이유는 피건 자신이 호프와 한 번이라도 대담해 본 결과가 아니라 그가 가장 신뢰하는 대상인 프랜시스 다윈 경의 말을 듣고서였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호프의 다윈 방문 당시 곁에 있지도 않았다. 

결국 피건의 편지는 당대 다운 지역에 이뤄진 호프의 사역에 대한 신빙성을 오히려 간접적으로 더해 주는 구실을 했다. 

기타 증거들

'보울 서신'에 따르면, 호프 여사가 다운 지역에서 오두막 모임을 가질 때, 다윈이 소식을 듣고 방문을 희망했다. 당시 호프는 다운에서 6 마일 떨어진 베켄엄에서 살고 있었다. 호프 여사 자신의 책 '우리의 황금 열쇠'(1884년)에 따르면, '펠릭스'라는 무명의 전도자도 이 무렵 켄트 지역에서 사역을 하곤 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자/역사가 퍁 슬론조차도 '인본주의자'에 실린 자신의 글(1960, 1965년)에서 호프 여사가 다운 저택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놀라운 발언을 했다. 그러므로 피건은 전도자 답지 않게 거짓말을 했든가 호프를 거의 모르고도 아는 척 했다는 얘기가 된다.

전술한 대로 호프 여사는 금주절제운동을 했다. 애당초 다윈이 왜 호프를 초청했을까? -충분한 추정 요인의 하나는 다윈의 조모와 증조모가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고 따라서 다윈이 알코올중독의 결과를 끔찍히 두려워 했다는 사실이다.

호프 여사는 누구였나?

본명이 "일리저벹 리드 스태플턴-커튼"인 호프는 1842년 호주 태즈메이니어에서 영국 육군 장성 출신이자 관개 전문가인 아터 토머스 커튼 경의 딸로 태어났다. 커튼 경은 인도 관개공사에 헌신한 "인도의 은인"이기도 했다.
1877년 그녀 나이 35살 때, 앞서 1856년 상처했던 전역 해군제독 제임스 호프 경(69세)과 결혼, '캐리던의 호프 여사'가 됐다. 호프 경은 4년 후 별세했다. 그녀와 아버지는 복음적 절제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2년 뒤인 1893년엔 아일랜드 사업가 T.A. 데니와 재혼했다. 데니 역시 20여년 연상이다. 당시는 다윈이 죽은(1882년 4월 19일)지 11년 되는 해였는데도 '레이디 호프'라는 별칭을 계속 썼다. 데니는 1909년 별세했다. 호프는 4년 뒤 미국을 방문했다가 1915년 다윈 방문담을 공개했다. 여사는 1922년 시드니에서 암으로 별세, 거기 묻혔다.

호프가 장성/명사 출신인 아버지를 존경한 사실과 로벝 앤더슨 경, 쇞츠베리 경, 미국의 부흥강사 드와잍 무디(호프에게 이야기 공개를 추천함)와 아이라 생키 등과 가까웠던 사실은 그녀가 함부로 없는 얘기를 꾸며냈을 리가 없다는 추정을 더해 준다.

기타 장애 요인 및 해소 요인

호프의 이야기는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나 딸 헨리에타 리치필드에 의해 강력 부정됐다. 그러나 앞서 비친 대로 호프의 다윈 방문 당시 집안엔 프랜시스도 헨리에타도 없었고 다만 그들의 어머니 에머만 있었다. 폴 마스턴 박사(영국 센추럴 랭카셔 대학교 교수. 자유감리교 사역자: 본 필자 주)도 무어의 현지조사 결과에 거의 동의하고 있다.

로즈비어 박사가 받은 옛 도어킹(Dorking) 역사 관련 편지에도 호프는 전도와 예배인도, 빈민구호와 절제회합, 기타 활동으로 당대 주민들에게 폭넓게 알려져 있었다고 기재돼 있다. 쇞츠베리 경은 호프의 한 저서를 위한 추천사에서 그녀가 "경건하고 상냥하고 성취도가 높은 젊은 숙녀"라면서 그녀의 활동이 "복음에 대한 깊은 사랑에 바탕을 뒀다"고 썼다.

호프 자신의 이런저런 저서 내용들을 읽어 보면, 다윈과의 만남을 조작할 만큼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불균형적인 이중인격자가 아님을 이내 파악하게 된다.

반면에 호프의 이야기를 '조작'됐다고 부정하는 사람/신자들은 주로 다윈이 과거에 쓴 저작들과 진화론에 얽힌 다윈의 명성, 또는 다윈 집안 사람들의 증언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호프 얘기에 대한 그들의 반론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왼쪽부터 다윈의 아내 에머, 아들 프랜시스, 딸 헨리에타(리치필드)

특히 호프의 방문에 관한, 다윈의 아내 에머의 침묵은 답답함을 더해 준다. 그러나 여러 방문객들에게 시달린 에머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도 된다. 더구나 당일이 무어가 추정한 대로 9월 28일이었다면, 두 무신론자와 한 복음주의자라는 양 극단을 한 날에 접해야 했던 부부로선 당혹감이 없을 리가 없으니 아예 양쪽 다 언급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

과연 다윈은 크리스천이 됐을까. 그는 지금 천국에 가 있을까. 아니라면 딴 곳에..?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하나님과 다윈 자신이 알 것이며..그래서 아마도 영구적인 수수께끼일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그의 입장이나 진화론이 약화돼 온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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