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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잠언.전도서

[전 5:19, 6:2] 잠재력과 누림



FROM: http://www.1st-art-gallery.com

또한 사람마다 하나님이 부와 재산을 주시고 누릴 힘을 주셨기에
자기 몫을 차지함과 자기 일을 즐김
-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와 재산, 영예를 하나님이 주셔서 그가 마음에 바라는 바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그가 그것을 누릴 힘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 딴 사람이 대신 누리니,
이것 참 헛되고도 황당한 노릇이구나!

(전도서 5:19, 6:2 사역)



위 두 구절은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된 듯 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부와 재산, 그리고 누릴 힘을 주셨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받고도 그러지 못한다니..그런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두 성구를 조화시켜 보면, 다같이 잠재력을 받아 놓고 어떤 까닭과 조건 아래서 누릴 힘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이것은 세상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흔히 공평치 못하다며 쉽사리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소위 신본위적 '절대주권주의' 사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책임을 물릴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심지어 제대로 믿는 신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첫 인상'이 좋지 않은 경우가 흔합니다.
눈에도 뵈지 않는 하나님의 인상이 어떻기에..?

우리의 뭔가를 앗아가시는 분이라는 잘못된 하나님 이미지이지요.

     자녀를 앗아가고
        기회를 앗아가고
           돈을 앗아가시는..
 
그런 분으로 은연 중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나..혹 그런 교회가 있을는지는 모르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전도서 기자에 따르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신 분이 아닌가요..?

전에는 그런 일이 좀체 없다가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아예 '점심 보따리'를 챙겨 여기저기 전전하고 다니며, 악착 같이 하나님 이미지를 "구겨" 드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곤 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간추려 보면, 대강 이렇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율법과 거기 걸맞는 복을 내셨다가 거두셨다. 따라서 십일조를 받아 챙기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 잘못된 하나님이다.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구약의 하나님은 복과 율법의 하나님이시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십일조와 복의 관계를 따지시지 않는 순수 복음의 하나님이다.

     율법은 폐지됐다. 십일조도 폐지됐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라지셨다. 지금은 신약의 하나님 즉 십일조도 요구하시지 않고 따라서 복을 주시지도 안 주시지도 않는 사랑의 하나님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은 순전히, 순수하게 우리의 자의에 의한 헌금만 예물로 대표될 뿐이다. 신약의 하나님은 십일조를 요구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거기 관련된 복도 말씀하시지 않는다.

     복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절대주권자인 그 분의 의사일 뿐 우리와는 상관 없다. 복이 있든 없든, 복을 받든 안 받든 우리는 다만 자의로 바치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의무도, 부과된 것도 없다. 십일조도 거기 관련된 복도 모두 구약시대의 것이지, 신약과는 무관하다. 재정적, 유형적인 복은 순전히 유대인들의 것이었지 신약인들과는 상관 없다. 우리가 벌어서 헌금을 바칠 수 있는 상황-이것 자체가 복이다. 영적으로..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는 것, 즉 영적인 복만 복이다.
 
 
이거..이해가 갑니까?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도 되셨다가 무복의 하나님도 되셨다가..그런가요?
시대와 사조에 따라 변모하시는 기분파 하나님이라는 말인가요?

알고 보면, 이건 이원론적인 신관/복관입니다.


안티십일조주의엔 여러가지 숨은 어젠다가 따라 다닙니다.

    - 하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 교회 십일조의 씀새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현실 교회와 지도자에 대한 불신을 통해 효과적으로 십일조를 거부하게 만든다.
    - 십일조는 불순한 것, 헌금은 순수한 것으로 몰아간다.
    - 십일조를 '율법'으로 몰아감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피하거나 회피할 핑계를 만들어 준다.
    - 십일조라는 차별적 장벽 내지 장해요인(?)을 제거함으로써 모든 교인들을 너/나 없이 평준화 한다. 이 점에서는 일종의 교회 내 사회주의화가 이뤄져 가는 셈인가요.
    - 십일조와 연계된 모든 복과 복관을 "기복주의"란 이름으로 타도한다. 그런 복은 바라지도 받지도 말자는 순수한(?) 무복주의로 몰아 간다. 즉 기복주의 대신 나타난 것이 무복주의입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재정과 복은 서로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이해가 돼 갑니다.


과연 이게 성경적일까요?
나름신학이고 나름신앙이지요. 이렇다 할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1990년대 말기부터 주로 웹에 출현하기 시작한 이런 신종 십일조관 곧 안티십일조주의는 바로 마귀/싸탄 그 작자가 조작해 내어, 교회의 후방 보급로를 효율적으로 차단하는, 교회/성도 말아 먹기 수단이지요.
마치 순수복음주의인 양 그럴 듯한 탈을 쓰고, 자체 포장을 하고 나타난 겁니다.
물론 고도로 간교한 마귀 군대는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식 이중 교란 작전의 일환으로, 교회 지도급의 십일조 오용/남용 관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마귀는 언제나 요런 식으로, 전면에서는 영적 싸움이 불능하도록 하나님의 완전무장(온몸갑옷=전신갑주)을 해제시키고, 뒤에서는 이렇게 보급로를 차단하여, 알아채지 못하게 이중작전으로 성도를 굶기려 교회를 노립니다.

마귀의 이같은 고도의 수법으로 오늘날 교회는 점차 가난뱅이가 돼 갑니다.
전에 할 수 있었던 수많은 효과적인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반십일조주의는 과거 십일조에 열심이던 교회를 복음에 '무지'했던 무리로 격하해 온 반면, 지금의 반십일조/비십일조/무십일조 교인들을 최고 엘리트로 격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재정에 관한 복을 추구하지 않는 교인들을 가장 순수맨/순수우먼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나머지는 모조리 '기복주의자'들로..오히려 역차별하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의 생각도 그러실까요..?
글쎄요.

독자가 위 바탕 본문을 보면, 기본적으로 창조주께서는 사람 각 자가 부와 재산을 얻어 누릴 잠재적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만..누릴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사회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법에 따르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 제1은 모든 삶의 우위에 그 분을 모셔 두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께 영광 돌리는 길의 하나입니다.

십일조는 다른 모든 분야처럼 나의 재정 분야, 경제 영역 위에도 하나님이 주인(!), 주권자(!), 지배자(!)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예. 
십일조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 저만큼 무시해 둔 채, 내 맘대로 자의적으로 바치는 헌금은..딴 분야는 몰라도 재정 분야, 경제 영역 만큼은 나 스스로 주인/주권자/지배자가 되어 내 뜻대로 하겠다는 주의입니다.

십일조에 연관된 복은 처음부터 "없는" 복으로 해 두고..복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고,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좋으니, 내가 바칠 만큼 "알아서" 바치겠다는 겁니다.
즉..십일조 없는 자유롭고(?) 순수복음적인(?) 나는 내 돈의 주인입니다.

그런 교계사회에서는..십일조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신자들은 모두 불순하고 비복음적이고 율법적이고 기복주의적인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십일조교인'과 '비십일조교인'이라는 차별을 가져오는 장본인들인 셈이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재정적인 복을 혼자 가로채는(?) 욕심 많은 '복돼지'들이 되는 셈인가요?
대표적으로 십일조를 갖고 하나님과 복 거래를 한 구약의 야콥이 그런 '복돼지'인 셈이군요.

더 나아가..혼자만 거룩한 체 위선적인 현대의 파리새들이 되는 셈입니다. 

반면, 비십일조인들은 순수하고 깨끗하고 성결한 복음주의자들이고, 하나님 앞에 참된 증인들이 되는 셈이고.
그런..건가........요?


글쎄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치고 거짓말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반십일조인들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인 말라키 3:10을 거짓말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짓 증인으로 몰아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7장 초두에서 분명히 복과 십일조의 상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복 빎'을 받는다고요.

아브라함은 엘리온(가장 높으신 분)의 사제(제사장), 멜키쩨뎈에게 복 빎을 받았지요.
마찬가지로 야콥은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와의 씨름 끝에 그에게 복 빎을 받았습니다.
이 둘은..율법과는 거의 전혀 상관 없이 복을 받았습니다.

야콥을 위해 복 빈 이 천사는, 구약 시대에 보이지 않는 성부님을 대리한 그 분의 형상이신 성자님으로 보입니다. "얄미운" 야콥의 '기복주의'를 하나님은 쾌히 응락하시고, 외숙 라반의 양떼 속에 배태된 얼룩양들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넘겨 주셨습니다. 야금야금.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야콥의 복의 언약을 이뤄 주시려고 이런 '음모'를 꾸미시고, 수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야콥의 믿음 때문이죠!

오늘날은 야콥에 비하면, 좀 더 순수해 뵈는 십일조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야콥처럼 복을 바라진 않습니다.
복을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으니 십일조의 약속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주일마다 '만 복의 하나님'은 왜 찾는 겁니까?
모든 기복/구복이 다 잘못이라면..야콥을 도우신 "기복의 하나님"도 찾지 말아야지 않을까요.
복이라곤 전혀 바라지 않는 인격적으로 고매한 순수믿음을 추구하려면. 


그러다 보니, 본문에서 다소 멀어졌습니다만..

제 아무리 타고난 경제력이 있고 자산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이 삶의 우위에 서신 경제의 주권자이심을 아무래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이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래? 그대 맘대로 하게나..나도 그대의 경제 생활에서 손 털지." -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자넨 아무러나 나는 절대주권으로 자네를 복 주겠네! 이대로 계속 나가게나." - 그러실까요..?
 

복을 참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삶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경제 생활에서도 최고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경제 분야에서도 하나님이 최고의 전문가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이야 말로 복을 누릴 자격이 갖춰진 사람이지요.

이런저런 그럴 듯한 온갖 이유로 요리조리 십일조 따위를 피하고 발뺌 하는 말발 좋고 기술 좋은 매끈한 자칭 '순수복음인'은..미안하지만, 아니지요.
그런 사람은 자신의 말마따나 복과 상관 없는 무복인이고 비복자(非福者)입니다.
그런 사람은 혹 영생은 몰라도, 평생-여생에 복과는 상관 말아야 합니다.
그냥 알아서 복과는 무관한 자의적 헌금이나 바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고요..? 그냥 알아서 십일조를 빼고 사니까, 십일조와 유관한 복과는 무관하다는 거죠.
스스로 알아서 사니까, 복도 알아서 대강 남거나 빠져 줄 수 밖에요.  

제가 너무하다고요?
지금 살아 계시다고 입증 받으시는 분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믿음으로 바치는 십일조가(히브리서 7:8) 복과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은..너.무.하.지. 않고요..???

복 받을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을 받아야 삽니다.
하나님은 말라키를 통하여 십일조에 따르는 복을 선언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
말라키가 거짓 증언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거짓 약속을 하셨다는 건가요?
말라키 3:10은 하나님의 거짓말이라는 얘기인가요?

복은 십일조를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평준화' 되어 자동으로, 굴러 드는 겁니까?
아니면 누구에게나 복이 공정하게, 아예 안 오는 겁니까?

깊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잘 생각하여 말하고 함부로 내뱉지 맙시다.
이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관계된 사안입니다.

반십일조적 생각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하나님보다 인간, 미래의 것보다 현실을 앞세워 말합니다.
그리고..십일조를 율법적 부담 내지 일종의 저주로 생각합니다!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크리스토의 십자가와 피만 오직 참되고 유일한 복음"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곤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 위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와 이방인들에게까지 온전히 성취/전수된 아브라함의 복이 달랑 영혼의 구원 뿐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깨어진 율법의 저주는 죄와 영혼의 저주뿐이던가요?

그럼 예수께선 왜 죄인들에게만 오시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갇힌 사람들, 눌리고 묶인 사람들, 아프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셨나요? 희년이란, 죄의 대속과 영혼구원만을 위한 것인가요?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여전히 눌리고 묶여 살고
    여전히 아프고 약하게 지내도..

    죄만 대속 받고,
    영혼만 구원 받으면 '
    그게 지고(至高) 지상의 복이니
    만족하며 살아가란 말인지요?


그렇다면.. 다만 혼자 그렇게 의롭고(?) 의연하고 초연하게 믿고 사십시오.
저는, 마음 약하여 십일조를 못하는 비십일조인들을 단죄하는 게 아닙니다.
차별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원이로되, 맘이 약하여 못할 수도 있겠지요.
언젠가는 할 요량으로. 

다만, 남에게 자신의 이즘을 보급해 온 적극적인 안티십일조인들에게 바라는 바는..
남에게 자신의 이즘을 호전적으로 강요하지도 말고
십일조교인들을 힐난하거나 헐뜯지도 말고,
떳떳하게 혼자 반십일조인으로 살아 가라는 겁니다.
남이 십일조 하나 안 하나 두루 살필 필요도 없이, 눈치 볼 필요 없이.
십일조 하는 남을 염려해 주고 챙겨 주고 간섭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니까.

    "나는 십일조를 안 하니 너도 안 하고 말아야 해. 당장 관 둬!"

이런 억지스런 평준화 노력을 관두라는 겁니다.
하면 하는 대로, 안하면 안하는 대로 조용히 평화롭게 살아가지,
보따리/도시락 싸 갖고 반십일조 사상을 뿌리며
혼자 의인인 양, 자신을 정당화 하고 타당화 해 가며,
남의 십일조 노력에 재를 뿌리지 말라..
그 말입니다.

님 나름의 성경해석과 님 나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축복합니다.

다만 저는 저대로..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고루 누리며 살렵니다.
오늘도 순진하고 미련(?)하게..
주님의 신실한 약속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고,
십일조를 하며 살렵니다.

그리고..약속하신 모든 복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맛보며..살아가렵니다.
 
그것이 전도서 5:19, 6:2에 비쳐진, 주님이 주신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겠기에.


기록된 언약에 충실하시고
보장된 약속에 신실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김삼의 글은, 외래어를 원음에 가깝게 표기함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