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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복의 연줄 (메시아계보대장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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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메시아-복의 연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히브리 족의 첫 선조이자 복의 뿌리와 샘이었던 것이죠(창 12:2b).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숨지면 '아브라함의 품'(낙원)에 안겼습니다. 

[여기서 잠시: 사실 '복의 근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 '베라카'는 그냥 복이란 뜻이고, '-근원'이라는 직접적인 낱말은 곁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대부분과 한글 성경 일부는 'source' 또는 '근원'을 뺐지요. 그러나 분명 '근원'이란 어의가 베라카에 포함될 수 있음을 여러 렉시콘(원어자전)이 보여줍니다.
하물며 복 받은 사람들의 원조인 아브라함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란 말은 하나님이 본디 복의 근원이 아니시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은 그 분이 지정하신 복의 근원이다-라는 말이 되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사람일 수 밖에 없음은 고대의 하나님의 사제 멜키쩨뎈의 축복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님. 가장 높으신(지존자)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주소서."
   (창 14:19)

그 아브라함의 복이 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뿌려집니다(갈라티아 3:8b,14. 로마서 4장 전장 참조).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메시아의 관계는 단지 법적/혈연적 관계일 뿐더러 복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복이 믿음으로 대물림 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지요(롬 4:13,16,23, 갈 3:7,9 참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서 비쳤거니와 비슷한 말씀을 거듭거듭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b. 12:3, 26:4도 참조).

즉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경로/채널은 바로 메시아를 통해서지요! 그 메시아는 성자님이 인간 되어 오신 예수 크리스토이시고요. 다음 성구가 이를 입증해 줍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a)

위에서 '네 씨'란 단수,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이것을 파울은 갈라티아서 3:16에서 해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 받을 '천하 만민'에 포함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복이 어떤 복입니까? 너무도 많지요!

사실 아브라함을 통해 복 받은 사람들은 많지요.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융성했음은 주변을 둘러 보시면 잘 아실 터이고..유대계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들인 이슈마엘(이짜크의 이복 형), 에사후(야콥의 형)의 후손들이 나름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복된 사람들은 누구냐.. 바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를 믿는 사람들입니다(롬 3:22, 4:6~8)!


아브라함은 어떤 '복'의 근원?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복이 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니 그가 영적인 복을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크리스토를 믿기만 하면, 역시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인 은총을 다 누릴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롬 4:15,16, 15:9 참조). 여기까지는 아마 안 믿거나 의심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을 터입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아브라함의 복이 과연 영적인 복 뿐일까요? 많은 신학자들은 그렇게들 믿고 있지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현상은 그런 신학자들도 주일날 '만 복의 근원 하나님',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찬송가 가사를 부르며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만 복'이 뭡니까? 복의 근원이 뭡니까? 하나님이 모든 복의 뿌리란 얘기가 아닌가요?
[저는 신학을 욕 보이겠다는 게 아니라, 신학은 성경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성경을 올바로 올곧게 분변하여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학이 진리 이해에 도움되야지 성경 이해를 방해하면 안 되지요!]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때 모든 생물들을 복 주셨습니다(창 1:22). 번식하고 창성하라고. 그러나 인간에겐 월등한 복을 더 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릴 거의 신적(!)인 통치권과 함께 역시 번성, 번영의 복을 더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시 8:5~8, 창 1:26~30). 더욱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할 수 있는 특권도 주셨습니다(창 2:9, 3:22b).

그러나 최초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써, 이 통치권은 합법적으로 싸탄에게 넘겨졌으나(루카=눅 4:5~7. 참고: 요복 12:31b, 14:30, 코린토B=고후 4:4, 요서A=요일 5:19b)..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 때 선언하신 복 때문에 죄인들은 아직 자연과 정부/제도/사회의 통치권 등 제한된 권한이나마 그럭저럭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율법을 어긴 이래 유전적 죄성 즉 '원죄'를 물려 받고 또 본인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계속 짓는 엄청난 죄악으로 각 사람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 왔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한 평생 겪는 질병/가난/고통/재앙/억압/부자유/두려움/죽음 등이 모두 율법의 저주와 그 증상들입니다(신명 27:11~26, 28:15~68). 사상 최악의 역병인 에이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이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한 율법의 모든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킨 것입니다(갈 3:13). 할렐루야!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 즉 구주로 믿고, 이젠 더, 과거의 노예주인 마귀가 아닌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면, 먼저 우리는 모든 죄와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 8:1,2 에페소 2:1)! 그것이 복음입니다. 아울러 마귀와 죄의 노예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 예수님의 동생들로서 하늘 보좌에 앉힌 바 됐습니다(히2:10~17, 엪 2:6b). 할렐루야! 그것이 구원이요 거듭남이요 영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복은 달랑 구원 뿐만은 아닙니다. 아울러 남은 삶을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라고, 말세의 '방주'로서 세워주신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복음을 권능있게 역동적으로 전하라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 두세 사람 이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고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교회가 바로 현세의 천국입니다. 주님은 "그대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뤀 17:21). 물론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보좌를 삼은 내 속에도 천국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롬 8:9, 계 3:20). 즉 우리는 앞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천국의 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은 어떤 컨텐츠를 담고 있냐는 궁금증에 싸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과연 영적인 복 뿐일까요?

"구원과 천국과 영생-그것만도 족해요! 뭘 더 바라려고..?" 할 신자도 더러 있을 터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굳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만 받겠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복들 중에서 딴 건 다 빼 놓고 구원만 달랑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선 아무래도 좋으니 천국/영생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른 복은 안 받아도 된다는 겁니다. 번영주의, '형통신학'은 싫다는 겁니다. 물질/신유/형통 따위는 지저분해서 싫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되지요. 거부하니까.


그러나 영적인 복 이상의 복이 더 많은데도 몰라서 못 누린다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특히 신학의 영향 탓입니다. 물론 신학은 좋은 것을 많이 갖다 줬습니다. 성경신학 때문에 성경에 대한 통찰력도 여러 모로 깊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잘못된 명제 때문에 교회가 손해 본 것도 많습니다. 뭐냐고요? 이제 곧 설명이 됩니다.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신학은 어디까지나 학문일 뿐, 영적 권능이 없습니다. 신학과 기독교 철학이 사람 영혼 하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딱 하나-복음 뿐입니다(롬10:8~17).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복 8:32) 할렐루야!

신학과 철학은 이론과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신학은 처음부터 생긴 게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일부 인사들에 의해 카톨맄 계 안에 서서히 생성돼 왔고 카톨릭 교회를 통해 먼저 굳혀져 간 운동입니다. 신학자들의 가장 큰 특징과 모순이 뭐냐면..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분으로 한 쪽으로는 믿으면서도 한 쪽으로는 그 분의 초자연적 권능을 적극 제한하고 배제, 심지어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계시의 완성, 계시의 '점진성' 때문이라는 전제 아래.

물론 기록계시는 신구약 성경으로 완성됐지요. 그 이상의 기록계시가 있을 수 없습니다(계시록 22:18,19). 그런데 모든 계시가 다 끝났나요? 아니지요! 계시가 없으면 사람이 망하는데(잠 29:18) 계시가 이젠 더 "없다"면 어떻게 교회가 살아가나요? 어떻게 존속되나요? 사도 파울은 분명히 "..여러분이 모일 때..계시도 있으며.." 라고 했습니다(코린토A 14:26). 그건 기록계시가 완성되면 계시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왜 대언자 요엘은 지상종말이 오기까지 말세에 계시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까(행전 2:17~21. 특히 후반부 참조)?  

아무튼..그래서 신학 때문에, 교회가 초자연적 요소는 빼 놓고 나머지는 다 갖춘 우스꽝스런 모습이 됐습니다. 마치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군인이 전장에 나선 형국입니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교회가 모두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복과 샬롬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크리스토의 몸인 교회의 참 모습일까요? 아니지요!

교회의 참 모습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따라 그분이 마련해 두신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모두 최대한 활용하고 권능을 가동시켜야 바른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 목표인 땅 끝까지 복음 전파를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영적인 복?

그런데 신학은 온갖 사람의 이론으로 거기에다 이런저런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 브레이크의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이것 -메시아를 통해 우리가 받는 아브라함의 복은 영적인 복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복을 신학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복은 구원 뿐 아니라 성령의 초자연적인 권능/은사도 포함됩니다. 성령의 아홉(9) 열매도 포함됩니다(갈 5:22,2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엔 현세적인 복-물질적/육적인 복도 포함됩니다! 교회가 이 복 없이는 유지될 수가 없지요. 돈 없이 복음 전파할 수 있나요? 돈 없이 교회당을 지을 수 있나요? 그런데 신학 이론은 자연적으로 굴러 들어오는 자원만 활용하지, 메시아를 통해 누리게 돼 있는 아브라함의 현세적인 복은 안 받겠다는 묘한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깨끗하게 영적인 복만 누리겠다는 것이지요.

그럼 하나님이 태초에 자연과 인간에게 주신 복은 불순한 복인가요? 잘 살고 잘 먹고 잘 번식하라고 하신 복은 받아선 안 됐을 성격의 '비복'인가요? 그럼 왜 '만복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는 겁니까? 그냥 '영복(=영적인 복)의 하나님'이라고만 부를 것이지.
 
신학의 물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물질적인 복은 구약인들과 현재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 신약 신자들에겐 적용이 안 된다고들 믿고 있지요. 정말 측은하고 가련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만 제대로 축복받은 인간들로 여긴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시온주의와 기독교 시온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아브라함의 물적/육적 복은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아닐까요? 돈과 신유, 자녀의 복은 우리의 것이 아닐까요? 천만에! 그건 신학적인 착각이지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결코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메시아를 통해 아브라함의 영적인 복뿐 아니라 온갖 복이 구약인/유대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똑 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함께 확인해 볼까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갈라티아 3: 5~18 일부 중략)

위 말씀을 보면 (10,13절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크리스토께서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온 율법의 저주는 전술한 대로 가난/질병/고통/억압/재앙/두려움/죽음 등 모든 해롭고 좋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크리스토께서 십자가에 달려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으심으로써 이 모든 저주를 영영 도말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단 크리스토를 믿는 신자들에게만 그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그나마 신학의 전제에 묶이지 않고 순수하게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그대로를 믿는 사람들만 제대로 효력과 효과, 효험을 본다는 겁니다.


온갖 복

자, 구약 때를 곰곰이 살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누린 온갖 복을 발견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이짜크 등을 통하여 자녀 생육의 복을 받았듯, 이스라엘 백성이 미쯔라임(아이귑트=애굽)에서 심히 번성하고 창대해졌습니다(미쯔라임탈출기=출애굽 1:7). 인구가 장정만 세어도 60만이었습니다(12:37).
그리고 430 년간 노예로 종살이를 하던 미쯔라임에서 모쉐를 통해 탈출합니다(출12:40, 참고: 행 13:19b). 미쯔라임은 여기서 마귀의 상징이지요.

그 뿐인가요..미쯔라임을 떠날 때 이스라엘권 자체의 자산도 고스란히 갖고 나왔거니와 그곳 사람들에 요구하여 온갖 은금 패물과 의류 등을 마치 당연한 것을 받는 양 선물로 받아 챙겨 나왔습니다(출 12:38, 35~36).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요!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과거 똑 같은 미쯔라임에서 많은 선물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12:16 참고: 20:14).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홍해 도해 당시 미쯔라임 전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적군을 전멸시키셨습니다(출 14:6~31). 온 민족이 한꺼번에 멸망 당할 뻔한 위기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광야 생활 40년간 밤엔 불기둥, 낮엔 구름기둥으로 이끄시면서 기온 조절까지 하시며 돌보셨고(출 13: 21~22)  그 오랜 세월 옷이 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게 신비롭게 역사하셨고 먹을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신 8:4,16, 29:5, 네헤미아=느 9:21).

그 뿐인가요..부지 중 병에 걸렸거나 죽은 환자가 없었고 다만 교만 죄로 저주 받아 병에 걸렸거나 죽은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또 죄악으로 불뱀에 물린 사람들 마저도 모세의 놋뱀 지팡이만 바라 보면 낫게 하셨습니다(민수기 21:9). 놋뱀은 바로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를 상징하지요(요복3:14)!

그 뿐인가요..비록 1세들은 예슈아(여호수아), 칼렙만 빼 놓고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2세는 시냇물과 샘이 흐르고 꿀이 흐르고 온갖 곡식과 열매, 광물이 넘치는 카나안 땅으로 진입했습니다(신 8:7~10).  

이것이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 즉 선민으로서 누린 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신실한 약속들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하물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믿는 우리들이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옷이 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똑 같은 이적을 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딴 것으로라도 채워 주시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공사역에 나서자마자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루카=눅 4:18,19)

"..이 글이 오늘 여러분의 귀에 성취되었소."(뤀 4:21b)

할렐루야! 메시아를 통해 죄에서의 해방,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속량의 메시지와 선언이 이뤄질 때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해, 즉 땅과 노예들을 구속할 희년(Jubilee)이 왔다는 것입니다(레 25:8~55 이 61:1,2 참조).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그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마 12:28).

그 은총의 열매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로써 맺히고 베풀어졌습니다! 그 결과 풍요와 자유, 치유, 그리고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왔습니다(요복 10:10). 

그럼 아마도 독자는 물을 것입니다: 죄를 씻음 받고 영생과 구원, 거듭남을 누리게 된 것은 알겠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왜 아직도 질병이 있고 가난이 있고 억압과 부자유가 남았냐고.
그 까닭은..율법의 저주는 십자가 위에서 영영 도말됐지만(갈 3:13) 우리가 그 효력을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온전히 승리 선언을 하고 바로 내 것으로 챙기기 전까지는 저주의 증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교회 즉 우리에게 묶기(binding)와 풀기(loosing) 권세의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마 16:19). 묶고 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교회 즉 우리에게 권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풍요의 선물, 신유의 은사 등을 믿음과 예수 이름으로 얻어 가난과 질병에서 해방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이미 그 몸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우리가 이것을 누리고 안 누리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주님께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아직도 구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안에서 약속하신 대로 구약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자동으로 누리게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누릴 수 없다는 식의 주장입니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린 것이지,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예수 이름으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믿음으로 나의 의지로, 예수 이름으로 그것-아브라함의 복을 청구해야 합니다! 내 것이 됐음을 선포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교회/신자에게 예수의 이름을 왜 주셨습니까? 단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ritual) 기도 끝에다 꼬리표로 달라고? 아니면 모든 '청구서'에 일일이 써 먹으라고 주신 건가요?

한 번 볼까요? 마르쿠스=마가 16:17,18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징표가 따를 테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악령들을 내쫓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고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

여기 아브라함의 복이 포함돼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령님 안에서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이 뿐인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b)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3,24, 26)

한 마디로 예수의 이름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그 이름으로 원하는 것을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복과 함께 치유도 풍요도 해방도 예수 이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이 모두를 다 챙겼습니다. 신유도 풍요도, 악령축출도 다 행하고 챙겼습니다. 행전엔 그런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코보 5:14~16은 뭡니까, 그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신학은 오직 초기 교회를 빼놓고 나머지 교회는 여기 해당이 안 된다고 우기니 말이나 됩니까? 그런 발상은 예수 크리스토는 어제나 오늘, 영원히 동일하다(히 13:8)는 말씀에도 어긋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 모든 세대의 교회에 베풀어 주신 것을 예수 이름으로 누려야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우스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님. 그대의 영혼이 잘됨 같이 그대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랍니다"고.

만약 기존 전통주의자들의 말이 옳다면 요한은 이런 식으로 말했어야지요.

     "사랑하는 님. 오직 그대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요한의 사랑받는 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요한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곧 주님께도 사랑받는 사람들이지요.

메시아와 관계를 맺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복도 겸손히 받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만하게.."난 영혼의 복만 받겠어, 딴 건 집어 치워!" 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도 안 받을 뿐더러 남이 복 받는 것을 말리고 심지어 쌍수를 들고 보따리 싸서 다니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더 좋은 언약, 더 나은 언약 아래 거한다(히 7:22, 8:6b)는 우리가 유대계나 아랍계보다 못한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딴 건 몰라도 하나님이 신실한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들은 그분의 자녀들로 챙길 줄 알아야지요. 그것이 슬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영적인 것만이라는 주장은 슬기로운 것이 아닙니다.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는 생각입니다. 이 점 이해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