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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이삭/리브가 (메시아계보대장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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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계보로 돌아가서..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 나이 100/90살(합이 190!)일 때 진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만으로 낳은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오래 전 폐경기를 완전 '졸업'한 여성에게서 자식이 만들어지나요?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 분의 온전한 뜻으로 이뤄진 순수기적"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그러나 아브라함/사라의 믿음과 그 의지란 게 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삭(이하 이차크)는 하나님의 은총, 부부의 믿음/의지의 '합작품'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무리 주시려고 해도 믿음의 반응이 없는데, 또 의지의 발동이 없는데 어떻게 이뤄집니까..안 그런가요? 물론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의지도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지만, 그 선물과 형상 부분을 사람 쪽에서 발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맑 6:5,6 마 11:20,21 참조). 

아브라함은 또 한 때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본래의 언약을 굳게 믿었기에 혹 죽여도 도로 살리실 줄을 알았습니다. 본래의 언약이란 아브라함 후손 가운데서 성자님이 화육(incarnated)한 메시아가 나실 줄을 알았던 것이죠.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다음 구절을 잘 봅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복 8:56~58)

위 말씀에서..주님이 '나의 때'(원어: 나의 날)라고 한 말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주님을 본 것'과 동격으로 봤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부정하지 않으셨으니 결국 여기 '나의 날'은 아브라함이 주님을 뵈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아브라함이 땅에서 뵀던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성자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동시에 바꿔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장차 오실 메시아의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떻게 그랬을까요? 비록 그가 죄 많은 칼데아-우르에서 나오긴 했지만 선대로부터 면면히 대물림한 메시아에 관한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선조들은 수 백 년 생존하면서 낳은 수많은 자녀들에게 먼 훗날 오실 메시아에 관한 얘기들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걸 어찌 아냐고요? 이미 말씀 드린대로, 최초인간 아담/하와에게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나실 그 분에 관한 충격적인 예언을 들려주셨고 이 예언은 아벨의 어린양 제사에서도 반영됐습니다.
  
아마도 카인 후예들은 관심 밖이라며 잊어 버렸을진 모르나..아벨 대신 태어난 셑의 후예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어 자손 대대로 메시아 예언 얘기를 들려 줬지요.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다음을 보십시오.

"..보라! 주님이 그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오시어,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되 그 가운데서 모든 불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하게 행한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스려 말한 모든 무엄한 언동 탓에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유다서 15)

이 말은 아담의 7대손 에놐이 한 예언입니다!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승천한 에놐은 확실히 구속자/심판주로 오실 메시아관을 제대로 가진 분이었지요(창 5:21~24). 에놐과 그 선후대는..아담/하와 부부가 카인에게 맞아 죽은 좋은 아들 아벨 대신 겸허한(최소한 송구한) 마음으로 기른 선한 선조 셑(4:25)과 주님(야웨)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에노쉬(4:26) 등으로부터 평생 들은 메시아 얘기를 수 백 년 간 장수하면서 모든 후손들에게 오래오래 전수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셑족 후손들이 각기 수백 년 내지 천 년 가까이 장수하는 동안 더욱 더 메시아 예언은 효과적으로 전수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특히 그 아내들은 모두 자신들의 몸 또는 후손에게서 언젠가는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가 태어날 줄로 기대했을 건 당연한 이치죠.

그 메시아 예언은 홍수 후 노아의 세 아들 중 특히 쉠의 후예를 통해 더 확고히 후대에 전달됐습니다. 홍수로 인류가 통째 다 멸망해 버렸으니 과연 예언대로 셑의 직계인 노아의 세 아들 밖에 메시아 계보를 이어갈 자가 전혀 없음이 더욱 확실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쉠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아브라함의 부친 테라가 우상 제작자였다고는 하나 메시아 예언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방문과 계시를 받고 나자 과거에 듣기만 하던 흐릿한 메시아 희망은 또렷하고 확고한 메시아 신앙으로 탄탄히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하물며 훗날 메시아로 오실 성자님을 직접 뵈었음에야!
 
아무튼 아브라함(향년 175세)/사라(127세) 자신도 죽기까지 이짜크/이슈마엘 등 수많은 후손들에게 평생 메시아 얘기를 들려줬을 터입니다.

그런데 외아들로 아버지 어머니께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사랑 받으며 웃음의 세월을 보내온 이짜크('웃음'이란 뜻)는 청장년기를 훌쩍 다 보내고 나이 40에 들어서야 기막히게 예쁜 아내를 얻어 늦장가를 들긴 했습니다만..나이 60이 되도록 자식을 보지 못합니다.

이짜크도 보통 믿음이 아니어서 반드시 자신의 후대를 통해 메시아가 오실 줄을 믿었지만 은근히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20년이 되도록 아직 수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는 모르나 상당기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짜크의 믿음을 보시고 결국 리브카의 태를 여셨는데 놀랍게도 쌍둥이였습니다. 이 쌍둥이 녀석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서로 치고받고 싸웁니다. 사이가 영~ 안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어리디 어린 사람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메시아 축복을 기대하고 장자권 갖고 쟁탈전을 벌인 셈입니다. 특히 작은 아들은 그렇습니다.

어이없을진 모르나, 창세기 25:23을 보면 그렇게 밖에 결론이 안 납니다! 그런데 리브카는 신중한 여인입니다. 뱃속에서 심상치 않은 태동을 느끼고 "아니..요것들이(?).." 하다가도 "지나다 보면 잦아들겠지" 했는데 이젠 아예 발로 차고 마구들 싸워대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직감합니다.

당황이 황당으로 바뀌어 "야들이 도대체 남(?)의 뱃속에서 와이카노..?! 우야마 좋노?" 하던 리브카는 결국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여기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리브카는 남편으로부터,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온 메시아 예언을 익히 듣고 자신도 메시아 후손 낳기를 열망해 왔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느낌에 하나가 아니고 둘이나 되는 데다 서로 '토닥질'까지 해 대니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과연 누가..? 바로 그래서 "하나님, (제 뱃속 사정이) 이런데 제가 어찌해야 됩니까?" 하고 솔직히 여쭸던 것입니다. 즉 메시아 신앙에 근거하여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상의 예언인 하나님의 답변을 들은 즉 "둘 중 동생이다"고 하시니까 리브카는 앞으로 할 일을 감 잡습니다. 즉 태어나자마자 메시아 선조감부터 챙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장자권을 탐하던, 너무나 영특하고 되바라진 태아 야콥은 "아니 내가 먼전데 왜?"하고 형의 발꿈치를 꽉 잡고 놓칠 않다가 결국 형 다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콥'(발꿈치잡으미)입니다.

리브카가 하나님의 계시 얘기를 남편에게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나 늘 야콥만을 끼고 애지중지 사랑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얘가 메시아 선조가 될 애야."란 믿음을 갖고서. 그런가 하면 이짜크는 단지 맏아들 에사후가 늘 사냥하고 조리하여 갖다 바치는 고기가 감칠 맛 나게 입맛에 맞아서 아무래도 둘째보다는 첫째를 사랑했습니다. 부부가 따로따롭니다. 그래서 이짜크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빗대어 개기는 안티-심리학자 비슷한 사람들도 있지만..알고 보면, 이게 다 메시아 신앙의 일환이었습니다. 

즉 이짜크는 맏아들이 메시아의 직계가 될 줄로 "당근" 생각했고 리브카의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아마도 이짜크는, 온몸이 짐승처럼 털 투성이에다 활을 "기똥차게" 잘 쏘는 이 붉은둥이(에사후의 뜻. 별명 '에돔')가 믿음직한 게 정말 메시아 선대답다고 생각했는지도..?
[요즘도 유대인들은 그런 메시아를 얼마나 기대합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부조리한 현실과 현세를 한꺼번에 몽땅 뒤집어 엎어 줄 과격한 정치혁명가 또는 개혁가 스타일의 메시아를 여태도 기다리지 않습니까? 거기 적당히 부응해 줄 안티도 곧 나타날 것이고.]

설마, 형처럼 사내다운 털도 근육도 별로 없고 살결이 여성처럼 매끈매끈하고 엄마처럼 혈색이 하얗고 곱기만(?) 한 야콥에게서 장차 메시아가 날 줄은 꿈도(?) 꾸지 않았던 게 이짜크의 본심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 부부는 엇갈려 제각기 아들 하나씩 끼고 따로 논 것입니다.
그런데 당초 이짜크가 메시아 계보를 이어 갈 줄로만 알았던 바로 이 에사후의 씨로부터 장차 메시아를 죽이려고 광분하는 고대의 '히틀러'-싸탄의 하수인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가 곧 이두매(에돔)족 출신의 헤롣 대왕이었던 것입니다!
붉은 몸뚱이의 에사후로 하여금 붉은 팥죽 한 그릇에 귀중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팔아 먹게 만들었던 싸탄이, 바로 그 에사후의 후손인 헤롣 대왕을 통해 메시아의 목숨을 맹추격하면서 수많은 아기들의 붉은 피를 흘리게 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난 얼마 후 하나님은 이번엔 아들 이짜크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복 언약의 핵심인 메시아 토크를 다시 상기시키십니다(창 26:2~5). 이때 이짜크는 아버지 때 이후 두 번째 큰 가뭄을 만나 아마도 남쪽 비옥한 미쯔라임 땅으로 내려가고픈 유혹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막으시며 언약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자고로, 아브라함 때부터 누구나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미쯔라임 땅으로 내려가고픈 유혹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요셒의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으로 내려가 혹시나 말뚝 박고 눌러 살다 보면 자연히 약속의 땅인 카나안의 언약을 잊기가 쉽고 흐릿해지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온갖 잡신과 이교가 우글대는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쁜 외국 여성은 누구나 아내감으로 탐내고 노리는 파라오와 신하들이 웅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앞서 사라도 탐내어 아브라함의 합법적(?) 용인 아래 그녀의 정조를 유린하려 했습니다. 이번에 이짜크가 내려가면 또 다시 아름다운 리브카를 탐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반복됩니다. 참으로 싸탄 마귀의 온갖 유혹과 함정이 손짓하며 기다리는 곳이 바로 풍요로운 나일 강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하나 악몽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싸탄의 간계를 아시는 주님은 미리 이짜크에게 언약을 상기시킴으로써 후손에게서 태어날 메시아를 위해 몸조심하라고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탄은 간단히 포기하고 물러가질 않습니다. 마침 이짜크는 게라르에 머물렀기에 똑같이 상투적인 수작을 세 번째로 벌입니다.


1. 먼저 이짜크를 게라르로 끌어가고 (문제의 위험 장소로 유인)
2. 이짜크에게 두려움을 주어 (하나님보다 자신의 수단 방법을 의지하게 함)
3. 과거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 같이 아내인 리브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하고 (일차적인 죄를 짓게 해 무장해제시킴)
4. 결국 게라르/펠레쉩 족 주민에게 아내를 뺏길 수도 있게 (위기로 몰아 넣고 탈취하려 듬)

작전을 꾸민 겁니다. (창 26:1, 6,7). 어찌 이런 똑 같은 악순환이..?! 싸탄은 손쉽고도 가장 잘 먹히는 상투적인 방법을 재탕/삼탕..해 먹는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 성도들이 비슷비슷한 과정으로 쓰러지고 타락합니까? 싸탄의 가장 간단한 상투적인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종류의 유혹을 받았어도 온전히 승리하신 예수 크리스토를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창26장의 이 사건이 특기된 것은 에사후와 야콥 출생 이전의 기록이라고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26장 전장에 걸쳐 34절 전까지 쌍둥이 형제 얘기가 전혀 내비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번엔 게라르 왕 아비멜렠이 이짜크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과거 아브라함 때와 같은 악몽 같은 사건이 반복될 수 있음을 두려워 하면서 백성들에게 불가침 경고를 하여 이짜크 부부를 잠시나마 보호해 주게 됩니다.

그러자 이짜크는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농사로 한 해에 수확을 과거의 백 배나 얻을 뿐더러 양떼와 소떼도 왕창 불어나 삽시간에 거부가 됩니다.

이짜크가 장차 메시아의 선대가 될 사람으로서 맏아들 에사후를 굳게 믿었다는 것은 27장 1절에서 나타납니다. 나이 많아 눈이 잘 보이지 않자 더 늦기 전에 장자에게 축복 유언을 남기려고 맘 먹은 것입니다. 드디어 히브리 민족의 한 족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고도 최고 권위를 행사하고 후손에게 특권을 대물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이 때도 이짜크는 아들에게 맛난 것을 하나의 조건으로 부탁합니다. 그가 맏아들 에사후에게서 별미/특식을 제공받는 것은 마치 전통 의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짜크가 얼마나 맏아들을 의존하며 그의 음식에 길들여져 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역설적 대비가 여기 있습니다. 뭐나면 말이죠..앞서 에사후는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양으로, 들에 나가 때로는 자주 아침부터 저녁까지 헤매다가 이따금씩 잡은 들짐승으로 아버지께 그토록 맛 있는 별미를 대접하여 바치면서도, 어느 날 정작 자기 자신이 사냥 끝에 허기 지고 지쳤을 때 고작 야콥이 만든 팥죽 한 그릇에 눈이 뒤집혀 하룻저녁에 장자권을 팔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에사후의 미래와 그 후대를 결정짓게 만든 일생일대의 과오와 후회, 좌절의 사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에사후는 한 편으로는 머지 않아 자신을 듬뿍 축복해 줄 아버지 이짜크의 마음을 사 두면서 한 편으로는 단 하룻저녁의 시장기를 때우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인 장자권을 홀가분하게 넘겨준 참으로 앞뒤가 안 맞고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전형적인 마초맨 타잎의 엉성하고 껄렁한(?) 면모를 보는 듯 합니다. 

약았지만 약해 보이는 동생 야콥을 에사후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활과 화살을 믿고 살아 온 그는 자신의 완력과 아버지의 든든한 '뺔'으로 충분히 커버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한 그릇 팥죽이든 장자권이든 언제나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큰 오산이었던 것입니다.

"흥, 장자권? 그게 뭐 대수야! 가져 보시라지..배고프신 이 몸은 당장 팥죽 한 그릇만 얻어 먹음 되니까. 까짓 장자권이 무슨 물건이냐..입으로 팔았다가 나중에 얼마든지 도로 빼앗아 되찾을 텐데 뭐.." 했던 모양입니다. 

그랬던 에사후가 이제 여기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팥죽 한 그릇에 대수롭지 않게 간단히 팔아넘긴 그 장자권 매매 사건을 까맣게 잊어먹고 계속 자신의 장자권이 지속될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형의 팔꿈치를 잡았던 야콥이 이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고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 갈 사람이 아니지요. 더욱이 어머니 리브카 역시 목숨을 걸고 장자권을 둘째 아들 야콥에게 넘겨 줄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자는 장자권과 거기 연계된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느라 온 삶을 거기다 건 사람들이었지요. 물론 야콥은 목숨마저도 쉽게 내 놓을 사람도 아니지요.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에사후는 여태 별미로 아버지 사랑을 온통 독차지하는 재미로 사냥 생활을 해 오다 존경하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딱 40에 결혼할 생각을 한 것 까진 좋은데, 여태 집안 전통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주변에서 눈에 차는 여인을 그것도 둘 씩이나 얻어 제 멋대로 장가를 듭니다. 그런데 이 두 아내가 사사건건 시부모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아무튼 이짜크는 죽기 전 에사후에게 마지막 축복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과 같이 훌륭한 사냥감을 잡아 오라고 최고의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요청합니다. 맛있게 먹고 맘껏 복을 빌기 위해섭니다. 이 이야기를 엿들은 리브카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지요.

이짜크가 무조건 맏아들 편이었다면, 리브카는 무조건 둘째 아들 편이니까. 이짜크는 이짜크대로, 리브카는 리브카대로 각기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브카의 까닭이 더 타당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더 강한 족속을 이룰 것이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믿는 데다 야콥이 약삭 빠르게 일찌감치 합법적인 장자권까지 확보해 뒀기 때문입니다. 방법이야 비굴했든 야비했든 어쨌든 간에 모자 간에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고 메시아 계보를 자신들이 잇겠다는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짜크는 마땅히 남자다운 털보 맏아들이 물려 받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에사후는 비록 두 아내가 부모님의 눈밖에 났더라도 이제 죽음을 얼마 안 남긴 듯한 아버지가 당연히 맏아들인 자기에게 베풀어 줄 유업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평소처럼 신나게 사냥을 나갔습니다.

용의주도한 리브카는 아무래도 안방 마님이어서 평소 남편이 즐기고 맏아들이 해 바치는 별미 요리의 조리 방식과 맛을 익히 잘 아는지라..야콥더러 너도 나가서 형처럼 야생 짐승을 잡아 오라가 아니라 간단히 집안에서 기르는 최상의 염소 새끼를 골라 오라고 말합니다. 형이 사냥감을 잡아 돌아오기 전, 단 시간에 모든 것을 일단락져야 하는 판국이니 시간이 문제이지 까짓 음식 맛 정도야 내 솜씨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콥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축복을 하려면 자식을 어루만지며 안수할 텐데 그러다간 털북숭이 형이 아닌 것이 금방 '뽀록'이 날 수도 있고 그런 와중에 자칫하다간 아버지한데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수도 있음이야 라고 꾀 많은 야콥 다운 우려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오로지 장자의 축복과 메시아 계보에만 맘을 둔 리브카는 혹 있을지 모르는 그 모든 저주는 자기한데 돌리라고 서둘러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브카가 쌍둥이의 출생 때부터 얼마나 절치부심 작은 아들 야콥의 장자권과 축복에 온통 모든 신경을 쓰고 정성을 모아 왔는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절호의 찬스에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들이 우려하는 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사상 최초로(?) 분장술도 동원합니다. 아들의 우려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만지면서 축복할 때에 행여 들통 나지 않게 분장까지 시킵니다. 피부가 매끈매끈한 아들의 손과 목덜미를 어린 염소 털가죽으로 다 덮어서 포장하여 여간해선 표시 나지 않게 들통 안 나게 면밀히 변장시킵니다. 나중엔 에서가 선호하는 옷까지 챙겨 입혀 독특한 향내가 풍기게 합니다. 매우 빈틈 없고 치밀한 계획입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충분히 속아 넘어 가리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주인공인 자식 야콥의 배역을 위해,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장자의 복' 따내기 작품 연출을 목표로, 갖은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되 혼자서 각본/각색/연출/감독은 물론 심지어 분장까지 완벽하게 해 내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미장센 '영화감독 리브카'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무엇이 그녀를 단 시간 내로 이토록 타고 난 연출/감독의 천재(?)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자식 사랑은 둘째치고라도 장자의 복을 따 내고, 메시아 계보를 잇게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과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예언을 하신 야웨에 대한 굳은 신앙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악입니다. 목표가 선하다고 해서 악한 방법조차 다 선이랄 법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일종의 사기극이며 앞서 팥죽 한 그릇으로 형식인 장자권을 탈취한 데 이어 그 알맹이인 축복까지 가로채는 이 행위가 거룩할 수 없습니다.

리브카와 야콥 두 사람 중 누가 진범이고 공범이든 간에 둘이서 짜고 가장인 이짜크를 속인 건 속인 겁니다. 이미 장자권을 사전 획득했든 어쨌든 맏아들/형의 것을 중간에서 가로챈 건 가로챈 것입니다. 간사한 것은 간사한 것입니다.

리브카가 자신과 야콥이 이러기를 반평생 꿈꿔 왔고 준비해 왔기에 이 기회에 이 방법 밖엔 달리 쓸 수 없었는지는 모르나 집안이 이 지경이 되도록 부부 간에 피차 자식 편애를 해 온 것도 어찌 보면 일종의 비극은 비극입니다. 다만 사기극이건 비극이건 우선 시간이 급하므로 빨리 해치울 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리브카는 모든 결과는 내게 다 맡기고 너는 들어 가서 연기를 잘하여 축복을 따 내거라-이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곤 눈 딱 감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아들을 아버지와 단독 1대1로 만날 축복 무대로 내 보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과 의지의 행위로 밖에 달리 해석이 안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장차 오고가는 세대에 태어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메시아 기다림의 신앙과 소망을 줄곧 간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는 생각입니다. 이 점 이해하시길. ]